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균 오동동야화29]김해랑 정진업에 이르기를 "풍각쟁이가 될텐가?"
신극이 유행하고부터는 신파극은 신극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겐,말하자면 경멸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무용을 하는 김해랑마저도 정진업이 혁신단을 따라다니자 나무라며 하는 말이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풍작쟁이가 될 텐가" 했다 하니 말이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의 박수를 이끌어내던 신파극의 독특한 플롯 구조가 당시 관객에게 먹혀들어갔을 터이다. 암튼 김해랑의 소개로 정진업은 이광래를 만나게 되나 보다.
극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은 뒤 이듬해인 1935년 이른 봄에 전기 천적막이 다시 불러 갔더니 역시 '극예사'란 간판을 걸고 소인극단체를 만들어 영남 일대를 순회공연하는 것이었다.
공연 작품은 월초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다. "창피하게도 옛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공연했던 <육혈포강도> <사나이답게 싸워라> 등이었다."
여기에서 연극인 정진업으로서는 치명적인 나쁜 버릇이 생겨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무대 위에 서기만 하면 무의식 중에 발작해버리는 참으로 안 좋은 버릇이다. 그것은 바로 '쿠세'라는 일본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연기자마다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월초에게는 '신파근성'이라는 못된 버릇을 지니게된 것이다.
대체로 좋은 연기를 하려면 언제나 주제의식을 머리 속에 머금고 상대 역과 호흠을 맞춰야 하는 법인데 리허설할 때는 앙상블을 잘 맞추다가도 무대에 서면 자기 혼자만 관객(물론 저질관객이다)에게 박수세례를 받는 신파 연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대본을 미리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맡은 역의 대사만 받아서 연습했기 때문에 생기는 숙명적인(?) 부담이다. 이런 버릇은 '사랑하는' 제자와 공연할 때도 어김없이 발작(?)했다.
1962년 12월 하유상이 쓰고 필자가 연출한 <고래>를 공연할 때도(이 대목은 후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주인공 고래 역은 월초가, 상대역인 화산댁 역은 조두이 여사가 맡았는데 평소 사생활에서나 리허설 중일 때는 제자인 조두이 여사를 남이 보면 부러워할 만큼 존중하고 아끼시던 분이 무대에만 서면 전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필자가 막이 내린 뒤 대선배이신 월초에게 대들라치면 "한군, 다시는 오버 액션 안 할게. 한번만 잘 봐 다우"하고 사정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나쁜 버릇도 처음 연극을 배운 데가 신파극단이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거의 일년 쯤 김삿갓처럼 방랑생활을 하던 중 마산으로 돌아와보니 경남 무용계의 개척자 김해랑 선생이 기다리고 계셨다.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아니면 풍각쟁이가 될 텐가?"
"어디 좋아서 유랑 극단에 따라 다니겠습니까?"
그제서야 김해랑 선생은 "내 친구 홍근(광래)이를 소개해 줄테니 서울로 가보게"하고 간곡히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6년 9월에 드디어 서울(경성)로 가게 되는 것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도하 각 신문에 '무작정 상경'이란 말이 거의 날마다 기사화되었듯이 월초도 그야말로 무용가 김해랑의 소개장 하나만 달랑 들고 이광래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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