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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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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책은 중2 올라가는 막내에게 딱 어울리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신문에 책 소개를 하고 집에 가져와 읽어보라고 추천했다.

막내의 첫 반응? 심드렁 그 자체다. 어쨌든 책이라 하면 바퀴벌레보다 더 기겁하는 모양새라니.

 

어떻게든 책을 한 번 읽어보게 하려고 온갖 전술과 전략을 펼쳤다.

 

"주인공이 이루나라는 애인데, 너랑 막상막하더군. 그런데 너보다 더 사춘기 겪는 거 같애. 안 궁금해?"

 

"별루."

 

다음날. 제 언니가 식탁 위에 놓인 책을 게눈 감추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읽는다. 큰 애가 집중력이 강하다. 다섯 살 때인가 세종대왕 위인전을, 세상에 본 거 또 보고... 아마 열 번도 더 읽었을 걸. 본 거 왜 또 보느냐 하니 "재있어요." 큰 애 대답이었다.

 

사춘기 갱년기를 다 읽은, 아마 두 시간만에 책장을 다 넘겼을 듯, 큰 애가 내가 쏙 마음에 들어하는 얘길 한다. 여튼 아빠 맘을 알아주는 내 새끼는 큰 애밖에 없다니까... 

 

"아빠, 아빠는 이루나 하고 엄마 중에 누구 편?"

 

"당연히 엄마 쪽이지."

 

"지원이 읽으면 사춘기와 갱년기 주제로 토론해도 재밌겠다."

 

"응. 그래 그래."

 

하고 호응을 했는데... 막내가 읽어야 말이지 싶어 금세 시무룩해졌다.

 

다음날 화장실에서 남은 반은 다 읽고 나와서는 막내에게 말했다.

 

"이거 아빠도 이제 다 읽었으니 니가 읽으면 되겠다."

 

"... ..."

 

"여기에 둘게. 나중에 읽어."

 

"응."

 

"안 읽을 거지?"

 

"응"

 

"어이구.. 맘대로 해."

 

출근하면서 책을 침대 위에 올려놓긴 했는데, 나중에 퇴근해 집에 가보면 아마... 예상치가 완전히 빗나가길 바라지만, 하나도 안 읽었을걸. ㅜㅠ

 

그런데, 책이 참 재밌다. 손에 쥐고 담박에 다 읽어내려갈 정도로 집중도와 흡인력이 강하다. 문장에 산뜻하고 시원시원하다. 엄마와 딸의 갈등이 드라마를 보듯 선하다. 이루나의 대사는... 우리 막내가 좀 따라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시원시원하다. 언젠가, 그렇게 어렸을 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런 말투 배우고 싶었다. 나는 생각이 많은 성격이라 말을 시원시원하게 하지 못한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본 적도 없으니. 그래서 더 이 책이 더 재미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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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텔링-장자늪 구렁이의 저주 현장을 찾아서

다시 찾은 창녕 관음사 미륵존불상.

일부러 다시 찾은 것은 아니다. 일이 있어 인근에 들렀는데… 예전 이곳에 취재하러 왔던 기억이 떠올랐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경내는 한산했다. 발자국 소리도 목탁 소리도… 하다 못해 풍경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코로나19가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들었나 보다.

여튼 우연히 다시 들른 관음사 덕에 예전 '경남이야기'에 썼던 글 다시 소환하게 됐다.

 

전설텔링 집필할 때가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장자늪에 얽힌 전설은 비단 창녕군 영산면 장척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편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인근 함안지방에도 장자늪 전설이 있고 의령에도 있고 밀양에도 있습니다. 충북 청주와 충주에도 있고 경기도에도 유사한 전설이 많이 있습니다.

‘장자(長者)’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부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러한 전설이 여기저기 많이 퍼져 있는 것은 아마도 옛 사람들은, 요즘 흔히 쓰는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부자들에게서 많이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요?

창녕의 이 장자늪 전설은 이야기 구성 형태가 다른 전설에 비해 비교적 기승전결의 짜임이 잘 되어 있습니다. ①욕심 많은 부자가 살았다 ②그 부자에게 스님이 찾아가 시주를 바라는데 시주는커녕 나쁜 짓을 했다 ③그것을 본 착한 며느리가 시아버지 몰래 시주를 하고 스님으로부터 주의사항을 듣는다 ④부자가 사는 마을에 나쁜 일이 생긴다 ⑤며느리는 스님의 말을 까먹는 바람에 돌부처가 된다 ⑥마을은 물에 잠겨 늪이 된다 ⑦물에 빠져 죽은 장자는 구렁이로 변해 늪을 지키고 있다. 대략 이런 구성입니다.

창녕군 영산면 신제리와 봉암, 봉산리에 걸쳐 있는 장척호.


◇도내 장자늪 전설 어떤 차이가 있나

앞서 언급한 이야기 구성은 ‘장자늪 구렁이의 저주’ 이야기에서 배경이 된 창녕 장척호에 얽힌 전설의 얼개이며 창녕군지(1984년)에 소개된 내용을 따왔습니다.

이러한 전설은 경남의 경우 각 지역의 시 또는 군지에 수록된 것으로 작성한 사람에 따라 이야기의 길이와 깊이에 차이가 납니다. 의령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관련 전설은 아주 간략합니다. 창녕군 장척호에 얽힌 전설과 다른 점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의령군은 정곡면 적곡마을 앞에 있는 약 2000평 가량 되는 늪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장자에게 시주승이 찾아간 대목입니다. 여기선 장자가 며느리에게 쇠똥 한 사발을 주라고 했는데 며느리가 몰래 쌀을 시주합니다. 이것이 들켜 장자가 노발대발하는데 스님이 도와 며느리가 화를 면하게 됩니다.

이때 스님은 온데간데 없고 늪에서 잔잔한 물결이 들끓기 시작하는데 이때 커다란 이무기가 튀어나와 장자의 집을 모두 쓸어버렸다고 합니다. 장자는 흔적도 없어지고 이무기는 승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늪 속에는 지금도 놋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데 장자의 영혼이 개과천선하여 구원을 청하는 소리라고 전해진답니다.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야기 구성이 창녕과 좀 차이가 있습니다. 다음은 통영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초라한 복장을 한 스님이 장자로부터 쇠똥 시주를 받게 됩니다. 이 스님은 동네사람들로부터 장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혼을 내겠다 마음을 먹습니다. 이듬해 예전의 초라한 행색과 달리 흰수염에 장죽을 짚고 장자를 찾아 가지요. 장자는 이 스님이 도사처럼 보였던지 대문 안으로 반갑게 맞이합니다.

스님이 장자의 집에 서기(瑞氣)가 있다며 앞으로 집안이 번창할 거라며 너스레를 떱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며 슬쩍 운을 떼자 장자는 귀가 솔깃해합니다. 그러자 스님은 바다 건너 삼봉산 앞 대섬(竹島) 가운데를 잘록하게 파서 봉우리 두 개를 만들면 5대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욕심쟁이 장자는 다음날 즉시 머슴들을 데리고 산 능선을 팝니다. 사흘째 되던 날 장자의 곡괭이에 거북이 목이 잘려 나옵니다. 장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놈이 우리 집안 명당의 혈을 가로막고 있었구나’ 하고요. 이 일이 있고서 장자에겐 계속 우환이 생기며 5대는커녕 3년도 못 가서 폭삭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밀양의 경우 초동면 반월리에 있는 원늪에 이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이 원늪은 달리 ‘장재늪’이라고도 불린답니다. 원늪에 얽힌 전설은 창녕과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나는 점은 며느리가 스님의 말에 따라 뒷산 중턱에 올라섰을 때 천둥번개에 뒤돌아보는 순간 돌미륵이 될 때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장자의 집이 불길에 휩싸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반달 모양의 연못이 생겼고 마을을 반월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함안의 장자에 얽힌 전설은 또 다른 형태를 띱니다. 장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점과 잘못의 원인이 장자가 아니라 장자의 며느리란 점이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잠깐 들여다보면, 입곡리 숲안마을에 아주 큰 부자인 곡부공씨(曲阜孔)가 살았는데 이집 며느리는 하도 손님이 많이 찾아오자 뒤치다꺼리에 진절머리를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에게 시주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과객이 몰려들지 않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집 왼쪽의 하천을 오른쪽으로 흐르게 하면 과객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며느리는 일꾼을 시켜 하천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하루아침에 집안 살림이 망해버려 다시는 과객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얘기로 전해옵니다.

◇장척호

봉암리와 봉산리 중간 지점에서 바라본 장척호 모습. 연꽃 군락이 꽤 넓게 펼쳐져있다.

장척호 남쪽 제방. 덩그마니 홀로 선 주택과 멀리 교회의 모습이 고즈넉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장척호는 인근의 번개늪과 함께 민물낚시를 좋아하는 동호인들에게 꽤 알려진 저수지입니다. 주로 배스가 많이 잡힌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직도 늪 속에는 장자가 변한 구렁이가 산다고 하는데 낚시인들은 겁도 없나 봐요.

장척호의 남쪽은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둔 형태입니다. 장척호의 넓이는 0.5㎢로 약 15만 평에 이릅니다. 늪의 주변은 연잎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고즈넉한 호수 분위기에 어울린다는 느낌이 듭니다.

인근 주민들은 장자늪이 장척호 옆에 있는 번개늪으로 알고 있기도 합니다. 동쪽과 서쪽에 엇비슷하게 형성된 두 늪의 넓이는 비슷하지만 모양은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장척호는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이고 번개늪은 타원형의 밋밋한 모습입니다. 이 번개늪 역시 장척호만큼 낚시인들의 관심지역이라고 합니다.

장척호의 서쪽에 있는 번개늪. 마을의 어떤 사람들은 이 번개늪이 장자늪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처고개

영산면에서 부곡면으로 가는 길은 고갯길입니다. 지금은 도로가 잘 형성되어 두 지역 간 소통이 원활하지만 옛날엔 그리 녹록한 고개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에서 며느리가 고개를 올라가서 뒤돌아보았다가 돌 속으로 몸이 스며들어 부처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고개가 이곳입니다. 이 미륵불은 일제강점기 때 도로개설을 하면서 도천면 송진리 관음사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부처고개로 추정되는 영산면에서 부곡면으로 가는 고갯길. 이곳에서 관음사에 보관되어 있는 미륵존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부처고개. 부곡면에서 영산면으로 넘어가는 방향.



◇관음사 미륵존불상

미륵존불상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호입니다. 이 미륵존불상은 관음사 내 성법보전 옆 작은 보호각 안에 들어 있는데 누구에게나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이 부처바위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며 자연석의 한쪽을 다듬어 미륵의 몸과 광배(光背)를 선으로 새긴 마애불이라고 설명되어 있군요.

이야기 속에 부처가 된 며느리가 장자구렁이에게 불꽃을 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 안내판의 내용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설명문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영산면 송진리 관음사 보호각 안에 보관되어 있는 미륵존불상. 부처가 된 며느리 소재다.[


“미륵의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나발과 상투 모양의 육계(肉髻)가 선명하다. 늘어진 귀에 긴 얼굴은 살집이 있어 온화하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두꺼운 세 줄의 삼도(三道)가 새겨졌다. 부처의 빛을 나타내는 광배(光背)에는 불꽃과 꽃잎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었고, 양 어깨에서 걸쳐 내린 법의(法衣)는 얇게 표현되었다.”

관음사에는 미륵존불상 외에도 오래된 문화재자료들이 두 개나 더 있습니다. 하나는 도천삼층석탑이고 또 하나는 관음사 석등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33523" align="aligncenter" width="630"]관음사 전경.[/caption]

[caption id="attachment_33524" align="aligncenter" width="630"]

도천삼층석탑과 석등. 둘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다.


도천삼층석탑은 원래 송진1리 탑골이라 불리던 보광사에 있던 탑인데 임진왜란 때 절이 폐허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파손되었고 1928년 이 탑을 관음사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 탑은 당시 기단부와 탑신 1장, 지붕돌 2개가 남아있었다고 하네요. 상륜부와 나머지는 사라진 상태였는데 탑재의 일부로만 다시 세웠기 때문에 석탑의 정확한 원형이 복원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탑의 높이는 1.62m이며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관음사 연못에 세워져 있는 석등 역시 삼층석탑과 함께 폐허가 된 보광사 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옮겨와서 관음사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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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파리시리즈 3(메리 매콜리프 지음·최애리 옮김)

 

201411월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의 골목길은 책에서 느꼈던 것처럼 그다지 예술적이라거나 낭만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예술가가 이곳을 거쳤고 또 수많은 예술가가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겠지만 그러한 모습은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긴 혼으로 빚어낸 예술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하려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싶다.

 

예술가들의 파리시리즈 3권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다시 파리를 여행할 일이 생긴다면 이제는 정말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되새겨보고 싶다는 것이다. 모네와 마네, 드뷔시, 에펠,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이사도라 덩컨, 스트라빈스키, 샤갈, 장 콕토, 피카소, 막스 바코브, 모르스 드 블라맹코, 키스 반 동겐, 모딜리아니, 조르주 브라크, 장 르누아르, 기욤 아폴리네르, 샤넬, 헤밍웨이, 조세핀 베이커.

 

1권은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1871년에서 1900년 사이 모네, 마네, 졸라, 에펠, 드뷔시 등이 활동했던 이야기를 담았고, 2권은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1900~1918년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프루스트, 퀴리 등의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3<파리는 언제나 축제>는 헤밍웨이와 샤넬, 만 레이, 르코르뷔지에 등이 활동했던 1918년에서 1929년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의 묘미는 거장들의 사연들을 각각 떼어 정리하지 않고 당시 시간대를 기준으로 그들의 소통과 관계를 통찰력 있게 드라마처럼 구성했다는 점이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 = ‘벨 에포크란 말은 프랑스어 그대로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이다. 프로이센과 전쟁이 끝나고 민중의 봉기마저 처절하게 짓밟힌 파리. 오히려 아름다운 시절의 시작점이었다. 미술계에선 모네와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이 기성 화단의 무시와 조롱을 받았고 드뷔시는 새로운 화음에 도전했다. 또한, 에펠은 기존의 화강석 자재 대신 현대적인 재료인 철로 작품을 구상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본문을 읽다 보면 , 이런 거장에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싶은 눈길 끄는 이야기가 많다. “‘최근에 모네를 만났는데, 완전히 파산했더군.’ 1875년 여름, 에두아르 마네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실제로 모네는 자기 그림 중 아무거나 골라열 점에 단돈 1000프랑에 팔겠다고 할 정도로 궁기에 몰려 있었다. ‘그저께 이후로 무일푼입니다.’ 그는 마네에게 보내는 펀지에 썼다. ‘정육점에서도 빵집에서도 이제는 외상을 주지 않아요.’”(113~114)

 

마네와 모네의 이야기는 풀밭 위의 점심라는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기도 하지만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재미있기도 하다. “마네는 이미 1863년 살롱 낙선전(그해 살롱전에 입선하지 못한 전위적 작품들의 전시회)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으로 파리 비평가들에게 충격을-그리고 모네에게는 영감을- 주었던 터였다. 비평가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모네는 풀밭 위의 점심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으며.”(59)

 

로댕의 이야기도 눈에 띈다. 1877년 살롱전에 청동시대를 출품하면서 받았던 의혹, 즉 너무 사실적이어서 모델 실물을 본떴을 것이라는 비판 때문에 속상해하는 장면이다. 무죄였으나 간첩이 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에밀 졸라의 <르 피가로> 기사와 관련한 사연도 속속들이 펼쳐진다. 59226000.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1900,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가 파리에 등장한다. 열아홉 살의 풋내기 청년은 자신의 그림 한 점이 만국박람회에 걸린 것을 기뻐하며 자신을 왕이라고 표현할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장면으로 시작하는 2권은 전통적 양식에 반발하며 새로운 예술을 구가하던 이들이 각자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피카소와 화가이자 시인인 카사헤마스는 이 시기에 만난 친구다. 피카소의 그림 인생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림은 온통 푸른색으로 이루어졌으며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피카소의 이 시기를 청색시대라고 한다. 이 그림은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카사헤마스는 파리를 떠나 있는 동안 폭음을 하며 제르멘에게 열정적인 구혼 편지를 써 보냈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한 터였으며 도대체 그와 함게 살거나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67) 카사헤마스는 고향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기로 했다며 송별회를 했다. “그날 저녁 모인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카사헤마스가 유난히 예민해져서 가끔 분위기를 긴장시키기는 했지만, 대체로 좋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짧은 인사말을 하겠다고 일어선 카사헤마스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피스톨을 꺼내 제르멘에게 겨누었다”(68)

 

제르멘이 죽었다고 생각한 카사헤마스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이 비극적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큰 충격으로 망연자실했고, 여러 해 동안 카사헤마스에 관한 환영에 사로잡히게 된다. 2권에는 피카소 이야기를 시작으로 드레퓌스를 지지하느라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야 했던 프루스트 이야기도 눈에 들어온다. “나중에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 3권인 <게르망트 쪽>을 쓰면서, 드레퓌스 사건이 그 격동의 시절 파리 사교계에 미친 영향을 묘사하게 된다. 그는 이 책을 오랜 벗 레옹 도데에게 헌정했다.”(85) 640. 26000.

 

파리는 언제나 축제 = 3권은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다시 황금기를 맞이한 시대를 그리고 있다. 재즈의 시대, 아우성의 시대, 광란의 시대라고도 불리는 시기. 예술계는 거의 멈춰섰지만 과학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게 되었다.

 

샤넬과 르코르뷔지에의 성공이 급변하는 사회를 대변하는 사례다. 샤넬의 옷들, 코르셋 없는 편안한 티셔츠 같이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은 실용적인 여성 의상은 패션계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화가로서 세상을 바꾸는 대신, 르 코르뷔지에는 이제 건축으로 그 일을 하기에 나섰다. 1921년에 그느 자신이 시트로앙 하우징 타입이라 부르게 될 것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그는 대량생산 주택이라 칭했다.”(168)

 

또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를 게재하면서 일어난 사연도 눈여겨 보인다. 미국과 영국, 아무도 외설금지법을 어길 엄두를 못 내던 시절이었으니 이 작품을 실은 <더 리틀 리뷰>가 벌금형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겠다. 이런 상황에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가 출판하겠다고 나섰으니 조이스에겐 더없이 기쁜 일이었으리라.

 

이외에도 잃어버린 세대라는 표현을 들고 나온 거트루드 스타인, 헤밍웨이 회고, 조세핀 베이커 이야기가 펼쳐진다. 현암사 펴냄. 484. 23000.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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