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산책]제멋대로 기운 소나무 사잇길 ‘매력’
흐린 날, 밀양시 삼문동 체육공원 송림에서 거북 걸음으로 여유를 부리다
며칠이 지났다. 잔뜩 흐린 날씨에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어깻죽지에 툭툭 떨어질 것만 같았던 하늘이었다. 이런 날은 괜스레 울적해서 슬픈 영화라도 볼 양이면 금세 눈물이라도 뚝뚝 떨어뜨리고야 말, 그런 분위기여서 혼자 한적한 길을 걷는다는 것은 감정조절을 감당 못할 위험도가 높아 오감을 어느 정도 제어할 필요가 있다.
두꺼운 외투에 장갑, 모자를 쓰고 극단 밀양의 연극 공연을 보러 밀양청소년수련관에 가는 김에 조금 일찍 나서서 인근에 있는 삼문동 체육공원 송림 속을 거닐었다. 공연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이곳 송림은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강둑 안쪽과 바깥쪽. 밀양시자원봉사센터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송림의 끝인 밀양축협 쪽에서부터 걸어나왔다.
숲길은 육각형의 정자에서부터 시작된다. 대개 정자를 이야기할 때 팔각정이 입에 익은데 육각정이라니. 그러고 보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도 육각정을 두고 팔각정이라고 말들을 한다. 세어보면 분명히 육각인데…. 지붕은 모임지붕 형태다. 육각뿔 형태로 중앙 꼭짓점에서 6개의 추녀마루가 흘러내려 각을 이룬다.
실제로 우리나라 정자의 건축형태는 사각이 많다고 한다. 그다음이 육각, 사실 팔각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정자 하면 ‘팔각’을 연상할까?
옛 건축 양식은 불교식을 많이 따랐는데 8이란 숫자는 ‘팔정도’에서 알 수 있듯이 ‘깨달음’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옛 불교에선 팔관회 행사도 치렀으며 이런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인식에 ‘팔’이라는 숫자가 깊이 새겨진 듯하다.
오죽하면 전혀 다른 글자를 ‘팔’로 바꿔버린 일도 있으니, 바로 팔룡동의 원래 이름이 ‘반룡산’에서 비롯되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룡’에는 동쪽의 용이란 뜻도 있고 승천하지 못한 용이란 뜻도 있다.
게다가 주역에서도 ‘팔괘’로 삼라만상을 말하고 있고 토정비결에서 ‘팔자’로 사람들의 운명을 점치고 있으니 오죽하랴. 그러하니 육각정도 팔각정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육각정엔 아직 현판이 붙어 있지 않다. 건물에서 아직 니스 냄새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내부도 깔끔하다. 겨울에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량인지 방풍시설을 잘해놓았다. 창문이 모두 달렸을 뿐만 아니라 드나드는 입구는 이중 문으로 되어 있다. 인근에 솔밭경로당이 있다.
이 송림은 왼쪽으로 문화체육회관과 청소년수련관을 두고 있고 오른쪽으론 삼문동 공설운동장을 끼고 있다. 그리고 좀 더 가서 둑을 넘으면 왼쪽으로는 밀양강 오른쪽으론 유성청구타운아파트와 밀양대우아파트를 끼고 있다.
이 삼문동 솔밭은 들어서는 순간 맨 처음으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길게 뻗은 소나무들이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어 막 혼란스럽게 자랐나 하는 것이다. 대개 산에서 자란 쭉쭉 벋은 나무들을 보면 기울기가 일정한데 비하면 분명히 뭔가 사연이 있는 형태이긴 하다.
그 이유를 머지않아 발견하게 된다. 둑 안쪽 솔밭은 길이 사방팔방으로 나 있다. 숲속에서 마구 다니지 못하도록 보도블록으로 길을 내어놓았다. 곳곳에 조명도 설치해놓은 것으로 보아 야간에도 괜찮은 분위기를 연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식수용으로는 보이지 않는 수도 시설이 보인다. ‘통일의 샘’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다. 1994년 민주통일자문회의 밀양시협의회에서 조성해 그런 이름을 가졌나 보다. 주변으로 학교를 마친 초등학생들이 뛰어놀고 있다.
여러 갈래로 난 길을 이리로도 가보고 저리로도 가본다. 구경하는 맛보다 걷는 운치가 더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길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나무도 있다. 그래 어디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버티고 섰겠나, 길을 만든 사람들이 울타리를 치다가 둘러가기 귀찮아서 그대로 길을 냈으니 그리된 것일 테지.
그런데 이런 나무가 왠지 밉지 않다. 걷다가 나무 기둥에 손을 얹고는 한 바퀴 돌아본다. 들어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놓은 안쪽의 소나무는 보기만 하는 관상용이지만 이 길 가운데 나무는 촉감을 허용하는 ‘감상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팻말이 하나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구절초(九節草)’란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설명을 읽어보니 구일초, 선모초, 고뽕이라고도 하는데 가을에 피는 대표적인 야생화란다. 하긴 구절초란 이름 익숙하게 들어온 상태다. 간혹 개망초 또는 쑥부쟁이와 헷갈리긴 하지만.
지나고 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이 동네 구절초 군락이 음력 9월, 양력으로 10월이면 장난 아니게 장관이다. 표지판에 있는 것을 더 읽어 내려가면 5월 단오에는 줄기가 다섯 마디, 9월 9일이면 아홉 마디가 되어 꽃이 핀다고 해서 구절초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참 신기하다. 이 구절초가 음력 달을 안다는 얘긴가?
꽃은 다 졌지만 구절초 군락을 벗어나 둑으로 올랐다. 그런데 밀양강의 멋진 경치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착시 아트’. 착시를 이용한 입체미술 작품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녀서인지 그림은 많이 닳아 흐릿했다.
바위가 많은 연못에서 오리가족이 이리저리 헤엄을 치며 노는 모습이다. 안내 간판을 보니 한쪽 발로 딛고 서서 위태위태하게 물을 건너려는 모습의 사진이 있고 또, 오리가 지나가는 양쪽 바위에 양발을 걸터서서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린 모습의 사진도 있다. 또 아이와 함께 바위에 올라서서 오리를 보는 모습도 있다. 괜히 한 장 찍어보고팠다. 사람들은 별로 다니지 않고…. 그냥 갈까 머뭇거리던 중에 멀리서 빨간 점퍼차림의 할머니가 걸어온다.
“할머니, 재미있는 그림이네예. 한 장 찍어드릴까예?” 할머니는 귀찮을 법도 하건만 객의 요청에 이리저리 포즈를 지어가며 촬영에 응해준다.
둑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또 솔밭이다. 왼쪽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철봉도 있고 사각정 쉼터도 있고 농구장도 보인다. 더 멀리 쳐다보면 영남루가 눈에 들어온다. 대략 현 위치에 대한 지리적 정보가 머릿속에서 가늠이 된다.
영남루 바로 아래 아랑각이 보이고 거기서 오른 쪽 위로 무봉사가 보인다. 성벽을 따라 쭉 올라가면 아동산 정상에 선 무봉대가 보인다. 저곳은 지난 3월 전설텔링 ‘태극나비, 훨훨’ 전설의 현장을 소개하면서 취재했던 곳이라 반가움마저 든다.
여기서 고개를 더 오른쪽으로 돌리면 “빠앙~!”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가 나타난다. 이곳에선 오랫동안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교통량이 많은 경부선이서 그런지 여객열차뿐만 아니라 화물열차도 종종 기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그 때문에 이곳 솔밭을 걷는 분위기가 더 있다.
솔밭으로 들어설 때 안내판을 발견했다. “이 소나무는 2000년 9월 16일 제14호 사오마이 태풍(초속 29m) 내습에 의하여 가지가 부러지고 직경 42㎝의 주간이 뒤틀려 갈라진 것으로 자연의 가공할 힘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현장입니다.”
태풍에 의해 나무가 기울었다는 얘기다. 그제야 이 송림의 희한한 현상이 이해되었다. 많이 기울어진 나무는 지지대를 받쳐놓았다. 그런 나무가 곳곳에 보인다. 기울어진 나무와 바로 선 나무, 자세히 보면 밑동이 잘록하거나 베인 듯한 나무도 있다. 모두 어울려 사는 그들의 세계를 발견한다. 하긴 인간의 세상임에야.
잠시 숲을 빠져나와 탁 트인 강변을 걷는다. 청둥오리들이 한가로이 놀고 있다. 저 갈대숲 너머엔 해오라기도 큰 날갯짓으로 날아올라 제 짝 옆으로 가서 앉는다. 다시 그 너머로 새마을호 열차가 ‘더그덩 더그덩’ 소리를 내며 다리 위를 지나간다.
도래재. “언양 땅 넘어가면/석남고개//밀양 땅 넘어오면/도래재고개//일흔일곱 굽이굽이/소쩍새 울어//실안개 피는 자락/눈물 맺힌다//돌아서서 가신 님/돌아오는 고개”
이 솔밭의 끝에는 이재금 시인의 시 ‘도래재’ 시비가 있다. 밀양에선 잘 알려진 시인인가보다. 밀양문학회에서 이 정도의 시비까지 만들어 줄 정도면. 덕분에 몰랐던 시인과 그의 시 한 수를 익히게 되었다.
이 시비 앞은 여름에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밀양강 노천수영장. 무료로 운영되는 데다 시원한 송림이 바로 옆에 조성되어 있어서 하루 피서지로 최적격인 곳이기 때문이다. 다녀간 때엔 가뭄이 오래되어서인지 물이 없었다.
다시 솔밭 사이로 돌아오는 길. 하늘에서 빗방울이 콧잔등에 내려앉는다. 예감이 좋지 않다. 곧 빗방울이 굵어질 것만 같다. 느릿했던 걸음의 리듬은 급기야 총총총 빠른 템포로 바뀐다. 다시 둑을 넘어 내려오다 되돌아본 솔밭과 밀양강, 다시 찾을 만큼의 매력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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