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균의 오동동야화]이광래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온재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1928년 배재고보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키는 작았지만 오히려 이름난 운동 선수였다.
배재고보를 비롯한 5대 사립(중앙, 휘문, 양정, 경신 등)의 종합 경기가 있을 때면 육상에서는 단거리 선수요, 야구에서는 명 포수로, 축구에서는 날쌘 LW(레프트 윙)로 '배재의 꼬마'라는 별명 그대로 온 운동장을 누비고 다닌 선수였다. 이렇게 만능 스포츠맨같은 활동은 일본도쿄고등학교 영문과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온재가 '연극'이라는 신천지에 눈을 뜬 것은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한 뒤였다. 그 대학에는 일본 신극의 개척자 쓰보우치쇼오 박사가 서양 연극을 일본에 이식하는데 힘썼을 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희곡 번역으로 연극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극이라는 새로운 바다에 뛰어든 온재는 항해를 시작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에서 시작하여 입센과 체호프 극에 빠져들었고 특히 당시 신문에서 많이 소개되던 '애란'의 국민극운동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벨리, 뮤레이(애란의 극작가)의 <황금결혼> <장남의 권리> 등을 탐독하였으며 로드둔사니의 신비적 상징주의 연극인 <아아기메데스왕과 무명전사> <신의 신들> 등의 희곡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김흥우의 <이광래 연구>p4~5)
이렇게 서양의 저명한 작가의 작품을 마구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그의 문학적 소양을 살찌우고 있던 중 그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이른바 다카다노바바 학생침입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카다노바바' 사건이란 한마디로 일본제국에 대한 반항으로 민족차별과 멸시에 대하여 동경 유학생들이 분노하여 궐기한 항쟁의 하나다. 남달리 정의감이 강한 광래가 이 항쟁을 강건너 불보듯 먼발치로 보고만 있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유혈극에 몸소 뛰어든 광래는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1933년 끝내는 와세다대학 3학년 중퇴로 귀국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눈을 돌려 마산에 신극이 태동하던 1920년대로 무대를 옮겨보자. 1932년 극예사가 마산에 신극의 깃대를 꽂을 때까지 여러 계몽 단체들의 순회공연이 먼저 있었다. 소인극운동의 효시가 되는 창원청년기독교회의 연극 공연이 1921년 5월 15일부터 16일까지 이틀 동안 공연이 있었다는 기사만 동아일보에 보일 뿐 그 레퍼토리나 스태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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