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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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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으로 간 월초로선, 당시는 자신이 어떤 인연이 맺어질지 상상도 못했겠지만 학원 선생을 맡았던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을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월초가 있는 학원의 교장이 일본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떠났는대 대한 교장으로 온 사람이 청마 유치환이었던 것이다. 유치환과 파트너가 되었으니 그가 놀 물은 반은 정해져버린 것일 터이다. 물론 월초가 오늘날에 기록으로 남겨질 인물이기도 하지만 당대 그가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역시 문화활동은 노는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하겠다. 김용기, 전혁림, 윤이상, 유치환...




통영에 서린 추억의 첫째는 교장이던 김욱주 박사(동영제대 농학부 줄업, 초대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동아대학교 대학원장 역임)의 따사로운 인격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언제나 너그러우면서도 절도있는 생활 리듬을 깨뜨리지 않는 스포츠맨(동경제국대학 테니스 대표선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600평이 넘는 넓은 저택에 수천권이 넘는 장서를 즐비하게 갖춰놓고 독서하다 지치면 밖에 나가 운동하고, 운동하고 돌아오면 아내(진주 일신고녀-진주여고 출신)가 끓여온 차를 마시며,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말하자면 그의 꿈같은 생활이 부럽다 못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 박사의 부친은 통영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판사 출신의 변호사요, 갑부였기 때문이다. 김 박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둘째는 청마 유치환 사백(詞伯 학식이 높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월초가 부임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앞에 말한 김 교장은 동경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떠나고 후임으로 청마가 부임한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연극과 산문을 공부하고 있었던 때라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서정시에서 특히 언어의 시성을 탐구하려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청마 사형의 시집(청마시초)을 모조리 읽고, 적잖은 감화를 받기도 하였다.(부산일보 '세정무정'에서)고 술회하고 있다.


셋째, 연극의 선배와 동료를 만나 견문을 넓히고 보다 높은 차원의 연기 공부를 하게된 것이다. 당시 통영에는 참으로 기라성 같은 대 배우와 연출자가 많이 있었다. 


박정섭(나운규의 아리랑과 벙어리 삼룡이 등의 영화에 성격배우로 활약함), 서성탄(일본 축지소극장 출신의 연극인, 동랑 유치진과의 인연으로 통영에 정착함), 김용기(동경학생예술좌 출신의 연출자, 이해랑·김동원 등과 동인), 김아부(후기 토월회 출신의 연기자), 최배송(동양극장 출신의 연기자) 그리고 극작가 박재성 등이 거의 날마다 모여 토론하고 숙식을 같이 하는 날이 많았다.


물론 그 비용은 3000석 지주의 둘째 아들 김용기가 도맡다시피하였지만, 거기에다 무대장치를 맡아 협력을 아끼지 않은 화가 김용주(오늘날의 국전 전신인 '선전' 특선 작가), 전혁림(국전 특선작가)과 효과를 돌봐 줄 작곡가 윤이상, 정윤주와 시인 유치환, 시조시인 장용두(하보) 등이 가세하였으니 월초로서는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정진업이 서울로 연극 공부를 하러 가서 만난 사람이 유치진과 홍해성이라고 한다. 물론 이광래가 내쳤더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인연이었겠지만, 어쩌면 번역 일을 하면서 '극예술연구회'가 주최한 강습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여간 다행한 일은 아니었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들여다 보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겠다 싶다.




월초가 서울에 갔을 때의 광래는 극작가로서보다도 오히려 문화부 베테랑 기자로 더욱 명성이 높았을 때였다. 광래는 연극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고향 후배를 매몰차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우선 검열대본 번역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말로 연극을 할 수 있을 때였는데(왜정 말기에는 일본말로 대사를 주고 받아야 했으니까) 우리 나라 작품을 조선총독부 산하의 관청에서 공연 허가를 얻으려면 일본말로 된 대본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일본 관헌이 읽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광래는 이 일을 주선해 진업에게 맡기면서 그의 호구지책을 우선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작품(희곡)을 접함으로써 연극의 세계에 입문시키려 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연극계 인사들과 얼굴을 익혀 안면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다행히 월초에게는 문재(文才)가 있어 광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문장력을 발휘하여 각 극단에서는 웬만하면 월초에게 번역 일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문필 업'은 생활과는 먼거리에 있었다.


한 작품 번역해보아야 한 달치 하숙비가 될똥말똥하는 그런 싸구려 수입뿐이었다. 이러한 번역하는 일로 극단 주변에서 약 1년쯤 지냈을 때인 1937년 11월 '극예술연구회'의 실천부(극예술연구회는 크게 연구부와 실천부로 나뉘어 있었고, 전자는 실험무대를 두고 또 후자는 강습회 등을 통하여 새로운 연기자 양성과 연극의 중요성과 함께 스태프의 각 분야별 전문 강의를 맡아 하고 있었다) 산하 강습회 회원으로 수강하게 된다.


이 강습회에서 몇 달 동안 강의를 받던 중 가장 인상적인 과목은 동랑 유치진의 <연기론>과 홍해성의 <무대론>이었다. 유치진은 너무나 유명한 극작가요 연출가니까 새삼스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홍해성에 대하여 잠시 언급해 두고자 한다.


홍해성은 극예술연구회 동인(해외문학파)들보다는 약 10년 선배로 소년시절부터 일본 신극의 요람인 축지 소극장에서 일본 신극의 개척자 오사나이 카오루에게서 신극의 무대 기술과 연기를 배우고 익혀 귀국하여 한국에 이식한 신극계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오동동야화 28화. 원본엔 26화 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번호를 잘 못 매겼다. 월초가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연극계로 진출한 이야기. 그런데 마산의 첫 신극 단체라 할 수 있는 '극예사'가 처음엔 김여찬, 이훈산 등의 아나키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혁신단 신파극 출신의 천전막이 맡으면서 친일로 흘렀다는 얘기에 가슴 아프다. 또 학교 졸업하고 그저 연기만 하고 싶은 마음에 천전막의 극예사에 들어간 정진업의 운명도 안타깝고. 결국 극예사는 돈이 없어 문을 닫고 마는데...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간교한 모습이 읽힌다. 반 일제 성향의 극단을 친일 인사가 인수하게끔 해놓고 결국 그마저 활용가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이런 일본 제국에 속아넘어간 어리석은 인간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만.... 오늘날에 와서도 그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는 정치인들이 있으니 뭐... 할말이 없다.




1934년 3월(당시는 학년말이 3월이었다)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한 월초는 처음으로 사회의 냉엄함을 체험하게 된다.


"졸업을 하자 금융조합의 서기 시험을 치러 갔지만 멋지게(?) 낙방을 하고 돌아왔다. 부모님의 압력에 못이겨 갔었지 나의 본의는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문학이나 예술을 전공하는 학업을 지속하느냐 하는 그 일념뿐이었다"('나의 문단 올챙이 시절')고 말한 바 있듯이 꿈과 현실과의 괴리를 메우지 못하고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른바 '고등룸펜' 생활을 반년쯤 했을 때의 일이다.


그러다가 1934년 10월에 '극예사'에 입단하게 된다. 극예사는 전술한 바 있듯이 1932년 7월에 창당된 마산 신극 최초의 극단인 셈이다. 창단 당시는 주동자가 김여찬, 이훈산 등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매료된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그 공연 작품들은 자연스레 일본 제국에 대하여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기록으로는 구체적인 레퍼토리가 남아 있지 않지만 서너 차례의 공연 중 공연 중지가 두 번이 있었다니 말이다. 그런데 월초가 입단했을 때는 전기 김여찬, 이훈산(훗날 옥사했다고 함) 등은 떠나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신파연극을 하던 천전막이 대표가 되어 극단의 색깔이 친일로 변색되어 있었던 무렵이었다.


옛날 뜻을 같이 했던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아 있는 몇 사람과 이리저리 급하게 모은 사람들로 연기진을 구성하는데 월초에게 주어진 역은 '일인이역'의 단역(연기진을 3대별 하면 주연, 조연, 단역으로 나뉨)이었다. 하나는 개막과 함께 등장하는 전보배달원 역이었고 또 하나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상점점원 역이었다. 그런데 (월초는) 그 작품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여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처럼 리허설에 들어가기 전에 작품(대본)을 연기자에게 미리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맡은 역의 대사만 적은 쪽지를 나누어 줬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요즘의 한 작품 공연 과정을 간략히 설명해 보면 '스태프 및 연기진에게 대본 나눠주기→연출회의(작품의 주제와 성격과 분위기와 색깔을 토론하고 각 스태프에게 지시한다)→액션(대사에 따른 동작연습)→총연습(공연과 꼭 같이 무대 위에서 조명·효과장치 등을 마련해 놓고 연습함)→공연' 대체로 이런 순서가 되겠는데 옛날 신파 연극 시대에는 경비를 절감한다는 이유 아래 액션 연습 몇 번 하고 바로 공연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사 연습 따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자 연기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월초도 작품 제목과 주제도 모르면서 액션 연습 두어 번 하다가 극단이 경비난으로 해체되고 마는 비운을 겪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학생 신분을 속이고 영화관에서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한 월초 정진업의 성숙함이 오늘 이야기의 초점인 것 같다. 이 이야기만 봐도 월초가 얼마나 정열적인 인간형인가 가늠하게 된다.



월초는 또한 왕성한 탐구욕의 소유자였다. 그 탐구욕의 소산이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마산상고에는 전술한 아즈카 데카라 선생 이외에도 고다마, 시카사마 등 두 분 선생이 더 계셨다.


고마마 선생은 <관원도진>이라는 희곡 작품을 발표할 정도의 문인이었고, 시카사마 선생은 영어선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 가끔 세계 명작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아일랜드 작가인 싱그와 오케이시 등의 작품을 통하여 영국 지해하의 아일랜드 사람들의 독립의식을 밝힘으로써 은근히 한국인에게도 독립심을 강조하기도 했던, 일본인으로서는 이단자구실을 서슴지 않았던 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음껏 섭취한 영양소(?)를 바탕으로 월초 선생은 마산성고 교지에 <가지>라는 첫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경남도문예전시회에 입선되어 지사의 표창을 받았다. 학우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자 문학에만 매달려 있을 월초가 아니었다.


극장에까지 진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1930년대 초)는 일반인의 의식수준이 낮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외국영화를 상영하려면 영화 상영에 앞서 해설자가 먼저 관객 앞에 나서서 그 영화의 핵심 줄거리와 함께 주연 배우의 연기까지도 미리 간략하게 해서래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내레이터를 용돈 몇 푼 받고 맡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극장, 창동에 있던 '시민극장'의 옛이름이 공락관이요, 그 공락관의 앞선 이름이 고도부키좌였다. 이 고도부키좌의 내레이터로 월초 선생이 채용된 것이다. 시쳇말로 아르바이트라고나 할까. 물론 텍스트는 당시 발행되던 <에이가노 토모>라는 영화전문지였지만 거기ㅏ 월초 자신의 느낌도 덧붙여 말하게 되어 있었다.


그날의 상영 프로는 마르세르 카르네 감독의 <안개 낀 부두>인데 주연인 장가벵의 표정을 해설하는 대목은 참으로 천하일품이었다. 


"그 조용한 박력, 완만하지만 단순한 움직임, 엷은 입술에서 번져나는 빙와 공포의 그림자, 멀리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 눈망을에 감겨드는 서글픔, 그리고 철학서적이 한 권씩 깔리는 듯한 둔중한 걸음걸이를 관객 여러분은 특히 눈여겨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우레같은박수가 쏟아졌으믄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박수에 굿쟁이(연극인)는 언제나 신이 나는 것이다.


월초 선생이 한참 으쓱해진 기분으로 무대 뒤 분장실로 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있었다. 마산상고 훈육담당(오늘날의 학생부) 아라다 교사였다. 학생 신분이 탄로난 월초는 그날로 즉시 극장주로부터 해고당하였고 학교에서는 4주간 유기 정학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학생은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던 무렵이라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가 날마다 벌 청소와 근로봉사하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연재들 모두에 언급한 대로 한하균 선생이 정진업을 만났을 때 장면이 기억난다. 소설가로 등단해 시인이기도 했던 연극인 정진업이 한하균 선생의 시낭송을 듣고는 나 말고 시를 낭송할 줄 하는 이가 있네 하면서 농을 건네고 심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충고를 주는 장면. 혹시 한하균 선생은 당시 너무 유명인들 앞이라 떨려서 자연스레 바이브레이션이 나왔던 것은 아닐까.. ㅎㅎ 추측일뿐. ㅋ~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연극인, 이 타이틀이 마음에 든다.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 이야기로 접어든다.


월초 선생은 골목대장이었다. 아명은 쇠돌이다. 무쇠처럼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에서 할머니께서 지으신 이름이란다. 진업은 호적상 이름이고 월초는 향파 이주홍 선생께서 부산일보 문화부장 시절에 지어주신 아호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16년 4월 19일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743번지에서 부친 동래 정씨 세룡과 모친 김해 김씨 정해 사이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진영면(당시는 면이었다)의 정식 공무원도 아닌 촉탁의 자리에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빠듯한, 가난하지만 선량하고 고지식한 말단 공무원이었다. 그러기에 월초는 끼니때마다 초라한 밥반찬에 죄없이 미안하고 죄송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하여 도랑에서 천렵을 하기로 마음 다진 것이다.


한 여름의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하계방학 중이었다고 한다. 보통학교(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초등학교로 됨) 4학년이던 월초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쇠돌이답게 또래들 가운데서는 체격이 우람하고 의협심도 강해 자연스레 골목대장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거느리고 푸짐한 생선 반찬을 미리 연상하면서 개울가에 진을 치고 작업을 개시하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할 그물이 준비 불충분이었다. 사연인즉 그물 대신 방충망을 가져왔는데 그 방충망에 대꼬챙이를끼워야 어로작업을 할텐데 대꼬챙이가 없는 방충망뿐이었다.


이에 골목대장의 엄명이 하달된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꼬챙이를 끼워 완전한 그물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훔칠 틈도 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독사에게 물린 것이다. 소년 월초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상처 윗부분에 헝겊을 찢어 힘껏 동여매고 서슴없이 독을 입으로 빨아내고는 업고 달렸다.


"10리가 훨씬 넘는 그 머나먼 길을 어떻게 뛰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가 없지만 그 아이를 병원 베드에 눕혀 놓고는 나 자신이 기절을 하고 만 거야." 안경 알을 닦으시면서 유년시절을 회고하며 "간이 콩알만 했다"고 술회하신 적이 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려고 했던 일이 오히려 가난한 아버지의 부담만 짊어지게 만든 이 사건은 어린 마음에도 상당한 상처를 남겼던 모양이다.


때마침 학계경진대회가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스스리카타(작문)' 장르에 출품하여 월초가 김해군에서 수석으로 입선하게 되었다. 글 제목은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효심을 바탕으로 한 개울가의 천렵 이야기, 다시 말해서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그때의 이야기를 글로 엮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골목대장의 문재(文才)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피해(?)를 입힌 결과가 되었지만, 아버지 어머니께 환한 기쁨을 드리게 디어 흐뭇했었다고 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오늘로써 이광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앞으로 다른 연극인 이야기에 엑스트라로 출연할 것이다. 연극동맹에 대항한 전력 때문에 인민국이 서울을 장악했을 때 피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끝내 유지했던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그의 작품 몇 개를 읽어보겠지만 한하균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작품에서도 그 성향이 드러난다고 하였으니. 또 민족주의가 세월을 타고 흐르면서 보수세력으로 정착화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겠다 싶다. 


이광래가 '연극동맹'에 대항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의 주구노릇을 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붉은 기를 들고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는 점을 들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선연극운동본부 결성 후 한 달만에 친일극 전력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1945년 9월 28일 나옹, 신고송 등이 탈퇴해 다시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을 결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다시 12월 연극본부하고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하고 통합해 조선연극동맹으로 재편됐다.(한국현대문학대사전) 


이유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통합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으로 재편했는데 이에 따른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이 건설본부쪽 애들과 그렇게 대립각을 세웠어도 더 큰 카테고리가 통합하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평생동안 염원하던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교육자요, 지도자였다. 1948년 서라벌 예대가 정식인가를 받기 전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1968년 타계하기 두 달 전까지 서라벌예대의 연극영화과 지킴이 교수와 동국대학, 서울연극학교(드라마센터) 등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강단에서 강의를 마다하지 않았던 까닭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것도 주먹구구식으로 연출하고 연기하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심리락, 민속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미학 등 남들이 모두 싫어하는 비인기 과목인 보조과학에 더 무게를 두고 강의했던 것이니, 이는 모두 연극인의 질적 향상을 염두에 둔 까닭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식이라든지 허세라든지 조작된 포즈라든지, 온갖 부수적인 사치를 배제하고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이해로써 사람을 대해주기 때문'(1971년의 <현대연극> 내 김상민의 '인간 이광래' 중)에 제자들의 존경을 받은 지도자였다.


또한 광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습작기의 작품인 <어막의 일야>를 비롯해 <지는 해>(34년) <촌선생>(35년) <석류나무집>(37년) <해질무렵>(37년) 등 초기 작품은물론 그의 40편에 달하는 거의 모든 작품 밑바닥에는 겨레사랑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8·15 직후 우리나라에 "쏘련 놈에 속지 말라. 미국 놈 믿지 말라. 일본 놈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하라"는 참요가 한때 유행했었는데 광래는 술이 거나해지면 "이 참요 속에 진리가 있단 말야?"하고 몇 번이고 되뇌이곤 했다고 한다.


어쨌든 광래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적색테러는 물론 백색테러와 철저하게 대항했던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온 나라의 연극계가 아니 어제까지 친일하던 연극인들이 '연극동맹'을 중심으로 하여 붉은 깃발을 휘두르고 있을 때 1945년 10월 오직 광래만이 민족예술무대(약칭 민예)를 조직하여 그들과 대항하여 싸웠다. 이때 북에서 피란 내려온 서북청년단(우익 행동부대)이 좌익의 테러를 막아주겠다고 나섰지만 이광래가 단연코 거절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도 6·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자마자 '연극동맹'에서는 유치진, 서항석 선생들을 색출하려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지만, 거기다가 이광래를 꼭 찾아내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날뛰는 판국이었다. 한강이 끊어져 도강할 수 없게 된 광래는 부득이 처가가 있는 경기도 여주 땅으로 피신하여 구사일생으로 악몽같은 90일을 견딘 것이다.


이제 그가 활약했던 이력을 정리해 봄으로써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한국문학가협회 이사 및 희곡분과 위원장(1965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57년), 한국연극협회 이사(1962), 대한민국문화포상 수상(1963), 대한민국예술원상(1967) 등등.


중천에 있던 해가 서녘하늘에 쓰러질 때는 찬란한 낙조를 남기듯 우리 연극계에 많은 일을 하고서도 별달리 야단스럽지 않았던 이광래 선생이 1968년 10월 29일 지병으로 타계하자 갑자기 우리 연극계는 한 기둥이 뽑힌 허전함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남녘을 바라보고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대로 지금 망우리 묘지에 묻혀 있는 이광래 선생. 그가 말한 남녘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고향 마산이리라.


/참고문헌: <온재 이광래 연구>(김홍우), <한국연극사>(장한기), <연극연감>(연극협회)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이광래의 업적이 나열된다. 사실주의 낭만주의 물결 속에서 '표현주의' 극을 이끌었다는 점, 극 중간에 또 이루어지는 중간극, 이것은 오페라 쉬는 시간(인터미션)에 공연되던 작은 오페라, 오페레타와 유사하겠다 싶다. 하긴 유럽에서 이 오페레타가 재미있는 극의 구성으로 오히려 오페라보다 더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지만. 여튼 그러한 장르의 극도 구상하고 소극장운동까지 펼쳤다고 하니 대단한 인물이다. 한국 연극 계보를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광래의 이러한 점은 현재 한국 연극계 거장 오태석, 이윤택, 손진책, 윤호진 이런 양반들과 비슷했겠다 싶다. 새로운 극을 실험하는 것만큼 창조적 희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그만큼 이광래는 거듭 말하지만 연극에 관한한 한치의 오차도 용납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불치의 병마(당뇨병)에 시달리면서 소극장운동의 세미나나 공연, 그리고 대학극의 초대에는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관극하고 합평회에 참석하여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연극에 미친(狂) 까닭을 광래 자신이 쓴 <나와 연극>(연극연감, 연극협회편)에서 찾아보자.


"내 울적한 감정과 격앙된 사상을 펼치고 떨칠 필드로서 연극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도쿄 고등학교(지금의 전문대학)를 나와 와세다대학에 재학시 공산주의 사상이 한창 판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반면 이것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백색테러가 반공인(公認) 아래 백주에 횡행하던 폭력시대였다. 이것을 보다 못해 분기한 것이 다가다노 마바의 학생침입이라는 유혈의 투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때 연좌(連坐)하였던 동지들은 5~15년의 판결 언도를 받았는데, 나는 연소자일 뿐아니라 학생이라는 이유로 빼돌려 주었다. 그러나 일본 관헌들의 눈은 나를 미행하다 못해 기어코 일본 땅에서 추방하고야 말았다. 귀국한 뒤에 축구경기장에서 결승전에 농민종맹(좌익계열)과 맞붙었는데 구기는 고사하고 사상적인 대립으로 집단 난투극의 수라장이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이것 때문에 소요죄에 걸려 감옥신세가 되고 말았으며, 반면 후에도 요시찰 인물로 하루가 멀다하고 유치장엘 드나들게 되었다. 나의 격앙된 심경은 결코 아폴론적으로 평온할 수는 없었다. (중략)그러다가 연극예술의 진수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동랑 유치진과 같이 (그는 행장극장을 만들어 민중계몽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일종의 공리적 목적에서 연극에 빠져들었지만 끝내는 연극예술을 꽃피우기 위하여 그 험난한 형극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나와 연극>에서 다음과 같은 글도 보인다.


"니체가 인생은 수난이 아니고 수난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했듯이 우리나라 연극사가 수난의 기록이 아니고 수난 그것이 바로 연극의 기록인 것 같이 내 인생이 연극인지 연극 바로 그것이 내 인생인지, 어쨌든 연극 가운데 내가 살고 내 가운데 연극이 살고 있는 한 내 인생은 수난 많은 인생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광래 스스로 말하듯 '수난의 기록'인 연극이었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그가 이룩한 업적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언제나 선구적 위치에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연출가요 극작가였다. 1930년 중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물결속에서 이땅에 처음으로 표현주의 무대를 형상화시키기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중간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연극을 탄생시키려고 온 정력을 다 기울였다.


또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극장운동을 개척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흥우(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 교수에 의하면 "그의 만년에 시도된 심포닉 드라마는 한국 고전음악기를 동원한 것으로, 한국 고전의상의 현대화, 이두 문자의 부활, 언어의 시각화 등을 시도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온재 이광래 연구)고 말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필자는 광래의 심포닉 드라마를 한 편도 관극하지 못해 낙향한 서글픔을 달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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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의 마지막 이야기일 듯하다. 1968년 사망 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광래에 대한 인상적이 이야기가 나왔다.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오랫동안 참여했는데, 한 번은 심사 노트를 변기에 빠트렸는데, 그 노트를 건지기 위해 똥을 다 퍼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건진 노트를 물로 헹궈내고 다른 노트에 옮겨 적기를 꼬박 하루동안 작업을 했다고 하니 성격이 독특하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나도 좀 그런 류의 인간형이긴 하다. 언젠가 한 번 한 시간여를 열심히 썼던 일기가 갑작스런 정전으로 날아가버렸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기록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에는 어찌 그리 애통하던지.



그런데 광래는 <기류의 음계>를 발표하면서 '작의'를 먼저 덧붙인 것이다. 약간 장황하지만 그의 실험정신을 탐색한다는 뜻에서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의식의 흐름이 오늘같이 혼잡한 때가 있었던가? 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잡다한 불협화음계가 소연한 가운데 현대의식은 갈피를 차리지 못하고 광망한다. 작자는 이러한 상황을 상징하여 '기류의 음계'라 정하였다. 그리고 '기류의 음계' 아래 이율배반적으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현대의식의 생태를 분석하여 의지적·정열적 변화의 경과를 내험하는 현대의식의 비장미를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구상화해 보려고 한다.(중략) 그러므로 의식작용을 화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의식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직관케 하기 위하여 작중 박환기의 인물을 3인으로 등장시켜 각각 지·정·의를 분탐케 하였다. … 실제인물로서 의식의 요소를 분탐케 하는 작의를 연출자와 연기자들이 잘 이해해주기 바란다."


8·15광복 전 현진건의 <무영탑>을 각색하면서 등장인물의 심상의 세계를 직관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시험해 본 바를 다시금 가다듬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한 것이다. 1958년 11월 18일부터 3일간 진주극장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물론 이광래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연출하면서도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자세로 온 정성을 다 쏟아부었으며, 특히 60년대 혜성처럼 나타났다 아깝게 요절한 탤런트 이우평 씨의 연기는 참으로 압권이었다."고 조연출을 맡았던 정인화 씨는 회고하고 있다. 


사실 광래는 일상생활, 특히 술자리에서의 생활태도는 거의 상궤를 벗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웬만한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약속을 해 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그런데 연극과 관계되는 약속은 아무리 취중이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도리어 혼이 나곤 했다.


가령 진주 영남예술제 때(1953년)부터 개천예술제로 이름이 바뀐 1968년 작고하던 그해까지 딱 한차례(54년에는 동랑 유치진 선생이 참석하셨다)만 빼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돌아가신 그해 1968년에는 서라벌예대에 병가(당뇨병)로 휴직원까지 제출해 놓은 상태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으며, 또한 10월 29일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열흘 남짓 전인 12일부터 16일까지 심사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버티신 이야기는 지금도 후배나 제자들의 귀감으로 전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사를 하실 때는 절대로 대충대충 머리로 하지 않고 심사노트를 바탕으로 하여 과학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 작품에 대한 심사 메모는 적어도 국판노트 56쪽을 넘었다고 한다. 이 심사 메모를 모아 놓은 노트를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다가 빠트린 일화는 지금도 연로한 진주예술인들 사이에는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그 오물을 다 퍼내고 건져서 깨끗한 물에 씻어 새로이 정리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이 위대한(?) 작업을 진두지휘하였던 당시의 예술제전 사무국장 한동렬 씨는 지금도 혀를 내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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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주현이 1958년 당시마산에서 김수돈 정진업 이런 양반들과 함께 공연을 했구나. 이즘 이광래는 드라마센터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동시 동국대 교수까지 맡아 자신의 연극론을 본격적으로 펼쳤단다. 그의 연기론은 스타니슬라브스키에서 더 한발 나아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했다는데 그는 이 연출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행간에서 연구하는 연극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마산에서의 공연 얘기를 덧붙인다.


익살스런 장서방 역을 맡은 주현의 코믹한 연기, 고뇌를 씹어삼키면서도 조용히 결의를 다지는 정도 역을 맡은 심영식의 그 처절한 표정 연기, 그리고 자비로우면서도 보다 큰 일을 위한 용단을 내리는 어머니 역을 맡은 천선녀의 그 중후한 연기. 이렇게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 보기 드문 공연이었는데도 마산의 관객은 그걸 몰라주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쫑파티(공연 자축 겸 합평회) 석상에서 온재 선생의 대갈일성이 터졌다. 


"화인·월초 두 사람은 잘 들어. 관객이 없는 연극이 있을 수 있나? 지금이 홍도야 울지마라 시대인가? 마산 관객을 이렇게 팽개친 것은 물론 고향을 오래도록 떠나 있는 내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안 해. 허지만 고향을 지키고 있는 자네들이 때때로 연극을 했다면서 관객을 18세기 시대에 이렇게 팽개쳐두고도 무슨 예술가로 자처하고 있는가? 책임을 느끼게 책임을."


그날 저녁 오랜만에 세 사람의 선후배는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도 마산의 연극 부흥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1958년엔 이광래의 일생에 변화가 온다. ITI(국제극예술협회) 한국지부 이사를 거쳐, 1960년에는 평생을 두고 고락을 같이 해 온 동랑 유치진의 청탁을 흔쾌히 수학하여 드라마센터(한국연극연구소) 상임이사와 같은 해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의 강사를 맡아 드디어 이광래는 자신의 소신을 펼치게 된다.


우선 동랑이 세계를 돌면서 유명한 극자의 구조를 촬영한 것을 바탕으로 드라마센터의 무대와 객석구조를 설계하려 할 때, 저 유명한 '김치'론을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버터 대신 김치를 먹고 살아온 민족이니 극장설계도 여기에 알맞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문화주체론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형무대, 장방형무대는 물론, 우리 고유의 탈춤·인형극 그리고 마당굿까지도 공연이 가능하도록 무대의 구조를 설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어서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출강하게 된 직접 동기는 서라벌예대(초급대학 2년제)와는 사뭇 다르게 연극미학·현대극론 그리고 새로운 연출론(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한 색채와 선과 율을 원용한 새로운 도학의 연출법)을 강의하면서 '그저 느낌과 주먹구구식 종래의 연극'을 배격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연극예술의 진가는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치밀한 계산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는 광래 자신의 생각을 후학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코 학자적 위치에서 이론 탐그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해, 전술한 소극장 '원방각'을 조직하여 서울은 물론 지방에까지 공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주 개천예술제(옛날의 영남예술제)에 참가한 <기류의 음계>라는 작품이다. 대체로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하여 '작의'라는 해설을 붙여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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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재를 두고 한하균 선생은 높은 존경심이 있나 보다. 경연하는 학생들이 온재의 작품을 선정해 공연준비를 하자 다른 작가의 작품을 하도록 추천한 일이나 극예술협회를 구성원은 그대로 하면서 '신극협의회'로 변경할 때 대표를 유치진에게 양보한 일을 두고 '희생'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엔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하면서 덧붙였다. 말하자면 계산된 작전이란 얘기다.



황무지에도 봄은 오는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악명 높은 미군정 193호는 소멸되고 연극예술의 씨앗은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연극학회의 탄생과 함께 연극경연대회의 개최였다. 1949년 6월 금천대회관(전시경찰국자리) 3층에 사무실을 두고 고고의 성을 울린 한국 연극학회의 참여 인사는 기라성같은 대 연극인들이 거의 다 모였다. 회장에 유치진, 간사장 이광래, 간사에 홍해창, 김진수·이종일·박동근 등 다섯 사람이었다.


이들은 당면과제로 첫째, 같은 해 8월부터 방학을 이용하여 하기 연극강좌를 시행하고 둘째, 10월에는 무대예술원 산하 각 단체로 하여금 민족의식 양양 전국 연극 계몽대를 파견하기로 하고 셋째, 10월에는 6일간 시공간에서 제1회 전국 남녀대학 연극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여 그 모든 행사를 성공리에 끝마친 것이다.


극평가들도 "한국 연극 발전상 최소 30년의 시간을 단축시켰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와 연극예술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한국 연극학회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 연극사상 찬연한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간사장으로서 실무총책을 지고 동분서주한 이광래의 공로는 실로 눈부신 바 있다고 하겠다.


대체로 작가는 자기 작품을 발표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모 대학에서 이광래 작품을 레퍼토리로 선정하여 책 읽기(연습의 첫 단계)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들은 광래는 그 대학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추천하면서 자기 작품 공연을 말린 것이다.


대회의 공정한 운영을 꾀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두기 위하여 자기의 욕심을 버린 것이다. 이러한 자기 희생정신은 국립극장 공연 때에도 우감없이 발휘된다.


1948년 7월 국무회의를 통과한 국립극장 공연법에서는 '무질서한 흥행극과 사상적인 반동분자 및 악질적인 흥행 브로커를 방지하기 위하여'라고 그 창설 목적을 밝히고 있다.그리하여 1949년 가을 국회에서 정식으로 창설령이 제정되자 그 극장 전속으로 '신협'과 '극협'의 두 극단이 지정되었다.


신협과 극협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광래가 주재한 '극예술협회'가 모태가 되어 새로이 탄생한 극단으로, 창설령이 제정되기 직전에 '신극협의회'로 바뀌고 그 구성 멤버도 거의 대부분 극예술협회 진용 그대로였다. 다만 대표자만 이광래에서 유치진으로 바뀌고 스스로 간사장이 되어 있었다.


이는 오로지 자기 자신보다는 극단을 먼저 생각한 용단이었다. 왜나하면 유치진은 그때 벌써 국립극장장으로 거의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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