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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균23

[한하균 오동동야화35]월초 통영에서 현주와의 재회 월초가 앞 번 이야기에선 기약 없이 슬그머니 현주를 떠난 듯하더니 현주가 통영으로 찾아오니 정식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부산일보에 술회한 이야기가 나온다. 느닷없고 뜬금없어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한하균 선생이 이야기를 너무 심하게 축약하다 보니 그 두 사건의 가운데 들어가야 할 플롯을 건너 뛰어버리신 겐가. 그럼에도 찾아온 현주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 탐탁지는 않다. 좀 귀찮게 여기는 듯도 해서다. 불원천리 택시를 타고 달려온 정인을 만났는데 얼싸안고 춤은 못 출망정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에게 떨어질 이익과 불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태도라니. 어쨌든 지지난 이야기에서 예감했듯 현주와의 재회는 이렇게 전혀 극적이지 않게 이루어져 실망이다만 마침 여배우가 궁한 터에 절묘하게 짠하고 나타난 것은 드라마틱하다 .. 2017. 7. 28.
[한하균 오동동야화34]유치환 윤이상 김용기 등과의 인연이 우연 통영으로 간 월초로선, 당시는 자신이 어떤 인연이 맺어질지 상상도 못했겠지만 학원 선생을 맡았던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을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월초가 있는 학원의 교장이 일본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떠났는대 대한 교장으로 온 사람이 청마 유치환이었던 것이다. 유치환과 파트너가 되었으니 그가 놀 물은 반은 정해져버린 것일 터이다. 물론 월초가 오늘날에 기록으로 남겨질 인물이기도 하지만 당대 그가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역시 문화활동은 노는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하겠다. 김용기, 전혁림, 윤이상, 유치환... 통영에 서린 추억의 첫째는 교장이던 김욱주 박사(동영제대 농학부 줄업, 초대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동아대학교 대학원장 역임)의 따사로운 인격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언제나 너.. 2017. 7. 26.
[한하균 오동동야화33]현주를 사랑한다면서 버리고 도망간 사내 월초 내가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어서 월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나 종종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된 터라 무책임한 남자의 못난 모습 정도로 여기는 장면이 바로 열애 중에 이유없이 떠나는 남자의 모습이다. 현주가 그렇게 좋아 자신의 집에까지 드나들게 했다면 부부나 다름없을 터. 어머니가 반대한다고 이웃에 대한 체면 때문이라고... 핑계가 마뜩찮다. 어머니야 아들이 술집 여성과 장래를 약속한다 하니 눈이 뒤집힐 수 있다. 그 또한 자기가 극복해야 할 부분이고. 헌데 이웃 눈치를 본다 정도면 정진업의 현주에 대한 진정성은 믿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진영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통영으로 학원 선생이 되어 간다하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현주는 다시 만나게 될까. 현주가 무슨 .. 2017. 7. 25.
[한하균 오동동야화]월초가 관심을 가진 여인 한현주 월초가 문단에 데뷔하여 금의환향한 이야기. 무엇보다 월초가 관심을 보였던 한현주라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글을 베껴 쓰면서도 그가 경남연극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한하균 선생이 주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 궁금하다. 문득, 현재 경남연극인들 중에 이런 이야기로 관심을 끌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일정 말기인 1930년대 말, 우리 나라의 유일무이한 문학전문지인 에 그렇게도 간절히 소망하던 문단 데뷔의 일차 관문을 통과하게 되자 월초는 그리운 고장 마산을 찾아와 온 시중을 휩쓸고 다녔다. 그 당시 마산 시중이래야 신마산은 70% 가까이가 일본인이 모여사는 신시가지였고 구마산은 거의 전부가 한국인이 취락하여 사는 보수색이 짙은 마을이었다. 다만 오동동만이 술집이 많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노랫가락과.. 2017. 7. 23.
[한하균 오동동야화30]서울서 유치진·홍해성과 인연 닿은 정진업 정진업이 서울로 연극 공부를 하러 가서 만난 사람이 유치진과 홍해성이라고 한다. 물론 이광래가 내쳤더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인연이었겠지만, 어쩌면 번역 일을 하면서 '극예술연구회'가 주최한 강습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여간 다행한 일은 아니었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들여다 보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겠다 싶다. 월초가 서울에 갔을 때의 광래는 극작가로서보다도 오히려 문화부 베테랑 기자로 더욱 명성이 높았을 때였다. 광래는 연극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고향 후배를 매몰차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우선 검열대본 번역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말로 연극을 할 수 있을 때였는데(왜정 말기에는 일본말로 대사를 주고 받아야 했으니까) 우리 나.. 2017. 7. 20.
[한하균 오동동야화29]김해랑 정진업에 이르기를 "풍각쟁이가 될텐가?" 신극이 유행하고부터는 신파극은 신극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겐,말하자면 경멸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무용을 하는 김해랑마저도 정진업이 혁신단을 따라다니자 나무라며 하는 말이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풍작쟁이가 될 텐가" 했다 하니 말이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의 박수를 이끌어내던 신파극의 독특한 플롯 구조가 당시 관객에게 먹혀들어갔을 터이다. 암튼 김해랑의 소개로 정진업은 이광래를 만나게 되나 보다. 극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은 뒤 이듬해인 1935년 이른 봄에 전기 천적막이 다시 불러 갔더니 역시 '극예사'란 간판을 걸고 소인극단체를 만들어 영남 일대를 순회공연하는 것이었다. 공연 작품은 월초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다. "창피하게도 옛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공연했던 등이었다." 여기에서 연극인 정진업.. 2017. 7. 18.
[한하균 오동동야화28]비운으로 시작된 월초의 첫 연기인 생활 오동동야화 28화. 원본엔 26화 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번호를 잘 못 매겼다. 월초가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연극계로 진출한 이야기. 그런데 마산의 첫 신극 단체라 할 수 있는 '극예사'가 처음엔 김여찬, 이훈산 등의 아나키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혁신단 신파극 출신의 천전막이 맡으면서 친일로 흘렀다는 얘기에 가슴 아프다. 또 학교 졸업하고 그저 연기만 하고 싶은 마음에 천전막의 극예사에 들어간 정진업의 운명도 안타깝고. 결국 극예사는 돈이 없어 문을 닫고 마는데...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간교한 모습이 읽힌다. 반 일제 성향의 극단을 친일 인사가 인수하게끔 해놓고 결국 그마저 활용가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이런 일본 제국에 속아넘어간 어리석은 인간들.. 2017. 7. 18.
[한하균 오동동야화27]월초 정진업의 옛시민극장 아르바이트 학생 신분을 속이고 영화관에서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한 월초 정진업의 성숙함이 오늘 이야기의 초점인 것 같다. 이 이야기만 봐도 월초가 얼마나 정열적인 인간형인가 가늠하게 된다. 월초는 또한 왕성한 탐구욕의 소유자였다. 그 탐구욕의 소산이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마산상고에는 전술한 아즈카 데카라 선생 이외에도 고다마, 시카사마 등 두 분 선생이 더 계셨다. 고마마 선생은 이라는 희곡 작품을 발표할 정도의 문인이었고, 시카사마 선생은 영어선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 가끔 세계 명작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아일랜드 작가인 싱그와 오케이시 등의 작품을 통하여 영국 지해하의 아일랜드 사람들의 독립의식을 밝힘으로써 은근히 한국인에게도 독립심을 강조하기도 했던, 일본인으로서는 이단자구실을 서슴지 않았던 분이었다. .. 2017. 7. 16.
[한하균 오동동야화26]괴짜 정진업의 마산상고 학창시절 사람이 성장하면서 아무래도 학창시절에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듯하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5, 6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기도 했지만. 월초 정진업 역시 마산상고 시절 만난 일본인 선생 마즈마데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면 그의 전공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어쩌면 성향도 닮는 듯하고. 아즈마데카라가 아나키적 성향이 있었다고 하니 앞으로 월초의 행보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지도 유심히 읽어봐야겠다. 1929년 4월 (당시는 신학기가 4월이었다) 월초는 5년제인 마산상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요즘에야 거의 대부분 학부모들이 자식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아 잘 기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별로, 아니 거.. 2017. 7. 15.
[한하균 오동동야화25]정진업 골목대장에서 문인으로 그 성장과정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연재들 모두에 언급한 대로 한하균 선생이 정진업을 만났을 때 장면이 기억난다. 소설가로 등단해 시인이기도 했던 연극인 정진업이 한하균 선생의 시낭송을 듣고는 나 말고 시를 낭송할 줄 하는 이가 있네 하면서 농을 건네고 심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충고를 주는 장면. 혹시 한하균 선생은 당시 너무 유명인들 앞이라 떨려서 자연스레 바이브레이션이 나왔던 것은 아닐까.. ㅎㅎ 추측일뿐. ㅋ~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연극인, 이 타이틀이 마음에 든다.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 이야기로 접어든다. 월초 선생은 골목대장이었다. 아명은 쇠돌이다. 무쇠처럼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에서 할머니께서 지으신 이름이란다. 진업은 호적상 이름이고 월초는 향파 이주홍 선생께서 부산일보 문.. 2017. 7. 14.
[한하균 오동동야화24]실험성 강조하고 타계한 연극교육자 이광래 오늘로써 이광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앞으로 다른 연극인 이야기에 엑스트라로 출연할 것이다. 연극동맹에 대항한 전력 때문에 인민국이 서울을 장악했을 때 피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끝내 유지했던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그의 작품 몇 개를 읽어보겠지만 한하균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작품에서도 그 성향이 드러난다고 하였으니. 또 민족주의가 세월을 타고 흐르면서 보수세력으로 정착화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겠다 싶다. 이광래가 '연극동맹'에 대항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의 주구노릇을 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붉은 기를 들고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는 점을 들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선연극운동본부 결성 후 한 달만에 친일극 전력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1945년 9월.. 2017. 7. 13.
[한하균 오동동야화23]광래의 표현주의 소극장운동 등 실험정신 이광래의 업적이 나열된다. 사실주의 낭만주의 물결 속에서 '표현주의' 극을 이끌었다는 점, 극 중간에 또 이루어지는 중간극, 이것은 오페라 쉬는 시간(인터미션)에 공연되던 작은 오페라, 오페레타와 유사하겠다 싶다. 하긴 유럽에서 이 오페레타가 재미있는 극의 구성으로 오히려 오페라보다 더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지만. 여튼 그러한 장르의 극도 구상하고 소극장운동까지 펼쳤다고 하니 대단한 인물이다. 한국 연극 계보를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광래의 이러한 점은 현재 한국 연극계 거장 오태석, 이윤택, 손진책, 윤호진 이런 양반들과 비슷했겠다 싶다. 새로운 극을 실험하는 것만큼 창조적 희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그만큼 이광래는 거듭 말하지만 연극에 관한한 한치의 오차도 용납않는 성격이었다. 그.. 2017. 7. 12.
[한하균 오동동야화22]재래식 화장실에 빠트린 심사노트, 이걸 어쩌나 이광래의 마지막 이야기일 듯하다. 1968년 사망 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광래에 대한 인상적이 이야기가 나왔다.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오랫동안 참여했는데, 한 번은 심사 노트를 변기에 빠트렸는데, 그 노트를 건지기 위해 똥을 다 퍼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건진 노트를 물로 헹궈내고 다른 노트에 옮겨 적기를 꼬박 하루동안 작업을 했다고 하니 성격이 독특하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나도 좀 그런 류의 인간형이긴 하다. 언젠가 한 번 한 시간여를 열심히 썼던 일기가 갑작스런 정전으로 날아가버렸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기록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에는 어찌 그리 애통하던지. 그런데 광래는 를 발표하면서 '작의'를 먼저 덧붙인 것이다. 약간 장황하지만 그의 실험정신을 탐색한다는 뜻에서 .. 2017. 7. 11.
[한하균 오동동야화21]마산에서의 흥행실패가 부흥 계기되다 탤런트 주현이 1958년 당시마산에서 김수돈 정진업 이런 양반들과 함께 공연을 했구나. 이즘 이광래는 드라마센터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동시 동국대 교수까지 맡아 자신의 연극론을 본격적으로 펼쳤단다. 그의 연기론은 스타니슬라브스키에서 더 한발 나아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했다는데 그는 이 연출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행간에서 연구하는 연극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마산에서의 공연 얘기를 덧붙인다. 익살스런 장서방 역을 맡은 주현의 코믹한 연기, 고뇌를 씹어삼키면서도 조용히 결의를 다지는 정도 역을 맡은 심영식의 그 처절한 표정 연기, 그리고 자비로우면서도 보다 큰 일을 위한 용단을 내리는 어머니 역을 맡은 천선녀의 그 중후한 연기. 이렇게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 보기 드문 공연이었는데도 마산의 .. 2017. 7. 10.
[한하균 오동동야화20]3.15 1주년기념공연은 '조국' 리바이벌로 20화 글을 보면 마산 관객은 아주 대형에다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마산의 거룩한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1년에는 3·15의거 1주년 기념 예술제전 준비가 거시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61년 2월 중순쯤 나도 화인 김수돈 선생의 급한 부름을 받고 부산에서 마산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생각과는 달리 약간 복잡한 일이 얽혀 있었다. 제전위원회 사무국장을 시인 김춘수 선생이 맡아 전 행사를 총괄하고 있었고 그 아래 예술 분과위원회가 있었는데 위원장에 김수돈, 부위원장에 월초 정진업 선생이 맡아 있어 오순도순 의논만 맞으면 참으로 훌륭한 작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두 분이 의견충돌을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월초는 3·15의거 정신을 고양한 작품을 거의 완성해.. 2017. 7. 9.
[한하균 오동동야화16]1948년 극협-신협 바뀌는 과정의 이광래 온재를 두고 한하균 선생은 높은 존경심이 있나 보다. 경연하는 학생들이 온재의 작품을 선정해 공연준비를 하자 다른 작가의 작품을 하도록 추천한 일이나 극예술협회를 구성원은 그대로 하면서 '신극협의회'로 변경할 때 대표를 유치진에게 양보한 일을 두고 '희생'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엔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하면서 덧붙였다. 말하자면 계산된 작전이란 얘기다. 황무지에도 봄은 오는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악명 높은 미군정 193호는 소멸되고 연극예술의 씨앗은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연극학회의 탄생과 함께 연극경연대회의 개최였다. 1949년 6월 금천대회관(전시경찰국자리) 3층에 사무실을 두고 고고의 성을 울린 한.. 2017. 7. 4.
[한하균 오동동야화]민족예술무대 시절의 이광래 광복을 즈음한 시기는 문화예술 분야의 격동기였다. 아니 정치, 사회, 생활 모든 것이 격변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점에 이광래가 주도한 '민예'의 활동 역시 격변기 상황을 대변했을 터이다. 한하균 선생의 글에서 놀란 것은 친일 극단이었던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광복과 함께 '조선연극동맹'이란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즉각적으로 공산주의 선전계몽대로 돌변한 사실인데... 친일단체였던 이 극단을 '친일청산'에 더 강력하게 대처했던 북한이 묵인했다는 게 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여튼. 연극의 예술성(순수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몸부림하던 이광래는 일제의 가교한 문화정책 때문에 신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극연'과 '중앙무대'가 해체되자 상업극의 독무대가 된 극단에서 1940년 황금좌에 .. 2017. 6. 27.
[한하균 오동동야화]'헬게랜드의 해적'에서의 1인 2역 연출이 무대에 서면 사실 전체 그림을 객관적으로 그리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연기력도 되고 연출력도 있는 사람을 종종 본다. 타고난 것이겠다. 마냥 부럽기도 하고. 마산 연극의 태동기에 활동했던 이광래가 그런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극본까지 썼으니. 하긴 연출과 희곡은 연기에 비해 훨씬 더 가까운 사이이긴 하다. 1938년 무렵 중앙무대에 상연된 작품이 이광래의 아 입센의 등이었다. 전자는 노년과 청춘의 애욕 갈등을 다룬 단막극이고, 후자는 정의와 복수를 그린 비극이다. 두 작품 다 이광래 연출로 부민관(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공연되어 흥행으로도 성공했고, 작품성도 높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광래의 연출은 처음으로 한국에 표현주의 수법을 시하였다"고 이향민은 6권 7호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 2017.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