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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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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균 선생의 오동동야화 마지막회.36회로 끝났다. 건강상의 이유였다. 온재 이광래와 월초 정진업. 정진업의 이야기는 아직 남은 듯도 한데... 한현주가 서울에서 어떻게 배우로 성공하는지 궁금했는데... 혹시나 해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봤는데...자료가 나와 있지 않다. 월초의 향후 약력을 보면 주로 마산서 활동을 했는데.. 서울 간 한현주는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을까?

그것도 그러려니와 월초 다음 차례가 화인 김수돈 이야기인데... 제법 재미있는 일화가 있을 법한데 더 접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현주의 정체를 알게 되자 '통영협성학원'의 재단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특히 염진사(구한말 과거에 진사로 합격한 통영의 대원로)를 비롯한 유림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무배(巫辈)들이나 하는 연극을 한다는 것도 마땅치 않았는데 거기다 화류계 여자와 동거하면서 그 여자와 함께 연극을 하겠다니 될 법이나 한 말이냐? 안되고 말고!" 이러한 유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힌 문화계 인사들, 그 중에서도 김용주, 김용기 형제를 비롯하여 박재성, 장하보, 유지환 등 이른바 양반의 집 자제들이 앞장서 간청을 한 것이다.


이에 중년층을 대표한 김채호(초대 통영읍장 김용식, 외무장관의 선친)와 청년층으로서는 노인네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이정규(초대 민선통영시장) 등이 나서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설득하려 했지만 유림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광복이 된 뒤에야 알려진 이야기지만 '일본어 연극'이라는데 유림들의 반감이 더 컸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연극도 수포로 돌아가고 월초도 통영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간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기로 하자.


"나는 어느덧 탕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이단자가 되어 있었다. 문학과 연극을 하는 선후배들이야 한자라에 모여 리허설도 하고 때로는 술시중을 들게 하면 같이 놀 수 있는 처지였지만 학원 운영자측, 특히 나이 많은 유림층에서는 막무가내였다. 아이들에게 영향이 미칠 것이니 추방해야 된다는 일부 주장이 우세하여 나는 일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 학원에서 쫓겨 나오고 말았다."('세정무정'에서)


그리하여 풍광명미한 한국의 나폴리 통영을 떠나면서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첫째는 현주를 먼저 서울로 가게 하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타이르고 구슬렀지만 여자 특유의 민감한 신경으로 현주는 다시는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몇 번이고 울면서 다짐을 받는 것이었다. "배신을 하는 날에는 당신도 죽이고 나도 죽을 것이라고..."


2~3일 후 현주를 서울로 보내고 허약해진 몸을 다스리기 위하여 두 번째로 마산의 부모 곁으로 돌아가 약을 먹기로 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지금의 KBS 정동에 있었던 제2방송국 아동극 원고 모집에 당선되었다는 통지서가 와 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월초의 마음에 한줄기 광명의 빛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상금도 탈 겸 몸이 수습되는 대로 서울로 떠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극의 바다'에 뛰어 들리라고 다짐하고 다시 서울로 갔던 것이다.


※작가의 건강사정으로 시리즈를 이번회로 마감합니다. 차후에 기회가 되면 다시 연재토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에 세워진 정진업의 '갈대' 시비


갈대


모래밭에 묻어 놓은

물새의 노래는

영영 몰라도 좋은 것이 있었다


바람이 일면

바람 같은 심사

사색을 쫓고


스스로 시익시익

그이의 모기치마 여미는 소리로

울어야 하였다


지금은 열다섯 소녀 하나

울면서 항구로 간다고

사공의 넋두리에

열이 오르는데


낙동강은 돌아선 채

태고 그대로인 바다로 가는 것을

그는 잠자코 보고 있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내가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어서 월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나 종종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된 터라 무책임한 남자의 못난 모습 정도로 여기는 장면이 바로 열애 중에 이유없이 떠나는 남자의 모습이다. 현주가 그렇게 좋아 자신의 집에까지 드나들게 했다면 부부나 다름없을 터. 어머니가 반대한다고 이웃에 대한 체면 때문이라고... 핑계가 마뜩찮다. 어머니야 아들이 술집 여성과 장래를 약속한다 하니 눈이 뒤집힐 수 있다. 그 또한 자기가 극복해야 할 부분이고. 헌데 이웃 눈치를 본다 정도면 정진업의 현주에 대한 진정성은 믿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진영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통영으로 학원 선생이 되어 간다하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현주는 다시 만나게 될까.





현주가 무슨 사연으로 남녘 바다가 있는 마산의 유흥가에 등장했는지는 몰라도 현주가 술이 취하면 "이제 지내고 보니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그때는 왜 그렇게도 가슴 저리고 뼈를 깎는 고통이었던지" 하며 술잔을 기울이더라고 했다.


당시로서는 고녀(오늘의 여고) 출신만 돼도 신여성 인텔리로 치부되던 시절에 한국 명문 사학의 하나인 이화여전 출신이고 보니 그녀의 눈은 자연스레 연극을 공부하고 문단 데뷔의 딱지가 붙어 있는 월초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거기다 청년 월초는 누가 봐도 탐낼만한 헌헌장부인데다 우람하면서도 이목구비가 반듯했으니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황폐할대로 황폐해진 현주의 가슴에 월초의 출현은 그야말로 '봄비'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 사랑의 '진도'는 초고속으로 발전되어서 "서재라고 꾸며놓은 내방에 현주가 드나들면서부터 금단의 과실은 따먹어버린지 오래가 되었고 어머니의 반대(돌아가신 아버님은 너그러우셔서 못 보신체 해주셨지만)와 이웃에 대한 체면으로 그런지 두 달만에 내 혼자 마산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물론 현주는 알 까닭이 없었다. 장래를 약속한 바는 있지만 같이 떠날 처지는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주의 영업시간을 기다려 궐녀(그녀를 낮춰 이르는 말)를 보내놓고 이내 밤차를 탔던 것이다."(부산일보 <세정무정>에서)


도망치듯 마산에서 진영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현주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월초는 시달려야 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장 진영은 월초를 반겨주었다. 소꿉친구들과의 재회에서 '현주와의 사랑' 때문에 번민하던 갈등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한 달쯤 뒤 지금의 통영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통영협성상업학원'에서 교사로 취임하라는 통보가 친구 편으로 날아든 것이다. 그리하여 본의아닌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부임지인 통영으로 가게 된다. '통영협성상업학원'은 당국의 정식인가를 얻지 못한 채 유림을 비롯한 여러 유지들이 재단을 형성하고 그 재단에서 운영하는 중학교 과정의 두 클래스짜리 사설학원이었다. 직원이래야 교장과 월초 그리고 청지기 한 사람 모두 세 사람뿐이었다. 그런데도 월초에게는 평생동안 잊을 수 없는 가지가지 추억이 서린 곳이 돼버렸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월초가 문단에 데뷔하여 금의환향한 이야기. 무엇보다 월초가 관심을 보였던 한현주라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글을 베껴 쓰면서도 그가 경남연극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한하균 선생이 주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 궁금하다. 문득, 현재 경남연극인들 중에 이런 이야기로 관심을 끌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일정 말기인 1930년대 말, 우리 나라의 유일무이한 문학전문지인 <문장>에 그렇게도 간절히 소망하던 문단 데뷔의 일차 관문을 통과하게 되자 월초는 그리운 고장 마산을 찾아와 온 시중을 휩쓸고 다녔다.


그 당시 마산 시중이래야 신마산은 70% 가까이가 일본인이 모여사는 신시가지였고 구마산은 거의 전부가 한국인이 취락하여 사는 보수색이 짙은 마을이었다. 다만 오동동만이 술집이 많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노랫가락과 신판 유행가가 뒤섞인 이른바 '안방술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른바 술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초장술은 북마산에서 마시고 거나해지면 카페 '공작'과 '은하'를 찾아들게 마련이었다. 당시 마산에는 카페라고는 앞에 말한 두 곳뿐이었다.


지금 남성동 파출소 앞에 제일은행이 있고 그 제일은행 뒤편에 부림시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 왼편에 아주 조그마한 골목이 있었고 그 골목 초입에 '공작'(옛날 미도식당 자리), 그리고 그 건너편에 '은하'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래가 촉망되거나 그 미래가 보증된 사람의 주변에는 으레 술 친구가 모여들게 되어 있는데, 월초 자신의 말대로 '보증이 붙은 문학청년입네 하고 선배들이 곧잘하던 데카당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 주변에 술 친구가 없을 리 없다. 그러니 자연스레 마산 최고의 신식 사교장인 공작과 은하에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했고, 그 중에 은하의 요정 현주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한현주. 그녀의 본명은 모른다. 술이 거나해지면 월초는 스스럼없이 옛일을 다 털어놓으시면서도 끝까지 그녀의 본명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그녀의 명예를 위해'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녀가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서울의 풍문고녀(요즘의 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이화여대의 전신) 문과를 졸업한 아가씨라는 것만 밝혔다.


부산일보에 발표한 <세정무정(世情無情)>에서 이화여전 중퇴라고 쓴 것은 그녀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뜻에서였고 재학 당시 '메이퀸(5월의 여왕)'으로 뽑힌 적도 있는 재원이라는 것이다.


"이건 자네만 알아야 해"하고 몇 차례나 당부하신 뒤 "이화여전 연극반이 공연했던 체호프의 <3인자매>에 '아주 중요한 역할'(역시 역명을 밝히면 그녀의 신분이 노출되니까)로 출연했던 연극 광(狂)이었어"라며 처연하게 회상하시곤 했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신극이 유행하고부터는 신파극은 신극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겐,말하자면 경멸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무용을 하는 김해랑마저도 정진업이 혁신단을 따라다니자 나무라며 하는 말이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풍작쟁이가 될 텐가" 했다 하니 말이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의 박수를 이끌어내던 신파극의 독특한 플롯 구조가 당시 관객에게 먹혀들어갔을 터이다. 암튼 김해랑의 소개로 정진업은 이광래를 만나게 되나 보다.



극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은 뒤 이듬해인 1935년 이른 봄에 전기 천적막이 다시 불러 갔더니 역시 '극예사'란 간판을 걸고 소인극단체를 만들어 영남 일대를 순회공연하는 것이었다.


공연 작품은 월초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다. "창피하게도 옛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공연했던 <육혈포강도> <사나이답게 싸워라> 등이었다."


여기에서 연극인 정진업으로서는 치명적인 나쁜 버릇이 생겨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무대 위에 서기만 하면 무의식 중에 발작해버리는 참으로 안 좋은 버릇이다. 그것은 바로 '쿠세'라는 일본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연기자마다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월초에게는 '신파근성'이라는 못된 버릇을 지니게된 것이다.


대체로 좋은 연기를 하려면 언제나 주제의식을 머리 속에 머금고 상대 역과 호흠을 맞춰야 하는 법인데 리허설할 때는 앙상블을 잘 맞추다가도 무대에 서면 자기 혼자만 관객(물론 저질관객이다)에게 박수세례를 받는 신파 연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대본을 미리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맡은 역의 대사만 받아서 연습했기 때문에 생기는 숙명적인(?) 부담이다. 이런 버릇은 '사랑하는' 제자와 공연할 때도 어김없이 발작(?)했다. 


1962년 12월 하유상이 쓰고 필자가 연출한 <고래>를 공연할 때도(이 대목은 후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주인공 고래 역은 월초가, 상대역인 화산댁 역은 조두이 여사가 맡았는데 평소 사생활에서나 리허설 중일 때는 제자인 조두이 여사를 남이 보면 부러워할 만큼 존중하고 아끼시던 분이 무대에만 서면 전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필자가 막이 내린 뒤 대선배이신 월초에게 대들라치면 "한군, 다시는 오버 액션 안 할게. 한번만 잘 봐 다우"하고 사정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나쁜 버릇도 처음 연극을 배운 데가 신파극단이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거의 일년 쯤 김삿갓처럼 방랑생활을 하던 중 마산으로 돌아와보니 경남 무용계의 개척자 김해랑 선생이 기다리고 계셨다.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아니면 풍각쟁이가 될 텐가?"

"어디 좋아서 유랑 극단에 따라 다니겠습니까?"


그제서야 김해랑 선생은 "내 친구 홍근(광래)이를 소개해 줄테니 서울로 가보게"하고 간곡히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6년 9월에 드디어 서울(경성)로 가게 되는 것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도하 각 신문에 '무작정 상경'이란 말이 거의 날마다 기사화되었듯이 월초도 그야말로 무용가 김해랑의 소개장 하나만 달랑 들고 이광래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사람이 성장하면서 아무래도 학창시절에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듯하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5, 6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기도 했지만. 월초 정진업 역시 마산상고 시절 만난 일본인 선생 마즈마데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면 그의 전공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어쩌면 성향도 닮는 듯하고. 아즈마데카라가 아나키적 성향이 있었다고 하니 앞으로 월초의 행보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지도 유심히 읽어봐야겠다.




1929년 4월  (당시는 신학기가 4월이었다) 월초는 5년제인 마산상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요즘에야 거의 대부분 학부모들이 자식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아 잘 기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별로, 아니 거의 지망하지 않고 있어서 중부 경남을 대표하던 마산상고가 옛 영화(?)를 못 찾고 있지만 월초가 입학하던 1930년대 초반기에는 수재들이 운집하던 때였다.


더욱이 가능하면 한국인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 온갖 잔꾀를 부리던 일제강점기였기에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혀있던 서민층의 한국인에게는 부산의 부산상고와 함께 마산상고가 유일한 등불이었다


따라서 지금 60대 중반 이상의 연령층에 있는 마산상고 동문들의 자긍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 그럴만도 했다. 우선 정계부터 살펴보면 황낙주(전국회의장), 우병규(전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김우석(전 건설부장관), 백찬기(전 국회의원), 김정수(국회의원) 씨가 이 상고 출신이다.


경제계에도 많다. 벽산그룹의 창시자 김인득, 이해규(삼성중 대표이사), 이철수(전 제일은행장), 이춘영(전 경남은행장), 배종열(한양그룹 회장) 등이 있고, 법조계에도 주선회(광주 고검장), 김성찬(부장검사)과 학계의 김윤식(서울대 교수 평론가), 정노팔(연세대 교수)임철규(연세대 교수) 등이 있다.


예술계에는 이광석(시인), 최원두(시인), 조병무(평론), 황원철(창원대 교수 화가) 등이 있다. 이외에도 언론계의 이순항(경남도민일보 대표), 이문행(경남신문대표), 그리고 씨름하면 누구나 떠오르게 마련인 이만기, 강호동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제제명사를 배출한 명문학교가 마산상고인 것이다.


월초도 마산상고 출신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인생의 방향타를 결정하게 한 사람이 마산상고를 입학하면서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한 아즈마데카라(東功) 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스승이다.


대개의 경우 일본인 이름은 4자 내지 5자로 되어 있고 한국인 이름은 3자로 되어 있게 마련인데 이분은 한자로 2자였기 때문이다. 월초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알맞은 특이한 이름의 동공이라는 스승은 문예 담당선생이었다.


히로시마 고등 사범법학교(이 학교는 일본 유수의 사범대학 중의 하나였다) 출신답게 명석한 머리와 정확한 판단력을 겸비했으면서도 결코 어떤 틀에 얽매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자유주의자였다. 수업시간에도 신국 일본(신이 일본을 세웠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이론)의 허구성과 허망함을 설파하는가 하면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사상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1920년대 일본 열도를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대하여 일가견을 말하기도 하는 괴짜 선생이었다.


이 괴짜선생을 흠모하고 따랐기 때문에 월초의 학생시절의 닉네임도 '괴짜'라는 뜻의 변태성이었다. 이유는 연극 음악 영화 등 다방면에 취미가 많아 장르가 바뀔 때마다 그 장르에 몰입해 버리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으로 잘 변한다하여 악우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연재들 모두에 언급한 대로 한하균 선생이 정진업을 만났을 때 장면이 기억난다. 소설가로 등단해 시인이기도 했던 연극인 정진업이 한하균 선생의 시낭송을 듣고는 나 말고 시를 낭송할 줄 하는 이가 있네 하면서 농을 건네고 심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충고를 주는 장면. 혹시 한하균 선생은 당시 너무 유명인들 앞이라 떨려서 자연스레 바이브레이션이 나왔던 것은 아닐까.. ㅎㅎ 추측일뿐. ㅋ~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연극인, 이 타이틀이 마음에 든다.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 이야기로 접어든다.


월초 선생은 골목대장이었다. 아명은 쇠돌이다. 무쇠처럼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에서 할머니께서 지으신 이름이란다. 진업은 호적상 이름이고 월초는 향파 이주홍 선생께서 부산일보 문화부장 시절에 지어주신 아호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16년 4월 19일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743번지에서 부친 동래 정씨 세룡과 모친 김해 김씨 정해 사이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진영면(당시는 면이었다)의 정식 공무원도 아닌 촉탁의 자리에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빠듯한, 가난하지만 선량하고 고지식한 말단 공무원이었다. 그러기에 월초는 끼니때마다 초라한 밥반찬에 죄없이 미안하고 죄송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하여 도랑에서 천렵을 하기로 마음 다진 것이다.


한 여름의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하계방학 중이었다고 한다. 보통학교(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초등학교로 됨) 4학년이던 월초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쇠돌이답게 또래들 가운데서는 체격이 우람하고 의협심도 강해 자연스레 골목대장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거느리고 푸짐한 생선 반찬을 미리 연상하면서 개울가에 진을 치고 작업을 개시하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할 그물이 준비 불충분이었다. 사연인즉 그물 대신 방충망을 가져왔는데 그 방충망에 대꼬챙이를끼워야 어로작업을 할텐데 대꼬챙이가 없는 방충망뿐이었다.


이에 골목대장의 엄명이 하달된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꼬챙이를 끼워 완전한 그물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훔칠 틈도 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독사에게 물린 것이다. 소년 월초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상처 윗부분에 헝겊을 찢어 힘껏 동여매고 서슴없이 독을 입으로 빨아내고는 업고 달렸다.


"10리가 훨씬 넘는 그 머나먼 길을 어떻게 뛰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가 없지만 그 아이를 병원 베드에 눕혀 놓고는 나 자신이 기절을 하고 만 거야." 안경 알을 닦으시면서 유년시절을 회고하며 "간이 콩알만 했다"고 술회하신 적이 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려고 했던 일이 오히려 가난한 아버지의 부담만 짊어지게 만든 이 사건은 어린 마음에도 상당한 상처를 남겼던 모양이다.


때마침 학계경진대회가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스스리카타(작문)' 장르에 출품하여 월초가 김해군에서 수석으로 입선하게 되었다. 글 제목은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효심을 바탕으로 한 개울가의 천렵 이야기, 다시 말해서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그때의 이야기를 글로 엮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골목대장의 문재(文才)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피해(?)를 입힌 결과가 되었지만, 아버지 어머니께 환한 기쁨을 드리게 디어 흐뭇했었다고 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마산 연극의 선구자들이랄 수 있는 이광래, 김수돈, 정진업 이런 사람들이 극단 민예 활동 중 일어난 일화.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번씩 거짓말로 상대를 골려주고 했을 것 같다.




이광래·김수돈·정진업에 얽힌 일화다. 8·15광복의 기쁨이 미처 가시기도 전인 1945년 세모가 가까운 어느날 충남 강경에서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강경은 유동인구가 정주보다 훨씬 많은, 그래서 상품거래가 많았던 곳이어서 권번(기생이 대기하면서 요리점에서 부르면 주변에 나가기 위하여 여러 가지 예절과 춤과 노래를 교습받던 곳)도 있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윤택했다.


강경에서의 공연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도 없는 초만원을 이운 가운데 무사히 끝났다. 막이 내린 뒤 분장실로 돌아가 보니, 월초 정진업에게는 그곳의 권번에서 정중히 초대한다는 전갈이 와 있었다. 사실 크레이그가 말한 대로 '연극은 연출의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연극에서의 연출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인 존대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연출 따위야 아랑곳없고 주연 남우나 주연 여우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월초에게만 초대가 있었던 것이다.


월초는 연출가 이전에 고향의 선배요, 친구인 온재와 화인에게는 살며시 행방을 알리고 초대에 응했다. 월초를 홀로(?) 보내놓고 온재 선생을 모시고 대폿집에서 쓸쓸히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화인은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찮았다. 그래서 화인은 온재 선생을 모시고 월초가 초대받은 요정으로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진업, 진업(화인은 언제나 월초를 그렇게 불렀다) 어디 있는가?" 몇 번을 불렀다고 한다. 월초는 꽃으로 둘러싸인 이 화원에 잡인(?)이 섞이는 것을 꺼려 못들은 첫하다가 하도 다급한 부름에 방문을 열고 내다 보니 "큰일 났네. 자네 부인이 위중하다는 기별이 왔네. 어서 가 볼 차비를 하게"라고 근심어린 표정으로 화인이 말하지 않는가.


그렇잖아도 병약한 신부를 고향에 두고 온 월초로서는 남모르게 은근히 걱정하던 차에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우직하리만큼 고지식하고 순수한 매혹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에다 헌칠한 키의 미남 배우인 월초의 눈망울에 눈물이 핑 번지는 것을 본 기녀들도 덩달아 입이 삐죽삐죽해지자 미리 화인과 약속이 되어 있던 온재도 한마디 거드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아침 고향에 다녀오게. 자네가 맡은 역은 내가 대신 함세..." 라고 말하자 월초는 황송해 하면서 굽신굽신하는 것이었다. 기녀들이 보아하니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 있다더니 그렇게 선망하고 존경하고 사모하던(?) 주연 배우를 명령하고 타이르는 연출 선생(두 사람 다 체구는 작았지만)의 존재에 새삼스레 경탄과 존경의 뜻을 나타내면서 술잔을 권하는 것이었다.


새벽녘이 이슥해서야 숙소(여관)로 돌아온 뒤 그간의 경위를 알게 된 월초가 화인을 때려죽인다고 또 한번의 희극(?)이 연출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쨌거나 곡절 많은 해방 직후에 극단 '민예'는 제 목소리를 꾸준히 외치다가 전술한 바와 같이 프락치 사건 때문에 1947년 11월에 문을 닫고 말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