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385 [한하균 오동동야화21]마산에서의 흥행실패가 부흥 계기되다 탤런트 주현이 1958년 당시마산에서 김수돈 정진업 이런 양반들과 함께 공연을 했구나. 이즘 이광래는 드라마센터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동시 동국대 교수까지 맡아 자신의 연극론을 본격적으로 펼쳤단다. 그의 연기론은 스타니슬라브스키에서 더 한발 나아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했다는데 그는 이 연출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행간에서 연구하는 연극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마산에서의 공연 얘기를 덧붙인다. 익살스런 장서방 역을 맡은 주현의 코믹한 연기, 고뇌를 씹어삼키면서도 조용히 결의를 다지는 정도 역을 맡은 심영식의 그 처절한 표정 연기, 그리고 자비로우면서도 보다 큰 일을 위한 용단을 내리는 어머니 역을 맡은 천선녀의 그 중후한 연기. 이렇게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 보기 드문 공연이었는데도 마산의 .. 2017. 7. 10. [한하균 오동동야화20]3.15 1주년기념공연은 '조국' 리바이벌로 20화 글을 보면 마산 관객은 아주 대형에다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마산의 거룩한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1년에는 3·15의거 1주년 기념 예술제전 준비가 거시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61년 2월 중순쯤 나도 화인 김수돈 선생의 급한 부름을 받고 부산에서 마산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생각과는 달리 약간 복잡한 일이 얽혀 있었다. 제전위원회 사무국장을 시인 김춘수 선생이 맡아 전 행사를 총괄하고 있었고 그 아래 예술 분과위원회가 있었는데 위원장에 김수돈, 부위원장에 월초 정진업 선생이 맡아 있어 오순도순 의논만 맞으면 참으로 훌륭한 작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두 분이 의견충돌을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월초는 3·15의거 정신을 고양한 작품을 거의 완성해.. 2017. 7. 9. 극단 상상창꼬 <매직가게> 15일 함안문화예술회관 공연 마산 극단 상상창꼬 7월 15일 오후 7시 함안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공연 ‘마술가게’라는 간판이 걸렸지만 판매하기 위한 옷들이 진열된 평범한 옷가게다. 조명이 밝아지면 점원이 마네킹을 들고 나온다. 쇼윈도 앞에 세우고 옷을 입힌다. 팔등신의 늘씬한 마네킹만 있는 게 아니다. 임신부 의상을 위한 배가 볼록한 마네킹도 있다. 점원이 나가자 마네킹들이 불만을 털어놓는다. 쉬지도 못하게 한다며. 그런데 옆 가게 알바 녀석들이 쇼윈도 앞으로 다가와 담배를 피운다. 이 녀석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마네킹 치마 밑을 들여다 보려고 낑낑대고 킬킬댄다. 마네킹들은 혼이라도 내주고 싶은데 아직은 인간의 시간이라 움직일 순 없고 불평을 늘어놓는 가운데 밤이 된다. 드디어 가게 이름처럼 판타스틱한 일들이 펼쳐진다. 마네킹.. 2017. 7. 9. [한하균 오동동야화19]기억해야 할 키워드, 원방각과 스타니슬라브스키 좀 기억할만한 내용이 담긴 19화다. 국내 소극장운동의 씨앗이랄 수 있는 원방각운동이 이광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광래가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점. 아쉬운 점은 소극장운동의 첨병이었던 원방각이 6회 공연을 끝으로 화재로 문을 닫고 재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원방각이 제대로 소극장 운동에 성공을 이루었다면 지금 연극판의 지형도 많이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살롱공연 무대나 카페연극이 사람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진 않았을까 싶은... 이광래와 서라벌 예술학원과의 인연은 훨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광래는 1948년 한국 초창기 연극계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인 윤백남 선생의 권유로 예술학원에 발을 들인다. 서라벌예술학원의 설립자가 윤백남 선생이셨기 때문이다. 그 당.. 2017. 7. 8. [한하균 오동동야화18]연극에 빠져 살던 이광래에게 전해진 비보 그래. 연극이냐 생활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활동을 했던 수많은 이들이 극단보다는 전공이든 아니든 생활을 위해 직장을 선택했던 것이 다반사였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광래가 연극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한국의 연극계를 이끌다시피 했던 이가 자기 몸 하나 근근이 건사할 정도였다니. 광래는 마산 출신이면서도 마산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었단다. 하지만 딸이 허기를 달래려고 우물물을 긷다가 빠져 사망하게 되자 마음을 달리 먹는다. 사실 6·25 전까지 서울국립극장에서 두 번 공연을 가졌는데 두 번 다 극단 신협이 맡았음만 보아도 신협의 활동상을 알 것이다. 그러다가 세 번째 레퍼토리인 정비석 원작 이광래 각색인 와 윤방일이 이끌던 '극협'에서.. 2017. 7. 7. [한하균 오동동야화17]국립극장 차지에 발휘된 이광래의 수완 앞서 16화에서 이광래가 이끌던 '극예술협회'가 있었지만 새로 '신극협의회'를 만들어 유치진이 대표를 맡게 하고 자신은 간사장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유를 17화에서 풀어놓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 있다.그 실타래를 풀어가보기로 하자. 광복 직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카프(조선공산주의 예술가 동맹의 약칭) 산하의 '연극동맹'이 온 연극계를 붉은 깃발로 물들이고 있을 때 유일무이하게 이에 대항하고 나선 단체(극단)가 민예요, 그러기에 그 민예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함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무대예술원 창립과 함께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 혹은 순전히 타의로 일본제국의 문화정책에 강제로 끌려나가 친일연극을 했던 사람들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38.. 2017. 7. 6. [한하균 오동동야화16]1948년 극협-신협 바뀌는 과정의 이광래 온재를 두고 한하균 선생은 높은 존경심이 있나 보다. 경연하는 학생들이 온재의 작품을 선정해 공연준비를 하자 다른 작가의 작품을 하도록 추천한 일이나 극예술협회를 구성원은 그대로 하면서 '신극협의회'로 변경할 때 대표를 유치진에게 양보한 일을 두고 '희생'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엔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하면서 덧붙였다. 말하자면 계산된 작전이란 얘기다. 황무지에도 봄은 오는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악명 높은 미군정 193호는 소멸되고 연극예술의 씨앗은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연극학회의 탄생과 함께 연극경연대회의 개최였다. 1949년 6월 금천대회관(전시경찰국자리) 3층에 사무실을 두고 고고의 성을 울린 한.. 2017. 7. 4. ‘문화콘텐츠의 향연’ 제9회 통영연극예술축제 개최 한국연극에 통영연극예술축제 소식을 실었다. 그 전문이다. 형편만 된다면 이 기간 휴가 딱 내고 통영서 살았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ㅋㅋ 7월 7~16일 시민문화회관·벅수골소극장 등서 23개 작품 공연개막작 폐막작 창작극 2편 눈길 오는 7일부터 16일까지 통영시민문화회관과 벅수골소극장, 남망산공원 야외무대 등에서 펼쳐지는 제9회 통영연극예술축제에 많은 예술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통영연극예술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질 뿐만 아니라 공연의 다양성도 이뤄나가고 있다. 이번 축제는 통영콘텐츠창작 스테이지, TTAF 스테이지, 가족극 스테이지, 꿈사랑나눔 스테이지, 섬마을 스테이지, 생활속의 스테이지로 나눠 진행된다. 특히 올해는 통영지역 문화자원을 활용해 콘텐츠로 발굴하는데 초점을 맞췄고 개막작 와.. 2017. 7. 4. [한하균 오동동야화15]미군 포고령으로 황무지가 된 연극계 이광래가 남원 군민 앞에서 썰을 푼 '명연설'이 당시엔 어땠는지 몰라도 썩 논리적이라거나 감동적이지는 않다. 마도로스가 수입의 6할을 선주에게 빼앗기기 때문에 농민이 7할~6할 지주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인지, 아픔을 공감한다면서 연극에서 대사가 6할을 일한 사람이 가져야 한다고 된 것을 남로당 요구대로 무상몰수 무상분배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게 관객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을 만한 것이었나에는 좀 의아한 구석이 있다. 어쨌든 이광래는 그렇게 연설해서 관객의 동의를 얻어 대본대로 공연을 한 모양이다. 미군정 시대 포고령이 바로 법이었으니... 1948년 200원짜리 관람료에 세금을 매겼으니 많은 극단이 해체되고 관람료 10원짜리 저급한 공연이 판을 치게 되었단다. 여튼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잘 .. 2017. 7. 3. [연극시연회리뷰]경남예술극단 '안녕이라 말하지마' 인물탐구 시연회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연출을 맡은 이삼우 감독에게도 말했지만 내 관극 태도의 가장 큰 단점은 감상하려하지 않고 분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공연을 볼때마다 그러는 바람에 어쩌면 이젠 그냥 감상만 한다는 것은 불안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관극 습관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남의 연극을 보기도 전부터 연극 무대에 올라섰으니... 게다가 고등학교 때 연극이라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놈이 극본 쓰고 연출까지 맡았더랬으니... 오죽하랴. 학교에서 연극을 했다는 것은 일종의 족쇄이기도 했다. 4학년 가을학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작품을 올리고 연이어 신문사 취직했다. 자연히 그 바닥을 떠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후배들은 시연회 때마다 불렀고 갈 때마다 작품을 분석하고 연기를 지적해댔다. 후배들은.. 2017. 7. 3. [한하균 오동동야화 14]광복 후 진영논리에 휘둘린 이광래 연극 광복 후 연극 바닥도 이념대결이 치열했던 모양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땅 때문에 이념 갈등이 생기고 급기야 분단까지 이어진 것을 아닐까 싶다. 이념이야 타협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제도는 얼마든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조선민족 성정이 얼마나 도아니면 모인지 반추해 볼 수 있기도 하낟. 암튼 그러한 상황에서 이광래는 남연 공연에서 땅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는 남로당 조직의 요구에 역제안은 한다는데... 극단 '민예'가 문을 닫던 그 해 그 달에 그러니까 1947년 11월에 이광래는 유치진·이서구와 함께 한국무대예술원을 조직한다. 이듬해인 1948년 이른 봄에는 우익진영의 많은 극단과 연극인들을 총망라하여 '극예술협회'라는 이름으로 UN한국위원단 환영 특별공연을 시공관에서 갖게 된다. 아울러.. 2017. 7. 2. [한하균 오동동야화13]김수돈 장난에 죽인다고 달려든 정진업 마산 연극의 선구자들이랄 수 있는 이광래, 김수돈, 정진업 이런 사람들이 극단 민예 활동 중 일어난 일화.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번씩 거짓말로 상대를 골려주고 했을 것 같다. 이광래·김수돈·정진업에 얽힌 일화다. 8·15광복의 기쁨이 미처 가시기도 전인 1945년 세모가 가까운 어느날 충남 강경에서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강경은 유동인구가 정주보다 훨씬 많은, 그래서 상품거래가 많았던 곳이어서 권번(기생이 대기하면서 요리점에서 부르면 주변에 나가기 위하여 여러 가지 예절과 춤과 노래를 교습받던 곳)도 있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윤택했다. 강경에서의 공연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도 없는 초만원을 이운 가운데 무사히 끝났다. 막이 내린 뒤 분장실로 돌아가 보니, 월초 정진업에게는 그곳의 권번에서 정중히 초.. 2017. 7. 1. [한하균의 오동동야화12]극단 민예 전국 누비며 순회공연 그래, 예전엔 지금보다 전국 순회공연 다니는 것이 훨씬 더했다. 악극단이 순회공연을 펼쳤듯이. 지금이야 서커스란 게 거의 형태를 감췄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서커스가 열리는 지역에는 동네가 시끌벅적했단다. 1960년대에 태어난 나도 그런 서커스 공연을 들어가서 보진 못했지만 밖에서 얼쩡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만 한 번도 연극을 그렇게 순회공연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음...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해도 연극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으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2 때 교회에서 친구들이 연극을 해보자며 내게 어쩌면 일방적으로 맡겨버리는 바람에 대본 쓰고 연출을 하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숫기가 없고 연기력이 딸리니까 배우 하지말고 연출을 맡겼을 수도 있겠다. 또 샜다. 지금에야 보.. 2017. 6. 30. 광주서 언론연수 마치고 오는 길에 5.18자유공원 들르다 창원을 비롯한 경남이야 워낙 구석구석 많이 돌아다녀 봤기 때문에 어딜 가도 거기서 거기란 생각이 드는 반면 생애 처음으로 갔던 광주는, 광주사람에게야 익숙해서 존재감마저 없을 수 있겠지만 난 타지 사람이다 보니 발길 닿는 곳, 눈에 비친 곳 모두가 새롭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연수라는 프로그램은 타지를 여행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기도 하다. 당일 오후 집에 일만 없었다면 1박 더 하면서 광주 곳곳을 돌아다녔을 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구경거리는 다음으로 미루고서라도 연수 마치고 점심식사를 했던 돼지갈비 맛집 나정상회에서 가까운 5.18자유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남신문의 권태영 기자도 창원으로 되돌아가는 버스 같은 걸 타기 때문에 함께 움직였다. 아, 알고봤더니 권 기자와는 광주로 올 때도 같은 버스를.. 2017. 6. 29. 광주시청 인근 출장 갔다면 산책하기 딱 좋은 평화공원 지난 22일 언론연수차 광주에 들렀다. 나로선 생애 처음이었다. 여러 번 갈 기회가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먼곳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원거리는 공식적인 일이 아니면 가급적 피했던 것도 사실이다. 가족여행이랍시고 멀리 간다고 갔던 곳도 기껏 포항이었으니. 어쨌든 광주란 곳은 내게 새롭고 신선한 동네였다. 당연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기록해야할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숙소 인근에 평화공원이 있었다. 1박 2일 출장 나가서 술을 안 마셔본 적도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1시쯤 잤다. 그랬더니 6시 제때에 눈이 떠졌고 한 30분 비몽사몽을 즐기다가 밖으로 나갔다. 물론 나가기 전에 다음지도로 주변을 탐색했다... 2017. 6. 28. [가곡전수관]청산도 절로절로~기악연주와 함께 감상하는 가곡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산(山) 절로절로 수(水) 절로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절로우리도 절로절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절로 늙으리라 -송시열(1607~1689)- 국악연주단 정음 공연. 가운데 악기는 '생황'인데... 저기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와 비슷. 가곡전수관에서 온 보도자료를 보고서 우암의 청산도를 다시 음미해봤다. 이게 시절가조, 즉 평시조인데 가곡으로 어떻게 부르나 궁금해서 동영상도 찾아 들어보았다. 아, 먼저! 시조와 가곡의 차이를 모를 수도 있겠다 싶어 부연설명을 하자면, 시조를 관현악기에 맞춰 노래로 부르는 것이 가곡이다. 말하자면 시조는 문학 쪽이겠고 가곡은 음악 쪽이겠다. 유행가로 치자면 가사냐 노래냐 뭐 그정도. 우암의 '청산도'는 학창시절 한 번쯤 보.. 2017. 6. 28. [한하균 오동동야화]민족예술무대 시절의 이광래 광복을 즈음한 시기는 문화예술 분야의 격동기였다. 아니 정치, 사회, 생활 모든 것이 격변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점에 이광래가 주도한 '민예'의 활동 역시 격변기 상황을 대변했을 터이다. 한하균 선생의 글에서 놀란 것은 친일 극단이었던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광복과 함께 '조선연극동맹'이란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즉각적으로 공산주의 선전계몽대로 돌변한 사실인데... 친일단체였던 이 극단을 '친일청산'에 더 강력하게 대처했던 북한이 묵인했다는 게 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여튼. 연극의 예술성(순수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몸부림하던 이광래는 일제의 가교한 문화정책 때문에 신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극연'과 '중앙무대'가 해체되자 상업극의 독무대가 된 극단에서 1940년 황금좌에 .. 2017. 6. 27. [화요명작예술감상회]몸에 착 달라붙는 음악 '탱고' 오늘 5개월 간 진행됐던 화요명작예술감상회 마자막 날이다. 차문호 교수 대타로 작곡가 임지훈 선생이 등장했다. 차 교수는 오후에 리허설 강의로 최종 시간을 진행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수업을 들을 수가 없다. 급하게 휴가를 내지 않는한... 사실 그 때문에 휴가를 낼 수는 없다. 탱고로 마지막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밖에 없겠다. 임 선생은 지난 주 차 교수가 강의했던 멘델스존에 대해 다시 언급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탱고에 대한 설명은 '지식채널e' 자료를 감상하면서 살폈다. http://www.ebs.co.kr/tv/show?prodId=352&lectId=1178031 태고 참고 영상 영화 여인의 향기, (카를로스) 가르델의 망명, 탱고레슨, 에비타. EBS예술의 광장 '포에버 탱고' 아르헨티나.. 2017. 6. 27. 이전 1 ··· 22 23 24 25 26 27 28 ··· 7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