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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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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찾아서]매듭,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

창원시립마산박물관 930일까지 ‘궁중의 멋, 전통매듭’ 전시


이어령은 그가 쓴 ‘한국문화박물지’에서 매듭을 ‘맺고 푸는 선의 드라마’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매듭은 맺고 푼다는 의미에서 인간사 그대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매듭은 깔끔한 마무리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또 서로 간 얽힌 관계를 말하기도 한다. 인연을 맺고 원한이 맺힌 것도 매듭을 잘 맺고 풀어야 한 세상 재미나게 살 수 있다.


매듭이란 표현은 여전히 많이 사용되지만 정작 우리 생활 속에 매듭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현대화된 생활용품들은 기계로 찍어낸 다량의 제품들이 생활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매듭, 어떤 게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신발끈이다. 그것도 이젠 끈 없이 신는 신이 많긴 하지만, 묶는다는 차원에서 매듭의 일종이다. 그리고 열쇠고리에 있는 매듭, 또 체험장에서 만들어 지니고 있는 매듭 팔찌 정도. 덧붙이면 딸아이 양갈래로 땋은 머리카락도 매듭은 매듭이다.


요즘은 보기 드문 매듭이 불과 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상이었다. 옷에 달고 다니던 노리개도 매듭이요, 단추도 매듭이요, 지니고 다니던 주머니도 매듭, 붓걸이에도 매듭이 있었고, 부채, 악기, 여성이 품속에 감추고 다녔던 은장도에도 매듭이 있었다.


그런 우리 전통의 매듭을 구경할 수 있는 전시회가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박물관은 지난 1일부터 오는 930일까지 1층 기획전시실에서 경상남도 시도무형문화재 제32호 매듭장 보유자인 배순화 씨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는 1부 ‘끈, 매듭이 되다’ 2부 ‘끈, 궁중의 멋이 되다’ 그리고 3부 ‘끈, 한 가닥의 아름다움이 되다’라는 주제로 나뉘어 구성됐다.


관람객에게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는 김수진 학예사.


전시장에 들어서자 김수진 학예연구사가 관람객에게 매듭에 관해 먼저 설명을 했다.


“매듭이 그냥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 하나하나 공들여 다 짜고 실도 염색을 해서 얼레에 다 감아서 또 밑에 나오는 술 있잖습니까? 노리개, 술 같은 경우에도 실을 하나하나 다 엮어서 해요. 술은 처음에는 실이 누글누글해요. 이것을 찜통에다 쪄요. 그러면 실이 탱탱하게 되어 작품이 제대로 나오는 거죠.”


끈으로 매듭을 지었다면 그 끈은 실로 구성된다. 실을 꼬아서 끈을 만들고 끈을 묶어서 매듭을 만드는 것이다. 전통 매듭을 보면 상당히 화려한데 매듭실의 천연염색 때문이다.


색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식물의 잎, 줄기, , 열매, 그리고 풀과 흙 등에서 추출한 천연 염료로 색을 입힌 색실들을 먼저 만난다.


이 색실들은 끈목틀에 의해 끈으로 만들어지고 송곳과 비톳, 바늘을 거치면서 매듭이 된다. 끈목은 광다회와 동다회가 있다고 한다. 광다회는 폭이 넓고 납작한 평직을 말하며 12사와 16, 32사가 있다. 대신 동다회는 4, 8, 16, 24, 36사로 이루어진다.


이는 다회를 치는데 드는 실가닥 수에 따라서 이같이 나누는데, 8사 이상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마주앉아 가닥을 돌려가며 쳤다고 한다.


끈목틀과 매듭 제작 도구들.


다회틀로 짠 끈목으로 매듭을 만든다. 매듭을 엮을 때 송곳과 비톳, 그리고 바늘 등의 도구가 쓰인다. 송곳이 필요한 이유는 매듭을 엮은 다음 꽉 조이기 위함이다. 그래야 매듭의 형태가 살아나고 유지된다.


전통 매듭 모양은 어떤 것이 있을까. 간편하게 동물형, 식물형, 그리고 기타로 나누어 볼 때, 먼저 동물형은 잠자리, 나비, 매미, , 꼰디기매듭이 있다. 식물형에는 국화, 연봉, 생쪽, 가지방석, 국화매듭이 있으며 기타 도래매듭, 안경매듭 등이 있다.


매듭과 술.


대개 매듭에는 술이 달려있다. 술이란 장식에 쓰이는 여러 가닥의 실을 말한다. 깃대나 가마 등 전통 물건에는 매듭만으로 장식하기엔 비례가 맞지 않아 술을 달았다고 한다. 끈목과 매듭, 술이 균형을 이루어야 비로소 매듭장식이 완성된다고 본 것이다.


술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주로 도포 끈이나 노리개 등에 장식되는 딸기술과 술 머리 모양이 봉처럼 생겨 글자를 새길 수 있는 봉술, 머리 부분이 방망이처럼 생긴 방망이술, 끈목을 낙지발처럼 여러 갈래로 늘어뜨린 낙지발술, 12사 끈목으로 만든 방울술 등이 있다.


조선시대엔 어떤 매듭을 하였을까. 고대부터 있었던 매듭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종류와 용도가 다양해졌다고 한다. 특히 장식성이 강하게 두드러졌다.


조선 초 기록인 세종실록에서 언급한 가례도감에 보면 악기인 해금과 박, 각 등에 생쪽매듭과 국화매듭을 한 게 보인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국화매듭, 생쪽매듭, 딸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윤복 ‘미인도’.


조선시대엔 상류층의 매듭단추가 평민들의 적삼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이다. 김홍도의 ‘신선도’를 보면 당나귀 그림의 앞 장식에 딸기술과 같은 매듭 한쌍이 달려 있으며 신윤복의 ‘미인도’에도 나타난다.


궁중을 중심으로 수요가 있던 매듭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민간에서도 사용이 되면서 일반화되었다. 매듭 상품들은 지금의 광희동인 시구문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매듭상품을 만드는 사람을 한때 ‘시구문안 매디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성용 매듭들.


여성들은 주로 몸치장용으로 매듭을 많이 사용하였다. 노리개, 주머니, 별전, 귀걸이 등에 매듭을 하였는데 여성의 장식품에 달리는 매듭에 따라 신분이 드러나기도 했다고 한다.


전시된 여성들의 매듭 제품에는 향갑 단작노리개, 수석류 삼작 노리개, 문자 삼작노리개, 복주머니 삼작 노리개, 옥나비 삼작 노리개, 호리병 삼작 노리개, 수화준 단작 노리개, 그리고 여성들이 겨울철 방한용으로 쓰던 조바위, 거울 장식매듭, 은장도 장식매듭이 있다.


합죽선에 달린 매듭.


조선시대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매듭이 다양하게 쓰였다. 대표적인 게 도포끈이다. 도포는 사대부들이 외출할 때 입는 옷인데 도포끈은 허리띠 역할을 했다. 반상의 유별을 유난히 따졌던 조선시대엔 남자들의 도포끈도 신분을 드러내는 물건으로 활용되었다.


관리들 가운데 당상관은 다홍색 띠와 분홍 띠, 자주색 띠를 무릎아래에 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선비들은 초록색 띠, 초시는 보라색, 참봉이나 주사는 회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포끈은 동다회로 양 끝에 끈목과 같은 색으로 딸기술을 한 개 혹은 한 쌍식 달아 늘어뜨렸다.


전시된 남성용 매듭제품을 보면, 앞서 설명한 도포끈과 동곳주머니, 향선추, 원숭이선추, 매난국죽선추, 죽선추, 수박쥐선추, 표주박 장식매듭 등이 있다.


남은들 상여에 장식된 매듭.


그리고 염주 등 종교 의식에 사용되는 매듭과 전통악기인 박에 딸린 매듭, 상여에 달린 매듭, 수저주머니 등 생활용품에 달린 매듭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남은들상여에 장식했던 큰 매듭이 눈에 띈다. 남은들상여는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상여로 지난 2013년 충남 예산군이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 남은들상여를 복원한 것으로 전흥수 대목장과 배순화 매듭장이 참여해 만들었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것은 모두 배순화 매듭장의 작품이다.


매듭이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은 생활용품의 단순한 표정을 화사하게 변화시키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횃대, 발걸이, 붓걸이, , 조각보 등 옛 물건들을 보면 매듭이 꼭 들어 있다.


횃대.


전시된 작품 중에 가로로 길쭉하게 걸려있는 대나무가 있는데 이를 횃대라고 한다. 가느다란 대나무 양쪽 끝에 끈을 매어 벽에 달아 옷을 걸었던 물건이다. 서민층에선 주로 방 아랫목 한구석에 달아 주로 두루마기나 장옷 같은 외출복을 걸쳐놓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외 전시된 것을 보면, 바늘꽂이, 돈보, 조각보, 패물보, 다용도함, 패물주머니, 쌈지, 도장주머니, 오곡주머니 등이 있다.


다양한 매듭을 한 주머니들.


현대용품으로 매듭을 활용한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주로 부채주머니, 브로치, 글자노리개, 그리고 타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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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이 쓰던 물건, 이런 것도 있었네

[전통을 찾아서]다른 곳에선 못 본, 창녕영산민속관에는 있는


여러 민속관이나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갈 때마다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옛물건들을 발견한다. 민속관이든 박물관이든 모든 물품을 완벽히 갖추기 쉽지 않으리라. 어쩌면 모든 옛물건들을 다 모아 전시하려면 민속관의 크기는 일반적인 것의 몇 배는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 지역을 나들이할 때 그 지역의 민속관을 찾아보는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옛물건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그동안 창원과 거창, 밀양 등 몇 군데를 다녔는데 얼마 전 찾은 창녕영산민속관에서도 ‘아, 이게 뭐지?’ 하는 물건들을 발견했다.


기름틀.


제법 크다. 굵은 나무틀 가운데 쇠로 된 회전체가 있다. 돌리면 내려와서 뭔가를 꾹 누르는 구조다. 나무틀 앞쪽에 작은 나무틀이 부착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아래에 그릇을 받쳐놓았다. 뭘까?


사진을 보고서 바로 정답을 알아맞히는 사람도 있으리라. 기름틀이다. 이 기름틀은 크기로 보아 방앗간에 설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가정에서 사용하는 기름틀은 이보다 크기가 작고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대부분 기름틀은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기름을 짠다. 깨가 든 기름떡을 기름틀 우묵한 곳 즉 떡판에 올려놓고 또 그다음 챗날을 끼우고 위에서 눌러 기름을 짜는 구조다. 누를 때는 무게를 더하기 위해 무거운 돌을 올려놓기도 한다.


나락뒤주.


몸집도 크고 대로 엮은 것이 통풍은 잘 되도록 한 것 같고 위에는 초가집 마냥 짚으로 된 주저리(짚가리)를 씌운 것으로 보아 비를 막고자 한 것인데. 과연 무엇일까?


시골 산장이나 그런 곳에 가면, 산장 주인이 옛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밖에 이런 물건 하나쯤 관상용으로 전시해놓기도 하는 이것은 나락뒤주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나락을 담아 보관하는 수장공간이다.


추수 때가 되면 창고와 곳간의 공간이 모잘 때가 있었는데 마당 한쪽에 이 나락뒤주를 세워 임시로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였던 것이다.


떡메와 떡판.


사진 속의 이 물건은 익숙하긴 한데 민속체험 등에서 보던 것과는 좀 다른 모양새다. 나무망치는 떡메이고 넓적한 나무판은 떡판이다.


떡판의 모양은 다양하다. 도마처럼 생긴 것도 있고 그냥 넓적한 나무판도 있으며 사진처럼 가운데가 움푹 파인 것도 있다. 또 어떤 것은 움푹 파인 부분과 평평한 부분으로 구성된 것도 있다.


전통찻집이나 이런 곳에 가면 떡판이 소품으로 활용되어 눈길을 끌기도 한다. 떡판은 인절미나 흰떡을 만들 때 찹쌀반죽을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떡을 칠 때 쓰는 떡메는 다른 말로 공이라고도 한다. ‘절굿공이’ 할 때 쓰이는 단어와 같은 말이다. 자료를 보면 떠판은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 가장 좋고 떡메는 황양목(黃楊木)으로 만든 것이 좋다고 한다.


솜활.


생긴 게 활처럼 생겼다. 화살을 걸어서 당겼다가 놓으면 사냥도 가능한. 그런데 이것은 사냥용 활이 아니다. 힌트를 주자면 옷을 만들 때 쓰이는 물건이다. 정답, 활은 활인데 솜활이다.


무명솜을 타는 활이다. 무명활이라고도 한다. 지름이 2센티미터쯤 되는 대나무를 휘어서 양쪽 끝을 삼노끈 등으로 바짝 당겨 맨 것인데 목화솜에 대고 줄을 당겨 진동을 줌으로써 씨앗이나 불순물을 떨어트린다. 그러다 보면 솜은 솜대로 부드럽게 부풀어 올라 고운 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주조장 술통.


사진 속 나무통에 ‘주조장’이라는 글자가 적힌 것으로 보아 눈치 빠른 사람은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눈치를 챘을 것이다. 술통이다.


그냥 술을 담아놓는 용기가 아니라 많은 양의 술을 담아 이동하기 위한 배달용 술통이다. 이 술통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진처럼 위에 주둥이가 있는 것과 불룩한 배에 구멍을 뚫어 주둥이를 만든 것.


술통의 크기는 18리터에서 180리터까지 다양한데 신기한 것은 나무로 잇대어 만든 탓에 틈이 있을 법한데 술이 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술이 들어감으로써 나무의 흡수성 때문에 팽창하게 되어 그 틈새가 메워지기 때문이다.


채반.


요즘에야 플라스틱 제품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대나무로 만든 것은 판매도 하고 있으니 모양새가 달라 그렇지 종종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원래 ‘채’란 말이 싸리를 두고 하는 말인데 요즘 싸리로 채반을 만드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 채반의 의미가 전도되었다고 봐야겠다.


예전엔 대부분 싸리나 버드나무, 대나무 등의 껍질을 가늘게 벗겨 짜서 만들었다. 이 채반은 주로 기름에 부친 지짐이나 만두, 고기 등을 담는데 사용한다. 공기가 잘 통하고 기름도 잘 빠져 음식이 잘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부각이나 나물을 말릴 때에도 사용된다.


채반은 대부분 둥근 형태를 띤다. 어원으로 보면 가는 싸리를 이르는 표현이지만 무채나 오이냉채 등과 같이 가늘게 썬 음식을 뜻하기도 하고 밀가루 등 가는 것을 거르는 채도 일맥상통하는 어원을 지닌다 하겠다.


토매.


나무를 잇대어 만든 통에 진흙이 잔뜩 들었다.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눈으로 보아서는 그 원리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 물건의 이름은 토매라는 것으로 벼의 겨를 벗기는 농기구다. 매통의 일종인데 안에 흙이 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통나무가 귀한 곳에서 사용한 것으로 진흙 속에 대쪽을 촘촘하게 박아 위와 아래 통을 맷돌처럼 돌리게 되면 벼를 비비게 되며 껍질이 벗겨지는 원리다.


토매, 매통, 맷돌 등의 표현으로 보아 ‘매’라는 말은 ‘갈다’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맷돌을 한자로 표현하면 ‘마석(磨石)’인데 이는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마제석기나 마제석검 유물 이름과도 관련이 있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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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의 화음…함안 뚝방길

함주공원서 5.7킬로미터 거리…이 여름길에도 낭만이


여항면 내곡리에서 시작한 함안천이 악양루 바로 앞 남강을 만나는 곳에 기역 자로 꺾여진 둑이 있다. 이 둑길 양옆으론 형형색색의 꽃들이 일직선으로, 마치 70년대 국빈이 방문했을 때 도로 양쪽에 나열하여 국기를 흔들며 환영하던 그 인파처럼 꽃잎을 흔들고 있다.


함안뚝방길이다. 이 길이 연결된 방죽은 길다. 함안과 의령 창녕의 방죽을 합하면 338킬로미터란다. 그 긴 길을 큰맘 먹고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마는 도심생활에 지친 사람이라면 하루 두세 시간 정도 잠깐 시간 내어 쉬엄쉬엄 걸으며 상념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위성지도위성사진./네이버지도


차를 몰고 찾아왔다면 함주공원에서 함안대로를 따라 악양마을 쪽으로 무조건 직진하여 직선 길이 끝날 때까지 가면 뚝방길을 만난다. 그 거리는 5.7킬로미터다.


이산화탄소 가득한 지구별. 신이 노했는지 자연이 놀랐는지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유월 하순. 지난 22일 잠시 짬을 내어 지난 봄 화려한 꽃으로 블로거들을 유혹하던 양귀비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뚝방길 가운데 쯤에 경비행기 교육장이 있다.


경비행기와 까치의 기싸움?


이미 뚝방길에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꽃양귀비는 화무십일홍 올해 한 세월을 풍미하고 꽃잎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붉은 꽃양귀비와 함께 푸른 잎의 수레국화, 노란 금계국 등도 얼추 화장을 벗고 진한 갈색의 씨앗들을 통통히 살찌우고 있었다.


다만, 해바라기를 닮은 루드베키아와 작은 해바라기들은 군락을 이루어 이제야 제철인양 진노란 얼굴을 드러내며 여행객을 반긴다.


뚝방길은 그리 길지 않다. 풍차가 있는 주차장에서 서쪽 길끝까지 1.3킬로미터, 동쪽 꺾어진 지점까지 1킬로미터. 2.3킬로미터, 차가 있는 곳으로 다시 와야 하므로 왕복 5킬로미터 정도를 걷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조금 더 시간이 있는 여행자라면 동쪽 뚝방길을 끝까지 걸어가서 악양교를 건너 ‘처녀뱃사공’ 노래비를 보고 악양가든을 지나 악양루를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


꽃양귀비.


구절초와 나비.


대부분 꽃양귀비가 화려한 시절 다 보내고 몇몇 젊은(?) 아이들이 마지막 자태로 카메라 눈을 유혹하는 뚝방길을 따라 서쪽으로 마냥 걸었다. 꽃잎은 떨어졌어도 꽃은 꽃인 모양이다. , 나비, 잠자리가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길 가운데엔 검은 천으로 포장(?)을 해놓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던 5월 방죽 흙길에 먼지가 일지 않게 조치한 것일 게다.


원두막 삼형제.


혼자 걷는 길에 잠자리와 나비가 길동무다. 이들의 춤을 보고 걷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래도 길 중간 쯤에 나란히 앉은 원두막 삼형제가 발길을 붙잡는다. 마지못한 척 퍼질러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을 느낀다. 반갑다. 뚝방길에 올라서면서부터 느꼈던 부담스러움. 유월 태양의 열렬한 환영이 정말 부담스러웠는데 원두막 마루에 걸터앉으니 다소곳한 바람이 선녀처럼 합죽선으로 살랑살랑 부채질해주는 듯도 하다.


해바라기 뒤로 루드베키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뚝방길 왼편 루드베키아 군락을 만났다. 노란 꽃잎들이 가뭄 끝에 물맛을 보았는지 빙그레 웃으며 해바라기 흉내를 낸다. 루드베키아 군락 앞에 해바라기 식구들이 줄을 지어 있다. 아직 어린 해바라기들이다. 그렇지. 함안 강주마을은 해바라기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8월이면 그곳, 해바라기로 바다를 이룬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법수면사무소 방향으로 7.8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8월이면 뚝방길에 코스모스도 키재기를 하며 쑥쑥 자랄 시점이겠다. 이곳 뚝방길은 5월 꽃양귀비, 9월 코스모스로 여행객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꽃 계절의 중간에 찾아와 망막에 맺히는 화려함은 없어도 시원한 하늘과 산과 물, 그리고 주위를 맴돌며 온갖 기교를 부리며 춤추는 나비와 잠자리가 있으니 이것이 낭만이 아니고 무엇이랴.


벌써 코스모스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돌아 오는 길에 멀리서 보이는 풍차.


뚝방길 끝을 찍고 되돌아오는 길. 왔던 길이 지겨우면 강변길을 따라 걸어도 되겠다. 하지만, 이 길은 물이 차면 갈 수 없는 길이다. 뚝방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도 상념으로 채우면 전혀 지겹지 않다. 좀 전에 만났던 원두막 삼형제를 다시 보게 되고 여전히 춤을 추며 유혹하는 나비와 잠자리. 그리고 멀리 보이는 풍차.


돌아보면 먼 거리인 것 같아도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쪽으로 1킬로미터 새로운 기분으로 걸어도 되겠다. 아니면 차량을 이용해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있는 곳으로 와서 어떤 사연이 서렸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다.


처녀뱃사공 노래비 뒤쪽에 숨어있는 스피커.


“낙또옹가앙 강빠아라아~암이 치마폭을 스으치이~면…” 술좌석에서 노래 부르는 이가 이젠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겐 노래방 애창곡이 바로 ‘처녀뱃사공’이다. 한 번이라도 와봤던 사람이라면 처녀뱃사공 이 노래의 사연을 잊지 않을 듯하다.


지금은 방송 출연이 뜸하긴 하지만 한때 ‘나는 행복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등을 불러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윤항기와 ‘여러분’을 불렀던 윤복희 남매의 아버지가 ‘처녀뱃사공’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아버지인 윤부길이 유랑극단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가 처녀 뱃사공의 이야기를 듣고 작사했고 ‘빈대떡 신사’ 한복남이 작곡한 노래가 바로 ‘처녀뱃사공’이다. 황정자 목소리의 노래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찾아 가보니 아하, 나무 뒤에 큰 스피커가 숨어있다.


노래 한 곡 정도 주변을 둘러보며 감상하고 길 건너편 악양가든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악양루로 가려면 이 식당을 지나야 한다.


악양루에서 보이는 뚝방길.


악양루는 높지 않은 절벽 위에 지어졌다. 지금이야 난간이 있어 안전하다지만 옛날엔 겁이 나서 어찌 마루 끝에 앉았을까 싶다. ‘악양루’ 편액을 찍으려 해도 자세가 영 마뜩찮다. 함안천 건너편에서 찍으면 잘 나오려나.


악양루 내부에는 많은 글이 걸려있다. 대부분 한시다. 물론 악양루중수기 등 짓게 된 사연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한문 실력이 상당한 분이라면 주련의 글귀를 읽으며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괜찮겠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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