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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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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볼만한 연꽃 공원 9경

 

7~8월, 연꽃이 제철을 만났다.

도내에는 크고작은 연꽃 공원이나 단지가 상당수 있다. 주남저수지 앞에서처럼 논에다가 연꽃단지를 조성한 곳도 있고 진해목재문화체험관 앞처럼 연못을 조성한 곳도 있다. 그리고 창녕 우포의 목포늪과 사지포늪, 쪽지벌처럼 습지에 군락을 이룬 곳도 있다.

경남 도내에서 연꽃구경 가볼만한 9곳을 추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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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텔링]구룡지엔 용 한 마리가 남았는데

아직도 양산 통도사 대웅전 옆 작은 연못엔 절 지킴이 용이 산다?


용이 전설의 주인공으로 단골 등장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신비함 때문일 것이다. ‘전설텔링’ 이 코너에서 등장한 용들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 용은 신의 반열에 있는 동물인데 ‘마리’라는 표현을 썼으니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다.


용이 언제 처음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원전 3~4세기에 쓰였다는 동아시아 고대 신화집인 ‘산해경’에도 실린 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용은 인간사에 관여해왔던 것 같다. 특히 용은 그렇게도 자주 또 많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건만 아무도 본 적이 없기에 더욱 신비 모드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아무도 용을 본 사람이 없는데 용에 대한 이미지가 대동소이한 걸 보면 희한하다. 민화를 보든, 사찰의 벽화를 보든, 건물의 용 조각을 보든 용의 모습은 대개 거기서 거기다. 산꼭대기 천지에 사는 용이나 강물에 사는 용이나 또한 바다에서 사는 용이나 그 모습은 한결같다.


통도사 대웅전 대방광전 방향 앞쪽에 있는 구룡지.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여기서 문자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중국 위나라 때(220~256) 만들어진 ‘광아(廣雅)’라는 책에 묘사된 뒤로는 이 용이 중국, 몽골, 한국, 일본으로 퍼져 나가며 수많은 세포분열을 거쳤음에도 거의 똑같은 유전자를 유지하고 있다.


‘광아’라는 책을 살짝 열어볼까. ‘용은 인충(鱗蟲)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표현이다.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그야말로 짬뽕동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고대 사람들은 신화 속의 동물은 이런 식으로 혼합하는 취미가 있었나 보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도 그렇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나 켄타우로스 같은 인간과 동물의 혼합체도 만들었으니.


어쨌든 흔한 동물의 혼합체임에도 용은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고귀한 존재로 추앙받기까지 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또한, 용은 산신과 어울려 다니는 호랑이와 달리 물속의 용왕과 어울려 다녔다. 그래서 산에는 호랑이신 물에는 용신이라는 대비로 존재감을 확실히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구룡지 맑은 물에 강룡교 다리와 나무 그림자가 어울려 비치고 있다.


한반도에 살았던 용들은 마냥 신비하고 위엄이 있는 경외의 대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양산 통도사 구룡지에 사는 용 이야기만 하더라도 다른 용들이 들으면 자존심 팍팍 구겨질 만한 캐릭터의 용들이 등장한다.


2008년 양산문화원에서 발간한 ‘양산고을 옛이야기’엔 통도사 대웅전 옆 자그마한 연못인 구룡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래를 설명했다. 그 유래는 통도사를 창건한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와 얽힌 한 토막 전설로 전해지고 전해진 것이다. 내용의 일부를 따왔다. 다음과 같다.


통도사를 창건한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는 진골 출신인 소판 김무림의 아들로 속명은 선종랑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물려받은 논밭과 집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란 절을 세웠으며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 고골관(신체를 시체의 관점에서 보기, 즉 시체가 썩어서 백골이 되는 모습을 보고 덧없음을 깨닫는 수행법)을 닦았다.


그러던 차에 636(선덕여왕 5), 왕명으로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청량산의 문수보살에게 기도 정진해 문수보살로부터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00, 불두골(佛頭骨)과 손가락뼈, 염주와 경전 등을 받았다.


그 후 종남산 운제사에서 3년 수행하고 643년 대장경 일부와 번당(幡幢), 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7년 만에 귀국했다.


자장율사는 신라 최고 승직인 대국통에 임명되어 승니(비구와 비구니)의 규범을 통제하고 보름마다 계를 설했다.


삼성각 앞에서 바라본 구룡지 모습. 맞은 편에 대웅전인 대방광전이 있고 왼편엔 배롱나무가 서 있다.


자장율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문수보살에게서 받아온 석가모니의 가사와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선덕여왕과 함께 창사할 터를 찾기 시작했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축서산(鷲栖山)에 이르니 산의 형세가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인도 영축산의 모습과도 너무나 흡사했다.


자장율사는 마음속으로 감탄하고 산 아래 큰 연못이 있는 곳에다 절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절을 지으려면 연못을 메워야 했기에 자장율사는 용들을 불러내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용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장율사는 하는 수 없이 법력으로 연못을 펄펄 끓게 해 용들을 쫓아냈다. 아홉 마리의 용 중에서 다섯 마리는 남쪽을 향해 산 너머로 도망을 갔는데 그곳을 오룡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용 세 마리는 동쪽으로 달아나다 솔밭 길 근처 야트막한 산의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때 용이 흘린 피가 바위에 낭자하게 흘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피바위 또는 용혈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산문 쪽에 있는 검붉은 색의 용혈암은 이 용들이 흘린 피가 묻어서 바위 색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구룡지를 가로지른 돌다리인 강룡교.


마지막 한 마리는 순종하며 절을 지키겠다고 맹세해 자장율사가 자그마한 연못을 만들어 그곳에 살도록 했다. 그 못이 지금 통도사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구룡지(九龍池)이다.


아무리 다양한 동물의 혼합체로서 신령스런 역할을 도맡아 왔다고 해도 불력을 앞세운 스님 앞에서는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끓는 연못을 스스로 식히지 못하고 도망을 갔으니. 게다가 세 마리는 도망가다가 바위에 부딪혀 피를 흘리고 죽었다 하니 용의 체면이 여간 구겨지는 게 아니다.


큰 연못을 메우고 남은 한 마리를 위해 작은 연못을 조성했다고 하니 한 마리 분량의 연못 크기 곱하기 9를 하면 원래의 연못 크기가 나오려나? 어쨌든 남은 한 마리를 위한 구룡지 크기는 아담할 정도다. 넓이가 15㎡에 지나지 않는다.


구룡지 북쪽으로는 금강계단이 있다. 시계방향으로 동쪽엔 대웅전, 남쪽엔 응진전, 그리고 서쪽엔 정면 세 칸짜리 건물 삼성각이 있다. 구룡지 곁에는 배롱나무가 혼자 남은 용의 친구가 되어 사시사철 표정을 달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산 통도사 위성지도./다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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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찾아서]매듭,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

창원시립마산박물관 930일까지 ‘궁중의 멋, 전통매듭’ 전시


이어령은 그가 쓴 ‘한국문화박물지’에서 매듭을 ‘맺고 푸는 선의 드라마’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매듭은 맺고 푼다는 의미에서 인간사 그대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매듭은 깔끔한 마무리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또 서로 간 얽힌 관계를 말하기도 한다. 인연을 맺고 원한이 맺힌 것도 매듭을 잘 맺고 풀어야 한 세상 재미나게 살 수 있다.


매듭이란 표현은 여전히 많이 사용되지만 정작 우리 생활 속에 매듭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현대화된 생활용품들은 기계로 찍어낸 다량의 제품들이 생활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매듭, 어떤 게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신발끈이다. 그것도 이젠 끈 없이 신는 신이 많긴 하지만, 묶는다는 차원에서 매듭의 일종이다. 그리고 열쇠고리에 있는 매듭, 또 체험장에서 만들어 지니고 있는 매듭 팔찌 정도. 덧붙이면 딸아이 양갈래로 땋은 머리카락도 매듭은 매듭이다.


요즘은 보기 드문 매듭이 불과 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상이었다. 옷에 달고 다니던 노리개도 매듭이요, 단추도 매듭이요, 지니고 다니던 주머니도 매듭, 붓걸이에도 매듭이 있었고, 부채, 악기, 여성이 품속에 감추고 다녔던 은장도에도 매듭이 있었다.


그런 우리 전통의 매듭을 구경할 수 있는 전시회가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박물관은 지난 1일부터 오는 930일까지 1층 기획전시실에서 경상남도 시도무형문화재 제32호 매듭장 보유자인 배순화 씨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는 1부 ‘끈, 매듭이 되다’ 2부 ‘끈, 궁중의 멋이 되다’ 그리고 3부 ‘끈, 한 가닥의 아름다움이 되다’라는 주제로 나뉘어 구성됐다.


관람객에게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는 김수진 학예사.


전시장에 들어서자 김수진 학예연구사가 관람객에게 매듭에 관해 먼저 설명을 했다.


“매듭이 그냥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 하나하나 공들여 다 짜고 실도 염색을 해서 얼레에 다 감아서 또 밑에 나오는 술 있잖습니까? 노리개, 술 같은 경우에도 실을 하나하나 다 엮어서 해요. 술은 처음에는 실이 누글누글해요. 이것을 찜통에다 쪄요. 그러면 실이 탱탱하게 되어 작품이 제대로 나오는 거죠.”


끈으로 매듭을 지었다면 그 끈은 실로 구성된다. 실을 꼬아서 끈을 만들고 끈을 묶어서 매듭을 만드는 것이다. 전통 매듭을 보면 상당히 화려한데 매듭실의 천연염색 때문이다.


색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식물의 잎, 줄기, , 열매, 그리고 풀과 흙 등에서 추출한 천연 염료로 색을 입힌 색실들을 먼저 만난다.


이 색실들은 끈목틀에 의해 끈으로 만들어지고 송곳과 비톳, 바늘을 거치면서 매듭이 된다. 끈목은 광다회와 동다회가 있다고 한다. 광다회는 폭이 넓고 납작한 평직을 말하며 12사와 16, 32사가 있다. 대신 동다회는 4, 8, 16, 24, 36사로 이루어진다.


이는 다회를 치는데 드는 실가닥 수에 따라서 이같이 나누는데, 8사 이상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마주앉아 가닥을 돌려가며 쳤다고 한다.


끈목틀과 매듭 제작 도구들.


다회틀로 짠 끈목으로 매듭을 만든다. 매듭을 엮을 때 송곳과 비톳, 그리고 바늘 등의 도구가 쓰인다. 송곳이 필요한 이유는 매듭을 엮은 다음 꽉 조이기 위함이다. 그래야 매듭의 형태가 살아나고 유지된다.


전통 매듭 모양은 어떤 것이 있을까. 간편하게 동물형, 식물형, 그리고 기타로 나누어 볼 때, 먼저 동물형은 잠자리, 나비, 매미, , 꼰디기매듭이 있다. 식물형에는 국화, 연봉, 생쪽, 가지방석, 국화매듭이 있으며 기타 도래매듭, 안경매듭 등이 있다.


매듭과 술.


대개 매듭에는 술이 달려있다. 술이란 장식에 쓰이는 여러 가닥의 실을 말한다. 깃대나 가마 등 전통 물건에는 매듭만으로 장식하기엔 비례가 맞지 않아 술을 달았다고 한다. 끈목과 매듭, 술이 균형을 이루어야 비로소 매듭장식이 완성된다고 본 것이다.


술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주로 도포 끈이나 노리개 등에 장식되는 딸기술과 술 머리 모양이 봉처럼 생겨 글자를 새길 수 있는 봉술, 머리 부분이 방망이처럼 생긴 방망이술, 끈목을 낙지발처럼 여러 갈래로 늘어뜨린 낙지발술, 12사 끈목으로 만든 방울술 등이 있다.


조선시대엔 어떤 매듭을 하였을까. 고대부터 있었던 매듭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종류와 용도가 다양해졌다고 한다. 특히 장식성이 강하게 두드러졌다.


조선 초 기록인 세종실록에서 언급한 가례도감에 보면 악기인 해금과 박, 각 등에 생쪽매듭과 국화매듭을 한 게 보인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국화매듭, 생쪽매듭, 딸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윤복 ‘미인도’.


조선시대엔 상류층의 매듭단추가 평민들의 적삼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이다. 김홍도의 ‘신선도’를 보면 당나귀 그림의 앞 장식에 딸기술과 같은 매듭 한쌍이 달려 있으며 신윤복의 ‘미인도’에도 나타난다.


궁중을 중심으로 수요가 있던 매듭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민간에서도 사용이 되면서 일반화되었다. 매듭 상품들은 지금의 광희동인 시구문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매듭상품을 만드는 사람을 한때 ‘시구문안 매디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성용 매듭들.


여성들은 주로 몸치장용으로 매듭을 많이 사용하였다. 노리개, 주머니, 별전, 귀걸이 등에 매듭을 하였는데 여성의 장식품에 달리는 매듭에 따라 신분이 드러나기도 했다고 한다.


전시된 여성들의 매듭 제품에는 향갑 단작노리개, 수석류 삼작 노리개, 문자 삼작노리개, 복주머니 삼작 노리개, 옥나비 삼작 노리개, 호리병 삼작 노리개, 수화준 단작 노리개, 그리고 여성들이 겨울철 방한용으로 쓰던 조바위, 거울 장식매듭, 은장도 장식매듭이 있다.


합죽선에 달린 매듭.


조선시대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매듭이 다양하게 쓰였다. 대표적인 게 도포끈이다. 도포는 사대부들이 외출할 때 입는 옷인데 도포끈은 허리띠 역할을 했다. 반상의 유별을 유난히 따졌던 조선시대엔 남자들의 도포끈도 신분을 드러내는 물건으로 활용되었다.


관리들 가운데 당상관은 다홍색 띠와 분홍 띠, 자주색 띠를 무릎아래에 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선비들은 초록색 띠, 초시는 보라색, 참봉이나 주사는 회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포끈은 동다회로 양 끝에 끈목과 같은 색으로 딸기술을 한 개 혹은 한 쌍식 달아 늘어뜨렸다.


전시된 남성용 매듭제품을 보면, 앞서 설명한 도포끈과 동곳주머니, 향선추, 원숭이선추, 매난국죽선추, 죽선추, 수박쥐선추, 표주박 장식매듭 등이 있다.


남은들 상여에 장식된 매듭.


그리고 염주 등 종교 의식에 사용되는 매듭과 전통악기인 박에 딸린 매듭, 상여에 달린 매듭, 수저주머니 등 생활용품에 달린 매듭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남은들상여에 장식했던 큰 매듭이 눈에 띈다. 남은들상여는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상여로 지난 2013년 충남 예산군이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 남은들상여를 복원한 것으로 전흥수 대목장과 배순화 매듭장이 참여해 만들었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것은 모두 배순화 매듭장의 작품이다.


매듭이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은 생활용품의 단순한 표정을 화사하게 변화시키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횃대, 발걸이, 붓걸이, , 조각보 등 옛 물건들을 보면 매듭이 꼭 들어 있다.


횃대.


전시된 작품 중에 가로로 길쭉하게 걸려있는 대나무가 있는데 이를 횃대라고 한다. 가느다란 대나무 양쪽 끝에 끈을 매어 벽에 달아 옷을 걸었던 물건이다. 서민층에선 주로 방 아랫목 한구석에 달아 주로 두루마기나 장옷 같은 외출복을 걸쳐놓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외 전시된 것을 보면, 바늘꽂이, 돈보, 조각보, 패물보, 다용도함, 패물주머니, 쌈지, 도장주머니, 오곡주머니 등이 있다.


다양한 매듭을 한 주머니들.


현대용품으로 매듭을 활용한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주로 부채주머니, 브로치, 글자노리개, 그리고 타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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