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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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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옥 창원대 교수. 영화광이란다. 초6년부터 좋아했다고. 철학 등 여러 과목의 교수들과 인문학 강좌를 하다 보니 영화를 가지고 강의하게 됐다. MBC에도 출연하고... 원래 영화를 보는 사람인데... 이제 공부하게 되었다.


영화를 다 보여주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지만 시간이 12시까지라 50분 정도만 가지고 하겠다. 다음 시간엔 80분짜리. 12시 반까지 하겠다.



어벤저스 이런 영화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엄청난 인문학적 영화이기도 하다. 인문학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영화들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 영화제가 100개 이상된다. 아주 세분화되어 있기도 하다.


인간의 삶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 안에 인문학이 스며있다. 


영화는 뭐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가. 트뤼포 왈 "영화란 한 명의 희생자 즉, 절대적으로 불공정하고 섬뜩한 운명 앞에 놓인 한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다른 한편 이같은 상황을 낳은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일본인들은 "일본 죽어라" 하고 우리는 "헬조선" 그런 반응을 보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연쇄 살인마를 예를 들자면 영화는 그 인간이 왜 그 매카니즘에 휘말릴 수 없나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요즘 국내 영화의 경우 강력범죄에 대한 끔찍한 인 스릴러 장르릐 상업적 영화는 수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은 관과되고 있다.


우리는 영화 속의 인물들에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내밀한 자아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 왜 일찍 상영관에서 내려지는가.. 그런 영화다. 하지만 인문학적으로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면 대한민국 사람은 안 본다는 거다. 내가 이런 영화보려고 영화관에 왔나 이런 생각을 들게 하기도 한다.


"당신은 왜 그것밖에 못해?"라고 누군가 내게 지적질을 하면 사생결단을 하고 달려들게 하는데, 영화 속의 어떤 인물은 나를 대변하고 있어서 그 주인공을 통해 나를 통찰하게 된다.


<버킷 리스트> 잭 니컬슨, 모건 프리먼 주연. 랍 라이너 감독. 아버지도 유명 연예인. 칼 라이너. 코미디언, 시나리오 작가, TV드라마, 영화연출가, 영화배우... 아들 롭 라이너도 시나리오 작가에, 연출가에 영화배우에 할 거 다하는 인간이구만.


롭 라이너는 처음에 연극 배우가 되려고 했다. 애미상 연기상도 받았다고. 


<디스 이즈 스파이널 탑> 영국 락밴드가 미국에 가서 실패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상업주의 음악, 영화 비판.




<스탠 바이 미> 1986. 영화배우 리버 피닉스. 디카프리오 세대 아이들 네 명. 24살에 요절. 이 영화 끝나고 정신병원에 갈 정도로 연기에 몰입했다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1989. 맥 라이언 로맨틱 코미디. 이 영화로 맥 라이언 한국에서 인기 구가. 


<미저리> 1990. 케시 베이츠 . 원래 조연 배우. 그런데 이 영화를 통해 주연배우로 등극. 여우주연상 받음. 스릴러물로 지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영화다. 유명 소설 작가와 극성 팬의 이야기.


<매직 오브 넬 아일> 2012. 모건 프리먼 주연.




<버킷 리스트> 


잭 니컬슨. 1937년생. 1973년 마지막 지령. 1975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 간 새>

머건 프리먼 1937년생.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소 생크 탈출> <루시> 최민식 출연 영화. <벤허> 2016. 

저렇게 나이 들어서도 활동적인 사람. 

모건 프리먼 얼굴 점. 어렸을 때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유명해지고 돈을 벌어도 저걸 빼지도 않는 것 보면 대단하다 생각이 들기도.


'kick the bucket' 양동이를 차다. 죽음을 뜻하는 말. 여기서 버킷만 떼어와서 리스트를 붙인 용어.


카터는 원래 역사학과 교수가 꿈이었던 사람. 그러나 가족 부양을 위해 자동차 정비사로 평생을 일해. 그러던 어느날 말기 암을 선고받는다.


에드워드는 16살 때부터 막일로 자수성가. 재벌이 되었지만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에드워드도 말기 암에 걸렸다.


두 사람은 삶의 가치관도 다른 데 병원에서 두 사람이 만난다. 에드워드의 병원. 에드워드의 철칙. 병실은 혼자 들어가는 경우 없게 규칙을 정해. 카터와 한 병실 쓰게 됨.


아무리 항암 치료를 해도 1년 시한부 선고. 카터가 적은 버킷리스트를 보고 에드워드가 돈 걱정하지 말라, 당신이 평생 해보지 못한 것을 해볼수 있는 기회다. 도와주겠다고. 


카터의 부인이 하는 말 "암과 싸워야지!" 그런데 암이라는 게 싸워야 할 대상인가? 버티는 것 아닌가. 죽으면 암과 싸워서 졌다는 것인가.



이 영화는 오래 전에 봤다. 중반부부터 감상하는데 강렬한 인상을 받은 작품이라 그런지 장면 장면이 기억에서도 제법 또렷하게 재생된다. 사실 내가 연극을 다시 시작하게 된 배경엔 이 영화가 자리잡고 있다. 나이 더 들기 전에 연극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한 게 버킷 리스트 때문이었으니까.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느끼는 게 있는데.. 거참.. 두 영감쟁이 살날 1년도 안 남았다면서 스카이다이빙에, 스포츠카 드라이빙... 열정이 20대야. 전혀 아파보이지도 않아. 병실에선 그렇게 빌빌거리더니. 그런데 난 그 현상... 이해하지.


영화감상이 끝나는 시각 정각 12시. 야, 김 교수 시간 하나는 정확하게 맞췄네. 했는데... 이제부터 토론을 시작하잔다. 엥?! 


김 교수는 수강생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카터는 왜 버킷리스트를 떠났을까?"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버지니아의 전화가 왔을 때 뭐라고 했는지 떠올려보라고 했다. 아! 아.... 뭐라고 했는데... 뭐였지.... 하필 그 부분만 생각이 안나다니... ㅋㅋ. 


카터는 이렇게 말했다. "뭔지 모르지만 아주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다."

카터는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았다. 자신은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가족 부양을 위해 자동차 정비업을 선택했다.

자식들은 잘 키웠다. 일찍 부양의 족쇄에서 풀려나나 싶었지만 늦둥이를 낳는 바람에 다 키우고 나니 나이 60. 

어!? 나도 막내 다 키웠다 싶으면 60이 넘겠는데... 내 나이 56에 막내 겨우 13살이니.

뭐 그래도 내 버킷 리스트에 '늦둥이 키우기' 포함하면 되는 것. 


카터의 첫 번째 버킷 리스트는 장엄한 광경 보기다. 그래서 이집트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 광활한 지평선을 바라보지만 그 광경을 원한 게 아니었나 보다. 


카터는 에드워드에게 이 꼭대기에서 질문을 하나 한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에 대해 멋진 믿음이 있었다는 거 아나? 영혼이 하늘에 가면 말야,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하는데, 대답에 따라 천국행이 결정되었다는군.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는가?"


에드워드는 예스라고 대답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딸 때문이다. 딸이 결혼할 즈음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반대했고, 딸이 남편에게 맞는다는 얘길 들었을 때 '해결사'를 고용해 혼을 내주고 이혼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딸은 오히려 화를 내며 의절해버렸다. 그 이야길 카터에게 했으니...


"어떻게 내려가지?" 에드워드의 말. 이 장면은 작품의 모티브일 수 있다. 카터가 원하는 더 장엄한 광경은 히말라야다.


김경옥 교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게 버킷리스트에 들어간다고 했다. 음.. 나는... 뉴질랜드 동해안 절벽에 서 보는 것이다. 지금은 구글 지도를 통해 가끔 들여다 보지만 언젠가 정말로 가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볼 것이다.


카터는 왜 히말라야를 원했을까? 그 '완숙'한 나이에 쉽지 않은 도전이겠지만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접하는 광활하고 웅장한 광경은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 뭐라도 거기에 꽂히면 다른 아무리 좋은 거라도 만족스럽지 않을 테니까.


히말라야 턱밑에까지 갔다가 악천후에 의해 물러선다. 다음 기회로 넘기고 홍콩으로 떠난다. 홍콩에서 안젤리카라는 여성을 만난다. 그는 히말라야 8000까지 가봤다고 한다. 카터가 어떻더냐고 물으니 하늘이 까맣더란다. 그리고 밤이 되니 쏟아지는 별에 빨려들 것만 같다고 한다.


안젤리카의 말에 카터는 어떤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산꼭대기에 오른 사람이 말하기를 거기선 아무 소리도 안들린다고 했다가 곧 산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 산의 소리는 신의 소리였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피터 페터슨이 쓴 <신의 산>에 나오는 이야기다.


안젤리카가 카터에게 "진부한 표현 같지만, 방으로 갈래요?"라고 유혹한다. 카터가 거절하자 안젤리카는 돌아가고 카터는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고싶어졌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두 사람은 아메리카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카터는 얼마 있지 않아 숨진다. 가장 첫 번째 버킷 리스트 히말라야를 실현하지 못한채.


하지만 카터가 이루지 못한 소원은 에드워드에 의해 실현되고 에드워드 역시 비서에게 시켜 히말라야 높은 곳에 '불법'으로 묻힌 커피깡통 속의 카터 옆에 나란히 묻힌다. 10여 년 전에 봤을 때도 이 장면만큼 감동적인 것이 없었는데.. 오늘 봐도 역시 감동적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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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1990년 10월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니, 그때부터 문화부 기자만 줄곧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공연의 팸플릿을 다 간직하고 있다면, 그 양이 얼마나 될까? 사실 지금도 회사 책상 집 책상 책꽂이 곳곳에 널브러진 팸플릿들. 그나마 버려지지 않은 아직까지는 이것들이 소중하다. 내 기억의 한 단편이기도 하고 언젠가 내 기억을 도와줄 훌륭한 친구이기도 하기에. 그런데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오래지 않다. 다다음달 이사라도 가게 되면 팸플릿 뿐만 아니라 5년 전 버리고난 후에 다시 또 모이기 시작한 책들도 버림받을까 벌써 떨고 있다. 그렇게 안산다 안산다 해도 책꽂이를 더 사야할 만큼 불었다. 책이란 게 참...



삼각파도는 극단마산으로선 중요한 의미가 담긴 작품이다. 창작극이기도 하거니아 이걸로 전국연극제까지 출품했기 때문이다. 이에 얽힌 일화도 재미있다. 무대엔 뻘에 박힌 배가 한 척 등장하는데.. 이 소품을 어찌 형상화하나 고민하다가 마산 바닷가에 못쓰는 배가 한 척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걸 그대로 무대에 올렸다는 후문. 공연중에 바닷게도 기어나오고 했다는데... 이정도면 웃지못할 에피소드다. 전국연극제 사상 이처럼 무식한 무대는 전무후무하다고.


극단 마산의 8회 정기공연 작품이 <임금알>. 일종의 선입견 같은 게 내게 있었나 보다. 창원대 극회도 이 작품을 창립 초창기에 무대화한 적이 있다. 동아리방 사진첩에 꽂혀있는 모습을 보니 무대가 썰렁하고 배우들의 포즈도 썩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래서였나 보다. 워크숍 용으로 연습삼아 공연할만한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래서였다. 지난 경남연극제 때 심사위원을 맡은 오태영 선생을 만났을 때 막 그렇게 신비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그런데 오 작가와 함께 저녁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에...참  식당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그의 개인사 에피소드를 많이 들었다. 작가가 되려면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해야되는구나 싶기도 하고... 제발로 빵에 들어간 이야기까지... 여하튼 <임금알>이란 작품이 어두운 시대적 환경에서 갑갑한 심정을 풀어내보고자 쓴 풍자극이라 다시금 기회를 봐서 읽어봐야겠다.



극단 마산의 제1히 청소년극장 <방황하는 별들>/ 윤대성 작 현태영 연출. 학창시절 좋아했던 작가다. 윤대성과 이근삼, 이강백. 이 세 작자 뭔가 유사성이 있는 듯하면서도 나름 색깔이 독특한... 방황하는 별들... 이 작품을 본 듯한데... 기억이 거의 안 난다.



<위기의 여자> 이 공연 봤다. 당시 창대극회 공연 <들소>를 마치고 여유가 있을 때였는 갑다. 주인공으로 등장한 김소정 현 상상창꼬 상임연출은 <들소> 끝나고 바로 극단 마산의 이 작품에 투입됐나 보다. 극단 활동에 별 관심이 없던 터라... 사실은 당시 연극을 하면서도 늘 취업시험 공부에 매달려 있었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극단 활동에 눈을 돌렸어도 좋았겠다 싶긴 하다.



극단 창원의 2회 공연 <어떤 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때 벌써 극단 창원이 생겼었군. 극단 마산서 연출로 활동하던 현태영 감독이 창원에서 극단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던 때가 87년이었네. 한참 후인 줄 알았더니. 맞아, 이 시기 창원에 극단이 집중적으로 생겼던 것 같다. 극단 미소도 그렇고 부족도 그렇고...



1987년 경남대 21회 정기공연. <히바쿠샤>. 원폭 피해자들 이야기. 대체로 이 당시 극단이나 학생극의 소재가 사회고발성이 많은 것 같다. 객무의 문종근 감독이 연출한 작품인데 이 작품은 이후 극단 마산에서도 공연된다.



경남대 극회 정기공연인데 극단 마산 전용소극장에서 공연했었군. 이 역시 경남대 극회가 잘나간 배경이기도 하겠지.



극단 마산의 <돈내지 맙시다>. 1988년 2월 마산경찰서 맞은편 세림상가 3층에 전용소극장에서 공연.



팸플릿을 보면, 경남연극제가 당시 6회였고, 도내 9개 극단이 출품했음을 알 수 있다. 불씨촌, 부족, 벅수골, 마산, 어릿광대, 입체, 현장, 메들리, 터. 마산, 창원, 통영, 거창, 진주, 밀양의 극단들이다. 그리고 당시 경남대 완월대강당이 연극 공연장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단 부족의 <들소>는 내가 창원대 극회 작품으로 뛰었었다. 극단에 배우로 참여해달라는 박성근 연출의 제의를 받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7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자 맘을 먹었던 터라... 이때는 1년 휴학계까지 내고 부산서 지냈기 때문에 연극판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팸플릿들을 보니 대충 당시의 상황이 그림그려진다.


출연진을 보니 박명숙, 최규민 두 사람만 같은 배역을 가지고 경남연극제 참여했었군. 종갑씨가 내가 맡았던 뱀눈역을 소화했구나. 언제 한 번 그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구... ^^



6회 경남연극제에는 극단 창원에서 연출을 했던 현태영 감독이 극단 마산서 연출을 맡아 작품을 올렸다. <노비문서>. 윤대성 작가의 희곡. 등장인물에 아는 이가 많다. 고 김태성, 문종근, 오용규, 김종찬, 이태환, 김소정... ㅎㅎ.



천영형(천영훈) 현 극단 미소 대표는 당시 극단 어릿광대의 <망명정부주식회사>에 출연했었군. 88년, 이 해에 아마 미소가 창단했을 걸. 장은호 씨가 고수로 출연했구나.





극단 마산의 <노비문서> 24히 정기공연이다. 이 역시 윤대성 작가의 희곡. 문종근 감독, 강의 땐 사투리 때문에 무대에 별로 안 섰다더니 제법 많은 작품에 출연했구나.


경남대 23회 봄 정기공연 <아벨만의 재판> 이근삼 작. 



1988년 12월인데 극단 부족이 벌써 6회 정기공연을 올렸다. 상당히 활발한 공연활동을 했다는 방증이다. 조오튼 작 이순노 연출의 <미친 사람들>. 그래 당시 창원 중앙동에 주택가 지하에 전용소극장이 있었지. 몇 번 가봤더랬다. 다시금 생각하면 당시 아버지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 준비만 하지 않았더라면 극단활동을 열심히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왜냐면, 내가 안한다 안한다 해도 술로 유혹하면 바로 넘어가는 스타일이라. 첫 작품 <문밖에서>도 그랬고 두 번째 <들소> 역시 그렇게 말려들어 작품에 참여했었으니. <들소> 같은 경우 처음엔 대사가 별로 없는 붉은노을 역을 맡았다가 목소리가 안 맞다 해서 뱀눈으로 바꿨는데.. 으... 혼자 대사만 읊어도 40분짜리... 희한하게 그 긴 걸 어찌 다 외웠나 몰라.



연출은 맡은 이순노...선배는 음. 배우로도 뛰었구나. 당시 연출이 무대에 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동아리 선배들인 오세갑, 김경화, 이미화 등은 스태프로 일을 맡았었군.






극단 마산의 34회 정기공연 <메야 마이다>. 진주서 활동하던 서용수 선배가 처음으로 마산서 활동하기 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7회 경남연극제 대상, 연출상과 전국연극제 무대미술상을 받았다.



극단 마산 <사람의 아들> 이문열 작 현태영 연출. 이 작품은 극단 마산 전용소극장에서 봤다. 대학 시설 친구들과 신의 존재에 대해 밤새 토론하기도 했던 터라 작품을 보면서 '신과 인간'이란 화두를 들고 아주 깊숙히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다. 민요섭이 문종근, 조동팔이 김종찬, 여인에 김소정...모두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용 중심으로만 봐서 그런가... 그런데 형사를 맡은 김태성은 인상이 강렬해서였는지 그 모습, 목소리가 기억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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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복학하고서 처음 대학연극에 발을 들인 해다. 자연히 이런 저런 연극을 보기도 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희곡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국문과 안에 각 장르별 창작 그룹을 조직했었는데... 추동력이 모자라 얼마 하지 못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그게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된다. 그러면서 나는 또 더 연극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 괜한 썰을...


여튼 창원문화재단이 마련한 문화강좌 '화요명작예술감상회'를 통해 문종근 객석과무대 연출로부터 당시의 팸플릿 자료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언제 창원대 극예술연구회 동아리방에 들어가 30여년 전의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내가 한 작품 자료들도 그대로 남아 있는지... 음... 설레는군.



경남대 18회 정기공연. <모닥불 아침이슬>. 객석과무대 배우로 활동하다 2004년 돌아가신 김태성 선배의 연출 작품이군. 캐스트 중에선 현 객무 상임연출 문종근 감독과 이태환... 어.. 아는 사람이 이정도밖에 없네... 복학하기 전이어서 그런가 보다.



극단마산의 제3회 공연작 <시즈위밴지는 죽었다>. 현태영 연출.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 주차장 옆 보람의 집에서 공연됐다고. '보람의 집'? 없어진 지 15년이 다 된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위치가 아마도 지금의 마산의원이 있는 그 건물 아닐까 싶다. 90년대 중반 쯤에 음악 공연을 보러 딱 한 번 간 기억이 난다. 1986년도에 그곳에서 연극을 했다니 놀랍다.



공연을 축하한 극단을 보니 당시 마산에 터를 잡은 극단의 면면을 알 수 있다. 불씨촌(강경윤), 무대(이지훈), 사랑방(송판호), 어릿광대(박낙원). 의외로 거창 극단 입체가 함께 축하를 했다는 것이 이채롭다. 공연축하 광고를 고 추송웅 배우의 명복을 비는 내용으로 편집을 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명복을 빌면서 공연을 축하한다는 것이 어찌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고.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 배우 추송웅은 TV드라마 <달동네>에서 똑순이 아버지로 나와 큰 인기를 얻었더랬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다림질하면서 손과 고개를 교차시켜 "쉭! 쉭!"하던 모습. 그 추송웅 선생이 내 고등학교 선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또 얼마나 관심갖고 연기를 보게되었던지...





극단 불씨촌의 25회 공연. 알베르트 카뮈의 <오해>. 1986년 7월이면 가을 공연 앞두고 내가 한창 연극 연습을 하던 시기구만. 스태프나 등장인물에 아는 얼굴이 많다. 캐스트 중에 김소정 현 상상창꼬 상임연출, 기획 김미화, 연출 맡은 우정진은 이야기만 들었지 얼굴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구... 86년도 우정진은 몰라도 김경화 김소정은 창원대 학생있었는데... 불씨촌 공연을 했었구나.






경남대 극회 20회 정기공연. 11월 28일. 완월강당. 이 공연은 내가 봤다. 창원대 극회 학생들이 단체로 가서 본 작품이다. 당시 보면서 학생극치고는 정말 투자를 많이 한 무대라고 생각했다. 물론 작품의 수준도 당시 내가 출연했던 <문밖에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많은 등장인물을 소화할 정도의 동아리 학생이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고... 보고나서 우린 언제 저런 작품 하나 올려보나 그런 생각을 했으니.









창원대 극회의 11회 정기공연 <문밖에서>. 전대명 연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연출자는 전영도다. 왜 다른 이름을 썼는지 지금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뭔 이유가 있었겠지. 내가 맡은 연대장 역은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리허설 때 러닝타임 2시간 남짓. 그 시간 동안 내 대사는 총 11마디. 그런데... 첫 무대라 얼마나 떨었던지... 몇 안 되는 그 대사마저 까먹어버리고 온갖 사투리로 애드립을 쳐댔으니... 아, 지금 생각해도 낯이 후끈거린다.


문종근 연출의 강의에서 이 팸플릿을 소개하면서 괜히 나를 언급하는 바람에 수강생들의 시선이 죄다 내쪽으로.. 흐.. 게다가 문 감독이 박수까지 유도를... 어찌 낯을 들고 다니라구! ^^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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