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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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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찾아서]거제 팔랑개 어장놀이

만선의 꿈 싣고 떠나는 과정 놀이로 풀어…용신제도 포함해 어민 안녕 기원


96일 오전 1130.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거제조선해양문화관 앞마당에서 팔랑개어장놀이가 펼쳐졌다. 팔랑개어장놀이는 예부터 옥포동 파랑포마을에서 마을 공동으로 행해온 민속놀이인데 특정한 날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이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간 뒤 부녀자들이 주로 했던 놀이다.


그래서 놀이에는 풍어와 안전을 비는 염원이 담겼는데 배신굿과 풍신제 형태를 띠기도 한다.


놀이의 구성은 총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마당은 질굿 마당으로 출어일에 마을 사람들이 고기잡이 장비를 가지고 선창으로 나와 풍물을 치고 노는 과장이다.


꽹과리와 북, 장구, 징을 든 풍물패가 흥겨운 가락에 풍물을 치며 앞서 행렬을 지으면 어구들을 각기 하나씩 손에 쥔 아낙들이 뒤따라 오며 즐겁게 춤을 춘다. 태평소도 흥을 돋운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아낙들의 손엔 주로 대광주리가 들렸고 남자들처럼 아래위 옷을 흰색으로 맞춰 입은 아낙들의 손엔 도리깨가 들렸다. 바지개를 짊어진 남정네도 있고 술동이를 머리에 인 아낙도 있다.


팔랑개어장놀이1과장


1과장인 들머리 풍물은 여느 민속의 지신밟기와 유사하다. 양반도 등장하고 부인도 등장한다. 다만, 1과장에서 다른 풍물과 다른 점은 나주에 용왕제를 지낼 무당들이 미리 풍물에 함께 한다는 점이다.


시연되는 풍물의 동선은 다양하게 펼쳐진다. 풍물패와 어민들이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따로 그룹을 형성하면서 놀기도 한다. 풍물 중에 이상한 가면도 등장해 보는 재미를 더했다.


팔랑개어장놀이2과장


둘째 마당은 도리깨 마당이다. 그물을 도리깨로 털고 손질하여 배에 싣는 과정을 그린 과장이다.


픙물패는 한쪽으로 비켜 나와 여전히 풍물을 울린다. 어민들은 풍물 장단에 맞춰 배 앞에 있던 그물을 부채꼴로 펼친다. 어민들은 그물을 바닥에 펼쳐놓고 각기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아 구멍 난 그물을 꿰는 등 손질을 한다.


이윽고 작은 그물을 가운데로 가져와서 도리깨질을 한다. 도리깨질을 하는 이유는 그물에 남아있는 이물질을 깨끗이 털어내기 위함이다.


어구를 손질하는 것도 노동. 노동에 술이 빠질 리 없다. 노동으로 말미암은 갈증을 풀어주는 데는 막걸리 만한 음식도 없다. 구수한 맛에 짜릿한 게 피로를 싹 풀어주고 힘이 솟게 한다. 아낙은 일꾼들에게 플라스틱 바가지로 막걸리를 떠서 나눠준다. 풍물이 더 신나고 즐거운 시간이다.


팔랑개어장놀이3과장


셋째 마당은 용왕제 마당. 배가 떠나기 전에 배 앞에 제사상을 차리고 무당이 굿을 시작한다. 바다에 풍랑이 일지 않게 하고 어부들이 무사귀환하도록 하고 또한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는 기원일 터이다.


여기저기서 무당이 오늘 굿을 너무 잘한다며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 칭찬에 힘을 더 얻었는지 무당의 목청은 더욱 들떠 어장에 모인 사람들의 모든 기운을 쫙 끌어 모으는 듯하다. 용왕제에 참석한 사람들이 제사상에 얹힌 돼지머리 입에다 돈을 꽂고는 손을 모아 소원을 빈다.


용왕제가 끝나고 배는 만선의 꿈을 싣고 바다로 출항한다. 배를 떠나보낸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바탕 질펀한 풍물에 맞춰 흥겹게 노래하고 춤을 추며 논다.


팔랑개어장놀이4과장


넷째 마당은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며 흥겨운 가락에 맞춰 만선의 기쁨을 노래하는 과장이다. 그물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과장이라 그물소리라고도 한다. 배에 가득한 고기, 그리고 어민들에게 무사귀환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으랴.


그물에 잡힌 생선을 터는 과정이 고된 노동일지라도 즐겁다. 그물에 걸린 생선을 털 때엔 함께 작업하는 어민들 간의 호흡이 중요하다. 손발이 착착 맞아야 한다. 풍물에 맞춰 손발이 딱딱 맞다.


부채꼴로 펼쳐졌던 그물은 고기를 터는 과정에서 점점 배가 있는 쪽으로 모인다. 그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생선들도 한곳으로 모인다. 잡은 물고기를 다 저장고에 넣게 되면 다시 한바탕 풍물이 펼쳐진다.


팔랑개어장놀이5과장


다섯째 마당은 그래서 대동제가 된다. 가래마당 만선놀이다. 만선기를 꽂고 돌아오는 어부들을 마을 주민들이 환영하는 과장이다.


첫째 마당처럼 풍물과 어민들이 어울려 신나게 놀고 공연을 마친다. 첫째 마당과 다른 점은 배 위에서도 어부들이 만선기를 흔들며 대동놀이 분위기를 띄운다는 점이다.


팔랑개 어장놀이는 지난 199210월 제24회 경남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으며 장려상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994년 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거제의 중요민속놀이로 자리를 굳히고 각종 행사에 초대되기도 했다.


이날 팔랑개어장놀이보존회의 정기공연은 전래민요놀이보존회와 거제농악보존회 등과 함께 열렸다. 아쉽게도 공연 중 비가 내려 구경하러 온 관람객들은 대부분 멀리 떨어진 해양문화관 처마 아래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보존회 회원들은 강우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명나는 공연을 펼쳤다.


<동영상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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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텔링]최치원과 황금돼지

마산합포구 월영동 작은 섬, 돝섬에 얽힌 전설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과 성산구 두산중공업 사이에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지역인이면 모를 사람이 없을 유명한 ‘돝섬’이다. 지금은 마산서항지구 매립이 진행 중이니 조만간 육지에서 훨씬 더 가까워지겠지만 돝섬 유람선 선착장에서 한 10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뱃길 또한 관광에 재미를 더해준다.


돝섬은 1982년 처음 개장한 해상유원지다. 처음엔 동물원도 있었고 놀이시설도 있었다. 1995년엔 돝섬비엔날레를 열기도 했고 잘 나갔다. 그러다가 2003년 태풍 매미로 쑥대밭이 되었는데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한동안 방치된 섬으로 남기도 했다.



돝섬 해상유원지 선착장에 닿기 직전 유람선에서 바라본 풍경.


2011년 돝섬개발 공모를 통해 돝섬유원지 종합계발 계획이 차차 진행되었고 그해 4월 재개장을 했다. 2012년엔 다시 창원조각비엔날레를 이곳에서 개최해 제2전성기를 꿈꾸는 섬이 됐다. 아직도 이때 출품된 비엔날레 조각품 20점이 전시되어 있다.


2013년 돝섬은 친환경유원지로 1차 정비를 마쳤다. 바다장미원 4000㎡에는 40종의 장미 6000그루와 관목류 78500그루의 나무가 조성됐다.


돝섬에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시멘트 길도 데크로드로 변했다. 또 돝섬의 탄생설화가 담긴 이야기벽천 인공폭포도 조성됐다. 이 벽천에서 쏟아지는 물 안쪽에 타일로 만들어진 6개의 벽화장식에 돝섬이란 이름이 붙게 된 전설이 담겨 있다.



돝섬 내 황금돼지상과 벽천 폭포가 있는 광장./창원시


여기에 소개한 이야기는 마산시사에 실린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2011년에 제작된 ‘마산시사’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가락국 서기 42~532. 옛날 김해 가락왕의 총애를 받던 미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그 흔적이 없어졌다. 왕은 낙담 고심한 끝에 사람을 사방에 파견하여 상금을 걸고 수색을 벌였는데, 우연히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가 골포(마산) 앞바다의 조그마한 섬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절색 미녀를 봤다는 보고를 접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특사를 파견해 그 섬에서 배회하고 있는 미희에게 환궁하기를 재촉하였으나 미희는 홀연히 돼지로 변하더니 큰 울음을 내고 두척산(무학산) 상봉의 큰 바위틈으로 사라져버렸다.


특사는 급히 왕에게 그 경위를 보고하였고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의심이 덜컥 났다. 당시 백성 가운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며 밤마다 금돼지가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가되 어린 계집아이나 젊은 부녀자를 특히 좋아한다는 풍설이 퍼지고 있던 터였다.


왕은 느낀 바가 있어 군병을 동원하여 두척산 바위를 포위토록 하였다. 군병들은 일제히 창과 활을 꺼내 들고 산이 진동하는 고함을 지르며 포위망을 압축해 가자 금돼지는 날카로운 이빨로 군병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군병들은 활과 창, , 돌로써 금돼지를 내리쳤다. 군병들에 의해 죽은 금돼지는 미희의 모습으로 다시 변하더니 한줄기 요운이 아지랑이 같이 골포 앞바다 돝섬으로 뻗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그 섬 근방에는 밤마다 돼지 우는 소리와 함께 괴이한 광채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라 거유(이름난 유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이 골포의 산수를 즐기려고 월영대에 들러 향학을 설치하고 풍류를 즐기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어느 초승달이 뜬 밤에 이 괴이한 현상을 보고 그 섬을 향해 활을 쏘았더니 괴이한 광채는 별안간 두 갈래 길로 갈라져 사라지고 말았다.


이튿날 고운 선생이 그 섬에 건너가 화살이 꽂힌 곳에 제를 올린 뒤로는 이러한 현상이 없어졌다 한다. 고운이 제를 올린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 하여 후세에도 오랫동안 그 풍습이 이어졌다. (마산시사, 2011, 마산시사편찬위원회)


돝섬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여지도서’에는 저도(猪島)가 월영대(月影臺)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창원), ‘영남지도’(창원) 등의 조선 후기 고지도의 월영대 앞바다에 저도가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지형도’에는 마산 남서쪽 바다에 저도가 표시되어 있다. 월영동(月影洞) 월영대 앞에 있다고 하여 월영도(月影島)라고도 불린다.



마창대교에서 바라본 돝섬.



마산 무학로 산복도로 신월동서 바라본 돝섬.



정부경남지방합동청사에서 바라본 돝섬.



천주산에서 내려다 본 돝섬.


회원현성지에서 바라본 돝섬. 아파트에 가려 섬 전체가 조망되지 않는다.


같은 돝섬에 대한 전설인데 일본인 諏方武骨이 쓴 ‘경남사적명승담총(慶南史蹟名勝談叢)’이란 책에서는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손진태라는 사람이 1935110일 동아일보 칼럼 ‘난타나에설전 기야이지야도’라는 코너에 번역해 쓴 것을 옮겨 본다.


전설에 나타난 도야지 이야기-마산의 돝섬과 금도야지


지금 마산만 가운데 조그마한 섬이 있어 옛날부터 돝섬이라 하고 근자에 와서는 월영도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섬은 그 형상이 돝과 방불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신라 때로부터 내려오는 금돝 전설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신라 때에 최윤덕이란 사람이 있어 위인이 온후하고 청렴하여 조정에서 명성이 자자하더니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 가서 조 아무개라는 라는 기생의 아름다운 자색에 한 번 미친 뒤로는 마음이 일변하여 밤낮으로 술과 계집에 방종하는 지라 임금은 그를 구실군의 태수로 하여 시골로 내려보냈다. 이 구실군이라는 것은 지금 마산과 창원을 합친 고을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기생과 함께 마산으로 와서는 더 한층 방종한 생활을 하고 ○○(영인본에 보이지 않는 글자이나 ‘정사’라고 대입하면 무리가 없을 듯)에는 마음을 쓰지 아니하였다. 그러더니 하루는 홀연히 그 기생이 없어지고 말았을 뿐 아니라 그날부터 금빛이 찬란한 금도야지 한 마리가 밤마다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가므로 온 고을이 큰 소동을 하고 최 군수는 사람을 모아 이 도야지를 잡으러 떠났다.


그들이 봉암산(팔용산) 중허리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큰 바위 위에 선 절세의 미인을 보았다. 이것이 곧 군수의 사랑하던 기생이었다. 군수가 반가워 손을 잡고자 할 때 기생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요새 밤마다 사람을 잡아먹는 도야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입니다. 나는 원래 궁중의 도야지러니 이 세상을 온통 도야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최 도선의 술법 까닭에 뜻을 얻지 못하고 그 원수를 갚고자 미인으로 화하여 기생이 되어 도선의 일가인 그대를 사로잡았던 것이나 그것에도 만족을 얻을 수 없어 또다시 도야지로 화하여 온갖 사람을 잡아먹고자 한 것이나 지금은 후회가 되고 지금 내 목숨을 그대에게 바칠 터이니 나를 죽이어 천하에 사하고 그대도 마음을 고치어 어진 사람이 돼라.”고 하였다.


그래서 군수는 뭇사람으로부터 도야지를 죽이고 마음을 회개하여 깊이 불법에 귀의하였다고 하는데 그 금돝이 화살에 맞아 죽을 때 요기가 공중에 나타나 세 번 금돝을 돌고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가 지금 돝섬에 이르러 사라졌으므로 이 섬을 돝섬이라 하는 것이다.


그 뒤 최치원 선생이 마산에 와서 월영서원에 계실 때 밤마다 돝섬에서 괴이한 불이 일어나고 그중에 한 미인이 나타나며 때로는 도야지 우는 소리까지 거기서 일어나 뱃사람들이 무서워 밤이 되며 그곳을 지나지 못한다 하므로 선생은 술법을 행하여 이 요물을 물리치었었다고 한다. (諏方武骨 저, 경남사적명승담총에서 초역)


손진태는 서울대 사학과 교수 출신으로 문교부 차관까지 지낸 민속학자다. 그는 이 돝섬 전설에 대해 “우리의 고유한 금돝 전설을 골자로 하여 거기에다 불교의 사상으로 윤색을 더한 것이다. 세상의 탐욕과 색욕을 도야지에 의하여 표현하고 이것은 필경 불법에 의하여 구제될 것이라는 사상을 이렇게 전설의 형식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마산시사에 나타난 돝섬 전설과 달리 조선 세종 때의 장군이자 정승인 최윤덕 이름이 나온다. 의도였든 아니든 일부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



돝섬 입구에 있는 황금돼지상.



최치원 초상화.


그런데 돝섬처럼 금돼지가 최치원과 짝을 이룬 이야기는 전북 군산시 옥도면에 있는 섬들, 고군산군도에 전한다. 여기서는 최치원이 금돼지의 아들로 나온다. 군산문화원에서 펴낸 ‘우리 군산의 옛날 이야기’ 속 ‘내초도 금돈시굴(金豚始窟)’ 편에 실렸다.


, 최치원이 금돼지의 아들이라는 설정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와 박혁거세신화에 나오는 백마의 알 차원의 표현일 것이다.


금돈시굴 전설에 전하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충이 지금의 군산인 문창 수령으로 발령을 받아 갔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내초도란 섬으로 사냥을 갔다가 누런 돼지한테 붙들려 바위 밑 토굴에 갇혀 몇 달을 살게 되었다.


그러자 이 누런 돼지에게 태기가 있어 열 달 후 아기를 낳았다. 아들이 점점 자라 다섯 살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누런 돼지의 감시가 심해 그럴 수가 없었다.


하루는 이 돼지가 이웃 섬으로 사냥을 간 사이 최충은 모든 사실을 아들 치원에게 털어놓았다. 최치원은 어미돼지가 해다 놓은 나무토막으로 뗏목을 만들어 이곳을 탈출하자고 했고 어느 날 어미돼지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간 사이 이들은 섬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들이 육지에 닿기 전에 어미돼지에게 발각되었다. 어미돼지는 바다를 빠른 속도로 헤엄쳐 뗏목에 다다랐다. 최치원은 미리 실어놓은 나무토막을 바다에 던졌다. 욕심이 많은 돼지는 나무가 버려지는 것이 아까워 그것을 주워다 섬에 갖다 놓고 다시 뗏목으로 헤엄쳐 왔다. 최치원 부자는 계속 나무토막을 바다에 던져 결국은 돼지가 기진맥진해 죽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부자는 살아서 육지에 올랐고 머리가 총명했던 최치원은 열심히 공부해 당나라에 유학도 가고 벼슬도 하고 나중엔 대 문장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는 얘기다.


금돈시굴 전설과 유사한 얘기로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군담소설인 ‘최고운전’에서도 전한다. 여기서는 최치원의 어머니가 아이를 밴 상황에서 금돼지에게 납치당해 갔는데 최충이 미리 명주실로 조치를 취해놓았기 때문에 금돼지의 소굴을 찾을 수 있었다.


최충이 금돼지를 죽이고 구해오지만 그 후 부인이 최치원을 낳았는데 최충은 아이가 금돼지의 아이일지 모른다 하여 내다버린다. 버려진 아이에게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자 다시 데려다 키우게 되고 훌륭하게 자란다는 얘기다.


마산만의 돝섬 전설이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으나 군산의 황돼지 전설, 조선 중기 소설인 ‘최고운전’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겠다. 최치원을 따라다니던 누런 돼지 전설이 마산에 와서 돝섬에 얽히게 된 것이리라.


돝섬을 한 바퀴 돌면서 섬에 얽힌 전설과 관련된 다른 전설도 떠올린다면 더욱 의미가 있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돝섬 위성사진./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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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찾아서]“내가 영감 찾아 토영까지 왔소”

13일 한산대첩 축제 기간 세병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탈춤제 ‘통영오광대’


통영한산대첩제가 한참이던 813일 통영 세병관 마루에서 “얼쑤~!” 흥겨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9회 대한민국 탈춤제가 16일까지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3일은 개막하는 날이었고 통영오광대는 개막공연으로 연희를 펼쳤다. 원래 통영오광대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가 있어서 정월대보름 하루 앞날 시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산오광대나 수영야류와 달리 벽사의 성격보다 오락의 성격을 많이 반영함으로써 연희를 하는 날도 3월 보름과 4월 초 봄놀이 때, 그리고 9월 단풍놀이 때 연희로 놀게 되었고 최근 들어서는 4월 정기공연과 탈춤페스티벌이나 특별한 탈춤행사에 초청되어 공연을 하거나 한산대첩 기념행사로도 연희되고 있다.



통영오광대 깃발.


오광대라는 것이 산대도감에서 비롯된 것인바 산대도감이 해체되고 경기도 쪽으로 별산대가 조성되고 남쪽 경상남도로 오면서 오광대가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부산 쪽으로 넘어가면서는 동래야류나 수영야류처럼 야류(들놀음)가 되었다는 것도.


오광대란 명칭이 붙은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오방신장무 과장에 등장하는 다섯광대가 상징하는 오행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개 다섯 과장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진주오광대의 문둥이 광대도 다섯 명이 등장한다.


오방신장무가 제의적 성격이 강한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통영오광대는 오락적 성격이 강화됐기 때문에 오방신장무는 빠진다.


오광대 중에서 오방신장무가 있는 곳은 가산(사천)과 진주, 마산과 창원오광대 정도다. 통영오광대는 문둥이탈춤부터 시작한다. 문둥이 한 명이 등장한다.


1과장 : 문둥(법고)탈춤



애환 어린 탈춤 추는 문둥이탈.


악사들이 굿거리장단으로 북·장구를 친다. 떵더꿍 덩더꿍. 흐느적거리는 춤사위가 보기만 해도 애틋하다.


“아이고 여보소. 이네 한 말 들어보소. 삼대 할아버지 삼대 조모님 그 지체 쓸쓸한 울 아버지 울옴마 인간의 죄를 얼마나 지었건대 몹쓸 병이 자손에게 미쳐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한참을 신세 한탄을 하고는 기어이 북채를 잡고 소고춤을 춘다. 춤사위는 점점 갈수록 경쾌해진다. 구성은 다른 오광대와 유사하다.


2과장 : 풍자탈놀이



풍자탈놀이 과장에서 양반들이 무대를 빙글빙글 돌면서 덧배기춤을 추고 있다.


통영오광대의 풍자탈놀이는 다른 오광대의 양반과장과 같은 과장이다. 오광대의 대표적 아이콘 말뚝이가 양반들을 골려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굿거리장단에 양반들이 무대로 등장한다. 말뚝이가 맨 뒤에 따라 등장한다.


원양반을 비롯해 차양반, 홍백양반, 검정양반(먹탈), 곰보양반(손님탈), 비틀양반(비뚜라미), 조리중이 무대를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다가 쉬~ 하고 멈춘다.


“오늘 심심하니 말뚝이 이놈이나 불러다가 농담이나 해볼까요?” 원양반의 제의에 다른 양반들이 그러자고 호응을 한다. 말뚝이가 함께 등장해서인지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다가 겨우 나타나는 가산오광대의 말뚝이와는 달리 통영의 말뚝이는 바로 대답을 한다.



원양반이 양반 자랑을 하니 말뚝이가 되받아서 바로 면박을 준다.


“내가 너이 고을에 살로 온 지가 수십 년이라 어이들 근본을 모를쏘냐? 내가 일러 줄 터이니 자사히 들어라. 첫째 양반 널로 두고 말하면 니 집안에 기생이 여덟이고 비자가 일곱이라 부정한 계집이 열다섯이니 니가 양반이라 자랑하며, 둘째 양반 널로 두고 말하면 니 에미가 주주모라….”


이렇게 말뚝이는 근본 자랑하는 양반들을 하나하나 그 근본을 들춰내며 기를 죽인다. 양반 중심사회에서 양반에게 불만이 많았던 당시 서민들에게 통쾌함을 주기에 충분한 풍자였다.


이날 통영오광대의 풍자탈놀이는 별 대사 없이 한바탕 덧배기춤으로 놀고 퇴장했다.


3과장 : 영노탈놀이



영노탈놀이과장에서 비비양반이 영노를 보고 놀라 뒤로 나자빠지고 있다.


영노는 다른 말로 비비라고도 한다. 버드나무 피리를 비비하고 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비라는 이름은 고성오광대에서 쓴다.


통영오광대의 영노는 다른 지역 탈과 달리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이 용처럼 생겼고 입은 긴 부리처럼 생겨 말을 할 때마다 부리가 움직인다. 비비란 이름은 양반에게 가서 붙었다.


비비양반이 무대를 한 바퀴 돌고 있는데 갑자기 등에서 영노가 비비 소리를 내고 놀래킨다.


“아이고 놀래라. 니가 뭣고?” 하니 “나는 구령에 사는 영노다”하고 받는다. 양반이 “구령에 사는 영노사면 구령에 있지 뭣하러 여기 왔노?”하니 영노는 양반놈들 행사가 나빠서 양반 잡아묵으로 왔다고 한다. 아흔아홉을 잡아먹었고 이제 하나만 먹으면 백을 채우고 하늘로 간다고 한다.


그러자 비비양반은 자신은 양반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영노가 도포를 보니 양반이라고 하니 도포를 벗으려고 한다. 도포를 벗어도 너는 양반이라는 말에 옥신각신하다가 대결을 벌이고 결국 비비양반은 영노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영노과장의 결말은 오광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가산오광대의 경우 영노가 오방신장을 다 잡아먹고 포수에게 총을 맞아 죽지만 고성오광대에서는 양반이 재치있게 “니 고조 할애비다.”하고는 위기를 모면한다.


4과장 : 농창탈놀이



농창탈과장에서 등장하는 할미탈.


다른 오광대의 영감할미과장과 같다. 통영오광대에선 영감과 작은어미가 먼저 등장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 나이 많은 영감과 함께 사는 것이 재미가 없는지 영감이 장에 간 틈을 타서 동네 남정네들을 불러 모아 아리랑을 부르고 춤을 추며 논다.


이윽고 할미가 등장하여 충청도에서 예까지 영감을 찾으러 왔다고 한다. 등장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캐릭터다. 할미는 몸단장을 하고 굿을 하여 영감 찾기를 염원하고 결국은 만나게 된다.



그런데 영감은 이미 작은어미를 두고 있다. 게다가 작은어미는 출산을 앞두고 있다. 영감은 봉사를 불러 경을 읊게 한다. 이 장면은 가산오광대에서도 등장한다. 북을 치고 경을 읊을 때 빙글빙글 돌아가는 갓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작은어미가 아기를 순산하고 아기를 두고 할미와 작은어미가 승강이를 벌인다. 그 와중에 할미는 작은어미에게 채여 넘어져 죽는다. 통영오광대 대본에는 없지만 작은어미가 쓰러진 할미를 밟아 일종의 ‘확인사살’하는 애드리브는 창원오광대 등에도 등장하는 장면이다. 마산오광대에선 영감이 할미를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하고 김해오광대와 가산오광대에선 영감이 죽는다.


마지막으로 상여가 등장하는 장면은 여느 오광대와 차이가 없다. 상여가 무대를 한 바퀴 돌면 구경꾼들이 지폐를 들고 나가 새끼에 끼운다.





5과장 : 포수탈놀이



마지막 과장인 포수탈놀이 과장./문화재청


통영오광대의 포수탈놀이는 다른 오광대의 사자무 과장에 해당한다. 담보와 사자가 등장하고 서로 싸운다. 한바탕 춤으로 질펀하게 싸운 끝에 사자가 담보를 잡아먹자 포수가 창을 하며 나타난다.


“관사령 났네, 관사령 났네, 훈련도감에 관사령 났네…”


사자를 발견한 포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저격 기회를 잡는다. 때론 관객을 불러 함께 사냥을 하기도 한다. 담보를 먹고 다리가 여섯이 된 사자는 포수가 있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고 놀다 결국 포수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렇게 통영오광대 연희는 끝이 난다.


이날 연희에서는 다음 순서 양주별산대 연희가 있어 시간 관계상 마지막 과장은 생략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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