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균 오동동야화30]서울서 유치진·홍해성과 인연 닿은 정진업
정진업이 서울로 연극 공부를 하러 가서 만난 사람이 유치진과 홍해성이라고 한다. 물론 이광래가 내쳤더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인연이었겠지만, 어쩌면 번역 일을 하면서 '극예술연구회'가 주최한 강습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여간 다행한 일은 아니었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들여다 보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겠다 싶다.
월초가 서울에 갔을 때의 광래는 극작가로서보다도 오히려 문화부 베테랑 기자로 더욱 명성이 높았을 때였다. 광래는 연극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고향 후배를 매몰차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우선 검열대본 번역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말로 연극을 할 수 있을 때였는데(왜정 말기에는 일본말로 대사를 주고 받아야 했으니까) 우리 나라 작품을 조선총독부 산하의 관청에서 공연 허가를 얻으려면 일본말로 된 대본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일본 관헌이 읽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광래는 이 일을 주선해 진업에게 맡기면서 그의 호구지책을 우선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작품(희곡)을 접함으로써 연극의 세계에 입문시키려 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연극계 인사들과 얼굴을 익혀 안면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다행히 월초에게는 문재(文才)가 있어 광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문장력을 발휘하여 각 극단에서는 웬만하면 월초에게 번역 일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문필 업'은 생활과는 먼거리에 있었다.
한 작품 번역해보아야 한 달치 하숙비가 될똥말똥하는 그런 싸구려 수입뿐이었다. 이러한 번역하는 일로 극단 주변에서 약 1년쯤 지냈을 때인 1937년 11월 '극예술연구회'의 실천부(극예술연구회는 크게 연구부와 실천부로 나뉘어 있었고, 전자는 실험무대를 두고 또 후자는 강습회 등을 통하여 새로운 연기자 양성과 연극의 중요성과 함께 스태프의 각 분야별 전문 강의를 맡아 하고 있었다) 산하 강습회 회원으로 수강하게 된다.
이 강습회에서 몇 달 동안 강의를 받던 중 가장 인상적인 과목은 동랑 유치진의 <연기론>과 홍해성의 <무대론>이었다. 유치진은 너무나 유명한 극작가요 연출가니까 새삼스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홍해성에 대하여 잠시 언급해 두고자 한다.
홍해성은 극예술연구회 동인(해외문학파)들보다는 약 10년 선배로 소년시절부터 일본 신극의 요람인 축지 소극장에서 일본 신극의 개척자 오사나이 카오루에게서 신극의 무대 기술과 연기를 배우고 익혀 귀국하여 한국에 이식한 신극계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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