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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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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개혁은 되었어도 여전히 10환짜리 지폐가 있던 시절 우리 가족은 부산의 전포동에 살았다. 내 나이 다섯살, 온동네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때다. 1968년 여름엔 40년이 넘은 지금도 잊히지 않은 추억이 하나 있다.

 

세발자전거. 아버지는 나의 독촉에 못이겨 세발자전거를 사주셨다. 얼마인가 기억을 할 수 없지만 당시 한국의 경제사정을 생각한다면 서민들이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참, 세발자전거와 위의 사진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서 설명하자면, 그 사건이 일어났던 때가 바로 이 때였기 때문이다. 사진 찍은 때가 먼저인지 세발자전거 사건이 터진 게 먼저인지 알 수 없다. 그 즈음에 집 앞으로 어떤 사진사가 조랑말을 몰고 지나가며 아이들 사진하나 찍어보라고 강권하기에 어머니는 마지못해 그러마고 했는데 돈이 좀 들어도 40년이 지난 지금 아들의 추억거리 안주가 되니 잘 투자한 셈이다. 어머니 고마워요.

 

사진에 얽힌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게 원래 내가 말에 올라 타려고 했다. 사진사가 날 말 안장에 앉힐려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살 먹은 동생이 말에 오르고, 동생이 말 등에 올라가고도 울지 않은 것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나는 말고삐를 잡아야 했는데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사진사는 자꾸 날더러 고삐를 들이미는데 난 겁이 나서 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가고 하는 수없이 사진사는 그냥 사진을 찍자며 고삐는 동생을 주고 나보고는 차려자세로 있어라고 했다. 그게 말처럼 되나. 말이 자꾸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데 어찌나 겁이 나던지. 혹시 팔이나 가슴을 물까 싶기도 하고 발로 찰까 싶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사진사는 셔터를 눌렀다.

 

이 시기에 구입한지 열흘도 되지 않은 세발자전거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가 저녁무렵이었다. 밖에서 자전거를 번갈아가며 타고 놀던 동생과 나는 어머니의 "밥먹으러 들어와"하는 소리에 자전거를 챙기지도 않고 그냥 쪼르르 들어갔다. 어쩌면 어린 마음에 집 문 앞에 있는 자전거를 누가 어찌하랴 하는 방심이 화근이었는지 모른다.

 

밥을 한참 먹고 있을 때 아버지가 "자전거는?"하고 물었다. 그제서야 밖에 그냥 놔두고 들어온 것이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총알같이 뛰어나가 봤지만 자전거는 이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뒤였다. 밥이고 뭐고 그 순간에 자전거를 빨리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섯 살이면 제법 어린 나이인데도 온 동네를 뒤집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결국 혼자서는 못 찾고 아버지와 함께 동네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수사는 며칠 계속 되었다. 누군가 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였다. 잃어버린지 열흘쯤 되었나 우리는 지치기 시작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한 말인지 내가 한 말인지 분명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세발자전거를 찾아다니다 훔쳐가기 아주 좋게 대문 밖에 남겨진 세발자전거를 봤을 때 "우리 저거 가져가자"하는 범행모의를 했었다. 아버지가 반대한 건지 내가 반대한 건지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우리는 그날도 해가 뉘엿뉘엿 질때까지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세발자전거에 대한 마음을 비웠다.

 

아마 아버지는 이 세발자전거 사건을 기억하시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어린 나이였어도 나에겐 아주 인상적인 경험이지만 아버지껜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아직 아버지께는 물어보지 못한다. 어머니라면 몰라도. 시시콜콜한 추억 잡담은 아버지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68년 부산 전포동, 이곳에서의 기억 중에 또 떠오르는 것은 내가 전철 다니는 길을 따라다니며 누군가 흘린 과자를 주워 먹었던 것과 만화방 아저씨 집에 있는 큰 개의 목줄을 잡고 있다가 흔드는 바람에 몇 미터나 끌려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들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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