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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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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초가 앞 번 이야기에선 기약 없이 슬그머니 현주를 떠난 듯하더니 현주가 통영으로 찾아오니 정식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부산일보에 술회한 이야기가 나온다. 느닷없고 뜬금없어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한하균 선생이 이야기를 너무 심하게 축약하다 보니 그 두 사건의 가운데 들어가야 할 플롯을 건너 뛰어버리신 겐가. 그럼에도 찾아온 현주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 탐탁지는 않다. 좀 귀찮게 여기는 듯도 해서다. 불원천리 택시를 타고 달려온 정인을 만났는데 얼싸안고 춤은 못 출망정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에게 떨어질 이익과 불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태도라니.


어쨌든 지지난 이야기에서 예감했듯 현주와의 재회는 이렇게 전혀 극적이지 않게 이루어져 실망이다만 마침 여배우가 궁한 터에 절묘하게 짠하고 나타난 것은 드라마틱하다 하겠다. 그렇게 현주가 여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겠지. 마지막 한 회가 남았는데... 이야기는 아직 한참인 것 같다. 이야기가 어떻게 압축될 지 기대된다.




월초는 '사회'라는 바다에 발을 들여 놓은지 처음으로 생활에 안정을 얻었고, 선배 동료와 함께 좋아하는 연극 문학에 대한 의견을 끝없이 나눌 수 있는데다 술마저 함께 하게 되었으니, 금상첨화란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인듯 싶었다.


여기에 뜻밖에도(?) 현주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 월초 자신의 말을 되새겨 보자. 


"어느날 밤 청마 사형과 하보(응두) 사형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유명한 통영 오통잔(기금의 대포를 그때 그렇게들 말했다)을 몇 순배인가 기울이고 서로 헤어져서 거나한 기분으로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문전에 택시가 서 있고 친구 K(강계호)가 차비를 치르고 있었다. 현관(그때 하숙집은 왜식으로 된 여인숙이었다) 긴 의자에는 현주가 핸드백을 들고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보고 용수철처럼 발딱 일어섰다. 나는 친구 K가 고맙기는 하였지만 한편 귀찮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현주와의 관계를 비밀로 해두었다가 정식 결혼은 불가능하더라도 서울 쯤 가서 동거라도 할 계획과 약속이 그전에 이미 굳게 이루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그 준비 기간으로서 내가 학원에 와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K가 이렇게 외고펴고 자동차로 버젓이 모시고 왔으니, 그나마 나는 확고부동한 총각 접장으로 가족 상황에 기록되어 있었다."(부산일보의 '세정무정'에서)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장하보 선생이 중재역(?)을 맡고 나선 것이다. 때마침 그 무렵 박재성 작으로 아카몬(일본 동경제국대학의 교문이 붉은 벽돌로 된 것이어서 붉은문=아카몬'이 동경대학의 교지 이름이 되었다)지에 발표되었던 '아키(가을)'라는 작품 외 공연 기획을 하고 있을 때였기에 이 작품의 여자 역할을 못 구해 애를 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고쿠고 조오요오'라 하여 무대 위에서도 우리말로 된 연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또 무대 경험이 있는 여자 연기자 구하기가 하을의 별따기처럼 지난한 일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여기에 현주가 안정맞춤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현주는 연극에 출연할 초청 여배우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예나 이제나 오래 못가는 법. 끝내는 들통이 나고 만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통영으로 간 월초로선, 당시는 자신이 어떤 인연이 맺어질지 상상도 못했겠지만 학원 선생을 맡았던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을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월초가 있는 학원의 교장이 일본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떠났는대 대한 교장으로 온 사람이 청마 유치환이었던 것이다. 유치환과 파트너가 되었으니 그가 놀 물은 반은 정해져버린 것일 터이다. 물론 월초가 오늘날에 기록으로 남겨질 인물이기도 하지만 당대 그가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역시 문화활동은 노는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하겠다. 김용기, 전혁림, 윤이상, 유치환...




통영에 서린 추억의 첫째는 교장이던 김욱주 박사(동영제대 농학부 줄업, 초대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동아대학교 대학원장 역임)의 따사로운 인격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언제나 너그러우면서도 절도있는 생활 리듬을 깨뜨리지 않는 스포츠맨(동경제국대학 테니스 대표선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600평이 넘는 넓은 저택에 수천권이 넘는 장서를 즐비하게 갖춰놓고 독서하다 지치면 밖에 나가 운동하고, 운동하고 돌아오면 아내(진주 일신고녀-진주여고 출신)가 끓여온 차를 마시며,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말하자면 그의 꿈같은 생활이 부럽다 못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 박사의 부친은 통영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판사 출신의 변호사요, 갑부였기 때문이다. 김 박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둘째는 청마 유치환 사백(詞伯 학식이 높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월초가 부임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앞에 말한 김 교장은 동경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떠나고 후임으로 청마가 부임한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연극과 산문을 공부하고 있었던 때라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서정시에서 특히 언어의 시성을 탐구하려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청마 사형의 시집(청마시초)을 모조리 읽고, 적잖은 감화를 받기도 하였다.(부산일보 '세정무정'에서)고 술회하고 있다.


셋째, 연극의 선배와 동료를 만나 견문을 넓히고 보다 높은 차원의 연기 공부를 하게된 것이다. 당시 통영에는 참으로 기라성 같은 대 배우와 연출자가 많이 있었다. 


박정섭(나운규의 아리랑과 벙어리 삼룡이 등의 영화에 성격배우로 활약함), 서성탄(일본 축지소극장 출신의 연극인, 동랑 유치진과의 인연으로 통영에 정착함), 김용기(동경학생예술좌 출신의 연출자, 이해랑·김동원 등과 동인), 김아부(후기 토월회 출신의 연기자), 최배송(동양극장 출신의 연기자) 그리고 극작가 박재성 등이 거의 날마다 모여 토론하고 숙식을 같이 하는 날이 많았다.


물론 그 비용은 3000석 지주의 둘째 아들 김용기가 도맡다시피하였지만, 거기에다 무대장치를 맡아 협력을 아끼지 않은 화가 김용주(오늘날의 국전 전신인 '선전' 특선 작가), 전혁림(국전 특선작가)과 효과를 돌봐 줄 작곡가 윤이상, 정윤주와 시인 유치환, 시조시인 장용두(하보) 등이 가세하였으니 월초로서는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내가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어서 월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나 종종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된 터라 무책임한 남자의 못난 모습 정도로 여기는 장면이 바로 열애 중에 이유없이 떠나는 남자의 모습이다. 현주가 그렇게 좋아 자신의 집에까지 드나들게 했다면 부부나 다름없을 터. 어머니가 반대한다고 이웃에 대한 체면 때문이라고... 핑계가 마뜩찮다. 어머니야 아들이 술집 여성과 장래를 약속한다 하니 눈이 뒤집힐 수 있다. 그 또한 자기가 극복해야 할 부분이고. 헌데 이웃 눈치를 본다 정도면 정진업의 현주에 대한 진정성은 믿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진영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통영으로 학원 선생이 되어 간다하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현주는 다시 만나게 될까.





현주가 무슨 사연으로 남녘 바다가 있는 마산의 유흥가에 등장했는지는 몰라도 현주가 술이 취하면 "이제 지내고 보니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그때는 왜 그렇게도 가슴 저리고 뼈를 깎는 고통이었던지" 하며 술잔을 기울이더라고 했다.


당시로서는 고녀(오늘의 여고) 출신만 돼도 신여성 인텔리로 치부되던 시절에 한국 명문 사학의 하나인 이화여전 출신이고 보니 그녀의 눈은 자연스레 연극을 공부하고 문단 데뷔의 딱지가 붙어 있는 월초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거기다 청년 월초는 누가 봐도 탐낼만한 헌헌장부인데다 우람하면서도 이목구비가 반듯했으니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황폐할대로 황폐해진 현주의 가슴에 월초의 출현은 그야말로 '봄비'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 사랑의 '진도'는 초고속으로 발전되어서 "서재라고 꾸며놓은 내방에 현주가 드나들면서부터 금단의 과실은 따먹어버린지 오래가 되었고 어머니의 반대(돌아가신 아버님은 너그러우셔서 못 보신체 해주셨지만)와 이웃에 대한 체면으로 그런지 두 달만에 내 혼자 마산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물론 현주는 알 까닭이 없었다. 장래를 약속한 바는 있지만 같이 떠날 처지는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주의 영업시간을 기다려 궐녀(그녀를 낮춰 이르는 말)를 보내놓고 이내 밤차를 탔던 것이다."(부산일보 <세정무정>에서)


도망치듯 마산에서 진영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현주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월초는 시달려야 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장 진영은 월초를 반겨주었다. 소꿉친구들과의 재회에서 '현주와의 사랑' 때문에 번민하던 갈등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한 달쯤 뒤 지금의 통영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통영협성상업학원'에서 교사로 취임하라는 통보가 친구 편으로 날아든 것이다. 그리하여 본의아닌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부임지인 통영으로 가게 된다. '통영협성상업학원'은 당국의 정식인가를 얻지 못한 채 유림을 비롯한 여러 유지들이 재단을 형성하고 그 재단에서 운영하는 중학교 과정의 두 클래스짜리 사설학원이었다. 직원이래야 교장과 월초 그리고 청지기 한 사람 모두 세 사람뿐이었다. 그런데도 월초에게는 평생동안 잊을 수 없는 가지가지 추억이 서린 곳이 돼버렸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월초가 문단에 데뷔하여 금의환향한 이야기. 무엇보다 월초가 관심을 보였던 한현주라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글을 베껴 쓰면서도 그가 경남연극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한하균 선생이 주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 궁금하다. 문득, 현재 경남연극인들 중에 이런 이야기로 관심을 끌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일정 말기인 1930년대 말, 우리 나라의 유일무이한 문학전문지인 <문장>에 그렇게도 간절히 소망하던 문단 데뷔의 일차 관문을 통과하게 되자 월초는 그리운 고장 마산을 찾아와 온 시중을 휩쓸고 다녔다.


그 당시 마산 시중이래야 신마산은 70% 가까이가 일본인이 모여사는 신시가지였고 구마산은 거의 전부가 한국인이 취락하여 사는 보수색이 짙은 마을이었다. 다만 오동동만이 술집이 많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노랫가락과 신판 유행가가 뒤섞인 이른바 '안방술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른바 술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초장술은 북마산에서 마시고 거나해지면 카페 '공작'과 '은하'를 찾아들게 마련이었다. 당시 마산에는 카페라고는 앞에 말한 두 곳뿐이었다.


지금 남성동 파출소 앞에 제일은행이 있고 그 제일은행 뒤편에 부림시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 왼편에 아주 조그마한 골목이 있었고 그 골목 초입에 '공작'(옛날 미도식당 자리), 그리고 그 건너편에 '은하'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래가 촉망되거나 그 미래가 보증된 사람의 주변에는 으레 술 친구가 모여들게 되어 있는데, 월초 자신의 말대로 '보증이 붙은 문학청년입네 하고 선배들이 곧잘하던 데카당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 주변에 술 친구가 없을 리 없다. 그러니 자연스레 마산 최고의 신식 사교장인 공작과 은하에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했고, 그 중에 은하의 요정 현주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한현주. 그녀의 본명은 모른다. 술이 거나해지면 월초는 스스럼없이 옛일을 다 털어놓으시면서도 끝까지 그녀의 본명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그녀의 명예를 위해'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녀가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서울의 풍문고녀(요즘의 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이화여대의 전신) 문과를 졸업한 아가씨라는 것만 밝혔다.


부산일보에 발표한 <세정무정(世情無情)>에서 이화여전 중퇴라고 쓴 것은 그녀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뜻에서였고 재학 당시 '메이퀸(5월의 여왕)'으로 뽑힌 적도 있는 재원이라는 것이다.


"이건 자네만 알아야 해"하고 몇 차례나 당부하신 뒤 "이화여전 연극반이 공연했던 체호프의 <3인자매>에 '아주 중요한 역할'(역시 역명을 밝히면 그녀의 신분이 노출되니까)로 출연했던 연극 광(狂)이었어"라며 처연하게 회상하시곤 했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정진업이 서울로 연극 공부를 하러 가서 만난 사람이 유치진과 홍해성이라고 한다. 물론 이광래가 내쳤더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인연이었겠지만, 어쩌면 번역 일을 하면서 '극예술연구회'가 주최한 강습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여간 다행한 일은 아니었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들여다 보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겠다 싶다.




월초가 서울에 갔을 때의 광래는 극작가로서보다도 오히려 문화부 베테랑 기자로 더욱 명성이 높았을 때였다. 광래는 연극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고향 후배를 매몰차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우선 검열대본 번역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말로 연극을 할 수 있을 때였는데(왜정 말기에는 일본말로 대사를 주고 받아야 했으니까) 우리 나라 작품을 조선총독부 산하의 관청에서 공연 허가를 얻으려면 일본말로 된 대본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일본 관헌이 읽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광래는 이 일을 주선해 진업에게 맡기면서 그의 호구지책을 우선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작품(희곡)을 접함으로써 연극의 세계에 입문시키려 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연극계 인사들과 얼굴을 익혀 안면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다행히 월초에게는 문재(文才)가 있어 광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문장력을 발휘하여 각 극단에서는 웬만하면 월초에게 번역 일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문필 업'은 생활과는 먼거리에 있었다.


한 작품 번역해보아야 한 달치 하숙비가 될똥말똥하는 그런 싸구려 수입뿐이었다. 이러한 번역하는 일로 극단 주변에서 약 1년쯤 지냈을 때인 1937년 11월 '극예술연구회'의 실천부(극예술연구회는 크게 연구부와 실천부로 나뉘어 있었고, 전자는 실험무대를 두고 또 후자는 강습회 등을 통하여 새로운 연기자 양성과 연극의 중요성과 함께 스태프의 각 분야별 전문 강의를 맡아 하고 있었다) 산하 강습회 회원으로 수강하게 된다.


이 강습회에서 몇 달 동안 강의를 받던 중 가장 인상적인 과목은 동랑 유치진의 <연기론>과 홍해성의 <무대론>이었다. 유치진은 너무나 유명한 극작가요 연출가니까 새삼스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홍해성에 대하여 잠시 언급해 두고자 한다.


홍해성은 극예술연구회 동인(해외문학파)들보다는 약 10년 선배로 소년시절부터 일본 신극의 요람인 축지 소극장에서 일본 신극의 개척자 오사나이 카오루에게서 신극의 무대 기술과 연기를 배우고 익혀 귀국하여 한국에 이식한 신극계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신극이 유행하고부터는 신파극은 신극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겐,말하자면 경멸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무용을 하는 김해랑마저도 정진업이 혁신단을 따라다니자 나무라며 하는 말이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풍작쟁이가 될 텐가" 했다 하니 말이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의 박수를 이끌어내던 신파극의 독특한 플롯 구조가 당시 관객에게 먹혀들어갔을 터이다. 암튼 김해랑의 소개로 정진업은 이광래를 만나게 되나 보다.



극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은 뒤 이듬해인 1935년 이른 봄에 전기 천적막이 다시 불러 갔더니 역시 '극예사'란 간판을 걸고 소인극단체를 만들어 영남 일대를 순회공연하는 것이었다.


공연 작품은 월초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다. "창피하게도 옛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공연했던 <육혈포강도> <사나이답게 싸워라> 등이었다."


여기에서 연극인 정진업으로서는 치명적인 나쁜 버릇이 생겨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무대 위에 서기만 하면 무의식 중에 발작해버리는 참으로 안 좋은 버릇이다. 그것은 바로 '쿠세'라는 일본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연기자마다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월초에게는 '신파근성'이라는 못된 버릇을 지니게된 것이다.


대체로 좋은 연기를 하려면 언제나 주제의식을 머리 속에 머금고 상대 역과 호흠을 맞춰야 하는 법인데 리허설할 때는 앙상블을 잘 맞추다가도 무대에 서면 자기 혼자만 관객(물론 저질관객이다)에게 박수세례를 받는 신파 연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대본을 미리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맡은 역의 대사만 받아서 연습했기 때문에 생기는 숙명적인(?) 부담이다. 이런 버릇은 '사랑하는' 제자와 공연할 때도 어김없이 발작(?)했다. 


1962년 12월 하유상이 쓰고 필자가 연출한 <고래>를 공연할 때도(이 대목은 후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주인공 고래 역은 월초가, 상대역인 화산댁 역은 조두이 여사가 맡았는데 평소 사생활에서나 리허설 중일 때는 제자인 조두이 여사를 남이 보면 부러워할 만큼 존중하고 아끼시던 분이 무대에만 서면 전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필자가 막이 내린 뒤 대선배이신 월초에게 대들라치면 "한군, 다시는 오버 액션 안 할게. 한번만 잘 봐 다우"하고 사정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나쁜 버릇도 처음 연극을 배운 데가 신파극단이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거의 일년 쯤 김삿갓처럼 방랑생활을 하던 중 마산으로 돌아와보니 경남 무용계의 개척자 김해랑 선생이 기다리고 계셨다.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아니면 풍각쟁이가 될 텐가?"

"어디 좋아서 유랑 극단에 따라 다니겠습니까?"


그제서야 김해랑 선생은 "내 친구 홍근(광래)이를 소개해 줄테니 서울로 가보게"하고 간곡히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6년 9월에 드디어 서울(경성)로 가게 되는 것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도하 각 신문에 '무작정 상경'이란 말이 거의 날마다 기사화되었듯이 월초도 그야말로 무용가 김해랑의 소개장 하나만 달랑 들고 이광래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오동동야화 28화. 원본엔 26화 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번호를 잘 못 매겼다. 월초가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연극계로 진출한 이야기. 그런데 마산의 첫 신극 단체라 할 수 있는 '극예사'가 처음엔 김여찬, 이훈산 등의 아나키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혁신단 신파극 출신의 천전막이 맡으면서 친일로 흘렀다는 얘기에 가슴 아프다. 또 학교 졸업하고 그저 연기만 하고 싶은 마음에 천전막의 극예사에 들어간 정진업의 운명도 안타깝고. 결국 극예사는 돈이 없어 문을 닫고 마는데...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간교한 모습이 읽힌다. 반 일제 성향의 극단을 친일 인사가 인수하게끔 해놓고 결국 그마저 활용가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이런 일본 제국에 속아넘어간 어리석은 인간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만.... 오늘날에 와서도 그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는 정치인들이 있으니 뭐... 할말이 없다.




1934년 3월(당시는 학년말이 3월이었다)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한 월초는 처음으로 사회의 냉엄함을 체험하게 된다.


"졸업을 하자 금융조합의 서기 시험을 치러 갔지만 멋지게(?) 낙방을 하고 돌아왔다. 부모님의 압력에 못이겨 갔었지 나의 본의는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문학이나 예술을 전공하는 학업을 지속하느냐 하는 그 일념뿐이었다"('나의 문단 올챙이 시절')고 말한 바 있듯이 꿈과 현실과의 괴리를 메우지 못하고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른바 '고등룸펜' 생활을 반년쯤 했을 때의 일이다.


그러다가 1934년 10월에 '극예사'에 입단하게 된다. 극예사는 전술한 바 있듯이 1932년 7월에 창당된 마산 신극 최초의 극단인 셈이다. 창단 당시는 주동자가 김여찬, 이훈산 등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매료된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그 공연 작품들은 자연스레 일본 제국에 대하여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기록으로는 구체적인 레퍼토리가 남아 있지 않지만 서너 차례의 공연 중 공연 중지가 두 번이 있었다니 말이다. 그런데 월초가 입단했을 때는 전기 김여찬, 이훈산(훗날 옥사했다고 함) 등은 떠나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신파연극을 하던 천전막이 대표가 되어 극단의 색깔이 친일로 변색되어 있었던 무렵이었다.


옛날 뜻을 같이 했던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아 있는 몇 사람과 이리저리 급하게 모은 사람들로 연기진을 구성하는데 월초에게 주어진 역은 '일인이역'의 단역(연기진을 3대별 하면 주연, 조연, 단역으로 나뉨)이었다. 하나는 개막과 함께 등장하는 전보배달원 역이었고 또 하나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상점점원 역이었다. 그런데 (월초는) 그 작품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여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처럼 리허설에 들어가기 전에 작품(대본)을 연기자에게 미리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맡은 역의 대사만 적은 쪽지를 나누어 줬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요즘의 한 작품 공연 과정을 간략히 설명해 보면 '스태프 및 연기진에게 대본 나눠주기→연출회의(작품의 주제와 성격과 분위기와 색깔을 토론하고 각 스태프에게 지시한다)→액션(대사에 따른 동작연습)→총연습(공연과 꼭 같이 무대 위에서 조명·효과장치 등을 마련해 놓고 연습함)→공연' 대체로 이런 순서가 되겠는데 옛날 신파 연극 시대에는 경비를 절감한다는 이유 아래 액션 연습 몇 번 하고 바로 공연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사 연습 따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자 연기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월초도 작품 제목과 주제도 모르면서 액션 연습 두어 번 하다가 극단이 경비난으로 해체되고 마는 비운을 겪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학생 신분을 속이고 영화관에서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한 월초 정진업의 성숙함이 오늘 이야기의 초점인 것 같다. 이 이야기만 봐도 월초가 얼마나 정열적인 인간형인가 가늠하게 된다.



월초는 또한 왕성한 탐구욕의 소유자였다. 그 탐구욕의 소산이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마산상고에는 전술한 아즈카 데카라 선생 이외에도 고다마, 시카사마 등 두 분 선생이 더 계셨다.


고마마 선생은 <관원도진>이라는 희곡 작품을 발표할 정도의 문인이었고, 시카사마 선생은 영어선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 가끔 세계 명작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아일랜드 작가인 싱그와 오케이시 등의 작품을 통하여 영국 지해하의 아일랜드 사람들의 독립의식을 밝힘으로써 은근히 한국인에게도 독립심을 강조하기도 했던, 일본인으로서는 이단자구실을 서슴지 않았던 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음껏 섭취한 영양소(?)를 바탕으로 월초 선생은 마산성고 교지에 <가지>라는 첫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경남도문예전시회에 입선되어 지사의 표창을 받았다. 학우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자 문학에만 매달려 있을 월초가 아니었다.


극장에까지 진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1930년대 초)는 일반인의 의식수준이 낮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외국영화를 상영하려면 영화 상영에 앞서 해설자가 먼저 관객 앞에 나서서 그 영화의 핵심 줄거리와 함께 주연 배우의 연기까지도 미리 간략하게 해서래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내레이터를 용돈 몇 푼 받고 맡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극장, 창동에 있던 '시민극장'의 옛이름이 공락관이요, 그 공락관의 앞선 이름이 고도부키좌였다. 이 고도부키좌의 내레이터로 월초 선생이 채용된 것이다. 시쳇말로 아르바이트라고나 할까. 물론 텍스트는 당시 발행되던 <에이가노 토모>라는 영화전문지였지만 거기ㅏ 월초 자신의 느낌도 덧붙여 말하게 되어 있었다.


그날의 상영 프로는 마르세르 카르네 감독의 <안개 낀 부두>인데 주연인 장가벵의 표정을 해설하는 대목은 참으로 천하일품이었다. 


"그 조용한 박력, 완만하지만 단순한 움직임, 엷은 입술에서 번져나는 빙와 공포의 그림자, 멀리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 눈망을에 감겨드는 서글픔, 그리고 철학서적이 한 권씩 깔리는 듯한 둔중한 걸음걸이를 관객 여러분은 특히 눈여겨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우레같은박수가 쏟아졌으믄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박수에 굿쟁이(연극인)는 언제나 신이 나는 것이다.


월초 선생이 한참 으쓱해진 기분으로 무대 뒤 분장실로 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있었다. 마산상고 훈육담당(오늘날의 학생부) 아라다 교사였다. 학생 신분이 탄로난 월초는 그날로 즉시 극장주로부터 해고당하였고 학교에서는 4주간 유기 정학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학생은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던 무렵이라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가 날마다 벌 청소와 근로봉사하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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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성장하면서 아무래도 학창시절에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듯하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5, 6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기도 했지만. 월초 정진업 역시 마산상고 시절 만난 일본인 선생 마즈마데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면 그의 전공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어쩌면 성향도 닮는 듯하고. 아즈마데카라가 아나키적 성향이 있었다고 하니 앞으로 월초의 행보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지도 유심히 읽어봐야겠다.




1929년 4월  (당시는 신학기가 4월이었다) 월초는 5년제인 마산상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요즘에야 거의 대부분 학부모들이 자식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아 잘 기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별로, 아니 거의 지망하지 않고 있어서 중부 경남을 대표하던 마산상고가 옛 영화(?)를 못 찾고 있지만 월초가 입학하던 1930년대 초반기에는 수재들이 운집하던 때였다.


더욱이 가능하면 한국인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 온갖 잔꾀를 부리던 일제강점기였기에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혀있던 서민층의 한국인에게는 부산의 부산상고와 함께 마산상고가 유일한 등불이었다


따라서 지금 60대 중반 이상의 연령층에 있는 마산상고 동문들의 자긍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 그럴만도 했다. 우선 정계부터 살펴보면 황낙주(전국회의장), 우병규(전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김우석(전 건설부장관), 백찬기(전 국회의원), 김정수(국회의원) 씨가 이 상고 출신이다.


경제계에도 많다. 벽산그룹의 창시자 김인득, 이해규(삼성중 대표이사), 이철수(전 제일은행장), 이춘영(전 경남은행장), 배종열(한양그룹 회장) 등이 있고, 법조계에도 주선회(광주 고검장), 김성찬(부장검사)과 학계의 김윤식(서울대 교수 평론가), 정노팔(연세대 교수)임철규(연세대 교수) 등이 있다.


예술계에는 이광석(시인), 최원두(시인), 조병무(평론), 황원철(창원대 교수 화가) 등이 있다. 이외에도 언론계의 이순항(경남도민일보 대표), 이문행(경남신문대표), 그리고 씨름하면 누구나 떠오르게 마련인 이만기, 강호동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제제명사를 배출한 명문학교가 마산상고인 것이다.


월초도 마산상고 출신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인생의 방향타를 결정하게 한 사람이 마산상고를 입학하면서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한 아즈마데카라(東功) 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스승이다.


대개의 경우 일본인 이름은 4자 내지 5자로 되어 있고 한국인 이름은 3자로 되어 있게 마련인데 이분은 한자로 2자였기 때문이다. 월초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알맞은 특이한 이름의 동공이라는 스승은 문예 담당선생이었다.


히로시마 고등 사범법학교(이 학교는 일본 유수의 사범대학 중의 하나였다) 출신답게 명석한 머리와 정확한 판단력을 겸비했으면서도 결코 어떤 틀에 얽매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자유주의자였다. 수업시간에도 신국 일본(신이 일본을 세웠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이론)의 허구성과 허망함을 설파하는가 하면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사상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1920년대 일본 열도를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대하여 일가견을 말하기도 하는 괴짜 선생이었다.


이 괴짜선생을 흠모하고 따랐기 때문에 월초의 학생시절의 닉네임도 '괴짜'라는 뜻의 변태성이었다. 이유는 연극 음악 영화 등 다방면에 취미가 많아 장르가 바뀔 때마다 그 장르에 몰입해 버리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으로 잘 변한다하여 악우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연재들 모두에 언급한 대로 한하균 선생이 정진업을 만났을 때 장면이 기억난다. 소설가로 등단해 시인이기도 했던 연극인 정진업이 한하균 선생의 시낭송을 듣고는 나 말고 시를 낭송할 줄 하는 이가 있네 하면서 농을 건네고 심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충고를 주는 장면. 혹시 한하균 선생은 당시 너무 유명인들 앞이라 떨려서 자연스레 바이브레이션이 나왔던 것은 아닐까.. ㅎㅎ 추측일뿐. ㅋ~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연극인, 이 타이틀이 마음에 든다.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 이야기로 접어든다.


월초 선생은 골목대장이었다. 아명은 쇠돌이다. 무쇠처럼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에서 할머니께서 지으신 이름이란다. 진업은 호적상 이름이고 월초는 향파 이주홍 선생께서 부산일보 문화부장 시절에 지어주신 아호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16년 4월 19일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743번지에서 부친 동래 정씨 세룡과 모친 김해 김씨 정해 사이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진영면(당시는 면이었다)의 정식 공무원도 아닌 촉탁의 자리에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빠듯한, 가난하지만 선량하고 고지식한 말단 공무원이었다. 그러기에 월초는 끼니때마다 초라한 밥반찬에 죄없이 미안하고 죄송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하여 도랑에서 천렵을 하기로 마음 다진 것이다.


한 여름의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하계방학 중이었다고 한다. 보통학교(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초등학교로 됨) 4학년이던 월초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쇠돌이답게 또래들 가운데서는 체격이 우람하고 의협심도 강해 자연스레 골목대장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거느리고 푸짐한 생선 반찬을 미리 연상하면서 개울가에 진을 치고 작업을 개시하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할 그물이 준비 불충분이었다. 사연인즉 그물 대신 방충망을 가져왔는데 그 방충망에 대꼬챙이를끼워야 어로작업을 할텐데 대꼬챙이가 없는 방충망뿐이었다.


이에 골목대장의 엄명이 하달된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꼬챙이를 끼워 완전한 그물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훔칠 틈도 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독사에게 물린 것이다. 소년 월초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상처 윗부분에 헝겊을 찢어 힘껏 동여매고 서슴없이 독을 입으로 빨아내고는 업고 달렸다.


"10리가 훨씬 넘는 그 머나먼 길을 어떻게 뛰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가 없지만 그 아이를 병원 베드에 눕혀 놓고는 나 자신이 기절을 하고 만 거야." 안경 알을 닦으시면서 유년시절을 회고하며 "간이 콩알만 했다"고 술회하신 적이 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려고 했던 일이 오히려 가난한 아버지의 부담만 짊어지게 만든 이 사건은 어린 마음에도 상당한 상처를 남겼던 모양이다.


때마침 학계경진대회가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스스리카타(작문)' 장르에 출품하여 월초가 김해군에서 수석으로 입선하게 되었다. 글 제목은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효심을 바탕으로 한 개울가의 천렵 이야기, 다시 말해서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그때의 이야기를 글로 엮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골목대장의 문재(文才)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피해(?)를 입힌 결과가 되었지만, 아버지 어머니께 환한 기쁨을 드리게 디어 흐뭇했었다고 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