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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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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쓰러지면 큰 도인이 나타난다는데…

통영 벽방산 안정사의 산내 암자 은봉암 성석(삼도사바위)에 얽힌 이야기


인터넷에서 사찰 사진을 검색하다 보면 커다란 칼처럼 생긴 바위가 암자 기와에 딱 붙어 있는 사진을 발견할 때가 있다. 독특한 모습이어서 워낙 잘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통영 벽방산 안정사 산내 암자 은봉암과 은봉성석 사진이다.


이 은봉성석이라는 바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얽혀있다. 은봉암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장파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높이 7m의 이 은봉성석 덕에 이곳은 벽방산 안정팔경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은봉암은 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제목의 책을 쓴 성철 스님이 1951년 하안거를 한 곳이기도 하다.



통영시 광도면 덕포리를 지나는 길. 석가산의 기암이 오묘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반긴다.


전국을 떠돌며 운수납자 생활을 한 성철 스님이 은봉암 성석에 얽힌 전설 때문에 일부러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였겠나만 전설은 원래 이곳에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바위가 하나씩 쓰러질 때마다 큰 도인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하나가 쓰러지면 그때 마지막 도인이 나타난다는 얘긴데, 그 때문에 이 바위들을 삼도사(三道士) 바위라고도 부른다.



안정사 주차장에 도착하면 벽방산 숲길 안내도를 만난다. 벽방산 650m, 고성 통영 거제에선 가장 높은 산이다. 주차장에서 은봉암까지 1㎞ 거리다. 시간도 30~40분 거리다.



벽방산의 유래를 써놓은 안내판이 있다. 벽방산을 불가에선 벽발산이라고 부른단다. 부처의 제자 가섭존자가 벽발(바리때)를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어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벽방산의 정상은 상봉, 또는 칠성봉이라고 부른다.


600년 전 첫 번째 바위가 쓰러졌을 때 해월선사가 득도했으며 그리고 300년 뒤엔 종열선사가 득도했다. 이제 삼도사 바위는 마지막 한 분의 득도를 기다리며 하단부 금이 간 채 세월을 보내고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삼도사 바위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한다. 통영시지에 그 내용이 실려있다.


먼저 두 번째 득도한 종열선사가 주인공으로 전하는 전설이다.


300년 전 한 부인이 어린 자식 하나를 데리고 살기 좋은 따뜻한 고장을 찾아 거제도에서 작은 나룻배에 몸을 싣고 건너편으로 바라보이는 고성땅 뭍으로 건너고 있었다.


나룻배가 바다 가운데쯤에 이르자 부인은 갑자기 산기가 있더니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 순간 넘실대던 파도가 멎어 해변이 마치 거울같이 반듯해지며 일순간 온 세상이 얼어붙은 듯 돛단배가 꼼짝 않고 그 자리에 붙박였다.



벽발산 안정사 일주문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금단청에 지붕을 높이 올려 위엄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사찰 안으로 들어가려면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일주문의 위치와 방향이 애매하게 되어 있다.



큰 바위 위에 자그마하게 여러개를 쌓아 올린 막돌탑. 여러 사람이 저마다 정성을 들여 소원을 빌었으리라.


놀란 사공이 “이는 분명히 이곳 바다의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 분명하다.”라면서 갓 태어난 아기를 용왕님께 바쳐야만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온전히 살아날 수가 있다고 하면서 아기를 바다에 던져 고사 지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인은 절대로 아기를 버릴 수 없다며 대신 아기의 탯줄을 얼른 끊어 바다에 내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다시 물결이 일며 배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공은 열심히 노를 저어 무사히 해안에 다다르자, 부인에게 “이 아기는 예사로운 아기가 아닌 듯 싶으니 앞으로 훌륭히 키우시오.”라면서 뱃삯마저 사양했다. 이렇게 하여 지금의 광도면 황리 해안에 내린 부인은 어린 맏아들을 걸리고 갓 태어난 아기를 안은 채 면화산 기슭 갯가인 춘원포(春元浦)에 정착하게 되었다.


어느 듯 10년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벽방산 은봉암의 노스님이 부인에게 찾아와서는 댁에 서기가 어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큰 인물이 자라는 것으로 여겨지니 지난날 나룻배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을 부처님 곁에서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어떠하냐며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종열선사(宗悅禪師)가 출가하게 되었다. 종열이 입산하여 장좌불와 수도를 한 지 10년 되는 어느 날이었다. 이곳 암자의 왼쪽에 높이 4m에 달하는 바위 하나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렸다.



안정사를 지나 은봉암으로 오르는 등산로. 10월 하순이라도 남쪽 따뜻한 지역이어서 그런지 단풍이 많이 들거나 낙엽이 수북이 쌓이진 않았다. 고즈넉히 걷는 운치가 있는 길이다.



이곳도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그런지 도토리를 먹는 산짐승들이 별로 없나 보다.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이 제법 많이 깔려 있다.



드디어 다다랐나 보다. 숲길 밖으로 훤하더니 비석같은 바위가 먼저 반긴다. 특이해 보이는데 오랜 세월 이런 바위를 그대로 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 순간 종열은 도를 깨치고 ‘게송’을 읊으며 마당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본 노스님은 젊은 수좌가 과연 득도한 것을 언뜻 알아차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종열선사는 축지법을 행하여 사흘 만에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등의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런 전설이 얽혀 있어 통영 사람들은 ‘낙하암이문(落下岩異聞)’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너지는 바위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란 뜻일 테다.


또 다른 전설로 주인공이 해월선사인 경우다.



그렇게 오래 걸었던 건 아니지만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니 푹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이 계단만 오르면 은봉암 성석을 볼 수 있다.



은봉암 대웅전 격인 극락보전과 은봉성석이 눈에 들어온다.



은봉암 기와 끝에 칼처럼 생긴 바위가 딱 붙어 있다. 은봉성석이다. 삼도사바위 중 마지막으로 남은 바위다.



은봉성석 하단부에 금이 가 있다. 밀치기만 해도 무너져버릴 것 같다. 성철 스님도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지만 잘 버텼던 바위가 어느 누가 득도를 하면 무너져내릴까?



은봉성석 뒤에서 본 모습이다. 왼편에 있는 바위도 삼도사 바위로 누워있는 형태다.



등산로를 좀 더 올라가 촬영한 삼도사바위. 나머지 바위 두 개는 무너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이야기를 꾸민다면 두 번째 전설처럼 헤올이 10년 수도를 마치자 쩍 갈라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싶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어느 봄날.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해에 돛단배 한 척이 육지로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여보, 우리가 마치 요람에 든 아기 같구려.” 외로운 섬 생활을 청산하고 육지로 이사하는 노부부는 더없이 흡족했다.


그들이 이처럼 즐거워하는 것은 배 안의 아늑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식이 없어 적적하던 이 부부에게 뒤늦게나마 경사가 생긴 것이다. “뱃속의 아기도 기분이 좋은가 봐요.” “, 그래요!” 노인은 미처 아기 생각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웃었다. 육지에 오르면 집을 마련하고 아기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룰 꿈에 부풀어 얼마쯤 왔을 때다.


“아니 배가 왜 꿈쩍을 안 할까?” 노인은 재빨리 노를 챙겨 저었다. 그러나 배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뿐인가. 찰랑대던 물결도 굳은 듯했다. “여보, 제 뱃속의 아기도 꼼짝을 안 해요.” “아기도 놀지 않는다고?”


노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모처럼 희망을 안겨준 태아마저 움직이지 않는다니 그저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으앙!” 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죽음처럼 고요한 바다의 침묵을 깼다. 예기치 못했던 순간적인 해산이었다.



은봉암에서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정상이 상봉 또는 칠성봉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은봉암 뒤편 바위 위에 오르면 단풍 든 사람주나무와 고로쇠나무, 당단풍이 섞여 어울려 있다.



은봉암 앞에는 여러 고로쇠나무가 나란히 서있다.



아래에서 삼도사바위를 올려다 본 모습. 앞에 있는 바위들이 무너져내린 것으로 상상했던 것일까.


“아들이다!” 정신을 차린 듯 노인은 엉겁결에 소리쳤다. 학수고대하던 아들을 얻고도 공포와 불안에 잠긴 노부부는 탯줄을 끊어 바다에 던졌다.


그 순간 또 이변이 생겼다. 탯줄이 바닷물에 닿자마자 배는 언제 멈췄느냐는 듯이 항해를 계속했고 바닷물도 정겹게 출렁거렸다. 아기의 건강한 울음소리는 경쾌하게 바다에 울려 퍼졌다.


신기하게 태어난 그 아기는 참으로 비범하게 자랐다. 노인은 바다마저 숨죽이게 하고 태어난 아들 이름을 헤올이라 했다. 커갈수록 재주가 뛰어났다. 책 읽기를 즐기던 헤올은 열 살 되던 해 입산의 뜻을 밝혔다. “, 입산출가를 하겠다고?” “, 부모님 슬하를 떠나 도를 닦을까 합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네 나이 이제 겨우 열 살인데 도를 닦겠다니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헤올의 부모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보통 자식이 아님을 깨달은 노인은 할멈을 달래 헤올의 출가를 허락했다. 헤올은 자신에게 영감이 계시하는 대로 발길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 상촌마을 뒤 벽방산 은봉암. 그 암자엔 고매한 도승이 한 분 있었다. 스승을 만났으나 나름대로 신념을 지닌 헤올은 도승의 가르침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스님께서 절 어리다고 하심은 마치 제 부모님께서 출가를 걱정하시던 자애로운 정과 같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스님, 제가 암자 밖 저 큰 바위에서 10년 간 도를 닦게 해주십시오.”


꾸지람도 해보고 달래도 보았으나 헤올의 뜻은 돌처럼 굳었다. 기어코 헤올은 거대한 바위에 도의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계절이 바뀌어 살을 에는 듯한 겨울 한파가 몰려왔다.


“헤올아, 바람이 차다. 네 힘으론 이 추위를 이기지 못할 테니 어서 암자로 가자.” “아닙니다. 꼭 이겨내겠습니다.” 2, 3년 해가 거듭함에 따라 헤올은 청년으로 변해갔다.


“벌써 7년째다. 헤올아, 이러다간 입도하지도 못한 채 쓰러지겠다.” 도승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저를 지켜봐 주십시오.”



안정사 대웅전. 안정사는 위 은봉암보다는 좀 늦은 신라 무열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 시대엔 14개의 방을 갖춘 굴지의 사찰이었다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은 상당히 규모가 줄었다. 안정사의 동종은 보물 제16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10년이 되던 날 도승은 더 이상 볼 수만은 없어 잣죽을 끓여서 헤올에게 갔다. “그 자리에 앉은 지 벌써 10. 네 힘으로 어지간한 것을 이제 알겠으니 이 잣죽이나 먹고 깨달음을 기다려라.”


헤올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 “아니, 얘가?” 도승은 헤올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직감했다. 노스님이 섬짓 놀라는 순간 갑자기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면서 헤올이 앚은 거대한 바위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제야 잠자코 있었던 헤올이 몸을 털고 일어났다. “스님, 너무 오랫동안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습니다.” “과연 크게 깨쳤구나.” 노스님은 헤올이 신통했다.


그 후 종열이란 젊은이가 이 바위에서 10년 정진 후 깨달음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노스님과 헤올, 그리고 종렬 등 세 명의 도사가 깨달음을 얻은 이 바위를 삼도사 바위라 불렀다.


600년 전 혜월선사의 이야기와 300년 전 종열선사의 전설이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따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달리하며 가미된 듯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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