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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끼의 문화읽기489

[한하균 오동동야화28]비운으로 시작된 월초의 첫 연기인 생활 오동동야화 28화. 원본엔 26화 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번호를 잘 못 매겼다. 월초가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연극계로 진출한 이야기. 그런데 마산의 첫 신극 단체라 할 수 있는 '극예사'가 처음엔 김여찬, 이훈산 등의 아나키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혁신단 신파극 출신의 천전막이 맡으면서 친일로 흘렀다는 얘기에 가슴 아프다. 또 학교 졸업하고 그저 연기만 하고 싶은 마음에 천전막의 극예사에 들어간 정진업의 운명도 안타깝고. 결국 극예사는 돈이 없어 문을 닫고 마는데...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간교한 모습이 읽힌다. 반 일제 성향의 극단을 친일 인사가 인수하게끔 해놓고 결국 그마저 활용가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이런 일본 제국에 속아넘어간 어리석은 인간들.. 2017. 7. 18.
[한하균 오동동야화27]월초 정진업의 옛시민극장 아르바이트 학생 신분을 속이고 영화관에서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한 월초 정진업의 성숙함이 오늘 이야기의 초점인 것 같다. 이 이야기만 봐도 월초가 얼마나 정열적인 인간형인가 가늠하게 된다. 월초는 또한 왕성한 탐구욕의 소유자였다. 그 탐구욕의 소산이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마산상고에는 전술한 아즈카 데카라 선생 이외에도 고다마, 시카사마 등 두 분 선생이 더 계셨다. 고마마 선생은 이라는 희곡 작품을 발표할 정도의 문인이었고, 시카사마 선생은 영어선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 가끔 세계 명작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아일랜드 작가인 싱그와 오케이시 등의 작품을 통하여 영국 지해하의 아일랜드 사람들의 독립의식을 밝힘으로써 은근히 한국인에게도 독립심을 강조하기도 했던, 일본인으로서는 이단자구실을 서슴지 않았던 분이었다. .. 2017. 7. 16.
[한하균 오동동야화26]괴짜 정진업의 마산상고 학창시절 사람이 성장하면서 아무래도 학창시절에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듯하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5, 6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기도 했지만. 월초 정진업 역시 마산상고 시절 만난 일본인 선생 마즈마데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면 그의 전공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어쩌면 성향도 닮는 듯하고. 아즈마데카라가 아나키적 성향이 있었다고 하니 앞으로 월초의 행보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지도 유심히 읽어봐야겠다. 1929년 4월 (당시는 신학기가 4월이었다) 월초는 5년제인 마산상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요즘에야 거의 대부분 학부모들이 자식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아 잘 기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별로, 아니 거.. 2017. 7. 15.
[한하균 오동동야화25]정진업 골목대장에서 문인으로 그 성장과정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연재들 모두에 언급한 대로 한하균 선생이 정진업을 만났을 때 장면이 기억난다. 소설가로 등단해 시인이기도 했던 연극인 정진업이 한하균 선생의 시낭송을 듣고는 나 말고 시를 낭송할 줄 하는 이가 있네 하면서 농을 건네고 심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충고를 주는 장면. 혹시 한하균 선생은 당시 너무 유명인들 앞이라 떨려서 자연스레 바이브레이션이 나왔던 것은 아닐까.. ㅎㅎ 추측일뿐. ㅋ~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연극인, 이 타이틀이 마음에 든다.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 이야기로 접어든다. 월초 선생은 골목대장이었다. 아명은 쇠돌이다. 무쇠처럼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에서 할머니께서 지으신 이름이란다. 진업은 호적상 이름이고 월초는 향파 이주홍 선생께서 부산일보 문.. 2017. 7. 14.
[한하균 오동동야화24]실험성 강조하고 타계한 연극교육자 이광래 오늘로써 이광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앞으로 다른 연극인 이야기에 엑스트라로 출연할 것이다. 연극동맹에 대항한 전력 때문에 인민국이 서울을 장악했을 때 피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끝내 유지했던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그의 작품 몇 개를 읽어보겠지만 한하균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작품에서도 그 성향이 드러난다고 하였으니. 또 민족주의가 세월을 타고 흐르면서 보수세력으로 정착화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겠다 싶다. 이광래가 '연극동맹'에 대항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의 주구노릇을 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붉은 기를 들고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는 점을 들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선연극운동본부 결성 후 한 달만에 친일극 전력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1945년 9월.. 2017. 7. 13.
[한하균 오동동야화23]광래의 표현주의 소극장운동 등 실험정신 이광래의 업적이 나열된다. 사실주의 낭만주의 물결 속에서 '표현주의' 극을 이끌었다는 점, 극 중간에 또 이루어지는 중간극, 이것은 오페라 쉬는 시간(인터미션)에 공연되던 작은 오페라, 오페레타와 유사하겠다 싶다. 하긴 유럽에서 이 오페레타가 재미있는 극의 구성으로 오히려 오페라보다 더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지만. 여튼 그러한 장르의 극도 구상하고 소극장운동까지 펼쳤다고 하니 대단한 인물이다. 한국 연극 계보를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광래의 이러한 점은 현재 한국 연극계 거장 오태석, 이윤택, 손진책, 윤호진 이런 양반들과 비슷했겠다 싶다. 새로운 극을 실험하는 것만큼 창조적 희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그만큼 이광래는 거듭 말하지만 연극에 관한한 한치의 오차도 용납않는 성격이었다. 그.. 2017. 7. 12.
[한하균 오동동야화22]재래식 화장실에 빠트린 심사노트, 이걸 어쩌나 이광래의 마지막 이야기일 듯하다. 1968년 사망 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광래에 대한 인상적이 이야기가 나왔다.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오랫동안 참여했는데, 한 번은 심사 노트를 변기에 빠트렸는데, 그 노트를 건지기 위해 똥을 다 퍼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건진 노트를 물로 헹궈내고 다른 노트에 옮겨 적기를 꼬박 하루동안 작업을 했다고 하니 성격이 독특하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나도 좀 그런 류의 인간형이긴 하다. 언젠가 한 번 한 시간여를 열심히 썼던 일기가 갑작스런 정전으로 날아가버렸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기록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에는 어찌 그리 애통하던지. 그런데 광래는 를 발표하면서 '작의'를 먼저 덧붙인 것이다. 약간 장황하지만 그의 실험정신을 탐색한다는 뜻에서 .. 2017. 7. 11.
[한하균 오동동야화21]마산에서의 흥행실패가 부흥 계기되다 탤런트 주현이 1958년 당시마산에서 김수돈 정진업 이런 양반들과 함께 공연을 했구나. 이즘 이광래는 드라마센터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동시 동국대 교수까지 맡아 자신의 연극론을 본격적으로 펼쳤단다. 그의 연기론은 스타니슬라브스키에서 더 한발 나아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했다는데 그는 이 연출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행간에서 연구하는 연극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마산에서의 공연 얘기를 덧붙인다. 익살스런 장서방 역을 맡은 주현의 코믹한 연기, 고뇌를 씹어삼키면서도 조용히 결의를 다지는 정도 역을 맡은 심영식의 그 처절한 표정 연기, 그리고 자비로우면서도 보다 큰 일을 위한 용단을 내리는 어머니 역을 맡은 천선녀의 그 중후한 연기. 이렇게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 보기 드문 공연이었는데도 마산의 .. 2017. 7. 10.
[한하균 오동동야화20]3.15 1주년기념공연은 '조국' 리바이벌로 20화 글을 보면 마산 관객은 아주 대형에다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마산의 거룩한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1년에는 3·15의거 1주년 기념 예술제전 준비가 거시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61년 2월 중순쯤 나도 화인 김수돈 선생의 급한 부름을 받고 부산에서 마산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생각과는 달리 약간 복잡한 일이 얽혀 있었다. 제전위원회 사무국장을 시인 김춘수 선생이 맡아 전 행사를 총괄하고 있었고 그 아래 예술 분과위원회가 있었는데 위원장에 김수돈, 부위원장에 월초 정진업 선생이 맡아 있어 오순도순 의논만 맞으면 참으로 훌륭한 작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두 분이 의견충돌을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월초는 3·15의거 정신을 고양한 작품을 거의 완성해.. 2017. 7. 9.
극단 상상창꼬 <매직가게> 15일 함안문화예술회관 공연 마산 극단 상상창꼬 7월 15일 오후 7시 함안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공연 ‘마술가게’라는 간판이 걸렸지만 판매하기 위한 옷들이 진열된 평범한 옷가게다. 조명이 밝아지면 점원이 마네킹을 들고 나온다. 쇼윈도 앞에 세우고 옷을 입힌다. 팔등신의 늘씬한 마네킹만 있는 게 아니다. 임신부 의상을 위한 배가 볼록한 마네킹도 있다. 점원이 나가자 마네킹들이 불만을 털어놓는다. 쉬지도 못하게 한다며. 그런데 옆 가게 알바 녀석들이 쇼윈도 앞으로 다가와 담배를 피운다. 이 녀석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마네킹 치마 밑을 들여다 보려고 낑낑대고 킬킬댄다. 마네킹들은 혼이라도 내주고 싶은데 아직은 인간의 시간이라 움직일 순 없고 불평을 늘어놓는 가운데 밤이 된다. 드디어 가게 이름처럼 판타스틱한 일들이 펼쳐진다. 마네킹.. 2017. 7. 9.
[한하균 오동동야화19]기억해야 할 키워드, 원방각과 스타니슬라브스키 좀 기억할만한 내용이 담긴 19화다. 국내 소극장운동의 씨앗이랄 수 있는 원방각운동이 이광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광래가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점. 아쉬운 점은 소극장운동의 첨병이었던 원방각이 6회 공연을 끝으로 화재로 문을 닫고 재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원방각이 제대로 소극장 운동에 성공을 이루었다면 지금 연극판의 지형도 많이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살롱공연 무대나 카페연극이 사람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진 않았을까 싶은... 이광래와 서라벌 예술학원과의 인연은 훨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광래는 1948년 한국 초창기 연극계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인 윤백남 선생의 권유로 예술학원에 발을 들인다. 서라벌예술학원의 설립자가 윤백남 선생이셨기 때문이다. 그 당.. 2017. 7. 8.
[한하균 오동동야화18]연극에 빠져 살던 이광래에게 전해진 비보 그래. 연극이냐 생활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활동을 했던 수많은 이들이 극단보다는 전공이든 아니든 생활을 위해 직장을 선택했던 것이 다반사였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광래가 연극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한국의 연극계를 이끌다시피 했던 이가 자기 몸 하나 근근이 건사할 정도였다니. 광래는 마산 출신이면서도 마산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었단다. 하지만 딸이 허기를 달래려고 우물물을 긷다가 빠져 사망하게 되자 마음을 달리 먹는다. 사실 6·25 전까지 서울국립극장에서 두 번 공연을 가졌는데 두 번 다 극단 신협이 맡았음만 보아도 신협의 활동상을 알 것이다. 그러다가 세 번째 레퍼토리인 정비석 원작 이광래 각색인 와 윤방일이 이끌던 '극협'에서.. 2017. 7. 7.
[한하균 오동동야화17]국립극장 차지에 발휘된 이광래의 수완 앞서 16화에서 이광래가 이끌던 '극예술협회'가 있었지만 새로 '신극협의회'를 만들어 유치진이 대표를 맡게 하고 자신은 간사장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유를 17화에서 풀어놓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 있다.그 실타래를 풀어가보기로 하자. 광복 직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카프(조선공산주의 예술가 동맹의 약칭) 산하의 '연극동맹'이 온 연극계를 붉은 깃발로 물들이고 있을 때 유일무이하게 이에 대항하고 나선 단체(극단)가 민예요, 그러기에 그 민예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함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무대예술원 창립과 함께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 혹은 순전히 타의로 일본제국의 문화정책에 강제로 끌려나가 친일연극을 했던 사람들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38.. 2017. 7. 6.
[한하균 오동동야화16]1948년 극협-신협 바뀌는 과정의 이광래 온재를 두고 한하균 선생은 높은 존경심이 있나 보다. 경연하는 학생들이 온재의 작품을 선정해 공연준비를 하자 다른 작가의 작품을 하도록 추천한 일이나 극예술협회를 구성원은 그대로 하면서 '신극협의회'로 변경할 때 대표를 유치진에게 양보한 일을 두고 '희생'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엔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하면서 덧붙였다. 말하자면 계산된 작전이란 얘기다. 황무지에도 봄은 오는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악명 높은 미군정 193호는 소멸되고 연극예술의 씨앗은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연극학회의 탄생과 함께 연극경연대회의 개최였다. 1949년 6월 금천대회관(전시경찰국자리) 3층에 사무실을 두고 고고의 성을 울린 한.. 2017. 7. 4.
‘문화콘텐츠의 향연’ 제9회 통영연극예술축제 개최 한국연극에 통영연극예술축제 소식을 실었다. 그 전문이다. 형편만 된다면 이 기간 휴가 딱 내고 통영서 살았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ㅋㅋ 7월 7~16일 시민문화회관·벅수골소극장 등서 23개 작품 공연개막작 폐막작 창작극 2편 눈길 오는 7일부터 16일까지 통영시민문화회관과 벅수골소극장, 남망산공원 야외무대 등에서 펼쳐지는 제9회 통영연극예술축제에 많은 예술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통영연극예술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질 뿐만 아니라 공연의 다양성도 이뤄나가고 있다. 이번 축제는 통영콘텐츠창작 스테이지, TTAF 스테이지, 가족극 스테이지, 꿈사랑나눔 스테이지, 섬마을 스테이지, 생활속의 스테이지로 나눠 진행된다. 특히 올해는 통영지역 문화자원을 활용해 콘텐츠로 발굴하는데 초점을 맞췄고 개막작 와.. 2017. 7. 4.
[한하균 오동동야화15]미군 포고령으로 황무지가 된 연극계 이광래가 남원 군민 앞에서 썰을 푼 '명연설'이 당시엔 어땠는지 몰라도 썩 논리적이라거나 감동적이지는 않다. 마도로스가 수입의 6할을 선주에게 빼앗기기 때문에 농민이 7할~6할 지주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인지, 아픔을 공감한다면서 연극에서 대사가 6할을 일한 사람이 가져야 한다고 된 것을 남로당 요구대로 무상몰수 무상분배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게 관객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을 만한 것이었나에는 좀 의아한 구석이 있다. 어쨌든 이광래는 그렇게 연설해서 관객의 동의를 얻어 대본대로 공연을 한 모양이다. 미군정 시대 포고령이 바로 법이었으니... 1948년 200원짜리 관람료에 세금을 매겼으니 많은 극단이 해체되고 관람료 10원짜리 저급한 공연이 판을 치게 되었단다. 여튼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잘 .. 2017. 7. 3.
[연극시연회리뷰]경남예술극단 '안녕이라 말하지마' 인물탐구 시연회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연출을 맡은 이삼우 감독에게도 말했지만 내 관극 태도의 가장 큰 단점은 감상하려하지 않고 분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공연을 볼때마다 그러는 바람에 어쩌면 이젠 그냥 감상만 한다는 것은 불안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관극 습관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남의 연극을 보기도 전부터 연극 무대에 올라섰으니... 게다가 고등학교 때 연극이라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놈이 극본 쓰고 연출까지 맡았더랬으니... 오죽하랴. 학교에서 연극을 했다는 것은 일종의 족쇄이기도 했다. 4학년 가을학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작품을 올리고 연이어 신문사 취직했다. 자연히 그 바닥을 떠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후배들은 시연회 때마다 불렀고 갈 때마다 작품을 분석하고 연기를 지적해댔다. 후배들은.. 2017. 7. 3.
[한하균 오동동야화 14]광복 후 진영논리에 휘둘린 이광래 연극 광복 후 연극 바닥도 이념대결이 치열했던 모양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땅 때문에 이념 갈등이 생기고 급기야 분단까지 이어진 것을 아닐까 싶다. 이념이야 타협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제도는 얼마든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조선민족 성정이 얼마나 도아니면 모인지 반추해 볼 수 있기도 하낟. 암튼 그러한 상황에서 이광래는 남연 공연에서 땅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는 남로당 조직의 요구에 역제안은 한다는데... 극단 '민예'가 문을 닫던 그 해 그 달에 그러니까 1947년 11월에 이광래는 유치진·이서구와 함께 한국무대예술원을 조직한다. 이듬해인 1948년 이른 봄에는 우익진영의 많은 극단과 연극인들을 총망라하여 '극예술협회'라는 이름으로 UN한국위원단 환영 특별공연을 시공관에서 갖게 된다. 아울러.. 2017.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