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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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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1990년 10월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니, 그때부터 문화부 기자만 줄곧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공연의 팸플릿을 다 간직하고 있다면, 그 양이 얼마나 될까? 사실 지금도 회사 책상 집 책상 책꽂이 곳곳에 널브러진 팸플릿들. 그나마 버려지지 않은 아직까지는 이것들이 소중하다. 내 기억의 한 단편이기도 하고 언젠가 내 기억을 도와줄 훌륭한 친구이기도 하기에. 그런데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오래지 않다. 다다음달 이사라도 가게 되면 팸플릿 뿐만 아니라 5년 전 버리고난 후에 다시 또 모이기 시작한 책들도 버림받을까 벌써 떨고 있다. 그렇게 안산다 안산다 해도 책꽂이를 더 사야할 만큼 불었다. 책이란 게 참...



삼각파도는 극단마산으로선 중요한 의미가 담긴 작품이다. 창작극이기도 하거니아 이걸로 전국연극제까지 출품했기 때문이다. 이에 얽힌 일화도 재미있다. 무대엔 뻘에 박힌 배가 한 척 등장하는데.. 이 소품을 어찌 형상화하나 고민하다가 마산 바닷가에 못쓰는 배가 한 척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걸 그대로 무대에 올렸다는 후문. 공연중에 바닷게도 기어나오고 했다는데... 이정도면 웃지못할 에피소드다. 전국연극제 사상 이처럼 무식한 무대는 전무후무하다고.


극단 마산의 8회 정기공연 작품이 <임금알>. 일종의 선입견 같은 게 내게 있었나 보다. 창원대 극회도 이 작품을 창립 초창기에 무대화한 적이 있다. 동아리방 사진첩에 꽂혀있는 모습을 보니 무대가 썰렁하고 배우들의 포즈도 썩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래서였나 보다. 워크숍 용으로 연습삼아 공연할만한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래서였다. 지난 경남연극제 때 심사위원을 맡은 오태영 선생을 만났을 때 막 그렇게 신비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그런데 오 작가와 함께 저녁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에...참  식당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그의 개인사 에피소드를 많이 들었다. 작가가 되려면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해야되는구나 싶기도 하고... 제발로 빵에 들어간 이야기까지... 여하튼 <임금알>이란 작품이 어두운 시대적 환경에서 갑갑한 심정을 풀어내보고자 쓴 풍자극이라 다시금 기회를 봐서 읽어봐야겠다.



극단 마산의 제1히 청소년극장 <방황하는 별들>/ 윤대성 작 현태영 연출. 학창시절 좋아했던 작가다. 윤대성과 이근삼, 이강백. 이 세 작자 뭔가 유사성이 있는 듯하면서도 나름 색깔이 독특한... 방황하는 별들... 이 작품을 본 듯한데... 기억이 거의 안 난다.



<위기의 여자> 이 공연 봤다. 당시 창대극회 공연 <들소>를 마치고 여유가 있을 때였는 갑다. 주인공으로 등장한 김소정 현 상상창꼬 상임연출은 <들소> 끝나고 바로 극단 마산의 이 작품에 투입됐나 보다. 극단 활동에 별 관심이 없던 터라... 사실은 당시 연극을 하면서도 늘 취업시험 공부에 매달려 있었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극단 활동에 눈을 돌렸어도 좋았겠다 싶긴 하다.



극단 창원의 2회 공연 <어떤 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때 벌써 극단 창원이 생겼었군. 극단 마산서 연출로 활동하던 현태영 감독이 창원에서 극단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던 때가 87년이었네. 한참 후인 줄 알았더니. 맞아, 이 시기 창원에 극단이 집중적으로 생겼던 것 같다. 극단 미소도 그렇고 부족도 그렇고...



1987년 경남대 21회 정기공연. <히바쿠샤>. 원폭 피해자들 이야기. 대체로 이 당시 극단이나 학생극의 소재가 사회고발성이 많은 것 같다. 객무의 문종근 감독이 연출한 작품인데 이 작품은 이후 극단 마산에서도 공연된다.



경남대 극회 정기공연인데 극단 마산 전용소극장에서 공연했었군. 이 역시 경남대 극회가 잘나간 배경이기도 하겠지.



극단 마산의 <돈내지 맙시다>. 1988년 2월 마산경찰서 맞은편 세림상가 3층에 전용소극장에서 공연.



팸플릿을 보면, 경남연극제가 당시 6회였고, 도내 9개 극단이 출품했음을 알 수 있다. 불씨촌, 부족, 벅수골, 마산, 어릿광대, 입체, 현장, 메들리, 터. 마산, 창원, 통영, 거창, 진주, 밀양의 극단들이다. 그리고 당시 경남대 완월대강당이 연극 공연장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단 부족의 <들소>는 내가 창원대 극회 작품으로 뛰었었다. 극단에 배우로 참여해달라는 박성근 연출의 제의를 받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7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자 맘을 먹었던 터라... 이때는 1년 휴학계까지 내고 부산서 지냈기 때문에 연극판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팸플릿들을 보니 대충 당시의 상황이 그림그려진다.


출연진을 보니 박명숙, 최규민 두 사람만 같은 배역을 가지고 경남연극제 참여했었군. 종갑씨가 내가 맡았던 뱀눈역을 소화했구나. 언제 한 번 그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구... ^^



6회 경남연극제에는 극단 창원에서 연출을 했던 현태영 감독이 극단 마산서 연출을 맡아 작품을 올렸다. <노비문서>. 윤대성 작가의 희곡. 등장인물에 아는 이가 많다. 고 김태성, 문종근, 오용규, 김종찬, 이태환, 김소정... ㅎㅎ.



천영형(천영훈) 현 극단 미소 대표는 당시 극단 어릿광대의 <망명정부주식회사>에 출연했었군. 88년, 이 해에 아마 미소가 창단했을 걸. 장은호 씨가 고수로 출연했구나.





극단 마산의 <노비문서> 24히 정기공연이다. 이 역시 윤대성 작가의 희곡. 문종근 감독, 강의 땐 사투리 때문에 무대에 별로 안 섰다더니 제법 많은 작품에 출연했구나.


경남대 23회 봄 정기공연 <아벨만의 재판> 이근삼 작. 



1988년 12월인데 극단 부족이 벌써 6회 정기공연을 올렸다. 상당히 활발한 공연활동을 했다는 방증이다. 조오튼 작 이순노 연출의 <미친 사람들>. 그래 당시 창원 중앙동에 주택가 지하에 전용소극장이 있었지. 몇 번 가봤더랬다. 다시금 생각하면 당시 아버지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 준비만 하지 않았더라면 극단활동을 열심히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왜냐면, 내가 안한다 안한다 해도 술로 유혹하면 바로 넘어가는 스타일이라. 첫 작품 <문밖에서>도 그랬고 두 번째 <들소> 역시 그렇게 말려들어 작품에 참여했었으니. <들소> 같은 경우 처음엔 대사가 별로 없는 붉은노을 역을 맡았다가 목소리가 안 맞다 해서 뱀눈으로 바꿨는데.. 으... 혼자 대사만 읊어도 40분짜리... 희한하게 그 긴 걸 어찌 다 외웠나 몰라.



연출은 맡은 이순노...선배는 음. 배우로도 뛰었구나. 당시 연출이 무대에 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동아리 선배들인 오세갑, 김경화, 이미화 등은 스태프로 일을 맡았었군.






극단 마산의 34회 정기공연 <메야 마이다>. 진주서 활동하던 서용수 선배가 처음으로 마산서 활동하기 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7회 경남연극제 대상, 연출상과 전국연극제 무대미술상을 받았다.



극단 마산 <사람의 아들> 이문열 작 현태영 연출. 이 작품은 극단 마산 전용소극장에서 봤다. 대학 시설 친구들과 신의 존재에 대해 밤새 토론하기도 했던 터라 작품을 보면서 '신과 인간'이란 화두를 들고 아주 깊숙히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다. 민요섭이 문종근, 조동팔이 김종찬, 여인에 김소정...모두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용 중심으로만 봐서 그런가... 그런데 형사를 맡은 김태성은 인상이 강렬해서였는지 그 모습, 목소리가 기억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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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복학하고서 처음 대학연극에 발을 들인 해다. 자연히 이런 저런 연극을 보기도 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희곡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국문과 안에 각 장르별 창작 그룹을 조직했었는데... 추동력이 모자라 얼마 하지 못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그게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된다. 그러면서 나는 또 더 연극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 괜한 썰을...


여튼 창원문화재단이 마련한 문화강좌 '화요명작예술감상회'를 통해 문종근 객석과무대 연출로부터 당시의 팸플릿 자료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언제 창원대 극예술연구회 동아리방에 들어가 30여년 전의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내가 한 작품 자료들도 그대로 남아 있는지... 음... 설레는군.



경남대 18회 정기공연. <모닥불 아침이슬>. 객석과무대 배우로 활동하다 2004년 돌아가신 김태성 선배의 연출 작품이군. 캐스트 중에선 현 객무 상임연출 문종근 감독과 이태환... 어.. 아는 사람이 이정도밖에 없네... 복학하기 전이어서 그런가 보다.



극단마산의 제3회 공연작 <시즈위밴지는 죽었다>. 현태영 연출.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 주차장 옆 보람의 집에서 공연됐다고. '보람의 집'? 없어진 지 15년이 다 된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위치가 아마도 지금의 마산의원이 있는 그 건물 아닐까 싶다. 90년대 중반 쯤에 음악 공연을 보러 딱 한 번 간 기억이 난다. 1986년도에 그곳에서 연극을 했다니 놀랍다.



공연을 축하한 극단을 보니 당시 마산에 터를 잡은 극단의 면면을 알 수 있다. 불씨촌(강경윤), 무대(이지훈), 사랑방(송판호), 어릿광대(박낙원). 의외로 거창 극단 입체가 함께 축하를 했다는 것이 이채롭다. 공연축하 광고를 고 추송웅 배우의 명복을 비는 내용으로 편집을 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명복을 빌면서 공연을 축하한다는 것이 어찌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고.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 배우 추송웅은 TV드라마 <달동네>에서 똑순이 아버지로 나와 큰 인기를 얻었더랬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다림질하면서 손과 고개를 교차시켜 "쉭! 쉭!"하던 모습. 그 추송웅 선생이 내 고등학교 선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또 얼마나 관심갖고 연기를 보게되었던지...





극단 불씨촌의 25회 공연. 알베르트 카뮈의 <오해>. 1986년 7월이면 가을 공연 앞두고 내가 한창 연극 연습을 하던 시기구만. 스태프나 등장인물에 아는 얼굴이 많다. 캐스트 중에 김소정 현 상상창꼬 상임연출, 기획 김미화, 연출 맡은 우정진은 이야기만 들었지 얼굴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구... 86년도 우정진은 몰라도 김경화 김소정은 창원대 학생있었는데... 불씨촌 공연을 했었구나.






경남대 극회 20회 정기공연. 11월 28일. 완월강당. 이 공연은 내가 봤다. 창원대 극회 학생들이 단체로 가서 본 작품이다. 당시 보면서 학생극치고는 정말 투자를 많이 한 무대라고 생각했다. 물론 작품의 수준도 당시 내가 출연했던 <문밖에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많은 등장인물을 소화할 정도의 동아리 학생이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고... 보고나서 우린 언제 저런 작품 하나 올려보나 그런 생각을 했으니.









창원대 극회의 11회 정기공연 <문밖에서>. 전대명 연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연출자는 전영도다. 왜 다른 이름을 썼는지 지금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뭔 이유가 있었겠지. 내가 맡은 연대장 역은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리허설 때 러닝타임 2시간 남짓. 그 시간 동안 내 대사는 총 11마디. 그런데... 첫 무대라 얼마나 떨었던지... 몇 안 되는 그 대사마저 까먹어버리고 온갖 사투리로 애드립을 쳐댔으니... 아, 지금 생각해도 낯이 후끈거린다.


문종근 연출의 강의에서 이 팸플릿을 소개하면서 괜히 나를 언급하는 바람에 수강생들의 시선이 죄다 내쪽으로.. 흐.. 게다가 문 감독이 박수까지 유도를... 어찌 낯을 들고 다니라구! ^^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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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다들 많이 바쁜 시기인 것 같다. 정치적으로도 그럴 테고 문화 쪽도 5월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달이긴 하다. 학교는 학교 대로 바쁠 테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늘 도민행복위 성평등분과 회의엔 출석률이 저조했다. 당연직인 안태명 여성정책관을 빼고 13명의 위원 중에 8명밖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그럼에도 늘 느끼는 것이지만 회의는 진지하고 심도 깊다. 나같은 비전문가가 섣불리 토론에 끼어들기 조심스러운 분위기이기도 하다. 전문적인 내용을 아주 상식적인 수준에서 한마디씩 거듦에도 다른 위원들이 잘 들어주고 받아주어 고맙기도 한 위원회다.


다음은 경남도에서 오늘 회의했다는 소식을 보도자료로 배포한 글이다. 성평등 홍보를 위해 내 블로그에 주어담는다.


도민행복위원회 성평등행복분과 4차 회의 열려

30일(수) 경남도청 회의실...경남 성평등지수 개선 방안 등 논의



경상남도는 5월 30일 오전 10시, 경남도청 2층 회의실에서 도민행복위원회 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도민행복위원회 성평등행복분과 4차 회의’를 개최했다.


‘도민행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소통과 협치의 참여도정을 슬로건으로 취약계층이 체감할 수 있는 시책을 발굴하고 민관거버넌스 실현을 위해 설치·운영하고 있다.


이날 성평등행복분과 회의에서는 경남의 성평등 지수개선을 위해 추진 가능한 세부지표별 목표를 설정하고 여성인재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따른 설문 문항 등을 검토하는 등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회의에 참석한 한경호 도지사권한대행은 “성평등은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로 우리사회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중점사항”이라며, “도민이 체감할 수는 성평등 과제를 적극 발굴하고 평가하여 여성과 남성이 모두 행복한 경남 실현을 위해 위원님들의 적극적인 노력을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도민행복위원회는 2월에 청년행복분과위원회가 추가되면서 총 8개 분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106명의 위원들이 활동 중이다. 매월 각 분과별로 회의를 열고 분기별로는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경상남도는 앞으로도 도민행복위원회가 민관거버넌스의 구심적 역할을 하면서 ‘행복한 경남 실현’을 앞당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기까진 보도자료 내용이고.


회의에서 중점적으로 토론이 된 것은 지난 회의에서 경남도의 성평등지수 개선을 위한 세부지표의 목표 설정치를 10% 정도 높여 추진하라는 주문을 했었는데 몇몇은 상향조정했고 또 몇몇은 예산 문제로 하향 조정한 곳도 있었다.


문제는 신규과제로 추가를 검토할 사업에 대해서 인데, 여성경제활동참가율 제고를 위한 사업으로 '여성일자리 종합계획 수립' '일자리 창출 실적관리 시 성별 분리 실적 관리' '주요 일자리 창출사업 성별영향분석 평가 시행' '공공기관 비정규직 전환시 여성비율 확대'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 실태 조사' '여성 비정규직 근로자 실태 조사' 등에 대해선 수용하기 어렵다는 답변이 왔다.


예산 등 여러 이유로 또는 현실적으로 추진이 어렵다고 하지만 위원회에서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었다. 만약 위에 열거한 사업이 필요없다면 모르되 필요한 것이라면 추진하기 어렵더라도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그 의지를 듣고 싶은 것이었는데... 그저 이러저러한 이유로 추진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으니 맥이 풀리는 분위기가 한동안 흐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토론 중에 해당 실과의 어려움을 이해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 회의에 해당 실과장이 직접 답을 하거나 하는 적극적인 소통을 바라기도 했다.


그 다음 여성인재DB 구축에 대해선 여성가족부의 등록신청서 양식을 바탕으로 더할 것 더하고 뺄 것 빼서 양식을 만들자는 토론으로 이어졌는데, 여가부의 양식은 너무 기록해야 할 내용이 많아 오히려 작성을 꺼려하게 될 수 있다며 간편화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전북의 사례를 참고해 첫 설문의 문항은 1~2페이지 정도로 줄이고 차후 더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추가 기록하는 것으로 회의는 정리되었다.


그리고 경남도가 '양성평등기본계획'과 '경상남도성인지통계' '여성인재DB구축' 용역을 추진키로 하고 자문위원을 위원회에서 일부 맡기로 함에 따라 추천을 했는데... 성인지통계 용역 부문 자문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비전문가라 사양했지만 두 번 거절은 또 그렇기도 해서 수용하고 말았다. 일단 한다고 했으니 공부도 좀 더 하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아내한테 또 한 소리 듣겠다. 하는 일 좀 줄이라고. 그래도 변명할 꺼리가 있어 다행이다. 두어 달 동안 두어 번만 시간 내면 되는 거라서.


아직은 젊으니까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더 나이 들어봐. 하고 싶어도 못해. 70까지는 추억을 계속 쌓아나가야지. 그 후엔 뭐 추억을 먹고 살면 되는 거고.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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