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균 오동동야화22]재래식 화장실에 빠트린 심사노트, 이걸 어쩌나
이광래의 마지막 이야기일 듯하다. 1968년 사망 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광래에 대한 인상적이 이야기가 나왔다.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오랫동안 참여했는데, 한 번은 심사 노트를 변기에 빠트렸는데, 그 노트를 건지기 위해 똥을 다 퍼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건진 노트를 물로 헹궈내고 다른 노트에 옮겨 적기를 꼬박 하루동안 작업을 했다고 하니 성격이 독특하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나도 좀 그런 류의 인간형이긴 하다. 언젠가 한 번 한 시간여를 열심히 썼던 일기가 갑작스런 정전으로 날아가버렸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기록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에는 어찌 그리 애통하던지.
그런데 광래는 <기류의 음계>를 발표하면서 '작의'를 먼저 덧붙인 것이다. 약간 장황하지만 그의 실험정신을 탐색한다는 뜻에서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의식의 흐름이 오늘같이 혼잡한 때가 있었던가? 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잡다한 불협화음계가 소연한 가운데 현대의식은 갈피를 차리지 못하고 광망한다. 작자는 이러한 상황을 상징하여 '기류의 음계'라 정하였다. 그리고 '기류의 음계' 아래 이율배반적으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현대의식의 생태를 분석하여 의지적·정열적 변화의 경과를 내험하는 현대의식의 비장미를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구상화해 보려고 한다.(중략) 그러므로 의식작용을 화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의식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직관케 하기 위하여 작중 박환기의 인물을 3인으로 등장시켜 각각 지·정·의를 분탐케 하였다. … 실제인물로서 의식의 요소를 분탐케 하는 작의를 연출자와 연기자들이 잘 이해해주기 바란다."
8·15광복 전 현진건의 <무영탑>을 각색하면서 등장인물의 심상의 세계를 직관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시험해 본 바를 다시금 가다듬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한 것이다. 1958년 11월 18일부터 3일간 진주극장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물론 이광래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연출하면서도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자세로 온 정성을 다 쏟아부었으며, 특히 60년대 혜성처럼 나타났다 아깝게 요절한 탤런트 이우평 씨의 연기는 참으로 압권이었다."고 조연출을 맡았던 정인화 씨는 회고하고 있다.
사실 광래는 일상생활, 특히 술자리에서의 생활태도는 거의 상궤를 벗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웬만한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약속을 해 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그런데 연극과 관계되는 약속은 아무리 취중이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도리어 혼이 나곤 했다.
가령 진주 영남예술제 때(1953년)부터 개천예술제로 이름이 바뀐 1968년 작고하던 그해까지 딱 한차례(54년에는 동랑 유치진 선생이 참석하셨다)만 빼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돌아가신 그해 1968년에는 서라벌예대에 병가(당뇨병)로 휴직원까지 제출해 놓은 상태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으며, 또한 10월 29일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열흘 남짓 전인 12일부터 16일까지 심사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버티신 이야기는 지금도 후배나 제자들의 귀감으로 전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사를 하실 때는 절대로 대충대충 머리로 하지 않고 심사노트를 바탕으로 하여 과학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 작품에 대한 심사 메모는 적어도 국판노트 56쪽을 넘었다고 한다. 이 심사 메모를 모아 놓은 노트를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다가 빠트린 일화는 지금도 연로한 진주예술인들 사이에는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그 오물을 다 퍼내고 건져서 깨끗한 물에 씻어 새로이 정리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이 위대한(?) 작업을 진두지휘하였던 당시의 예술제전 사무국장 한동렬 씨는 지금도 혀를 내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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