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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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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하균 선생의 오동동야화를 베껴쓰기 전에 오늘의 주인공인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기본 정보부터 훑어보아야겠다. 자료는 역시 <경남연극인물사1>이다. 정진업은 극작가이자 배우,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다.1930년 김해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현 용마고등학교인 마산공립상업학교를 나왔다. 1936년 무렵 이광래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극단 극연, 낭만파, 태양 등에서 연극수업을 받았고 영화 <해연> <여인애사> <삼천만의 꽃다발>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한하균 선생의 야화를 거친 다음 풀어볼란다.




월초 전진업 선생과의 만남


세 번째로 월초 정진업 선생과 만났다.


1951년 스산한 바람이 세차게 부는 초겨울이었다. 마산의 화인 선생으로부터 서신 한 통이 배달되었다. '마산문총(현 예총)의 종합예술제에서 서항석 작 <군상>을 내 연출로 공연하니 꼭 오라. 자네가 존경하는 동랑 선생 작품이 아니라서 조금은 섭섭하겠지만 연출가에 뜻이 있는 자네가 한 작가에만 전념한다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 아니겠는가'하는 요지의 편지였다.


국제극장(지금은 없어진 부림시장 위 강남극장)에서 마지막 날 저녁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일찍이 토월회(1920년대 박승희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 신극단체의 효시) 시대부터 무대로, 스크린으로 널리 알려진 톱스타의 한 사람인 고 복혜숙(당시 피란 차 마산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음) 선생과 중진 여배우 김영옥(역시 피란 차 마산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음) 여사의 연기 역량이야 새삼스레 말할 나위가 없었다. 


정낙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그 육중한 체구에 걸맞게 박력 넘치는 연기와 그 낭랑한 보이스 컬러로 극장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볼륨있는 대사를 구사하는 남자 연기자였다. 막이 내린 뒤 소개받아 알았지만 그가 바로 월초 정진업 선생이었다. 월초 선생은 1939년 <문장>지에 소설을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지만 그뒤 시인으로 전업했다. 사실은 연극인으로 이광래 선생과 함께 일제 때는 만주 각지로, 해방 후에는 '민예'의 중진 배우로 전국을 누비고 다니던 대배우였던 것이다.


그날 저녁 이른바 쫑파티(연극이 끝난 뒤의 자평회 및 축하연)에서 주기가 도연해진 월초 선생의 자작시 낭독이 있었다. 과시(果是)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그대로 뛰어나고 멋진 낭독이었다.


그 자리에서 화인 선생의 권유로 나도 미당 선생의 시를 한 수 읊게 되었다. 눈의 휘둥그래진 월초 선생이 '시 낭독만은 내 전매특허인줄 알았는데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 걸. 그런데 미스터 한, 바이브레이션이 너무 심하면 격조에 이상이 생기니까. 그런 점에서 나를 모델로 삼아 더 연구해야 할 걸"하고 충고해 주시던 그때 일이 바로 어제 일인듯 새롭기만 하다.


정말 우직하리만큼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월초 선생이었다. 이런 월초 선생과 나는 주로 부산과 마산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같이 했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도 이 글에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어릴 적 그 맑고 순수하고 미소로운 사랑(?)이 고희를 맞은 지금까지도 아련히 가슴에 남아 있듯이, 이제 세 분 선배님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리고 지난 날을 반추하면서 오늘의 의미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먼저 언급하기를 정진업 선생이 언론인이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자료를 쭉 읽어내려가니 1951년 부산일부 문화부장으로 일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때 용공기자로(용공이란 말은 쉽게 말해 당시 빨갱이로 인식되는 용어다)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는 기록과 함께. 그의 시 '갈대'가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월초 정진업 선생의 시 '갈대' 시비.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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