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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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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다시 시작하면서 경남의 초창기 연극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15년 전쯤 월간지 한국연극처럼 경남연극이 발행되기도 했기에 뒤져볼까 하다가 먼저 <경남도민일보>에 한동안 연재됐던 한하균 선생의 '오동동야화'가 떠올랐다.


그런데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봐도 선생의 글이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사이트가 개편되면서 이전의 많은 기사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찾고자 하는 게 없다 보니 더 찾게 되더라고. 전산부에 물어보니 다행히 과거 신문을 PDF판으로 제작해 놓은 게 있다고 했다.


2000년 6월 7일부터 매주 수요일 연재를 했기에 자료는 어렵지 않게 뽑아낼 수 있었다.2001년 2월 28일 건강 악화로 연재를 중단할 때까지 36편이 나왔다. 지금부터 마산의 연극사를 되짚어본다 생각하고 베껴쓰볼까 싶다. 중간중간 경남연극협회에서 발행한 <경남연극사> 자료도 참고하고 예전에 발행되었던 <경남연극>도 참고하면서...


참고로 베껴쓴 '오동동 야화'는 경남도민일보의 콘텐츠임을 밝힌다.




한하균의 오동동 야화 - 내가 만난 연극인들

1. 이광래 선생과의 인연


내가 합포성에 입성한지도 어언 반세기가 거의 다 되어 간다. 그동안 참 많이도 바뀌었다. 어떤 것은 사위다 못해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고 어떤 경우는 깡그리 없어져버리기도 했다.


지금 오동동 거리에 나서서 "목발 김형윤 선생을 아는가? 아니, 영화배우 이수련 씨를 아는가?" 하고 묻는다면 아마 여에 아홉 사람은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만큼 변한 것이다.


우리는 어제의 마산을 너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내가 관여한 연극을 통해서, 또 연극계 대 선배 세 분의 활동을 거울삼아, 예술을 위한 순수한 정열과 낭만과 또 좌절감에서 빚어지는 절망의 몸부림과 아우성을 가능한한 생생하게 전달, 당시 사회상의 일단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원술랑> 상연극장 앞 운명의 만남


내가 온재 이광래 선생을 처음으로 뵌 것은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4월 29일이다. 이날은 대한민국 국립국장이 창설되고 그 개관 기념프로로 유치진 원작 이화삼·허석(남실) 공동 연출의 '원술랑'을 보기 위해서 국립극장(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의 일부가 된 구 부민관 자리) 앞에서 입장하려고 바둥거리고 있을 때였다.


표를 사려는 인파가 한 줄은 광화문 네거리까지, 또 한 줄은 덕수궁까지 뻗쳐 있어 극장 안은 초만원이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이런 판국에 입장권도 구하지 못한 내가 국립극장에 입장하려고 덤볐으니 반세기가 지난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오직 향리(통영)에서 청마 선생님의 말씀만 금과옥조로 믿고 무작정 상경했으니 말이다. 청마 선생님의 말씀은 "동랑 형님께 편지로 말씀드렸으니 용산 갈월동 형님 댁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갈월동 동랑 유치진 선생 댁으로 찾아뵈었더니 내외분 모두 외출 중이시고(아마 두 분 다 국립극장 개관 때문에 그즈음 무척 바빴을 것이다) 득현(동랑의 장남. 현 서울예술전문대학 재단 이사장. 당시는 중학생) 씨가 말하기를 "극장 현관에 가면 김상호 씨가 있을 테니 그분께 말하면 입장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척이 천리라고 극장 현관문이 저만치 빤히 보이는 거리였지만 하도 사람이 많아 오늘 저녁 입장이 가능할지 그것조차 의심스러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바로 내 앞에서 키가 조그마한 중년신사 한 분이 자꾸만 팔뚝시계를 쳐다보면서(그 당시는 팔뚝시계가 요즘처럼 지천으로 많지 않았다) "이거 야단났는 걸"하고 중얼거리시는데 분명한 경상도 악센트가 아닌가. 그래서 그분보다는 거의 두 배(?)에 가깝게 키가 큰 내가 넉살좋게 그분께 말을 걸었다.


"선생님 혹시 고향이 경상도 아니십니까"하고 여쭈었더니 "내 고향은 마산이네 자네는?" "저는 토영(통영의 동음생략)입니다. 동랑 선생님이나 서남실 선생님을 뵈올까 하고." "그래 어찌 왔는가?" "원술랑 공연을 보기 위해서 불원천리 달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자네 혹시 동경학생예술좌(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연극단체로 이해랑 김동원 이진순 씨 등도 같은 동인이었다) 출신의 김용기 씨를 아는가" "알다뿐이겠습니까? 제 스승이십니다." 


그리하여 온재 선생과 나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 뒤에야 안 일이지만 그날의 공연 단체인 '신협'(신극협의회의 약칭 대표 유치진, 간사장 이광래)의 간사장을 맡고 계시던 <촌선생>의 극작가 이광래 선생이 바로 그분이셨던 것이다.


갑자기 이광래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해졌다. 오동동야화 2편에 그 만남 후속편이 나오나 싶었더니 아니다. 온재 선생이야기는 4편에서야 나온다. 그래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꽃혀 있는 <경남연극인물사1>을 꺼냈다. 한국연극협회 경남도지회가 발간한 책이다. 77쪽에 이광래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상남도 마산 출신. 사회사업가 이상무의 아들이며 동요작가 이일래의 아우이다. 1928년 배재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다녔으나 3학년 때 중퇴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자로 있었다.


1932년 마산 최초의 극단 <극예사>를 창단해 연극에 첫발을 디뎠다. 1934년에는 극단 <표현무대>를 창단해 <지하층의 미담>(1막)을 공연했으며 신파극단 <황금좌>에 입단해 전국은 물론 만주까지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1935년 서울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희곡 <촌선생>(3막)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극작가로 데뷔하였다.


일단 이정도. 이광래 선생이 동요 <산토끼> 작가 이일래의 동생이란 점에서 깜짝 놀란다. 창녕 산토끼 노래동산에 가면 이광래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접할 수 있겠다 싶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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