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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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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업이 서울로 연극 공부를 하러 가서 만난 사람이 유치진과 홍해성이라고 한다. 물론 이광래가 내쳤더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인연이었겠지만, 어쩌면 번역 일을 하면서 '극예술연구회'가 주최한 강습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여간 다행한 일은 아니었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들여다 보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겠다 싶다.




월초가 서울에 갔을 때의 광래는 극작가로서보다도 오히려 문화부 베테랑 기자로 더욱 명성이 높았을 때였다. 광래는 연극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고향 후배를 매몰차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우선 검열대본 번역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말로 연극을 할 수 있을 때였는데(왜정 말기에는 일본말로 대사를 주고 받아야 했으니까) 우리 나라 작품을 조선총독부 산하의 관청에서 공연 허가를 얻으려면 일본말로 된 대본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일본 관헌이 읽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광래는 이 일을 주선해 진업에게 맡기면서 그의 호구지책을 우선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작품(희곡)을 접함으로써 연극의 세계에 입문시키려 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연극계 인사들과 얼굴을 익혀 안면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다행히 월초에게는 문재(文才)가 있어 광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문장력을 발휘하여 각 극단에서는 웬만하면 월초에게 번역 일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문필 업'은 생활과는 먼거리에 있었다.


한 작품 번역해보아야 한 달치 하숙비가 될똥말똥하는 그런 싸구려 수입뿐이었다. 이러한 번역하는 일로 극단 주변에서 약 1년쯤 지냈을 때인 1937년 11월 '극예술연구회'의 실천부(극예술연구회는 크게 연구부와 실천부로 나뉘어 있었고, 전자는 실험무대를 두고 또 후자는 강습회 등을 통하여 새로운 연기자 양성과 연극의 중요성과 함께 스태프의 각 분야별 전문 강의를 맡아 하고 있었다) 산하 강습회 회원으로 수강하게 된다.


이 강습회에서 몇 달 동안 강의를 받던 중 가장 인상적인 과목은 동랑 유치진의 <연기론>과 홍해성의 <무대론>이었다. 유치진은 너무나 유명한 극작가요 연출가니까 새삼스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홍해성에 대하여 잠시 언급해 두고자 한다.


홍해성은 극예술연구회 동인(해외문학파)들보다는 약 10년 선배로 소년시절부터 일본 신극의 요람인 축지 소극장에서 일본 신극의 개척자 오사나이 카오루에게서 신극의 무대 기술과 연기를 배우고 익혀 귀국하여 한국에 이식한 신극계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오늘로써 이광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앞으로 다른 연극인 이야기에 엑스트라로 출연할 것이다. 연극동맹에 대항한 전력 때문에 인민국이 서울을 장악했을 때 피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끝내 유지했던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그의 작품 몇 개를 읽어보겠지만 한하균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작품에서도 그 성향이 드러난다고 하였으니. 또 민족주의가 세월을 타고 흐르면서 보수세력으로 정착화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겠다 싶다. 


이광래가 '연극동맹'에 대항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의 주구노릇을 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붉은 기를 들고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는 점을 들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선연극운동본부 결성 후 한 달만에 친일극 전력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1945년 9월 28일 나옹, 신고송 등이 탈퇴해 다시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을 결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다시 12월 연극본부하고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하고 통합해 조선연극동맹으로 재편됐다.(한국현대문학대사전) 


이유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통합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으로 재편했는데 이에 따른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이 건설본부쪽 애들과 그렇게 대립각을 세웠어도 더 큰 카테고리가 통합하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평생동안 염원하던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교육자요, 지도자였다. 1948년 서라벌 예대가 정식인가를 받기 전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1968년 타계하기 두 달 전까지 서라벌예대의 연극영화과 지킴이 교수와 동국대학, 서울연극학교(드라마센터) 등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강단에서 강의를 마다하지 않았던 까닭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것도 주먹구구식으로 연출하고 연기하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심리락, 민속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미학 등 남들이 모두 싫어하는 비인기 과목인 보조과학에 더 무게를 두고 강의했던 것이니, 이는 모두 연극인의 질적 향상을 염두에 둔 까닭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식이라든지 허세라든지 조작된 포즈라든지, 온갖 부수적인 사치를 배제하고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이해로써 사람을 대해주기 때문'(1971년의 <현대연극> 내 김상민의 '인간 이광래' 중)에 제자들의 존경을 받은 지도자였다.


또한 광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습작기의 작품인 <어막의 일야>를 비롯해 <지는 해>(34년) <촌선생>(35년) <석류나무집>(37년) <해질무렵>(37년) 등 초기 작품은물론 그의 40편에 달하는 거의 모든 작품 밑바닥에는 겨레사랑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8·15 직후 우리나라에 "쏘련 놈에 속지 말라. 미국 놈 믿지 말라. 일본 놈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하라"는 참요가 한때 유행했었는데 광래는 술이 거나해지면 "이 참요 속에 진리가 있단 말야?"하고 몇 번이고 되뇌이곤 했다고 한다.


어쨌든 광래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적색테러는 물론 백색테러와 철저하게 대항했던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온 나라의 연극계가 아니 어제까지 친일하던 연극인들이 '연극동맹'을 중심으로 하여 붉은 깃발을 휘두르고 있을 때 1945년 10월 오직 광래만이 민족예술무대(약칭 민예)를 조직하여 그들과 대항하여 싸웠다. 이때 북에서 피란 내려온 서북청년단(우익 행동부대)이 좌익의 테러를 막아주겠다고 나섰지만 이광래가 단연코 거절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도 6·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자마자 '연극동맹'에서는 유치진, 서항석 선생들을 색출하려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지만, 거기다가 이광래를 꼭 찾아내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날뛰는 판국이었다. 한강이 끊어져 도강할 수 없게 된 광래는 부득이 처가가 있는 경기도 여주 땅으로 피신하여 구사일생으로 악몽같은 90일을 견딘 것이다.


이제 그가 활약했던 이력을 정리해 봄으로써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한국문학가협회 이사 및 희곡분과 위원장(1965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57년), 한국연극협회 이사(1962), 대한민국문화포상 수상(1963), 대한민국예술원상(1967) 등등.


중천에 있던 해가 서녘하늘에 쓰러질 때는 찬란한 낙조를 남기듯 우리 연극계에 많은 일을 하고서도 별달리 야단스럽지 않았던 이광래 선생이 1968년 10월 29일 지병으로 타계하자 갑자기 우리 연극계는 한 기둥이 뽑힌 허전함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남녘을 바라보고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대로 지금 망우리 묘지에 묻혀 있는 이광래 선생. 그가 말한 남녘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고향 마산이리라.


/참고문헌: <온재 이광래 연구>(김홍우), <한국연극사>(장한기), <연극연감>(연극협회)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이광래의 업적이 나열된다. 사실주의 낭만주의 물결 속에서 '표현주의' 극을 이끌었다는 점, 극 중간에 또 이루어지는 중간극, 이것은 오페라 쉬는 시간(인터미션)에 공연되던 작은 오페라, 오페레타와 유사하겠다 싶다. 하긴 유럽에서 이 오페레타가 재미있는 극의 구성으로 오히려 오페라보다 더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지만. 여튼 그러한 장르의 극도 구상하고 소극장운동까지 펼쳤다고 하니 대단한 인물이다. 한국 연극 계보를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광래의 이러한 점은 현재 한국 연극계 거장 오태석, 이윤택, 손진책, 윤호진 이런 양반들과 비슷했겠다 싶다. 새로운 극을 실험하는 것만큼 창조적 희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그만큼 이광래는 거듭 말하지만 연극에 관한한 한치의 오차도 용납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불치의 병마(당뇨병)에 시달리면서 소극장운동의 세미나나 공연, 그리고 대학극의 초대에는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관극하고 합평회에 참석하여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연극에 미친(狂) 까닭을 광래 자신이 쓴 <나와 연극>(연극연감, 연극협회편)에서 찾아보자.


"내 울적한 감정과 격앙된 사상을 펼치고 떨칠 필드로서 연극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도쿄 고등학교(지금의 전문대학)를 나와 와세다대학에 재학시 공산주의 사상이 한창 판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반면 이것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백색테러가 반공인(公認) 아래 백주에 횡행하던 폭력시대였다. 이것을 보다 못해 분기한 것이 다가다노 마바의 학생침입이라는 유혈의 투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때 연좌(連坐)하였던 동지들은 5~15년의 판결 언도를 받았는데, 나는 연소자일 뿐아니라 학생이라는 이유로 빼돌려 주었다. 그러나 일본 관헌들의 눈은 나를 미행하다 못해 기어코 일본 땅에서 추방하고야 말았다. 귀국한 뒤에 축구경기장에서 결승전에 농민종맹(좌익계열)과 맞붙었는데 구기는 고사하고 사상적인 대립으로 집단 난투극의 수라장이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이것 때문에 소요죄에 걸려 감옥신세가 되고 말았으며, 반면 후에도 요시찰 인물로 하루가 멀다하고 유치장엘 드나들게 되었다. 나의 격앙된 심경은 결코 아폴론적으로 평온할 수는 없었다. (중략)그러다가 연극예술의 진수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동랑 유치진과 같이 (그는 행장극장을 만들어 민중계몽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일종의 공리적 목적에서 연극에 빠져들었지만 끝내는 연극예술을 꽃피우기 위하여 그 험난한 형극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나와 연극>에서 다음과 같은 글도 보인다.


"니체가 인생은 수난이 아니고 수난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했듯이 우리나라 연극사가 수난의 기록이 아니고 수난 그것이 바로 연극의 기록인 것 같이 내 인생이 연극인지 연극 바로 그것이 내 인생인지, 어쨌든 연극 가운데 내가 살고 내 가운데 연극이 살고 있는 한 내 인생은 수난 많은 인생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광래 스스로 말하듯 '수난의 기록'인 연극이었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그가 이룩한 업적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언제나 선구적 위치에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연출가요 극작가였다. 1930년 중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물결속에서 이땅에 처음으로 표현주의 무대를 형상화시키기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중간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연극을 탄생시키려고 온 정력을 다 기울였다.


또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극장운동을 개척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흥우(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 교수에 의하면 "그의 만년에 시도된 심포닉 드라마는 한국 고전음악기를 동원한 것으로, 한국 고전의상의 현대화, 이두 문자의 부활, 언어의 시각화 등을 시도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온재 이광래 연구)고 말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필자는 광래의 심포닉 드라마를 한 편도 관극하지 못해 낙향한 서글픔을 달랠 수밖에 없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이광래의 마지막 이야기일 듯하다. 1968년 사망 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광래에 대한 인상적이 이야기가 나왔다.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오랫동안 참여했는데, 한 번은 심사 노트를 변기에 빠트렸는데, 그 노트를 건지기 위해 똥을 다 퍼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건진 노트를 물로 헹궈내고 다른 노트에 옮겨 적기를 꼬박 하루동안 작업을 했다고 하니 성격이 독특하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나도 좀 그런 류의 인간형이긴 하다. 언젠가 한 번 한 시간여를 열심히 썼던 일기가 갑작스런 정전으로 날아가버렸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기록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에는 어찌 그리 애통하던지.



그런데 광래는 <기류의 음계>를 발표하면서 '작의'를 먼저 덧붙인 것이다. 약간 장황하지만 그의 실험정신을 탐색한다는 뜻에서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의식의 흐름이 오늘같이 혼잡한 때가 있었던가? 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잡다한 불협화음계가 소연한 가운데 현대의식은 갈피를 차리지 못하고 광망한다. 작자는 이러한 상황을 상징하여 '기류의 음계'라 정하였다. 그리고 '기류의 음계' 아래 이율배반적으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현대의식의 생태를 분석하여 의지적·정열적 변화의 경과를 내험하는 현대의식의 비장미를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구상화해 보려고 한다.(중략) 그러므로 의식작용을 화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의식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직관케 하기 위하여 작중 박환기의 인물을 3인으로 등장시켜 각각 지·정·의를 분탐케 하였다. … 실제인물로서 의식의 요소를 분탐케 하는 작의를 연출자와 연기자들이 잘 이해해주기 바란다."


8·15광복 전 현진건의 <무영탑>을 각색하면서 등장인물의 심상의 세계를 직관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시험해 본 바를 다시금 가다듬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한 것이다. 1958년 11월 18일부터 3일간 진주극장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물론 이광래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연출하면서도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자세로 온 정성을 다 쏟아부었으며, 특히 60년대 혜성처럼 나타났다 아깝게 요절한 탤런트 이우평 씨의 연기는 참으로 압권이었다."고 조연출을 맡았던 정인화 씨는 회고하고 있다. 


사실 광래는 일상생활, 특히 술자리에서의 생활태도는 거의 상궤를 벗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웬만한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약속을 해 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그런데 연극과 관계되는 약속은 아무리 취중이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도리어 혼이 나곤 했다.


가령 진주 영남예술제 때(1953년)부터 개천예술제로 이름이 바뀐 1968년 작고하던 그해까지 딱 한차례(54년에는 동랑 유치진 선생이 참석하셨다)만 빼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돌아가신 그해 1968년에는 서라벌예대에 병가(당뇨병)로 휴직원까지 제출해 놓은 상태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으며, 또한 10월 29일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열흘 남짓 전인 12일부터 16일까지 심사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버티신 이야기는 지금도 후배나 제자들의 귀감으로 전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사를 하실 때는 절대로 대충대충 머리로 하지 않고 심사노트를 바탕으로 하여 과학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 작품에 대한 심사 메모는 적어도 국판노트 56쪽을 넘었다고 한다. 이 심사 메모를 모아 놓은 노트를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다가 빠트린 일화는 지금도 연로한 진주예술인들 사이에는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그 오물을 다 퍼내고 건져서 깨끗한 물에 씻어 새로이 정리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이 위대한(?) 작업을 진두지휘하였던 당시의 예술제전 사무국장 한동렬 씨는 지금도 혀를 내두르고 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탤런트 주현이 1958년 당시마산에서 김수돈 정진업 이런 양반들과 함께 공연을 했구나. 이즘 이광래는 드라마센터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동시 동국대 교수까지 맡아 자신의 연극론을 본격적으로 펼쳤단다. 그의 연기론은 스타니슬라브스키에서 더 한발 나아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했다는데 그는 이 연출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행간에서 연구하는 연극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마산에서의 공연 얘기를 덧붙인다.


익살스런 장서방 역을 맡은 주현의 코믹한 연기, 고뇌를 씹어삼키면서도 조용히 결의를 다지는 정도 역을 맡은 심영식의 그 처절한 표정 연기, 그리고 자비로우면서도 보다 큰 일을 위한 용단을 내리는 어머니 역을 맡은 천선녀의 그 중후한 연기. 이렇게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 보기 드문 공연이었는데도 마산의 관객은 그걸 몰라주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쫑파티(공연 자축 겸 합평회) 석상에서 온재 선생의 대갈일성이 터졌다. 


"화인·월초 두 사람은 잘 들어. 관객이 없는 연극이 있을 수 있나? 지금이 홍도야 울지마라 시대인가? 마산 관객을 이렇게 팽개친 것은 물론 고향을 오래도록 떠나 있는 내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안 해. 허지만 고향을 지키고 있는 자네들이 때때로 연극을 했다면서 관객을 18세기 시대에 이렇게 팽개쳐두고도 무슨 예술가로 자처하고 있는가? 책임을 느끼게 책임을."


그날 저녁 오랜만에 세 사람의 선후배는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도 마산의 연극 부흥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1958년엔 이광래의 일생에 변화가 온다. ITI(국제극예술협회) 한국지부 이사를 거쳐, 1960년에는 평생을 두고 고락을 같이 해 온 동랑 유치진의 청탁을 흔쾌히 수학하여 드라마센터(한국연극연구소) 상임이사와 같은 해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의 강사를 맡아 드디어 이광래는 자신의 소신을 펼치게 된다.


우선 동랑이 세계를 돌면서 유명한 극자의 구조를 촬영한 것을 바탕으로 드라마센터의 무대와 객석구조를 설계하려 할 때, 저 유명한 '김치'론을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버터 대신 김치를 먹고 살아온 민족이니 극장설계도 여기에 알맞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문화주체론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형무대, 장방형무대는 물론, 우리 고유의 탈춤·인형극 그리고 마당굿까지도 공연이 가능하도록 무대의 구조를 설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어서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출강하게 된 직접 동기는 서라벌예대(초급대학 2년제)와는 사뭇 다르게 연극미학·현대극론 그리고 새로운 연출론(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한 색채와 선과 율을 원용한 새로운 도학의 연출법)을 강의하면서 '그저 느낌과 주먹구구식 종래의 연극'을 배격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연극예술의 진가는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치밀한 계산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는 광래 자신의 생각을 후학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코 학자적 위치에서 이론 탐그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해, 전술한 소극장 '원방각'을 조직하여 서울은 물론 지방에까지 공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주 개천예술제(옛날의 영남예술제)에 참가한 <기류의 음계>라는 작품이다. 대체로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하여 '작의'라는 해설을 붙여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20화 글을 보면 마산 관객은 아주 대형에다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마산의 거룩한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1년에는 3·15의거 1주년 기념 예술제전 준비가 거시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61년 2월 중순쯤 나도 화인 김수돈 선생의 급한 부름을 받고 부산에서 마산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생각과는 달리 약간 복잡한 일이 얽혀 있었다. 제전위원회 사무국장을 시인 김춘수 선생이 맡아 전 행사를 총괄하고 있었고 그 아래 예술 분과위원회가 있었는데 위원장에 김수돈, 부위원장에 월초 정진업 선생이 맡아 있어 오순도순 의논만 맞으면 참으로 훌륭한 작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두 분이 의견충돌을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월초는 3·15의거 정신을 고양한 작품을 거의 완성해 놓았으니 자신의 작푸을 레퍼토리로 선정하여 공연하자는 것이요, 화인은 시간만 넉넉하다면 전폭적으로 창선하겠지만 문제는 연습할 시간이 없으니 마산이 낳은 극작가요 연출가인 이광래 선생에게 일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월초는 폐업(?)하고 집에 칩거하여 일을 거들지 않으니 화인이 나를 부른 것이다.


두 분 다 나에게는 대 선배라 어느 편을 들기도 거북하여 실로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진 것이다. 백고천난 끝에 두 분을 화해시키고 화안과 나는 일약 서울로 가기에 이르렀다. 마산시장 전용차로 부산 수영 공항(당시는 부산공항이 수영이었다)으로 직행한 우리가 비행기에 탑승하려할 때 수튜어디스가 우리를 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만 하더라도 비행기 승객은 말쑥한 옷차림에다 무슨 선민의식으로 도색한 표정을 가다듬고 있어야 할 텐데 머리카락은 갯바람을 맏아 춤추듯 너울거리고, 까만 세루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까만 색깔이 아니라 차라리 하얀 빛깔이라 해야할 만큼 막걸리가 온 두루마기에 묻어 있었으니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서울에 내린 화인과 나는 종로 5가에 있는 '현대문학사'로 먼저 찾아갔다. 이광래 선생댁의 주소를 알기 위해서였다. 누상동 이광래 선생댁은 물론 서라벌예대로, 국립극장(당시는 명동에 있었다)으로, 그 옆 골목에 있는 은성(최불암 씨의 선비가 경영하던 술집)으로 마구 서울 장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돈암동에 있는 방공호집(시인 구상·조지훈·박목월, 화가 김환기·이중섭 씨 등이 자주 모이시던 술집)에서 온재 선생을 뵈옵게 된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셨던 온재 선생께서도 고향 마산의 3·15 1주년 기념공연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단박에 눈에 형형한 안광이 빛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공연 날짜를 손꼽아 보시더니 "어쩔 수 없네. 리바이벌이야"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오리지널 작품을 상연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부득이 서라벌 예대에서 리허설용으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원용하여 고영ㄴ한 바 있는 유치진 작 이광래 연출의 <조국>을 레퍼토리로 선정하고 마지막 손질을 더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산의 강남극장에서 개막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마산의 관객은 대배우 중심의 화려하고 박력있는 연극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감동이 아닌 잔잔한 감동에는 그다지 큰 박수를 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좀 기억할만한 내용이 담긴 19화다. 국내 소극장운동의 씨앗이랄 수 있는 원방각운동이 이광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광래가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점. 아쉬운 점은 소극장운동의 첨병이었던 원방각이 6회 공연을 끝으로 화재로 문을 닫고 재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원방각이 제대로 소극장 운동에 성공을 이루었다면 지금 연극판의 지형도 많이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살롱공연 무대나 카페연극이 사람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진 않았을까 싶은... 



이광래와 서라벌 예술학원과의 인연은 훨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광래는 1948년 한국 초창기 연극계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인 윤백남 선생의 권유로 예술학원에 발을 들인다. 서라벌예술학원의 설립자가 윤백남 선생이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물론 문교부의 정식인가를 얻지 못한 서라벌예술 학원시절에 거의 무보수로 선배의 일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그저 강사로 출강하였지마는 이제는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2년제 초급대학) 교수로 정식 취임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초대학과장이 됨과 동시에 그 지긋지긋한 살림의 궁색함에서 약간 해방되었다. 술만 취하면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내딸년(순숙)을 죽인 놈!" 하던 죄의식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순숙을 잊기 위하여 더 무서운 집념으로 책을 읽기로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애란의 국민연극운동(민족연극운동)에 대하여 일본 와세다대학시절부터 가졌던 관심을 한충 심화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선구자 예이츠에서부터 그레고리부인의 역할, 그리고 싱그의 희곡에 이르기까지 아비극장을 중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전통문화를 되찾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정신을 거울삼으려 한 것이다.


거기에다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 의한 이른바 소극장운동이 모스크바 예술좌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소극장 원방각 운동이다. 장소는 1958년 을지로 입구에 한국 연극의 초창기 이인직이 활동하던 시절 최초의 민간극장인 원각사(1908)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원각사란 소극장을 개관한 바 있는데 이 극장에서 이광래가 뒤에서 떠빧쳐주고 그의 제자들이 앞장서 활동하게 된다.


여기 '원방각'(극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출신들이거나 학교 강사였다. 장한기(당시 서라벌 예대 강사.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주임교수 및 문화대학장, 예술대학원장 역임) 박사를 비롯하여 극작가 오학영, 일찍이 요절했지만 신예 연출가로 주목받았던 김상민, 주로 라디오 드라마에서 성우와 극작가로 활약했던 심영식(마산 3·15 1주년 기념예술제 때 유치진 작 이광래 연출의 <조국>에서 정도 역을 맡아 마산 관객의 열렬한 박수를 받은 바 있다), 특이한 마스크와 목소리로 성격배우의 구실을 멋지게 해낸 여배우 천선녀, 그리고 주현이란 예명으로 지금도 TV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견 탤런트 주상현 등이 그 핵심 멤버였다.


창립공연으로 입센의 <유령>을 이광래 연출로 상연하게 되어 한국 연극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그것은 전술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 의한 '새로운 무대와 새로운 연출수법'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새삼스럽지만 연극이란 연기를 창조하는 배우의 예술이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를 창조하려면 배우의 수업과 역의 완성이 필요하다.


이러자면 심리적 사실주의를 바탕한 이른바 '신체적 행동법'이 필수적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출이론을 구체적으로 무대에 옮겨 새로이 이식한 사람이 이광래다. 따라서 한국연극사상 하나의 큰 획을 그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극단 '원방각'은 겨우 5회의 공연과 지방공연 1회로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극장 '원각사'에 불이 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70년대와 80년대에 불꽃같이 타올랐던 소극장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 극단 '원방각'의 공로는 결코 가벼이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주엔 오랜 만에 다시 이야기의 무대를 마산으로 옮겨야 할 것 같다. 3·15의거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하여 전 시민이 자연발생적으로 독재정권을 규탄하고 나선 데모는 끝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마산시민, 아니 지각있는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그래. 연극이냐 생활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활동을 했던 수많은 이들이 극단보다는 전공이든 아니든 생활을 위해 직장을 선택했던 것이 다반사였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광래가 연극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한국의 연극계를 이끌다시피 했던 이가 자기 몸 하나 근근이 건사할 정도였다니. 광래는 마산 출신이면서도 마산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었단다. 하지만 딸이 허기를 달래려고 우물물을 긷다가 빠져 사망하게 되자 마음을 달리 먹는다. 



사실 6·25 전까지 서울국립극장에서 두 번 공연을 가졌는데 두 번 다 극단 신협이 맡았음만 보아도 신협의 활동상을 알 것이다. 그러다가 세 번째 레퍼토리인 정비석 원작 이광래 각색인 <청춘의 윤리>와 윤방일이 이끌던 '극협'에서 사르트르 원작인 <더러운 손>, 훗날 <붉은 장갑>으로 개명되어 부산에서 공연된 이 작품을 연습하던 중 6·25 전쟁을 맞게 된다.


어쨌거나 이광래는 자신보다는 단원(배우)을, 단원보다는 극단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요, 극작가요, 연출가였다. 그러기에 그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동가식서가숙은 다반사요, 작품 집필마저도 거의 집 한 귀퉁이에서 이루어진 것이 비일비재였다. 실로 처참, 그것이었다. 이 무렵 이광래 스스로 표백한 글을 살펴보면 얼마나 생활이 아니라 생존에 허덕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951년 극단 신협이 대구문화극장(4월 16~20일)과 부산극장(4월 26~5월1일)에서 상연한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연출하면서 그 팸플릿에 쓴 글에서 <수전노>의 번역자인 김광주 씨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태의 글이다.


"광주형, 오랜만에 지기의 벗을 만났습니다. 그는 대단한 청색 애호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의 캔버스는 황색계열로 변해가고 있더군요. 그래서 기왕이면 새까많게 칠해 버리라고 제의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의 아틀리에에도 검은 장막이 꼭 드리운지 오래입니다. 천장에 뚫어놓은 채광창으로는 곧잘 광선이 스며들던 곳입니다.


훨씬 더 높이 푸른 창공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구름도 날고 새도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밤이 될라치면 명멸하는 별들이 반짝반짝 깃들었습니다. 한국전쟁 후로는 비행기도 곧잘 날더군요. 그러나 이 채광창은 흑막을 꽁꽁 닫아버리고 말았단 말이에요. 왜냐구요? 배가 부르니까 하늘이 푸르더군요. 배가 고프니까 하늘이 노래지더군요. 노란 것이 지나치니까 새까맣게 되더군요. 이런 생리적 현상을 체험하신 분은 내 정신적인 현상도 이해하실 줄 압니다. 진실로 새까맣습니다. 그것이 나의 현실입니다."


고향(마산)을 지척에 두고도 대구와 부산에서 떠돌기(피란) 생활을 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생계를 걱정해야 하면서도 광래는 끝내 고향을 찾지 않았다. 복혜숙, 김영옥, 김동원 등 수많은 연극인들이 고향 마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도록 고향의 친지들에게 거주지를 알선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고향을 찾지 않은 오직 하나의 이유가 고향의 친척과 친지들에게 손톱만치라도 폐끼치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이러한 고집도 사랑하던 막내딸 순숙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전술한 바와 같이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연출하던 중 리허설장에서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졸도한 것이다. 배가 고파 대신 물배라도 채우려던 꼬마아이가 우물 물을 긷다가 잘못하여 우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광래는 9·28 수복과 함께 서울로 간 뒤에는 우선 가족의 생존(결코 생활이 아니다)부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방향전환한 것이 연극인 양성을 위한 교육계의 진출이었다. 그것이 곧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교수로 부임한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앞서 16화에서 이광래가 이끌던 '극예술협회'가 있었지만 새로 '신극협의회'를 만들어 유치진이 대표를 맡게 하고 자신은 간사장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유를 17화에서 풀어놓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 있다.그 실타래를 풀어가보기로 하자. 광복 직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카프(조선공산주의 예술가 동맹의 약칭) 산하의 '연극동맹'이 온 연극계를 붉은 깃발로 물들이고 있을 때 유일무이하게 이에 대항하고 나선 단체(극단)가 민예요, 그러기에 그 민예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함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무대예술원 창립과 함께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 혹은 순전히 타의로 일본제국의 문화정책에 강제로 끌려나가 친일연극을 했던 사람들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38이북 지방에서 공산주의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남하한 이북지방 연극인들도 자연스레 여기에 합류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끼리끼리의 우정과 이해가 합쳐져 분파의식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연극계도 이북과 이남의 두 줄기 흐름이 은근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38 이북 사람들은 서항석을, 이남 사람들은 유치진을 떠받드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나라에서 고정급을 주는 국립극장이 탄생한 것이다.


사실 연극인들에게 고정급은 생활의 안정을 의미하고, 생활의 안정은 곧 좋은 연극을 할 수 있다는 등식은 지금과 다를 바 없다. 더욱이 연극인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예술인은 없을 것이다. 비가 많이 와도, 눈이 많이 내려도, 폭풍우가 거세게 불어도 극장은 관객이 끊어지고 관객이 끊어지면 흥행이 안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고정급을 받는 국립극장의 전속 극단이 어느 단체가 되느냐, 그리고 어느 단체가 개관 첫 공연을 갖게 되느냐에 전 연극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있던 광래는 일찌감치 '신협'의 대표자리를 대선배인 유치진에게 넘겨 놓고 국립극장 창설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국립극장이 창설되려 할 즈음 유치진이 극장장 자리를 한사코 마다는 것이었다.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잡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극장장은 서항석이 맡을 것이요, 서항석이 맡으면 극단 '신청년'이 전속극단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이에 이광래의 용산 갈월동 유치진 선생 방문이 시작된 것이다. 요즈음처럼 택시가 흔할 때도 아니요, 버스라야 몇십분만에 한 대씩 오는 것을 기다릴 수 없어 누상동 집에서 새벽부터 걷게 되었다. 그래야 동랑(유치진) 선생이 집을 나서기 전에 가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두어시간씩 걷자니 그 좋아하던 술도 끊어야 했다.


이러기를 열 엿새만에 "나라에서 극장장하라면 하지"하는 대답을 들은 것이다. 말하자면 온재의 '신협'을 위한 그 정성에 동랑 선생도 감격한 것이다.



한하균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이광래라는 연극인은 작품에 대한 열정도 어지간하겠지만 문화계의 흐름을 읽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계산도 아주 뛰어난 것 같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온재를 두고 한하균 선생은 높은 존경심이 있나 보다. 경연하는 학생들이 온재의 작품을 선정해 공연준비를 하자 다른 작가의 작품을 하도록 추천한 일이나 극예술협회를 구성원은 그대로 하면서 '신극협의회'로 변경할 때 대표를 유치진에게 양보한 일을 두고 '희생'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엔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하면서 덧붙였다. 말하자면 계산된 작전이란 얘기다.



황무지에도 봄은 오는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악명 높은 미군정 193호는 소멸되고 연극예술의 씨앗은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연극학회의 탄생과 함께 연극경연대회의 개최였다. 1949년 6월 금천대회관(전시경찰국자리) 3층에 사무실을 두고 고고의 성을 울린 한국 연극학회의 참여 인사는 기라성같은 대 연극인들이 거의 다 모였다. 회장에 유치진, 간사장 이광래, 간사에 홍해창, 김진수·이종일·박동근 등 다섯 사람이었다.


이들은 당면과제로 첫째, 같은 해 8월부터 방학을 이용하여 하기 연극강좌를 시행하고 둘째, 10월에는 무대예술원 산하 각 단체로 하여금 민족의식 양양 전국 연극 계몽대를 파견하기로 하고 셋째, 10월에는 6일간 시공간에서 제1회 전국 남녀대학 연극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여 그 모든 행사를 성공리에 끝마친 것이다.


극평가들도 "한국 연극 발전상 최소 30년의 시간을 단축시켰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와 연극예술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한국 연극학회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 연극사상 찬연한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간사장으로서 실무총책을 지고 동분서주한 이광래의 공로는 실로 눈부신 바 있다고 하겠다.


대체로 작가는 자기 작품을 발표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모 대학에서 이광래 작품을 레퍼토리로 선정하여 책 읽기(연습의 첫 단계)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들은 광래는 그 대학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추천하면서 자기 작품 공연을 말린 것이다.


대회의 공정한 운영을 꾀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두기 위하여 자기의 욕심을 버린 것이다. 이러한 자기 희생정신은 국립극장 공연 때에도 우감없이 발휘된다.


1948년 7월 국무회의를 통과한 국립극장 공연법에서는 '무질서한 흥행극과 사상적인 반동분자 및 악질적인 흥행 브로커를 방지하기 위하여'라고 그 창설 목적을 밝히고 있다.그리하여 1949년 가을 국회에서 정식으로 창설령이 제정되자 그 극장 전속으로 '신협'과 '극협'의 두 극단이 지정되었다.


신협과 극협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광래가 주재한 '극예술협회'가 모태가 되어 새로이 탄생한 극단으로, 창설령이 제정되기 직전에 '신극협의회'로 바뀌고 그 구성 멤버도 거의 대부분 극예술협회 진용 그대로였다. 다만 대표자만 이광래에서 유치진으로 바뀌고 스스로 간사장이 되어 있었다.


이는 오로지 자기 자신보다는 극단을 먼저 생각한 용단이었다. 왜나하면 유치진은 그때 벌써 국립극장장으로 거의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