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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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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선사시대 고인돌을 찾아서

함안박물관 앞 고인돌공원에서 배우는 옛사람들 죽음의 양식


‘고인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뭐가 있을까? 나이 40이나 50대라면 박수동의 만화 그 고인돌? 더 연관지어서 ‘배배~ 꼬였네♬’ 하는 아이스케이크 광고? 아니면 강화고인돌축제에서 펼쳐지는 각종 공연들이 생각날까. 고인돌이 뭔지 아예 알지 못하는 초등학교 자녀들도 있을 것이다.



함안고인돌공원


역사 시간에 대충 배웠듯이 들판 가운데 혹은 낮은 언덕에 커다란 바위가 밥상처럼 묘하게 얹어져 있는 모습으로만 고인돌을 정의해버리는 사람도 있겠다. 고인돌이 원시인 족장의 무덤으로 아는 사람도 있을 테고 원시시대 제사상으로 추측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고인돌이 대체 뭘까. 함안에 고인돌이 뭔지 한눈에 알 수 있게끔 꾸며놓은 ‘고인돌공원’이 있다.


고인돌공원은 함안박물관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바로 옆에 몇 년 전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연꽃의 씨앗을 재배한 ‘아라홍련 시배지’가 있기도 하다.


선돌





선돌은 거석기념물의 한 종류다. 대개 신앙의 대상물이 되고 또한 마을의 경계표시를 위한 역할도 한다. 명칭은 지역마다 다양하게 불린다. 돌꼬지라고 하는 곳도 있고 도두, 석주라고도 하고 구지바위, 돌장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선돌의 형태는 둥근뿔 모양의 것이 많다. 비석 모양도 제법 있는 편이다. 선돌은 전국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워지는 것으로 보아 그 문화적 인식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선돌은 마을 입구에 세워지므로 벽사나 수구막이(마을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거나 마을의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것) 역할을 하거나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대개 논밭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구릉에 세워지며 풍요를 기원하는 역할도 한다.


기반식 고인돌





기반식 고인돌은 땅을 파고 판돌을 세우거나 깬돌을 쌓아올려 무덤 벽면을 만들고 그 주위에 고임돌 4~8개 정도 놓은 다음 큰 덮개돌을 덮는 형태다. 덮개가 마치 큰 바둑판처럼 생겼다 하여 기반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선 주로 영호남지역에 분포하여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무덤의 형태는 일정한 형식이 없는데 덮개돌을 큰 걸 쓰기 때문에 이를 구하고 운반하기 쉬운 평지나 구릉에 주로 분포해 있다. 아주 드물게 산 정상부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고인돌 공원에 있는 이 기반식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남 화순의 고인돌을 모방한 것이다. 화순고인돌유적 홈페이지(http://www.dolmen.or.kr/) 참고.


동촌리 1호 고인돌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1482번지 일대는 고인돌 군집지역이다. 그래서 이곳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됐다. 동촌리는 분지지역이다. 여기에 있는 고인돌 24기는 동촌벌에 3~4기씩 삼삼오오 모인 채 열을 지어 분포해 있다.


동촌리 1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길이 256, 너비 185, 두께 110㎝ 정도다. 덮개돌 아래에는 깬돌로 조성한 무덤칸이 있었고 여기서 간돌검과 돌화살촉, 대패날도끼 등이 출토됐다. 이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2002년 경남발전연구원이 발굴조사하여 원형 그대로 이곳 함안박물관 고인돌 공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탁자식 고인돌





기반식 고인돌이 남방식이라면 탁자식 고인돌은 북방식이다. 지상에 4개의 판석형 고임돌을 세워 무덤칸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다. 그 모습이 탁자처럼 생겼다 해서 탁자식 고인돌이다.


탁자식은 지역에 따라 중대형과 소형으로 나뉘어 분포되어 있다. 중대형은 주로 요동반도와 대동강 일대에 있으며 소형은 중부지방에 많이 있다. 탁자식 고인돌에 대해 종교적 제사 기념물로 보는 견해와 씨족들의 공공장소 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지역 여러 곳에서 사람뼈와 껴묻거리(부장품, 사람이 죽을 때 끼워서 함께 묻는 물건)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무덤으로 활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함안고인돌공원에 있는 이 탁자식 고인돌은 전북 고창고인돌의 유적 형태를 본떴다고 한다. 고창고인돌유적 홈페이지(http://dolmen.gochang.go.kr) 참고.


고인돌 암각화





선사시대 암각화는 동굴이나 바위 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고 장례를 치르고 그 무덤 위에 얹은 거대한 덮개돌에도 그림을 새겨넣었다. 물론 고인돌에 암각화를 새기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 2월 제주도 고인돌에서 청동기시대 후기 암각화가 발견되어 언론의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주도에서 두 번째 고인돌 암각화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인돌 암각화는 그리 흔하지 않아 역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사이기도 하다.


고인돌 암각화의 내용은 대략 세 가지. 첫째, 사람의 얼굴, 또는 신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 둘째, 사냥하는 모습 등을 표현한 것. 셋째, 동심원, 마름모꼴과 선·무늬 등 각종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것을 들 수 있다. 대체로 다산을 기원하며 그렸을 것으로 보이며 청동기 시대의 신앙과 예술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함안의 도항리 다호 고인돌 덮개돌에서는 많은 알구멍과 함께 8개의 동심원 무늬가 새겨져 있다.


칠원 오곡리 12호 고인돌





이 고인돌 유적은 칠원면 오곡리 유적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대로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이 고인돌은 오곡리 일대 구릉에 있었던 것으로 청동기 시대의 것이다. 오곡리 유적지는 청동시 시대뿐만 아니라 가야시대의 무덤도 함께 발견되어 복합유적지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고인돌은 총 34기가 확인됐는데 대부분 기반식과 개석식(땅속으로 무덤을 파서 안치한 후 덮개돌을 바로 덮는 형태)이 있으나 덮개돌이 잔존하는 것은 1기에 불과하다. 무덤칸은 돌덧널형, 돌널형, 토광형으로 조성되었으며, 이중 오곡리 12호 고인돌은 벽석을 강돌로 축조한 돌덧널형인데 위에 덮은 덮개돌이 2개로 구성됐다. 돌덧널은 길이 206, 너비 46㎝로 비교적 큰 편이며 간돌검 1점과 돌화살촉 2점이 출토되었다.


함안의 돌널무덤





돌널무덤이란 깬돌이나 판돌을 잇대어 널을 만들어 사용한 무덤이다. 함안에는 약 170기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안의 고인돌은 크게 도항리, 광정리, 봉성리 군을 중심으로 하는 함안·가야권, 동촌리 중심의 군북권, 오곡, 야촌, 용정리 중심의 칠원권으로 나뉜다.


함안에 가장 많은 돌널무덤은 덜덧널형이며 그다음으로 토광형, 돌널형 순이다. 봉성리 유적의 경우 40여 기가 한꺼번에 확인된 것으로 2003년 도로 확장공사 때 발굴된 것으로 함안천을 따라 줄줄이 열상배치되어 있었다.


방형구획묘





방형구획묘란 무덤칸을 중심에 두고 묘역을 사각형으로 설정한 뒤 무덤 바깥부분을 작은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을 말한다. 함안고인돌공원에 있는 것은 합천 저포리 E지구 5호 구획묘를 본떠 조성한 것이다.


방형구획묘는 무덤 바깥부분 사각 공간에 깬돌과 강돌을 넣어 쌓고 작은 돌을 채워넣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조성방식과 규모로 보아 청동기 시대 족장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무덤도 대형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방형구획묘는 김해 구산과 율하, 창원 덕천리, 마산 진동과 진북 등 많은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원형구획묘





방형구획묘와 유사하나 무덤 주변을 사각형이 아닌 원형으로 조성한 것이 원형구획묘다. 고인돌공원의 이묘는 진주 대평 옥방 1지구 5호 구획묘를 본떠 만든 것이다. 방형구획묘와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 족장의 강력한 권위를 표출하기 위해 만들었다.


하지만, 밀양의 활성동 유적처럼 구획묘 안에 무덤시설이 확인되지 않는 것도 있어 이것이 꼭 무덤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제사를 위한 제단시설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원형구획묘는 마산진동리, 진주가호동과 초장동, 사천 덕곡리, 산청 매촌리 등에서 확인된다.


충의공원유적 돌널무덤





이 돌널무덤은 함안 충의공원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가야읍 당산마을의 구릉에 있었던 것이다. 충의공원 유적지에서는 돌널무덤이 이것 하나만 발굴이 되었는데, 대개 몇 기씩 모여 조성되는 것과 달리 따로 1기만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한다.


돌널의 길이는 약 1m 정도로 작고 바닥에는 판석 두 개가 깔렸다. 벽면에는 3~4매의 판석을 겹쳐서 쌓거나 1~2매 판석을 세워서 축조했다.



(그림자료)청동기 시대 고인돌 축조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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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참 오랜 만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야 수시로 해수욕하러 찾은 곳이나 바닷가에 이렇게 와보기는 30년이 훨씬 넘었다. 고등학교 마치고 6개월 쯤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와봤으니.



죽도공원.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던 곳이다. 2개비째 시도하다가 도저히 못견디고 나머지 18개비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긴 했지만. 그때 빨간 솔이 처음 나왔을 때다. 500원짜리. 



이제 와 보니 이곳이 죽도공원이란 이름을 달고 있었다. 대나무숲으로 우거진 섬이란 말이렸다.



멀리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정자. 이름이 송일정이다. 일송정하고 헷갈린다. 송일정이야 새로 지었겠지만 송정이란 이름과 무관치 않다. 송정이란 마을 이름이 붙은 국내 대부분의 지명이 소나무숲에 있는 정자에서 비롯된 것처럼.



송일정 옆에 있는 바위섬. 꼭대기 누가 얹어놓은 둣한 저 바위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무게중심이 앞에 있어 금방이라도 앞으로 꼬꾸라져야 할텐데 모진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다. 그 이유를 가서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강한 바람에 감히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송일정에서 바라본 태평양. 망망대해가 눈을 시원하게 한다.



왜 죽도냐 하면, 예전엔 이곳에 대나무가 많았는데 전쟁시 화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래 대나무가 있었으니 죽도이지. 동해 한가운데 떠있는 독도에 무슨 대나무밭이 있었다고 그것이 죽도냐? 일본이 그 섬을 다케시마(죽도)라고 부른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 언어학을 공부한 나로서는 독도를 다케시마라 불렀을 가능성을 점쳐본다. 받침이 있는 '독' 발음이 일본인에게 어려우니 '다케'가 되었을 거란 얘기다. 다케시마란 말 자체부터 '독도'를 인정한 꼴이 아니더냐.



죽도공원에서 바라본 송정해변. 여기선 잘 보이지 않지만 서핑보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송정에서 해운대까지 이어지는 철길 트래킹이 시작됐다.



폐선로를 트래킹하는 것은 색다른 맛을 준다.



왼편으로 광활한 바다를 끼고 있어 눈이 즐겁다.



하지만 염주알 굴리듯 계속 같은 보폭으로 되풀이되는 걸음은 여간 지겹지 않다. 거의 수행의 수준이다.



색다른 볼거리가 나타나 조금 휴식을 취했다. 바닷바람에 태극기 속 바람개비가 신나게 돌아간다.



왼편 절벽 아래는 절경이다. 바위들과 파도가 군무를 추는듯하다. 간간이 보이는 해안초소도 옛추억을 꺼집어내는 오브제로 작용했다. 해안초소 근무처럼 따분한 것 없을 것이다.



멀리 해무가 밀려온다. 저 깊은 바다의 속을 누가 알까. 외로운 물새들은 알까. 저 바다에 누워란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저절로. 



3분의 2 지점을 지나고. 발 딛는 곳만 내려다 보며 묵언수행을 하다시피 하다 고개를 들면 멀리 해운대가 보인다.



철길 트래킹이 걸음걸이를 단조롭게 해 지겹다는 느낌이 있어도 종종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바다풍경 덕분에 지겹지만은 않은 길이다.



짧은 터널. 여고생인지 여중생인지 온갖 폼을 잡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학창시절 저런 추억 만들기 부럽다. 내 학창시절은 사진이 비싼 시절이어서 영상은 기억 속에만 있으니 이것이 안타깝다. 기억을 인화할 수 있는 기술, 나 죽기 전에는 개발될까.



해운대가 한층 가까워졌다. 멀리 두산위브더제니스인지 아이파크인지 모르겠으나 마천루가 구름을 끼고 있는 모습이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송정발 철로 종점이자 해운대발 트래킹 시작점이다. 미포다. 지명에서 예전에 이곳이 포구였단 걸 짐작케 한다.



해운대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큰 모래더미가 몇 군데 산을 이루고 있다. 왜? 그 궁금증은 머지 않아 풀렸다.



이달 말부터 모래축제가 시작된다. 모래를 만들 수 있는 예술품들이 짧은 생명을 마다않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려 밤낮으로 해운대 바닷가를 지킬 것이다. 그때 한 번 다시 와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려나.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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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찾아서)2000년 역사 가야진 용신제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낸 국가 제례…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


가야진 용진제는 신라 초기부터 전해오는 나라 제사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32 ‘제사조’에 기록되기로 “가야진용신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국가적 제전으로 제정한 중사(中祀) 가운데 사독(四瀆)의 하나다.”라고 했다. 이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렸다.


신라 시대 중사는 제후가 왕명을 받들어 명산대천에서 올리던 제사다. 사독엔 오악(산신), 사해(해신), 사진(지신), 그리고 사독(천신)으로 구분되는데 가야진용신제는 사해가 아니라 사독에 해당한다. 당시 기우제 성격이 강해서였을 것이다.



가야진사에서 바라본 낙동강.


그리고 사독은 서라벌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있는 토지하(흥해), 웅천하(공주), 황산하(양산), 한산하(서울)을 일컫는 말인데 지금은 유일하게 가야진용신제만 남았다. 신라시대엔 천신제와 풍년기원제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진용신제는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9호다. 신라시대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던 이 민속제례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였다. 일제는 가야진사를 허물고 용신제를 금지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몰래 인근 천태산에 들어가 제사를 모시면서 명맥을 유지했다.



가야진사 앞 제단의 남문에 금줄이 쳐져 있다. 헌관과 제관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종이도 걸려 있다.


광복 후 현 위치로 돌아왔고 꾸준히 보전해왔기 때문에 1983년엔 경남무형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고 1990년 대대적인 복원정비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가야진용신제는 이제 민속놀이로 승화해 1995년 제27회 경상남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이어서 1997년 도무형문화재가 된 것이다.


가야진용신제는 1 부정가시기, 2 칙사맞이굿, 3 용신제례, 4 용소풀이, 5 사신풀이 순서로 진행된다.


부정가시기굿



제단 주위를 돌면서 부정가시기굿을 하고 있다.


먼저 부정가시기는 제례일 3일 전부터 제관들은 목욕재계하고 제단 내외를 청소하며 제향을 준비한다. 제를 올리기 전에는 제단 주변과 출입문에서 부정을 쫓아내는 의식을 한다. 그리고 제단 주변으로 부정이 없도록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치고는 부정가시기 굿을 벌인다. 부정가시기 굿은 풍물패가 가야진사 앞에 마련된 제단을 돌면서 진행된다.


“부정아 가시라/부정부정 웬 부정/천상아래 넓은데/목욕재계 삼석달/점지하신 이곳은/이제 정성 대했네/삼용신을 모신 터/부정을 물리세/부정아 가시라/부정아 가시라/부정아 가시라/훠이 훠이 부정 가시라.”


칙사맞이굿



칙사맞이굿칙사맞이굿 중에 길닦이를 하고 있다.


칙사가 당도하기 전에 먼저 길을 닦는 의식이다. 칙사는 나라에서 보낸 관리로 용신제에서 제관이 된다. 가야용신제에선 현재 양산시장이 초헌관을 맡는다. 칙사맞이굿을 할 때엔 사람들이 괭이와 망깨 등 농기구를 들고 소리에 맞추어 땅을 고르고 다지기도 하고 빗자루로 쓸기도 한다.


이런 노동 품앗이에 술이 없을 수 없다. “아이고, 대라! 좀 쉬었다 하세!”하고 누가 소리라도 치면 잠시 휴식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을 하다 중간 중간 쉴 때마다 술이 공급된다. 길닦이 노동이 끝나면 일꾼들과 풍물꾼들이 섞여 춤도 추고 소리도 하며 노동의 피로를 푼다.


길닦이 소리가 정겹다. “용당마을 장정들아 가야진사 역사가세/어허여차 망깨야/길을 닦자 길을닦자 가야진사 길을 닦자/어허여차 망깨야/목괭이로 땅을 파고 나무가래 땅고르고/어허여차 망깨야/망깨로서 다져보세 천년만년 다하도록/어허여차 망깨야…”



칙사맞이사인교에 칙사를 모시고 제단으로 향하고 있다.


이렇게 길닦이가 끝나면 사인교를 앞세워 칙사를 맞으러 간다. 정자에서 기다리던 칙사(나동연 양산시장)가 사인교에 오르면 다시 제단으로 향한다.


“쉬! 칙사님 나가신다/! 나랏님 명을 받고 칙사님 나가신다/! 칙사님 행차시다.” 그렇게 칙사가 지나는 길에는 양옆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구경을 한다. 예전에는 부복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용신제



용신제초헌관을 맡은 칙사 나동연 양산시장이 제례를 하고 있다.


칙사가 제단에 당도하면 비로소 용신제가 시작된다. 먼저 강신굿을 하고 제단 남문 옆에 설치된 용고(龍鼓)를 세 번 울린 후 집례관의 집전에 따라 제례가 엄숙히 진행된다. 현재의 제례는 유교 형식을 띠며 제물은 돼지를 비롯해 익히지 않은 것을 올리고 잔은 3개를 놓는다. 이는 가야진사에 얽힌 전설에 따라 용 3마리에게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신제축문을 읊을 때면 모든 참제원들이 절을 한다.


용신제의 홀기(제례의 순서)가 진행되면 초헌관인 칙사는 여러 차례 제단을 오르내린다. 초헌례가 진행될 때 가야진용신제 시제축문을 읊는다. 그러면 모든 참제원들이 엎드려 축문을 듣는다.


“유세차 을미년 삼월을축삭십칠신사/근견신 양산시장 나동연 감소고우/가야진지신 복이 위국지축 택윤만물 극인극사 사아백복/근이 생폐예제 자성서품 식진명천 상향.” 한자로 된 어려운 말이나 제사를 지내는 헌관이 ‘감소고우’ 즉 가야진의 신에게 삼가 밝게 고하는 것으로 나라에 좋은 일이 있고 만물은 윤택하고 모든 일에 복이 있길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용소풀이



용소풀이_불집태우기불붙은 송막.



침하돈돼지 제물을 용소에 넣는 의식.


용신제례가 끝나면 모두 제단 인근에 마련된 송막(불집)으로 간다. 풍물을 치며 송막을 한 바퀴 돌면 칙사가 불을 지른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짚신을 벗어 불길로 던지며 용의 승천을 기원한다. 요즘은 행사를 위한 제례이므로 미리 송막 주면에 짚신을 마련해놓고 송막이 타오르면 짚신을 주워 던지는 시늉을 한다.


풍물이 끝나면 모두 강변으로 간다. 헌관과 집례 사령들은 배를 타고 용소로 간다. 제물을 용소에 있는 용왕에게 바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다. 용소는 강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용소에 도착하면 칙사가 헌작하고 세 번 절을 한다. 그러고는 “용신님, 이 희생을 바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하고 외치고 돼지를 물에 빠트린다.


이어서 함께 간 사람들이 “침하돈! 침하돈! 침하돈!”하고 세 번을 외친다. 이 소리와 함께 나루터에 있던 풍물패와 마을 주민들은 “비온다!”하고 외친 후 즐겁게 풍물을 울린다. 칙사 일행이 배를 타고 돌아오면 다시 모두 제단 앞으로 가서 흥겹게 뒤풀이를 한다.


사신풀이



사신풀이는 제관과 마을사람들이 함께하는 대동마당이다.


용소풀이가 끝나고 제단 앞에 모인 모든 참제원들이 풍물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뒤풀이를 한다. 이를 사신풀이라고 한다. 칙사는 관복을 벗고 제관을 비롯한 모든 참제원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논다. 대동마당이 펼쳐지는 것이다.




[관련기사]


[전설텔링]“첩룡을 죽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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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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