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균 오동동야화17]국립극장 차지에 발휘된 이광래의 수완
앞서 16화에서 이광래가 이끌던 '극예술협회'가 있었지만 새로 '신극협의회'를 만들어 유치진이 대표를 맡게 하고 자신은 간사장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유를 17화에서 풀어놓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 있다.그 실타래를 풀어가보기로 하자. 광복 직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카프(조선공산주의 예술가 동맹의 약칭) 산하의 '연극동맹'이 온 연극계를 붉은 깃발로 물들이고 있을 때 유일무이하게 이에 대항하고 나선 단체(극단)가 민예요, 그러기에 그 민예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함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무대예술원 창립과 함께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 혹은 순전히 타의로 일본제국의 문화정책에 강제로 끌려나가 친일연극을 했던 사람들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38이북 지방에서 공산주의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남하한 이북지방 연극인들도 자연스레 여기에 합류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끼리끼리의 우정과 이해가 합쳐져 분파의식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연극계도 이북과 이남의 두 줄기 흐름이 은근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38 이북 사람들은 서항석을, 이남 사람들은 유치진을 떠받드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나라에서 고정급을 주는 국립극장이 탄생한 것이다.
사실 연극인들에게 고정급은 생활의 안정을 의미하고, 생활의 안정은 곧 좋은 연극을 할 수 있다는 등식은 지금과 다를 바 없다. 더욱이 연극인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예술인은 없을 것이다. 비가 많이 와도, 눈이 많이 내려도, 폭풍우가 거세게 불어도 극장은 관객이 끊어지고 관객이 끊어지면 흥행이 안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고정급을 받는 국립극장의 전속 극단이 어느 단체가 되느냐, 그리고 어느 단체가 개관 첫 공연을 갖게 되느냐에 전 연극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있던 광래는 일찌감치 '신협'의 대표자리를 대선배인 유치진에게 넘겨 놓고 국립극장 창설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국립극장이 창설되려 할 즈음 유치진이 극장장 자리를 한사코 마다는 것이었다.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잡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극장장은 서항석이 맡을 것이요, 서항석이 맡으면 극단 '신청년'이 전속극단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이에 이광래의 용산 갈월동 유치진 선생 방문이 시작된 것이다. 요즈음처럼 택시가 흔할 때도 아니요, 버스라야 몇십분만에 한 대씩 오는 것을 기다릴 수 없어 누상동 집에서 새벽부터 걷게 되었다. 그래야 동랑(유치진) 선생이 집을 나서기 전에 가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두어시간씩 걷자니 그 좋아하던 술도 끊어야 했다.
이러기를 열 엿새만에 "나라에서 극장장하라면 하지"하는 대답을 들은 것이다. 말하자면 온재의 '신협'을 위한 그 정성에 동랑 선생도 감격한 것이다.
한하균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이광래라는 연극인은 작품에 대한 열정도 어지간하겠지만 문화계의 흐름을 읽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계산도 아주 뛰어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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