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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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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써 이광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앞으로 다른 연극인 이야기에 엑스트라로 출연할 것이다. 연극동맹에 대항한 전력 때문에 인민국이 서울을 장악했을 때 피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끝내 유지했던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그의 작품 몇 개를 읽어보겠지만 한하균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작품에서도 그 성향이 드러난다고 하였으니. 또 민족주의가 세월을 타고 흐르면서 보수세력으로 정착화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겠다 싶다. 


이광래가 '연극동맹'에 대항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의 주구노릇을 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붉은 기를 들고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는 점을 들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선연극운동본부 결성 후 한 달만에 친일극 전력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1945년 9월 28일 나옹, 신고송 등이 탈퇴해 다시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을 결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다시 12월 연극본부하고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하고 통합해 조선연극동맹으로 재편됐다.(한국현대문학대사전) 


이유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통합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으로 재편했는데 이에 따른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이 건설본부쪽 애들과 그렇게 대립각을 세웠어도 더 큰 카테고리가 통합하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평생동안 염원하던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교육자요, 지도자였다. 1948년 서라벌 예대가 정식인가를 받기 전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1968년 타계하기 두 달 전까지 서라벌예대의 연극영화과 지킴이 교수와 동국대학, 서울연극학교(드라마센터) 등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강단에서 강의를 마다하지 않았던 까닭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것도 주먹구구식으로 연출하고 연기하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심리락, 민속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미학 등 남들이 모두 싫어하는 비인기 과목인 보조과학에 더 무게를 두고 강의했던 것이니, 이는 모두 연극인의 질적 향상을 염두에 둔 까닭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식이라든지 허세라든지 조작된 포즈라든지, 온갖 부수적인 사치를 배제하고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이해로써 사람을 대해주기 때문'(1971년의 <현대연극> 내 김상민의 '인간 이광래' 중)에 제자들의 존경을 받은 지도자였다.


또한 광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습작기의 작품인 <어막의 일야>를 비롯해 <지는 해>(34년) <촌선생>(35년) <석류나무집>(37년) <해질무렵>(37년) 등 초기 작품은물론 그의 40편에 달하는 거의 모든 작품 밑바닥에는 겨레사랑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8·15 직후 우리나라에 "쏘련 놈에 속지 말라. 미국 놈 믿지 말라. 일본 놈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하라"는 참요가 한때 유행했었는데 광래는 술이 거나해지면 "이 참요 속에 진리가 있단 말야?"하고 몇 번이고 되뇌이곤 했다고 한다.


어쨌든 광래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적색테러는 물론 백색테러와 철저하게 대항했던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온 나라의 연극계가 아니 어제까지 친일하던 연극인들이 '연극동맹'을 중심으로 하여 붉은 깃발을 휘두르고 있을 때 1945년 10월 오직 광래만이 민족예술무대(약칭 민예)를 조직하여 그들과 대항하여 싸웠다. 이때 북에서 피란 내려온 서북청년단(우익 행동부대)이 좌익의 테러를 막아주겠다고 나섰지만 이광래가 단연코 거절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도 6·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자마자 '연극동맹'에서는 유치진, 서항석 선생들을 색출하려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지만, 거기다가 이광래를 꼭 찾아내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날뛰는 판국이었다. 한강이 끊어져 도강할 수 없게 된 광래는 부득이 처가가 있는 경기도 여주 땅으로 피신하여 구사일생으로 악몽같은 90일을 견딘 것이다.


이제 그가 활약했던 이력을 정리해 봄으로써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한국문학가협회 이사 및 희곡분과 위원장(1965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57년), 한국연극협회 이사(1962), 대한민국문화포상 수상(1963), 대한민국예술원상(1967) 등등.


중천에 있던 해가 서녘하늘에 쓰러질 때는 찬란한 낙조를 남기듯 우리 연극계에 많은 일을 하고서도 별달리 야단스럽지 않았던 이광래 선생이 1968년 10월 29일 지병으로 타계하자 갑자기 우리 연극계는 한 기둥이 뽑힌 허전함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남녘을 바라보고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대로 지금 망우리 묘지에 묻혀 있는 이광래 선생. 그가 말한 남녘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고향 마산이리라.


/참고문헌: <온재 이광래 연구>(김홍우), <한국연극사>(장한기), <연극연감>(연극협회)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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