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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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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이 쓰던 물건, 이런 것도 있었네

[전통을 찾아서]다른 곳에선 못 본, 창녕영산민속관에는 있는


여러 민속관이나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갈 때마다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옛물건들을 발견한다. 민속관이든 박물관이든 모든 물품을 완벽히 갖추기 쉽지 않으리라. 어쩌면 모든 옛물건들을 다 모아 전시하려면 민속관의 크기는 일반적인 것의 몇 배는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 지역을 나들이할 때 그 지역의 민속관을 찾아보는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옛물건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그동안 창원과 거창, 밀양 등 몇 군데를 다녔는데 얼마 전 찾은 창녕영산민속관에서도 ‘아, 이게 뭐지?’ 하는 물건들을 발견했다.


기름틀.


제법 크다. 굵은 나무틀 가운데 쇠로 된 회전체가 있다. 돌리면 내려와서 뭔가를 꾹 누르는 구조다. 나무틀 앞쪽에 작은 나무틀이 부착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아래에 그릇을 받쳐놓았다. 뭘까?


사진을 보고서 바로 정답을 알아맞히는 사람도 있으리라. 기름틀이다. 이 기름틀은 크기로 보아 방앗간에 설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가정에서 사용하는 기름틀은 이보다 크기가 작고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대부분 기름틀은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기름을 짠다. 깨가 든 기름떡을 기름틀 우묵한 곳 즉 떡판에 올려놓고 또 그다음 챗날을 끼우고 위에서 눌러 기름을 짜는 구조다. 누를 때는 무게를 더하기 위해 무거운 돌을 올려놓기도 한다.


나락뒤주.


몸집도 크고 대로 엮은 것이 통풍은 잘 되도록 한 것 같고 위에는 초가집 마냥 짚으로 된 주저리(짚가리)를 씌운 것으로 보아 비를 막고자 한 것인데. 과연 무엇일까?


시골 산장이나 그런 곳에 가면, 산장 주인이 옛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밖에 이런 물건 하나쯤 관상용으로 전시해놓기도 하는 이것은 나락뒤주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나락을 담아 보관하는 수장공간이다.


추수 때가 되면 창고와 곳간의 공간이 모잘 때가 있었는데 마당 한쪽에 이 나락뒤주를 세워 임시로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였던 것이다.


떡메와 떡판.


사진 속의 이 물건은 익숙하긴 한데 민속체험 등에서 보던 것과는 좀 다른 모양새다. 나무망치는 떡메이고 넓적한 나무판은 떡판이다.


떡판의 모양은 다양하다. 도마처럼 생긴 것도 있고 그냥 넓적한 나무판도 있으며 사진처럼 가운데가 움푹 파인 것도 있다. 또 어떤 것은 움푹 파인 부분과 평평한 부분으로 구성된 것도 있다.


전통찻집이나 이런 곳에 가면 떡판이 소품으로 활용되어 눈길을 끌기도 한다. 떡판은 인절미나 흰떡을 만들 때 찹쌀반죽을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떡을 칠 때 쓰는 떡메는 다른 말로 공이라고도 한다. ‘절굿공이’ 할 때 쓰이는 단어와 같은 말이다. 자료를 보면 떠판은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 가장 좋고 떡메는 황양목(黃楊木)으로 만든 것이 좋다고 한다.


솜활.


생긴 게 활처럼 생겼다. 화살을 걸어서 당겼다가 놓으면 사냥도 가능한. 그런데 이것은 사냥용 활이 아니다. 힌트를 주자면 옷을 만들 때 쓰이는 물건이다. 정답, 활은 활인데 솜활이다.


무명솜을 타는 활이다. 무명활이라고도 한다. 지름이 2센티미터쯤 되는 대나무를 휘어서 양쪽 끝을 삼노끈 등으로 바짝 당겨 맨 것인데 목화솜에 대고 줄을 당겨 진동을 줌으로써 씨앗이나 불순물을 떨어트린다. 그러다 보면 솜은 솜대로 부드럽게 부풀어 올라 고운 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주조장 술통.


사진 속 나무통에 ‘주조장’이라는 글자가 적힌 것으로 보아 눈치 빠른 사람은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눈치를 챘을 것이다. 술통이다.


그냥 술을 담아놓는 용기가 아니라 많은 양의 술을 담아 이동하기 위한 배달용 술통이다. 이 술통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진처럼 위에 주둥이가 있는 것과 불룩한 배에 구멍을 뚫어 주둥이를 만든 것.


술통의 크기는 18리터에서 180리터까지 다양한데 신기한 것은 나무로 잇대어 만든 탓에 틈이 있을 법한데 술이 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술이 들어감으로써 나무의 흡수성 때문에 팽창하게 되어 그 틈새가 메워지기 때문이다.


채반.


요즘에야 플라스틱 제품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대나무로 만든 것은 판매도 하고 있으니 모양새가 달라 그렇지 종종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원래 ‘채’란 말이 싸리를 두고 하는 말인데 요즘 싸리로 채반을 만드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 채반의 의미가 전도되었다고 봐야겠다.


예전엔 대부분 싸리나 버드나무, 대나무 등의 껍질을 가늘게 벗겨 짜서 만들었다. 이 채반은 주로 기름에 부친 지짐이나 만두, 고기 등을 담는데 사용한다. 공기가 잘 통하고 기름도 잘 빠져 음식이 잘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부각이나 나물을 말릴 때에도 사용된다.


채반은 대부분 둥근 형태를 띤다. 어원으로 보면 가는 싸리를 이르는 표현이지만 무채나 오이냉채 등과 같이 가늘게 썬 음식을 뜻하기도 하고 밀가루 등 가는 것을 거르는 채도 일맥상통하는 어원을 지닌다 하겠다.


토매.


나무를 잇대어 만든 통에 진흙이 잔뜩 들었다.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눈으로 보아서는 그 원리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 물건의 이름은 토매라는 것으로 벼의 겨를 벗기는 농기구다. 매통의 일종인데 안에 흙이 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통나무가 귀한 곳에서 사용한 것으로 진흙 속에 대쪽을 촘촘하게 박아 위와 아래 통을 맷돌처럼 돌리게 되면 벼를 비비게 되며 껍질이 벗겨지는 원리다.


토매, 매통, 맷돌 등의 표현으로 보아 ‘매’라는 말은 ‘갈다’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맷돌을 한자로 표현하면 ‘마석(磨石)’인데 이는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마제석기나 마제석검 유물 이름과도 관련이 있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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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의 화음…함안 뚝방길

함주공원서 5.7킬로미터 거리…이 여름길에도 낭만이


여항면 내곡리에서 시작한 함안천이 악양루 바로 앞 남강을 만나는 곳에 기역 자로 꺾여진 둑이 있다. 이 둑길 양옆으론 형형색색의 꽃들이 일직선으로, 마치 70년대 국빈이 방문했을 때 도로 양쪽에 나열하여 국기를 흔들며 환영하던 그 인파처럼 꽃잎을 흔들고 있다.


함안뚝방길이다. 이 길이 연결된 방죽은 길다. 함안과 의령 창녕의 방죽을 합하면 338킬로미터란다. 그 긴 길을 큰맘 먹고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마는 도심생활에 지친 사람이라면 하루 두세 시간 정도 잠깐 시간 내어 쉬엄쉬엄 걸으며 상념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위성지도위성사진./네이버지도


차를 몰고 찾아왔다면 함주공원에서 함안대로를 따라 악양마을 쪽으로 무조건 직진하여 직선 길이 끝날 때까지 가면 뚝방길을 만난다. 그 거리는 5.7킬로미터다.


이산화탄소 가득한 지구별. 신이 노했는지 자연이 놀랐는지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유월 하순. 지난 22일 잠시 짬을 내어 지난 봄 화려한 꽃으로 블로거들을 유혹하던 양귀비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뚝방길 가운데 쯤에 경비행기 교육장이 있다.


경비행기와 까치의 기싸움?


이미 뚝방길에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꽃양귀비는 화무십일홍 올해 한 세월을 풍미하고 꽃잎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붉은 꽃양귀비와 함께 푸른 잎의 수레국화, 노란 금계국 등도 얼추 화장을 벗고 진한 갈색의 씨앗들을 통통히 살찌우고 있었다.


다만, 해바라기를 닮은 루드베키아와 작은 해바라기들은 군락을 이루어 이제야 제철인양 진노란 얼굴을 드러내며 여행객을 반긴다.


뚝방길은 그리 길지 않다. 풍차가 있는 주차장에서 서쪽 길끝까지 1.3킬로미터, 동쪽 꺾어진 지점까지 1킬로미터. 2.3킬로미터, 차가 있는 곳으로 다시 와야 하므로 왕복 5킬로미터 정도를 걷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조금 더 시간이 있는 여행자라면 동쪽 뚝방길을 끝까지 걸어가서 악양교를 건너 ‘처녀뱃사공’ 노래비를 보고 악양가든을 지나 악양루를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


꽃양귀비.


구절초와 나비.


대부분 꽃양귀비가 화려한 시절 다 보내고 몇몇 젊은(?) 아이들이 마지막 자태로 카메라 눈을 유혹하는 뚝방길을 따라 서쪽으로 마냥 걸었다. 꽃잎은 떨어졌어도 꽃은 꽃인 모양이다. , 나비, 잠자리가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길 가운데엔 검은 천으로 포장(?)을 해놓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던 5월 방죽 흙길에 먼지가 일지 않게 조치한 것일 게다.


원두막 삼형제.


혼자 걷는 길에 잠자리와 나비가 길동무다. 이들의 춤을 보고 걷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래도 길 중간 쯤에 나란히 앉은 원두막 삼형제가 발길을 붙잡는다. 마지못한 척 퍼질러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을 느낀다. 반갑다. 뚝방길에 올라서면서부터 느꼈던 부담스러움. 유월 태양의 열렬한 환영이 정말 부담스러웠는데 원두막 마루에 걸터앉으니 다소곳한 바람이 선녀처럼 합죽선으로 살랑살랑 부채질해주는 듯도 하다.


해바라기 뒤로 루드베키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뚝방길 왼편 루드베키아 군락을 만났다. 노란 꽃잎들이 가뭄 끝에 물맛을 보았는지 빙그레 웃으며 해바라기 흉내를 낸다. 루드베키아 군락 앞에 해바라기 식구들이 줄을 지어 있다. 아직 어린 해바라기들이다. 그렇지. 함안 강주마을은 해바라기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8월이면 그곳, 해바라기로 바다를 이룬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법수면사무소 방향으로 7.8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8월이면 뚝방길에 코스모스도 키재기를 하며 쑥쑥 자랄 시점이겠다. 이곳 뚝방길은 5월 꽃양귀비, 9월 코스모스로 여행객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꽃 계절의 중간에 찾아와 망막에 맺히는 화려함은 없어도 시원한 하늘과 산과 물, 그리고 주위를 맴돌며 온갖 기교를 부리며 춤추는 나비와 잠자리가 있으니 이것이 낭만이 아니고 무엇이랴.


벌써 코스모스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돌아 오는 길에 멀리서 보이는 풍차.


뚝방길 끝을 찍고 되돌아오는 길. 왔던 길이 지겨우면 강변길을 따라 걸어도 되겠다. 하지만, 이 길은 물이 차면 갈 수 없는 길이다. 뚝방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도 상념으로 채우면 전혀 지겹지 않다. 좀 전에 만났던 원두막 삼형제를 다시 보게 되고 여전히 춤을 추며 유혹하는 나비와 잠자리. 그리고 멀리 보이는 풍차.


돌아보면 먼 거리인 것 같아도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쪽으로 1킬로미터 새로운 기분으로 걸어도 되겠다. 아니면 차량을 이용해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있는 곳으로 와서 어떤 사연이 서렸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다.


처녀뱃사공 노래비 뒤쪽에 숨어있는 스피커.


“낙또옹가앙 강빠아라아~암이 치마폭을 스으치이~면…” 술좌석에서 노래 부르는 이가 이젠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겐 노래방 애창곡이 바로 ‘처녀뱃사공’이다. 한 번이라도 와봤던 사람이라면 처녀뱃사공 이 노래의 사연을 잊지 않을 듯하다.


지금은 방송 출연이 뜸하긴 하지만 한때 ‘나는 행복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등을 불러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윤항기와 ‘여러분’을 불렀던 윤복희 남매의 아버지가 ‘처녀뱃사공’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아버지인 윤부길이 유랑극단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가 처녀 뱃사공의 이야기를 듣고 작사했고 ‘빈대떡 신사’ 한복남이 작곡한 노래가 바로 ‘처녀뱃사공’이다. 황정자 목소리의 노래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찾아 가보니 아하, 나무 뒤에 큰 스피커가 숨어있다.


노래 한 곡 정도 주변을 둘러보며 감상하고 길 건너편 악양가든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악양루로 가려면 이 식당을 지나야 한다.


악양루에서 보이는 뚝방길.


악양루는 높지 않은 절벽 위에 지어졌다. 지금이야 난간이 있어 안전하다지만 옛날엔 겁이 나서 어찌 마루 끝에 앉았을까 싶다. ‘악양루’ 편액을 찍으려 해도 자세가 영 마뜩찮다. 함안천 건너편에서 찍으면 잘 나오려나.


악양루 내부에는 많은 글이 걸려있다. 대부분 한시다. 물론 악양루중수기 등 짓게 된 사연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한문 실력이 상당한 분이라면 주련의 글귀를 읽으며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괜찮겠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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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짝사랑 수준에서 머물면 좋으련만 마음과 몸이 멈출 줄 모르니 끝내 상사병을 앓다가 죽게 되니 그 원혼이 가만 있으랴. 우리네 전설에 욕심 많은 장자 이야기만큼이나 많은 게 이룰 수 없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다. 그 사랑 이야기는 대개 바위에서 절정을 찍는데 후에 그 바위를 사람들이 ‘상사바위’라 일컫는다고 전해진다.

상사바위는 산꼭대기에 있을 수도 있고 바닷가 절벽에 있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상사바위가 있지만 오늘은 저기 거제도 능포항 끄트머리에 있는 양지암 앞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을 찾아가 볼까 한다.


옥포대첩기념공원에서 바라본 양지암.

2002년 발행된 거제시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능포 앞바다에서 우뚝 서 멈춘 곳 돌출부에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고 노송이 우거져 있는 곳을 양지암이라 하고 군함같이 생긴 바위가 마치 얼굴을 쑥 내밀고 있는 듯한 바위가 있는데 상사바위라 전한다.

조선 중기 이상서라는 사람이 삭탈관직되어 이곳으로 유배를 왔는데 무남독녀 외동딸 국화를 데리고 몸종 삼돌이와 함께 세 식구가 능포 어구에 초막을 짓고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상서의 딸 국화는 어릴 때부터 매우 영특하고 총명하여 일곱 살에 천자문을 떼고 열다섯 살에 사서를 다 배웠다고 한다.

이런 국화의 모습을 한 번 본 마을 청년들은 남몰래 국화를 사랑하였으나 세도 높은 양반의 딸이니 사랑을 호소하거나 규방 처녀를 만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어서 사랑을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였다. 동네 총각들은 애모와 연정의 대상으로 짝사랑만 하였다. 그중에서도 이상서의 몸종인 삼돌이는 종의 몸으로 국화를 그만 은연중에 사모하게 되었다.

늘 외로운 섬에서 날이 새면 만나는 사람은 이상서와 국화 그리고 몸종 삼돌이였다. 이상서는 귀양살이하는 동안 독서를 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국화는 아버지인 이상서의 뒷바라지에 효성을 다하였다.

삼돌이는 국화와의 사랑은 이루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국화를 밤낮으로 그리워했다. 삼돌이는 태어난 팔자타령을 하다가 식음을 전폐하고 국화만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삼돌이가 가엾게 생각된 국화는 죽 한 그릇을 끓여다 삼돌이에게 주었다.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국화를 본 삼돌이는 반가워하며 국화가 끓여준 죽 한 그릇을 마지막으로 상사의 한을 안고 죽고 말았다.

삼돌이가 죽은 후 사흘째 되는 날 밤에 국화는 몸이 이상해서 잠을 깨고 보니 실뱀 한 마리가 국화의 몸을 감고 있었다. 깜짝 놀란 국화와 이상서가 뱀을 떼어 놓으려 해도 뱀은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이 소문은 온 마을에 퍼져 많은 사랄들이 이런 희귀한 광경을 보려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삼돌이의 죽은 영혼이 상사뱀이 되었고 상사뱀 때문에 고생을 하던 국화는 결국 양지암 앞의 바위에 떨어져 죽었다. 국화가 떨어져 죽은 양지암 앞의 바위는 그 이후에 상사바위가 되었고 처녀 총각들이 혼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이곳에서 고사를 지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전한다.


옥포대첩기념관에 있는 양지암 모형.

신분 차이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을 내비치지도 못하고 결국 죽어서야 뱀이 되어 품었던 연저을 풀어보려 하나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이야기 구조다. 이런 상사바위 전설은 전국 어디서나 대개 유사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도내에도 여러 상사바위 전설이 있는데, 먼저 창원시 봉암동 수원지 뒷산에 있는 상사바위 이야기는 어떨까? 2003년 이학렬이 엮은 ‘간추린 마산 역사’란 책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상사병이라는 병이 있었다. 요사이 같으면 짝사랑으로 병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사병으로 죽는 수도 있어 죽는 자는 대개 남자인데 그 죽은 혼이 뱀이 되어 처녀의 배에 붙어 턱밑으로 대가리를 치켜들고 도저히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부모들이 그 죽은 원한을 플어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굿을 한다. 그러나 뱀이 끝까지 떨어지지 않으면 결국 높은 산 바위 위에서 절벽 밑으로 처녀가 떨어져 죽는데 그 바위가 바로 이 바위인 것이다.

남해 금산의 상사바위에도 유사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거제의 상사바위와 마찬가지로 유사한 스토리인데 금산의 상사바위엔 삼돌이 대신 돌쇠가 등장한다. 돌쇠가 주인 아씨를 사모하다 그만 속병이 나서 죽었는데 그 원혼이 뱀으로 나타나 아씨의 몸을 칭칭 감았다.

아씨의 부모가 이를 발견하고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자 굿을 했다. 하지만, 온갖 굿을 해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어느날 긴수염의 노인이 금산 높은 벼랑에서 굿을 해보라는 제의에 그렇게 하니 뱀이 아씨를 감았던 몸을 풀고 병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이 벼랑에서 상사를 풀었다고 해서 상사바위라고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거제 능포 방파제에 낚시꾼들이 많이 모였다.

거제의 상사바위 이야기와 아주 약간 다르긴 하다. 그 아씨가 죽지 않고 살았으니. 그런가 하면 함양군의 용추폭포 절벽 상사바위 이야기는 큰 틀에선 유사하지만 또 다른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1995년 함양군에서 발간한 ‘천령의 맥’이란 책에 보면 전설을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이야기를 압축해서 소개하면, 용추폭포 위에 용추사란 절이 있었다. 여기서 동쪽으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에는 작은 암자가 있어 젊은 스님들이 불도에 정진하고 있었다.

어느날 어여쁜 여인이 불공을 드리러 왔다. 여인은 불도를 닦고 있는 젊은 스님에게 첫눈에 반해버린다. 그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알아차린 다른 스님이 여인을 추방한다. 암자에서 쫓겨난 여인은 더욱 젊은 스님을 잊지 못하고 사랑으로 괴로워하다 상사병에 걸리고 만다.

결국 그는 괴로워하다 숨을 거두고 마는데, 얼마 후 달이 밝은 가을 밤 동자승이 공부를 하다 잠시 쉴 요량으로 큰 바위에 올라 고향 생각을 하는 중에 큰 뱀과 맞닥뜨리게 된다. 스님은 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큰 뱀은 사정없이 스님의 몸을 칭칭 감고 노려봤다.

“나는 당신을 너무나도 사모하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한 맺힌 처녀귀신입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해 찾아왔습니다. 제 소원은 영혼이나마 당신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뱀은 그렇게 애원했지만 스님은 이미 부처님께 귀의한 몸이라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뱀은 스님을 칭칭 감은 채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둘 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후세사람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른다.

이처럼 상사바위의 핵심 줄거리는 신분이나 여건의 차이 때문에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 하다 한쪽이 죽음을 맞게 되고 그 때문에 연정의 대상이었던 이에게도 불행이 닥치게 되는 구조다.

다시 거제 양지암의 상사바위 이야기로 돌아가서. 거제의 상사바위 전설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구체성을 띤다. 그리고 삼돌이의 원혼이 변한 실뱀이 국화의 몸을 감고 떨어지지 않자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린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양지암 가는 길에 만나는 산책로 안내판.

양지암과 상사바위 위성지도./다음

창원 봉암수원지 뒤편 상사바위나 남해 금산, 함양 용추폭포 동쪽 기백산 줄기의 상사바위가 떨어지기 전 올라선 바위라면 거제 능포의 상사바위는 떨어진 곳에 솟은 바위란 점이 다르다.

그 바위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위성 지도를 확대해 보면 양지암 등대 북동쪽 방향으로 깎아지른 절벽 앞에 나룻배 한척이 정박해 있는 듯한 모습이다. 물론 옆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 모습을 카메라 렌즈에 담으려 13일 거제로 떠났다.

이 상사바위를 담을 수 있는 장소는 옥포대첩기념공원과 양지암 현장이다. 먼저 옥포대첩기념공원으로 갔다. 하필 가는 날 바다 안개가 자욱해 촬영이 쉽지 않았다. 망원렌즈로 당겨도 선명한 사진을 담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안개가 걷히길 기다린다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공원을 둘러봤다. 옥포대첩기념탑과 참배단, 기념관과 이충무공을 모신 사당을 둘러보고 나왔다. 참, 기념관 전시실에서 ‘양지암’ 모형을 봤다.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옥포대첩의 승리를 가능케 한 양지암.’ 옥포대첩과 양지암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처럼 모형을 떠놓은 것일까.

인터넷을 어지간히 뒤져도 답을 구하지 못했다. 거제문화원에 문의하니 양지암과 옥포해전의 승리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알 수 없단다. 그런 자료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왜? 이에 대한 답은 천천히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양지암으로 가려면 능포로 가야 한다. 가는 길 오른편에 양지암조각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양지암조각공원으로 들어가 조각들을 감상하고 산책로를 따라 양지암으로 걸어가도 되겠다.

양지암만 갈 것 같으면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된다. 도로의 끝이 나오기 바로 10여 미터 전에 우측으로 빠지는 도로가 있다. 이 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또 길의 끝을 만난다. 길가에 제법 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대부분 낚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의 차다.

능포 방파제에도 제법 많은 낚시꾼들이 줄을 지어 있다. 낚시가 잘되는 곳인가 보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길가에 텐트를 치고 고기를 구워먹는 사람들도 있다. 선입견에 여성들은 낚시를 싫어한다고 여겼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다. 낚싯대를 잡은 여성의 의외로 많다. 한 여성이 손맛에 비명을 지르자 옆에 있던 남성이 낚싯대를 잡아준다.

이 길의 끝에서 ‘양지암 가는 길’ 푯돌이 있다.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폭의 도로다. 차를 몰고 갈까, 갈등이 인다. 그러다가 조금 올라가면 하얀 팻말에 군사지역이므로 차량운행 시 사고우려가 있으므로… 어쩌구 저쩌구 적혀있다. 갈등이 싹 사라졌다.


양지암 안내판. 맞은 편으로 계속 가면 군부대다.

길은 예상과 달리 제법 길다. 양지암과 양지암조각공원으로 가는 산책로 분기점에 안내도가 있어 대략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20분 쯤 걸으면 될까? 오후 좀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걸음을 재촉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은근히 피로도 몰려왔다.

또 길의 끝을 만났다. 그곳엔 예닐곱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낚시하러 온 이들의 차였다. 아, 이룰 줄 알았으면 차를 가져오는 건데…. 여기서 차단기를 넘어 들어가면 양지암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 나온다.

오른쪽 군부대를 감고 돌듯 길을 따라가면 머지않아 하얀 등대가 우뚝 솟은 양지암을 만난다. 양지암은 거제도에서 가장 먼저 해를 볼 수 있는 바위란 뜻으로 이름지어졌단다. 지도에 의하면 이 양지암 바로 앞에 뭉툭하게 솟은 바위가 있다. 그것이 상사바위다. 그런데….

아무리 고개를 빼고 내려다봐도 상사바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들 가지 끝으로 조금 보이는 ‘돌무더기’가 상사바위의 꼭대기 부분이다. 이래가지고선 온전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다.


양지암 등대.


양지암에서 내려다 본 상사바위 모습.

양지암 전망대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갯바위들이 바다에 발을 담그고 섰다. 좀 더 안쪽으로는 해식동굴로 보이는 것도 있다. 저쪽으로 내려갈 방법이 없을까? 거기서는 상사바위의 옆모습을 촬영할 수 있겠다 싶다.

돌아서 나갔다. 낚시꾼들이 많이 다녀서 그런지 길이 나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몇 걸음 옮기지 않아서 헬기착륙장을 만났다. 아, 군사지역. 양지암 오른편 갯바위로 내려가는 길은 헬기장 앞에 있었다.

그런데 길이 암벽으로 된 데다 너무 가파르다. 그래서 밧줄이 매어져 있었나 보다. 밧줄 없인 도저히 오르내릴 수 없는 낭떠러지다. 겨우 밧줄을 잡고 바위를 타며 내려서니 저 아래에 낚시꾼이 보인다. 낚시에 여념이 없다. 상사바위를 촬영하자니 그가 앵글 속으로 들어온다.


헬기장.

상사바위.

상사바위와 양지암 등대.

드디어 촬영에 성공한 것이다. 상사바위는 거제도 동쪽 끝에서 모진 풍파를 몸으로 받아내느라 그런지 몰라도 바윗덩이들이 모두 갈라져 있다. 일부는 쪼개어져 떨어지기도 했다. 하기야 저렇게 되기엔 수천 년 수만 년이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낚시꾼들은 물고기가 잘 낚이는 포인트를 찾아 위험을 감수하듯 취재기자는 좋은 장면을 찍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 같다. 그런 만족감에 30분 이상을 머물렀다. 그런 중에 두 사람이 밧줄을 타고 절벽을 내려온다. 여기도 포인트인 모양이다.

돌아나오면서 되돌아본 양지암과 상사바위. 어쩌면 갯가에 있는 바위들의 평범한 모습이다. 언제부터 상사바위 전설이 얽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신분 차이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 이야기가 유배지였던 거제, 능포 끝자락 바위에 맺히게 된 것은 이곳 옛 사람들의 신분차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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