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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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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쓰러지면 큰 도인이 나타난다는데…

통영 벽방산 안정사의 산내 암자 은봉암 성석(삼도사바위)에 얽힌 이야기


인터넷에서 사찰 사진을 검색하다 보면 커다란 칼처럼 생긴 바위가 암자 기와에 딱 붙어 있는 사진을 발견할 때가 있다. 독특한 모습이어서 워낙 잘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통영 벽방산 안정사 산내 암자 은봉암과 은봉성석 사진이다.


이 은봉성석이라는 바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얽혀있다. 은봉암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장파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높이 7m의 이 은봉성석 덕에 이곳은 벽방산 안정팔경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은봉암은 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제목의 책을 쓴 성철 스님이 1951년 하안거를 한 곳이기도 하다.



통영시 광도면 덕포리를 지나는 길. 석가산의 기암이 오묘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반긴다.


전국을 떠돌며 운수납자 생활을 한 성철 스님이 은봉암 성석에 얽힌 전설 때문에 일부러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였겠나만 전설은 원래 이곳에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바위가 하나씩 쓰러질 때마다 큰 도인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하나가 쓰러지면 그때 마지막 도인이 나타난다는 얘긴데, 그 때문에 이 바위들을 삼도사(三道士) 바위라고도 부른다.



안정사 주차장에 도착하면 벽방산 숲길 안내도를 만난다. 벽방산 650m, 고성 통영 거제에선 가장 높은 산이다. 주차장에서 은봉암까지 1㎞ 거리다. 시간도 30~40분 거리다.



벽방산의 유래를 써놓은 안내판이 있다. 벽방산을 불가에선 벽발산이라고 부른단다. 부처의 제자 가섭존자가 벽발(바리때)를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어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벽방산의 정상은 상봉, 또는 칠성봉이라고 부른다.


600년 전 첫 번째 바위가 쓰러졌을 때 해월선사가 득도했으며 그리고 300년 뒤엔 종열선사가 득도했다. 이제 삼도사 바위는 마지막 한 분의 득도를 기다리며 하단부 금이 간 채 세월을 보내고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삼도사 바위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한다. 통영시지에 그 내용이 실려있다.


먼저 두 번째 득도한 종열선사가 주인공으로 전하는 전설이다.


300년 전 한 부인이 어린 자식 하나를 데리고 살기 좋은 따뜻한 고장을 찾아 거제도에서 작은 나룻배에 몸을 싣고 건너편으로 바라보이는 고성땅 뭍으로 건너고 있었다.


나룻배가 바다 가운데쯤에 이르자 부인은 갑자기 산기가 있더니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 순간 넘실대던 파도가 멎어 해변이 마치 거울같이 반듯해지며 일순간 온 세상이 얼어붙은 듯 돛단배가 꼼짝 않고 그 자리에 붙박였다.



벽발산 안정사 일주문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금단청에 지붕을 높이 올려 위엄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사찰 안으로 들어가려면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일주문의 위치와 방향이 애매하게 되어 있다.



큰 바위 위에 자그마하게 여러개를 쌓아 올린 막돌탑. 여러 사람이 저마다 정성을 들여 소원을 빌었으리라.


놀란 사공이 “이는 분명히 이곳 바다의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 분명하다.”라면서 갓 태어난 아기를 용왕님께 바쳐야만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온전히 살아날 수가 있다고 하면서 아기를 바다에 던져 고사 지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인은 절대로 아기를 버릴 수 없다며 대신 아기의 탯줄을 얼른 끊어 바다에 내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다시 물결이 일며 배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공은 열심히 노를 저어 무사히 해안에 다다르자, 부인에게 “이 아기는 예사로운 아기가 아닌 듯 싶으니 앞으로 훌륭히 키우시오.”라면서 뱃삯마저 사양했다. 이렇게 하여 지금의 광도면 황리 해안에 내린 부인은 어린 맏아들을 걸리고 갓 태어난 아기를 안은 채 면화산 기슭 갯가인 춘원포(春元浦)에 정착하게 되었다.


어느 듯 10년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벽방산 은봉암의 노스님이 부인에게 찾아와서는 댁에 서기가 어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큰 인물이 자라는 것으로 여겨지니 지난날 나룻배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을 부처님 곁에서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어떠하냐며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종열선사(宗悅禪師)가 출가하게 되었다. 종열이 입산하여 장좌불와 수도를 한 지 10년 되는 어느 날이었다. 이곳 암자의 왼쪽에 높이 4m에 달하는 바위 하나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렸다.



안정사를 지나 은봉암으로 오르는 등산로. 10월 하순이라도 남쪽 따뜻한 지역이어서 그런지 단풍이 많이 들거나 낙엽이 수북이 쌓이진 않았다. 고즈넉히 걷는 운치가 있는 길이다.



이곳도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그런지 도토리를 먹는 산짐승들이 별로 없나 보다.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이 제법 많이 깔려 있다.



드디어 다다랐나 보다. 숲길 밖으로 훤하더니 비석같은 바위가 먼저 반긴다. 특이해 보이는데 오랜 세월 이런 바위를 그대로 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 순간 종열은 도를 깨치고 ‘게송’을 읊으며 마당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본 노스님은 젊은 수좌가 과연 득도한 것을 언뜻 알아차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종열선사는 축지법을 행하여 사흘 만에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등의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런 전설이 얽혀 있어 통영 사람들은 ‘낙하암이문(落下岩異聞)’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너지는 바위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란 뜻일 테다.


또 다른 전설로 주인공이 해월선사인 경우다.



그렇게 오래 걸었던 건 아니지만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니 푹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이 계단만 오르면 은봉암 성석을 볼 수 있다.



은봉암 대웅전 격인 극락보전과 은봉성석이 눈에 들어온다.



은봉암 기와 끝에 칼처럼 생긴 바위가 딱 붙어 있다. 은봉성석이다. 삼도사바위 중 마지막으로 남은 바위다.



은봉성석 하단부에 금이 가 있다. 밀치기만 해도 무너져버릴 것 같다. 성철 스님도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지만 잘 버텼던 바위가 어느 누가 득도를 하면 무너져내릴까?



은봉성석 뒤에서 본 모습이다. 왼편에 있는 바위도 삼도사 바위로 누워있는 형태다.



등산로를 좀 더 올라가 촬영한 삼도사바위. 나머지 바위 두 개는 무너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이야기를 꾸민다면 두 번째 전설처럼 헤올이 10년 수도를 마치자 쩍 갈라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싶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어느 봄날.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해에 돛단배 한 척이 육지로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여보, 우리가 마치 요람에 든 아기 같구려.” 외로운 섬 생활을 청산하고 육지로 이사하는 노부부는 더없이 흡족했다.


그들이 이처럼 즐거워하는 것은 배 안의 아늑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식이 없어 적적하던 이 부부에게 뒤늦게나마 경사가 생긴 것이다. “뱃속의 아기도 기분이 좋은가 봐요.” “, 그래요!” 노인은 미처 아기 생각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웃었다. 육지에 오르면 집을 마련하고 아기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룰 꿈에 부풀어 얼마쯤 왔을 때다.


“아니 배가 왜 꿈쩍을 안 할까?” 노인은 재빨리 노를 챙겨 저었다. 그러나 배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뿐인가. 찰랑대던 물결도 굳은 듯했다. “여보, 제 뱃속의 아기도 꼼짝을 안 해요.” “아기도 놀지 않는다고?”


노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모처럼 희망을 안겨준 태아마저 움직이지 않는다니 그저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으앙!” 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죽음처럼 고요한 바다의 침묵을 깼다. 예기치 못했던 순간적인 해산이었다.



은봉암에서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정상이 상봉 또는 칠성봉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은봉암 뒤편 바위 위에 오르면 단풍 든 사람주나무와 고로쇠나무, 당단풍이 섞여 어울려 있다.



은봉암 앞에는 여러 고로쇠나무가 나란히 서있다.



아래에서 삼도사바위를 올려다 본 모습. 앞에 있는 바위들이 무너져내린 것으로 상상했던 것일까.


“아들이다!” 정신을 차린 듯 노인은 엉겁결에 소리쳤다. 학수고대하던 아들을 얻고도 공포와 불안에 잠긴 노부부는 탯줄을 끊어 바다에 던졌다.


그 순간 또 이변이 생겼다. 탯줄이 바닷물에 닿자마자 배는 언제 멈췄느냐는 듯이 항해를 계속했고 바닷물도 정겹게 출렁거렸다. 아기의 건강한 울음소리는 경쾌하게 바다에 울려 퍼졌다.


신기하게 태어난 그 아기는 참으로 비범하게 자랐다. 노인은 바다마저 숨죽이게 하고 태어난 아들 이름을 헤올이라 했다. 커갈수록 재주가 뛰어났다. 책 읽기를 즐기던 헤올은 열 살 되던 해 입산의 뜻을 밝혔다. “, 입산출가를 하겠다고?” “, 부모님 슬하를 떠나 도를 닦을까 합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네 나이 이제 겨우 열 살인데 도를 닦겠다니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헤올의 부모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보통 자식이 아님을 깨달은 노인은 할멈을 달래 헤올의 출가를 허락했다. 헤올은 자신에게 영감이 계시하는 대로 발길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 상촌마을 뒤 벽방산 은봉암. 그 암자엔 고매한 도승이 한 분 있었다. 스승을 만났으나 나름대로 신념을 지닌 헤올은 도승의 가르침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스님께서 절 어리다고 하심은 마치 제 부모님께서 출가를 걱정하시던 자애로운 정과 같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스님, 제가 암자 밖 저 큰 바위에서 10년 간 도를 닦게 해주십시오.”


꾸지람도 해보고 달래도 보았으나 헤올의 뜻은 돌처럼 굳었다. 기어코 헤올은 거대한 바위에 도의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계절이 바뀌어 살을 에는 듯한 겨울 한파가 몰려왔다.


“헤올아, 바람이 차다. 네 힘으론 이 추위를 이기지 못할 테니 어서 암자로 가자.” “아닙니다. 꼭 이겨내겠습니다.” 2, 3년 해가 거듭함에 따라 헤올은 청년으로 변해갔다.


“벌써 7년째다. 헤올아, 이러다간 입도하지도 못한 채 쓰러지겠다.” 도승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저를 지켜봐 주십시오.”



안정사 대웅전. 안정사는 위 은봉암보다는 좀 늦은 신라 무열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 시대엔 14개의 방을 갖춘 굴지의 사찰이었다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은 상당히 규모가 줄었다. 안정사의 동종은 보물 제16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10년이 되던 날 도승은 더 이상 볼 수만은 없어 잣죽을 끓여서 헤올에게 갔다. “그 자리에 앉은 지 벌써 10. 네 힘으로 어지간한 것을 이제 알겠으니 이 잣죽이나 먹고 깨달음을 기다려라.”


헤올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 “아니, 얘가?” 도승은 헤올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직감했다. 노스님이 섬짓 놀라는 순간 갑자기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면서 헤올이 앚은 거대한 바위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제야 잠자코 있었던 헤올이 몸을 털고 일어났다. “스님, 너무 오랫동안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습니다.” “과연 크게 깨쳤구나.” 노스님은 헤올이 신통했다.


그 후 종열이란 젊은이가 이 바위에서 10년 정진 후 깨달음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노스님과 헤올, 그리고 종렬 등 세 명의 도사가 깨달음을 얻은 이 바위를 삼도사 바위라 불렀다.


600년 전 혜월선사의 이야기와 300년 전 종열선사의 전설이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따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달리하며 가미된 듯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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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찾아서]벽사 의식 짙은 굿판 ‘진주오광대’

다섯 문둥이와 팔선녀 등장 특징…풍자에 예술성 더한 연희


진주오광대는 다른 오광대와 비교하면 과장이 짧은 편이다. 4, 5과장을 하나로 합쳐 연희를 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총 4과장이 된다. 마산과 창원의 오광대가 7과장인 거에 비하면 연희가 상당히 압축되었거나 생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광대는 합천 밤마리오광대에서 전파되었다고 보고 있는데 대개 5과장으로 되어 있다.


오광대라는 말, 여러 설이 있다. 5개 과장으로 되어 있어서 오광대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주로 광대놀이 첫 과장에 등장하는 황, , , , 흑의 오방신장의 광대를 두고 이름이 붙여졌다는 주장도 있다.


오광대란 게 경남지역의 탈놀음에만 붙여진 이름인데다 정월대보름에 주로 행해진 놀이였다는 점에서 벽사의 성격이 강했기에 오방신장을 두고 오광대란 이름이 지어졌다는 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여러 오광대놀음 중에서 진주오광대는 벽사의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1과장에 오방신장무가 배치된 데 이어 2과장인 문둥이 과장에서도 다섯 가지 얼굴색을 가진 문둥이가 나와 춤을 추고 극을 풀어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번 진주오광대에 대한 기록은 지난 103일 양산 삽량문화축전 때 연희된 것을 바탕으로 했다. 시간의 제약 때문에 4과장 중에 노장이 소무를 유혹하여 춤을 추는 부분은 빠진 점이 아쉽다.


첫째 마당.


1과장인 오방신장무.중앙과 동서남북의 신들이 진춤을 추고 있다.


오방신장 중 중앙 황제신장의 모습. 역신을 물리친다는 처용도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사대천왕도 그렇거니와 옛사람들은 악귀를 물리치는 신들의 모습을 무섭게 표현했다는 게 우리의 독특한 의식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되면 오른쪽에서 오방신장이 차례로 춤을 추며 등장한다. 오방신장의 모습은 다른 가면과 달리 특이한 점이 있다. 오방색의 중치막(소매가 곧은 두루마기)을 입고 있으며 무당이 쓰는 깃이 달린 호수갓을 썼다. 얼굴은 길쭉하다. 게다가 액을 쫓는 역할임을 고려하면 영락없는 처용이다. 처용이 삼국유사에서 표현되었듯이 그는 용의 아들로 신적인 존재다.


오방신장은 신라 헌강왕 때 역신을 쫓은 처용처럼 연희의 시작에 나와 마을에 깃든 역신을 쫓아내는 진춤을 춘다. 다섯 신장은 중앙과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오방진을 펼치고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며 춤을 추는데 때론 중앙 황제신장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진춤을 추기도 한다.


역신을 쫓아내는 춤이 끝나면 들어온 반대쪽으로 퇴장을 한다. 들어올 때엔 황제신장이 먼저 들어왔지만 나갈 때엔 맨 나중에 퇴장을 한다.


둘째 마당.


2과장은 다섯 문둥이들이 나와 병신춤을 추고 화투놀이를 하며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마당이다.

문둥이 마당에 어딩이가 등장한다. 손님병을 앓는 자식을 데리고 나오는데 문둥이들의 노름돈을 훔쳤다가 곤혹을 치르는 과정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문둥이들이 투전판을 벌여 노는 장면.

어딩이가 판돈을 훔쳤다가 문둥이들에게 잡혀 매질을 당하려는 순간 마마를 앓는 아들 무스러미가 달려나와 아버지를 감싸 보호한다. 몇 번이고 그러한 행동이 되풀이 되자 문둥이들도 이들을 용서한다.

노름돈을 모두 어딩이에게 줘버린 문둥이들, 오히려 좋은 일 해서 기분이 좋다며 멋드러지게 품판을 벌인다.


문둥이 과장이다. 악사들의 연주에 다섯 문둥이가 여러 방향에서 등장해 문둥이 춤을 춘다. 다 떨어진 부채를 든 문둥이도 있고 바가지를 든 문둥이도 있다. 이들의 신분을 가늠케 하는 소품들이다.


과거에 이들의 신분이 어쨌건 간에 현재로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불쌍타 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굿거리 장단에 덧배기춤을 이어가더니 세마치 가락에 흥도 낼 줄 안다.


그런 와중에 얼굴에 마마 자국 가득한 무스러미를 업은 어딩이가 등장한다. 어딩이가 행색은 그래도 양반 출신이라고 하자 문둥이들이 놀린다. 어딩이를 쫓아낸 문둥이들은 노름판을 벌인다. 쫓아낸다고 쫓겨갈 어딩이가 아닌 모양이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기회를 보아 노름판의 돈을 슬쩍 훔쳐 달아난다.


이 과장은 여러 형태로 연희가 되는데 때론 어딩이가 포청에 신고를 해 노름한 문둥이들이 잡혀가기도 하는데 이 판에선 문둥이들이 도망간 어딩이를 잡아 매질을 하려 한다. 어딩이가 매를 맞으려 할 때마다 무스러미가 가로막는다.


어딩이는 자식 병을 고치고자 그랬으니 잘못했다며 용서를 빈다. 사연을은 문둥이들은 그냥 봐주자고 하고 보낸다. 그러고는 한판 신나게 품바타령에 춤을 추고는 말뚝이의 등장과 함께 퇴장한다.


셋째 마당.


어느 오광대놀음에서나 주인공을 뽑으라면 단연코 말뚝이다. 의식으로 치면 오방신장무이겠으나 연희로 치면 말뚝이다. 진주오광대의 말뚝이가 추는 덧배기춤은 일품이다.

진주오광대는 다른 오광대와 달리 양반이 말뚝이를 부르는 게 아니라 말뚝이가 양반들을 불러세운다. 그리고 양반의 약점을 열거하며 코를 납작하게 만든다.

또한 진주오광대의 특징이랄 수 있는 팔선녀 춤. 팔선녀가 등장하고 잠시 말뚝이도 어울려 놀다가 퇴장한다.

팔선녀 중 한 사람이 교방춤을 추고 있다.


양반과장이다. 말뚝이가 먼저 등장하는 게 다른 오광대의 양반과장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오광대 특유의 “야, 이노옴~ 말뚝아!”하는 대사가 없다. 대신 말뚝이가 생원을 불러 이런저런 말로써 골탕을 먹인다.


그런 즈음에 팔선녀가 등장하고 양반들은 퇴장한다. 팔선녀가 말뚝이를 둘러싸고 규방춤을 출 때에 말뚝이도 한 가락 어울려 추다가 퇴장하면 무대는 팔선녀 판이 된다. 오광대에서 팔선녀가 등장하는 것은 진주오광대 뿐이다.


팔선녀는 조선 후기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오광대에 문학작품의 내용을 끌어들여 연희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넷째 마당.


영감과 할미의 상봉 장면. 마산과 창원의 오광대에선 둘 다 서로를 찾아 떠돌다 만나는데, 가산오광대는 영감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진주는 영감이 집으로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할미가 영감을 찾아 떠난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게 처리되고 있다. 할미의 아들이 요강을 비운다든지, 봉사나 의원, 무당의 등장 등이 집이라는 상황의 방증이다.

영감의 발길질 한 번에 할미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자 영감은 봉사를 불러 경을 한다. 봉사의 갓돌리기가 압권인데 다른 오광대에 비해 속도감을 느끼기엔 좀 부족하다.

오광대의 기본 이야기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과장이 영감할미 과정이다. 인근의 가산오광대에선 영감이 쓰러지고 통영오광대에선 작은어미에 의해 할미가 쓰러졌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상여를 탄다. 진주오광대의 할미는 굿을 통해 다시 일어난다.


영감할미과장. 할미가 굿거리 장단에 춤을 추며 등장한다. 한바탕 춤을 추고 아들을 부른다. 어린 광대가 역할을 맡았다. 할미 이야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게 소변을 보는 장면이다. 그런데 직접 요강을 뿌리는 게 아니라 아들에게 뿌리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감 할미의 만남. 그렇게 만났는데, 영감에겐 색시 둘이 딸려왔다. 둘 다 이름에 공주가 붙는다. 시기질투에 불타는 할미는 색시들에게 공격을 퍼붓고 이를 말리는 영감과 옥신각신 다투다 발로 차서 넘어뜨린다.


영감은 아들을 시켜 봉사를 부르고 봉사가 경을 외워도 할미는 미동도 없다. 다시 의원을 불러 치료를 하나 꼼짝 않는 게 할미는 아마도 죽은 것 같다. 봉사에 이은 의원 등장으로 마당은 웃음으로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무당을 불러온다. 무당이 진오귀굿을 펼치며 영감을 때리기도 한다. 그러자 할미가 의식을 차리고 일어난다. 봉사의 경과 의원의 의술로도 깨어나게 하지 못했던 사람을 굿이 살리는 것으로 구성된 것은 진주오광대가 무속에 더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할미가 살아나면서 모든 광대들이 무대에 나와 흥겨운 춤을 추고 마당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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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타작에서 망시논매기까지 웅상농청장원놀이

경남무형문화재 제23호…103일 양산삽량문화축전에서 시연


양산의 최대축제인 삽량문화축전이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양산천 둔치 인근에서 열렸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3호인 웅상농청장원놀이는 이튿날인 3일 오후 315분 특설무대 앞마당에서 펼쳐졌다.


농청, 무슨 말일까? 인터넷에서 농청놀이로 검색하면 수영농청놀이와 마산농청놀이가 나온다. 농청이란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사일을 의논하거나 놀려고 지은 집이다. ()자가 붙었다고 해서 관청은 아니다.


농청의 유래는 두레로 보고 있다. 두레라는 것이 농사철 일손을 덜고 상호 협력하고자 만들어진 조직 아닌가. 지역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의 자생적 조직인 농청은 고문격인 좌상을 중심으로 행수, 들임사, 방목감독, 보감독, 수총각 등의 소임자로 구성되어 있어 조직적인 두레 활동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장원이란 말은 왜 붙었을까? 백중을 즈음해서 농사일이 거의 끝나면 어느 집의 농사가 가장 잘되었나 품평회를 하는데, 여기서 가장 잘된 집이 장원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웅상농청장원놀이는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 세시기 형태로 재구성한 놀이인데, 봄에 보리타작에서부터 가을 마지막 논매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1. 등장






100여 명으로 구성된 웅상농청장원놀이 구성원들이 풍물을 치며 너른마당으로 나온다. 풍물패가 앞장서고 뒤이어 농민들이 농사일에 쓸 도구들을 챙겨 줄을 지어 뒤따라 온다. 상쇠 안내로 관객이게 인사를 하고 나면 삿갓과 도롱이, 망태기 등 농사도구를 바닥에 놓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다.


2. 농사일 시작





너른 마당 가운데엔 황소를 앞세워 써레질을 하고 건너편엔 아낙들이 모를 찐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남정네들이 보리타작을 한다. 일련의 과정은 동시에 진행된다.


아낙네들의 모찌기가 끝나면 줄을 맞춰 모를 심는다. 모심기 소리가 구성지다. 힘든 농사 심신을 달래준다.


3. 농신제





모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당산에 모여 농신제를 지낸다. 풍년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제사상은 간소하다. 북어포와 포도, 사과, , , , 대추, 그리고 술이 마련되었다.


4. 농청회의






농청회의는 작년 농청 소임자들이 마을 사람들 앞에 나서서 행수부터 들임사, 방목감독, 보감독, 수총각 등을 선출하게 되는데 이번 해엔 지난해 소임자들이 그대로 유임됐다.


농청회의 중에는 새로 이사 온 마을 사람이 소개되고 소임자 중 한 사람은 들돌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힘자랑도 한다.


5. 용신제


농청회의가 끝나면 풍재와 수재, 충재를 막기 위한 용신제를 지낸다. 용신제는 특별한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긴 나발을 불고서 소리를 하며 진행된다.


6. 망시논매기





망시논매기는 아시논매기, 두벌논매기에 이은 세 번째인 세벌논매기다. 마을 사람이 총동원되어 논의 끄트머리에서부터 논을 매면서 모여든다. 모내기가 끝나면 행수가 농사가 마무리되었음을 알리면 모두 환호를 지른다.


7. 품평회





망시논매기가 끝나면 바로 품평회가 진행되고 가장 잘된 농가는 장원으로 뽑힌다. 장원으로 뽑힌 농가의 상머슴은 소 등에 올라타고서 집으로 향한다. 이때 두레에 참여했던 모든 이가 상머슴의 뒤를 따라 장원농가로 간다.


8. 지신밟기와 칭칭이 풀이





장원농가에 도착하면 잔치가 벌어진다. 풍물단은 지신밟기를 하고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마련된 술과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즐긴다. 잔치의 마지막은 칭칭이풀이로 신명나게 흥겨운 한마당을 펼치며 놀이는 막을 내린다.


놀이가 끝나면 처음처럼 참가자들이 관객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뒤풀이. 뒤풀이에는 나동연 양산시장이 꽹과리를 잡고 흥을 돋우며 참가자들과 함께 대동 한마당을 펼쳤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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