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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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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삼문동 수변공원이다. 잡초가 듬성듬성 끈질긴 생명력으로 초록을 자랑하고 있지만 대부분 잔디가 깔려있어 걷기에도 폭신하니 좋다.


마침 간 날 수변 산책로는 공사 중이라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골프장(박세리가 치는 골프와는 다른)에서 모형차 경주장을 오가면서 느끼는 분위기는 광활하다는 것이다. 가족 단위로 놀러 온다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다. 


골프장은 연 6만 원, 하루 3000원 회원제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재미있어 보였다. 


다음에 아내와 함께 오게 되면 한 번 쳐볼까? 아, 골프채를 사야 하는 건가? 흠..


겨울 평일인데다 공사중이어서 사람들이 별로 없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제법 다닐 것 같다. 산책로는 공사중이지만 대신 잔디밭을 걸어다닐 수 있으니까. 폭신폭신 밟히는 잔디여서 걷는 재미가 있다.  

 


장미정원.

모형자동차 경주장.

도로변 데크 산책로.

육각정 쉽터 앞에 걸린 공사중 펼침막.

왼쪽 출입금지 펜스와 잔디밭으로 난 사람들이 다닌 흔적.

누런 잔디와 초록의 잡초(?) 군락.

겨울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로수와 아파트의 조화.

골프치는 사람들.

골프장.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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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환·약육강식·농락 풍자 ‘거제영등오광대’
거제영등민속보존회, 22일 거제문화예술회관서 7회 정기공연



거제영등오광대는 짜임새 있는 5과장으로 구성됐다. 합천에서 시작한 오광대가 경남 각 지역으로, 나무가 가지를 뻗어내듯 갈래갈래 나뉘어 거제 영등(학산)에 와서는 고갱이만 가려뽑은 듯 핵심 5과장으로 정립, 복원됐다.

거제영등민속보존회는 지난 22일 거제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거제영등오광대’ 제7회 정기공연을 펼쳤다. 이 행사는 수년째 소년소녀가장돕기와 함께 진행되었다.


탈고사를 지내는 영등오광대 보존회 관계자들과 탈꾼들.


오광대 탈춤의 전파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면, 대체로 세 갈래인데, 하나는 합천 초계 밤마리에서 진주오광대, 가산오광대로 연결되고, 또 하나는 마산오광대를 거쳐 통영오광대로 왔다가 여기서 고성오광대와 거제영등오광대로 전파되었다. 나머지 한쪽은 수영야류로, 동래야류로 해서 김해오광대로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전파 과정은 추정일 뿐이다. 그외 다양한 설이 있다.

거제영등오광대의 경우, 1900년에 오광대놀이를 하였다는 학계의 논문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바, 1930년에는 학산(영등)에 살았던 노인들에 의해 말뚝이가 양반을 풍자하는 장면과 큰 각시가 오줌을 눌 때 키를 부치는 모습, 또 무당이 굿을 하는 모습 등을 보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거제영등오광대 탈들.


당시 노인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통영오광대와 비슷했다는 것인데, 흑백 문둥이가 등장하는 점과 영노와 사자, 포수가 한 과장에서 한꺼번에 등장하는 점 등이 다르다. 이외에도 스토리에서 조금씩 변화를 보이고 있다.

거제영등오광대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탈을 대나무 소쿠리로 만든다. 그래서 탈의 모습이 둥글둥글하다. 하다못해 다른 지역에선 길쭉하게 표현되는 오방신장탈도 둥근 형태를 띤다.

1과장. 오방신장무 마당.


오방색 다섯 신장이 굿거리 장단에 맞춰 덧배기춤을 추고 있다.


거제지역은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적 특색이 있어 오랜 옛날부터 풍어와 뱃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 많았다. 그러한 성향에 따라 영등오광대의 원형이 남아있진 않지만 복원하면서 오광대 내용 중 제의적 성격이 강한 ‘오방신장무’를 넣었다는 영등민속보존회 박기수 대표의 설명이다.

팸플릿에 실린 설명을 따오면, “벽사의식의 탈춤 마당으로 덧배기 양반춤을 기본무로 굿거리 장단에 춤을 추며 동쪽 청제양반, 서쪽 백제양반, 남쪽 홍제양반, 북쪽 흑제양반, 그리고 가운데 황제앙반이 오방진을 치고 춤을 춘다. 때론 돌면서 춤을 추기도 한다.

 

이러한 춤은 모든 잡귀 잡신들을 물리치고 마을사람들과 탈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

2과장. 문둥이 마당.


흑과 백 점박이 문둥이 탈꾼이 신세를 한탄하듯, 서로 의지하듯, 희망을 찾듯 춤을 추고 있다.


다른 오광대를 보면 문둥이가 등장하는 곳도 있고 아예 이 과장이 없는 탈놀이도 있다. 고성과 통영오광대는 문둥이가 혼자 등장하지만 진주의 경우 다섯 명이 등장한다. 하지만 거제영등오광대에선 문둥이가 흑백의 두 가지 모습을 하고 둘이 등장한다. 각자 손에는 소고를 들고 호흡을 맞춰 춤을 춘다.

“가면의 흑백은 우리의 내면과 외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문둥이의 아픔과 한을 자신의 업보라 여기며 아픔과 슬픔을 춤으로 달래는 것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하고 죄는 지은 대로, 닦는 대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마당”이라는 설명이다.

3과장. 포수 마당.


담보와 사자가 서로 싸우다 결국 담보가 사자에게 잡아먹힌다.


담보를잡아먹은 사자를 포수가 총으로 쏘아 죽인다.


먼저담보와 사자가 등장한다. 둘이서 제각기 놀다가 싸움을 하게 된다. 싸움에서 담보는 사자에게 먹힌다. 몸집이 커진 사자는 또 어슬렁거리며 놀다가 포수에게 발각된다. 포수는 이리저리 매복을 하면서 사자를 잡을 궁리를 한다.

마침내 기회를 잡은 포수, 땅! 사자가 쓰러지고 다리를 떤다. 조심조심 사자 곁으로 다가간 포수, 발로 사자의 죽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자다. 위험을 느낀 포수는 다시 뒤로 물러나 엎드려서 사냥총을 겨눈다. 다시 땅! 마침내 사자는 떨던 다리를 털썩 떨어트리고 죽는다.

팸플릿에 보면 “약육강식을 표현하는 마당으로 걷는 자 위에 뛰는 자가 있고 뛰는 자 위에 나는 사람이 있으니 제 잘났다고 자랑하고 조금 더 가졌다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동은 결코 허무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마당”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4과장. 말뚝이 마당.


양반들이 말뚝이를 불러 자기들의 근본을 자랑하며 말뚝이에게 핀잔을 주고 있다.



말뚝이가 원래 자신은 아주 지체높은 양반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명패를 보여주고 상황이 역전된 상황에서 양반들을 돌아가며 꾸지람을 준다.


이 말뚝이 마당은 다른 대부분의 오광대에선 ‘양반과장’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말하자면 양반이 말뚝이에게 잘난 체 하려다 수모를 당하는 내용인데, 거제오광대에선 달리 말뚝이 마당이라고 표현했다.

탈춤을 보면 이해가 될 만하다. 양반들이 제 잘난 체를 하다가 말뚝이에게 수모를 당하는 스토리야 다른 오광대와 차이가 없지만 양반들에게 둘러싸인 말뚝이가 어느 순간 허리춤에 찬 명패를 보여줌으로써 상황이 역전되는데, 이야기인즉슨, 말뚝이는 그들 양반보다도 훨씬 지체가 높은 양반이었다는 증표였으니.

 

관중들은 말뚝이 앞에서 벌벌 기는 양반의 모습에서도 통쾌함을 느꼈겠지만 말뚝이의 원래 신분이 양반이었다는 데서 놀라기도 한다.

보존회는 팸플릿에서 “돈이나 권력에 붙어 양반이 된 거짓 양반들은 그 양반을 포장하고 지키기 위해 더욱 양반 행세를 하며, 평민과 천민을 괴롭히는 것을 보다 못한 진짜 양반인 말뚝이가 나와 양반의 추악한 내면을 폭로하고 거짓 양반들을 개과천선시키는 마당”이라고 설명했다.

5과장. 영등 할미 마당.



영감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몸단장을 하는 영등할미.



작은 각시가 낳은 아이를 서로 뺏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도 모른채 태연히 오락가락하는 영등 영감.



작은 각시가 바람을 피워서 낳은 아기임을 알고는 충격을 죽게되고 이어서 상여가 무대를 돈다.


대부분의 오광대가 그렇듯이 거제영등오광대도 이 과장이 가장 길다. 스토리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유사한 스토리라인을 가지지만 세세한 내용은 저마다 달리한다.


영등 할미의 남편인 영등 오입쟁이 영감이 삼천포에 가서 새 각시를 하나 얻었는데, 이 각시는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여 또 젊은 다른 남자와 양다리를 걸쳤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영등 영감은 작은 각시에게 산기가 있자 이를 데리고 거제 영등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영감이 온다는 소식에 몸을 씻고 화장을 하는 등 몸단장을 하는 영등할미, 이제 영감이 무사히 잘 돌아오라고 무당을 불러 굿도 한다. 무당을 따라온 봉사는 징과 북을 치며 무당의 춤에 장단을 맞추는데, 영등 할미와 몸종 사이에 묘한 삼각관계로 얽히면서 재미를 준다.


작은 각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영등 영감. 영등 할미의 반가움도 잠시. 작은 각시가 아들을 출산하자 질투심에 휩싸인 영등 할미는 아기에게 심술을 부리는데, 자세히 보니 영감을 하나도 닮지 않은 것이었겠다. 이 사실을 영감에게 고하니 영감은 자신이 작은 각시와 바람을 피우는 동안 작은 각시는 또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분한 마음에 화를 참지 못하고 쓰러진다. 쓰러져서는 그 길로 바로 황천길을 떠나니 영등 할미에겐 3년이나 기다린 영감인데 이런 황망한 일이 있나? 영등 할미 아들의 곡이 울려퍼지고 이어서 상여가 들어온다. 소년소녀가장돕기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과 보존회 회원들이 만장을 들었다.


팸플릿엔 “옛말이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말과 처첩의 갈등, 가장의 도리를 말해주는 마당”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https://drive.google.com/open?id=0B1YFrNu7v2QiYTJtNmxybWhSM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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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삼남대도 임걸룡 어린 시절은?
산청군 시천면 내공리 정각사와 외송리 새고개를 찾아서


임걸룡이라는 이름을 접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 ‘임꺽정’이었다. 혹자는 임걸룡과 임꺽정이 동일인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활동 시기는 차이가 있다. 임걸룡은 조선 선조시대이고 임꺽정은 한참 후인 명종 때 사람이다.


이들이 실존인물이었든 가상의 인물이었든 사실을 뒷받침할 어떤 근거에 의해 이야기가 전달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면서 이야기는 부풀려지고 그러면서 자기 고장에 맞춰 새로 이야기가 꾸며지는 것이 전설이기에, 사실이냐 아니냐를 확인하는 작업은 이 코너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정각사 입구 천왕문.


참고로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 황해도 출신의 도적이고 임걸룡은 산청 출신이다. 물론 전설에 따르면.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은 조선시대 의적으로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을 꼽았다. 임걸룡이 삼남의 대도둑으로 불리긴 했지만 그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한 듯하다.


임걸룡이란 이름은 자료마다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지리산 ‘임걸령(林傑嶺)을 설명한 인터넷 자료에선 ‘임걸’ 혹은 ‘임걸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어쨌든 이 임걸룡의 탄생과 어릴 적 기행 전설이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현장을 찾아갔으므로 산청군의 자료를 소개한다.


산청군에서 1986년에 발행한 ‘내 고장 전설’이란 자료에 ‘의도 임걸룡(儀盜 林傑龍)’에 관한 글이 나온다. 의도는 의로운 도둑으로 풀이하는 글이 인터넷에 많은데,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예의가 있는 도둑이란 뜻이다. 이 해석은 전설을 읽어보면 수긍이 간다.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일부 문장이 어색하거나 이해가 쉽지 않은 곳은 쉽게 풀어 표현하겠다.



천왕문 옆으로 난 길. 경내로 이어진다.


산청군 시천면 내공리에 있는 정각사 자리는 수백 년 전에 삼남, 즉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 이르는 삼남의 대적(큰 도둑)으로 유명한 임걸룡이 출생한 곳이라 한다.


전하는 바로는 이 자리에 엿장수를 하는 한 부부가 한 칸짜리 집을 짓고 살다가 임걸룡을 낳았는데 임걸룡이 어렸을 때에는 업고 다녔지만 4~5세가 되자 데리고 다닐 형편이 못되어 부득이 집에 두고 장사를 나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선반에 얹어둔 엿이 십여 개씩 줄어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예사로 알았지만 시일이 갈수록 만들어 둔 엿이 자꾸 줄어드니 임걸룡의 모친은 하도 이상해서 엿을 가져가는 도둑을 잡아야 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평시와 같이 장사를 가는 척하고 숨어서 살펴보고 있었다.



천왕문과 법해루 사이에 있는 정각사 창건 기념비와 공덕비들.


그랬더니 얼마 후 임걸룡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사방을 한눈으로 둘러보고는 인적이 없음을 단정하고 주머니에서 엽전 한 닢을 껴내어 화롯불에 달군 후 실을 엽전 구멍에 단단히 매어서 엿을 놓아둔 그릇에 던져두었다가 잠시 후 실끈을 잡아당기니 엽전에 녹아 붙은 엿가락이 실끈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 비범한 지혜를 지켜본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처지로 볼 때 자기 아들이 도적보다 큰 인물로 발전할 수 없음을 알고는 성을 내어 꾸짖으며 “요놈의 자식이 방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다 똥 싸면서 도둑질해먹는 것이냐?”고 호통을 치며 “앞으로 큰 도둑이 되겠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임걸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머니가 가르쳐 준 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정각사 대웅전.


자라면서 지략이 비범한 임걸룡은 무예를 즐겨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때맞춰 정각사 동쪽에 있는 쥐설이라고 하는 묘 옆에서 준마 한 필을 얻게 되었다. 현재 정각사 입구에 석주가 서 있는데 임걸룡이 말을 매었던 돌이라고 한다.


그 후 마근담 위쪽 봉우리에 산채를 마련하여 훈련을 시키고 활동하다가 산청 새고개의 길가에 있는 석굴에 숨어들어 삼남대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 새고개는 지금의 신안면 외송리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굴도 그대로 남아있다.


임걸룡은 팔도의 행상을 상대로 물품을 털었는데 전량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고 물품 일부분을 얻어 모아서 부하를 먹이고 남은 것으로는 고장에 빈민을 구제하였다는 것이다.


이 길목을 지나가는 등짐장수는 미리 물품의 일부분을 별도로 갖고 오다가 굴 앞에 이르러 던져주고 갔다고 한다. 한때는 지금의 차황면 철수에 있는 호렴산에도 숨어 살았다는 굴이 남아있다.



대웅전 앞 뜰 전경.


그 당시 일걸룡이 출생한 내공의 지리에 대해서 풍수설에 청룡단두혈(靑龍斷頭穴)이라 하여 속인이 살면 대적이 나고 공당(公堂)이 서면 길지(吉地)라 하였는데 현재 정각사가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내용이 산청군의 ‘내 고장 전설’에 실려 있는 바, 전설의 현장 정각사로 찾아가니 정각사 주변은 울창한 대숲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죽림사 대웅전 뒤쪽 선방이 있는데 선방의 이름이 ‘죽림선원’이다.


여기저기 촬영하던 중 죽림선원 앞 작은 방에서 인기척을 느껴 들여다 보니 스님 한 분이 역시 인기척을 느꼈는지 내다본다. 눈길이 마주치자 서로 인사를 건넨다.


“스님, 이 절에 의도 임걸룡 전설이 있다면서요?”



장군수임걸룡이 마시고 씻고 했다는 장군수(원안) .


스님은 방문객을 방으로 초청한다. 임걸룡 전설에 대해 듣고 싶다고 했더니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미 방문객이 사전조사를 했음을 눈치 챈 듯했다. 그래서인지 사전조사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장군수’라는 샘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임걸룡이 여기서 태어나 자라면서 무예를 익혔다고 해요. 터가 넓어서 훈련하기에 딱 좋은 곳이지요. 임걸룡이 훈련을 마치면 항상 물을 마시고 씻고 했던 작은 샘이 있어요. 징군수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이 절을 짓기 전, 옛날엔 맑은 물이 계속 솟아났다고 해요.”


의외의 수확이다. 임걸령샘이라 하여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 사이에 있는 그 임걸령샘만 생각했는데 임걸룡이 어렸을 때 훈련을 하고서 목을 축이고 세수를 하던 샘이 이 사찰 안에 있다니 귀가 번쩍 뜨이는 일이다.



임걸룡이 말을 맸다는 바위.


스님은 그 샘물이 있는 현장으로 안내해준다. 사찰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어 자연 그대로 보존돼 있지는 않았다. 시멘트로 각지게 만들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지 뚜껑을 덮어놓았다. 뚜껑을 열어 보니 맑은 물이 표면에까지 올라와 찰랑거린다. 깊이는 그렇게 깊지 않았다.


스님은 함께 뚜껑을 덮으면서 임걸룡이 말을 매었던 바위를 혹시 보았는지 물어본다. 스님의 말씀이 아니었으면 미처 촬영을 못 하고 돌아갈 뻔하지 않았던가.


“아마 차를 몰고 오셨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 같아 물어보았는데, 예상대로군요.”



외송리 6·25참전기념비 앞에서 바라본 새고개 전경.


스님은 사찰 입구인 천왕문 밖으로 안내한다. 천왕문 옆에 사찰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천왕문 앞에는 불화가 그려져 있다. 문수동자와 보현동자 그림이다. 천왕문 안쪽에는 예의 그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천왕문을 지나 조금 내려가니 양쪽에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장승처럼 생겼고 또 하나는 마디가 있는 칼처럼 생겼다. 스님은 이 칼처럼 생긴 돌에 임걸룡이 말을 맸다고 설명했다.


정각사에서의 취재는 끝났다. 스님과 합장으로 인사를 나누고 임걸룡이 산적으로 활동했다는 외송리 새고개를 찾아갔다. 새고개는 경호강을 끼고 있으며 산청읍과 신안면·단성면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새고개에서 아래쪽으로 내려다 본 전경.



새고개에 조성된 6·25참전기념비 공원.


지금이야 넓은 도로가 뚫려 차량이 쌩쌩 달리는 곳이지만 예전엔 보부상들이 무거운 봇짐을 메고 땀을 흘리며 넘었을 법한 고갯길이다. 주변 경치를 보니 임걸룡이 이곳에서 진을 치고 도적질을 일삼았을 개연성이 보인다.


이 새고개에서 북서쪽으로 높은 웅석봉이 있다. 주변 경관이 훤하다. 산적들은 이곳에서 숨어있다가 보부상들이 오면 대뜸 칼을 휘두르며 나타나 “있는 대로 모두 내놔라!”하고 엄포를 놓았음직 하다. 물론 전설에 따르면 의도 임걸룡은 그러지 않았다고 하니 그런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딱 취할 만큼만 취했으니 그나마 도둑이라도 예를 안다고 해서 의도(儀盜 )란 호칭이 붙었지 않나 싶다. 임걸룡이 활약했다는 새고개는 현재 6·25참전기념비와 베트남참전기념비, 그리고 88사건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임걸룡과 전혀 관련은 없지만 산청군 6·25참전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이곳에 기념비를 세운 것은 나름대로 고갯길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찾게끔 하고자 했을 터인데, 들어서는 진입로가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가까이 가고서 발견했다면 다시 찾아 들어가기 쉽지 않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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