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삼남대도 임걸룡 어린 시절은?
전설의 삼남대도 임걸룡 어린
시절은?
산청군 시천면 내공리 정각사와
외송리 새고개를 찾아서
임걸룡이라는 이름을 접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 ‘임꺽정’이었다. 혹자는 임걸룡과 임꺽정이 동일인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활동 시기는 차이가 있다. 임걸룡은 조선 선조시대이고 임꺽정은 한참 후인 명종 때 사람이다.
이들이 실존인물이었든 가상의 인물이었든 사실을 뒷받침할 어떤 근거에 의해 이야기가 전달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면서 이야기는 부풀려지고 그러면서 자기 고장에 맞춰 새로 이야기가 꾸며지는 것이 전설이기에, 사실이냐 아니냐를 확인하는 작업은 이 코너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정각사 입구 천왕문.
참고로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 황해도 출신의 도적이고 임걸룡은 산청 출신이다. 물론 전설에 따르면.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은 조선시대 의적으로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을 꼽았다. 임걸룡이 삼남의 대도둑으로 불리긴 했지만 그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한 듯하다.
임걸룡이란 이름은 자료마다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지리산 ‘임걸령(林傑嶺)을 설명한 인터넷 자료에선 ‘임걸’ 혹은 ‘임걸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어쨌든 이 임걸룡의 탄생과 어릴 적 기행 전설이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현장을 찾아갔으므로 산청군의 자료를 소개한다.
산청군에서 1986년에 발행한 ‘내 고장 전설’이란 자료에 ‘의도 임걸룡(儀盜 林傑龍)’에 관한 글이 나온다. 의도는 의로운 도둑으로 풀이하는 글이 인터넷에 많은데,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예의가 있는 도둑이란 뜻이다. 이 해석은 전설을 읽어보면 수긍이 간다.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일부 문장이 어색하거나 이해가 쉽지 않은 곳은 쉽게 풀어 표현하겠다.
천왕문 옆으로 난 길. 경내로 이어진다.
산청군 시천면 내공리에 있는 정각사 자리는 수백 년 전에 삼남, 즉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 이르는 삼남의 대적(큰 도둑)으로 유명한 임걸룡이 출생한 곳이라 한다.
전하는 바로는 이 자리에 엿장수를 하는 한 부부가 한 칸짜리 집을 짓고 살다가 임걸룡을 낳았는데 임걸룡이 어렸을 때에는 업고 다녔지만 4~5세가 되자 데리고 다닐 형편이 못되어 부득이 집에 두고 장사를 나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선반에 얹어둔 엿이 십여 개씩 줄어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예사로 알았지만 시일이 갈수록 만들어 둔 엿이 자꾸 줄어드니 임걸룡의 모친은 하도 이상해서 엿을 가져가는 도둑을 잡아야 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평시와 같이 장사를 가는 척하고 숨어서 살펴보고 있었다.
천왕문과 법해루 사이에 있는 정각사 창건 기념비와 공덕비들.
그랬더니 얼마 후 임걸룡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사방을 한눈으로 둘러보고는 인적이 없음을 단정하고 주머니에서 엽전 한 닢을 껴내어 화롯불에 달군 후 실을 엽전 구멍에 단단히 매어서 엿을 놓아둔 그릇에 던져두었다가 잠시 후 실끈을 잡아당기니 엽전에 녹아 붙은 엿가락이 실끈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 비범한 지혜를 지켜본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처지로 볼 때 자기 아들이 도적보다 큰 인물로 발전할 수 없음을 알고는 성을 내어 꾸짖으며 “요놈의 자식이 방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다 똥 싸면서 도둑질해먹는 것이냐?”고 호통을 치며 “앞으로 큰 도둑이 되겠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임걸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머니가 가르쳐 준 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정각사 대웅전.
자라면서 지략이 비범한 임걸룡은 무예를 즐겨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때맞춰 정각사 동쪽에 있는 쥐설이라고 하는 묘 옆에서 준마 한 필을 얻게 되었다. 현재 정각사 입구에 석주가 서 있는데 임걸룡이 말을 매었던 돌이라고 한다.
그 후 마근담 위쪽 봉우리에 산채를 마련하여 훈련을 시키고 활동하다가 산청 새고개의 길가에 있는 석굴에 숨어들어 삼남대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 새고개는 지금의 신안면 외송리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굴도 그대로 남아있다.
임걸룡은 팔도의 행상을 상대로 물품을 털었는데 전량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고 물품 일부분을 얻어 모아서 부하를 먹이고 남은 것으로는 고장에 빈민을 구제하였다는 것이다.
이 길목을 지나가는 등짐장수는 미리 물품의 일부분을 별도로 갖고 오다가 굴 앞에 이르러 던져주고 갔다고 한다. 한때는 지금의 차황면 철수에 있는 호렴산에도 숨어 살았다는 굴이 남아있다.
대웅전 앞 뜰 전경.
그 당시 일걸룡이 출생한 내공의 지리에 대해서 풍수설에 청룡단두혈(靑龍斷頭穴)이라 하여 속인이 살면 대적이 나고 공당(公堂)이 서면 길지(吉地)라 하였는데 현재 정각사가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내용이 산청군의 ‘내 고장 전설’에 실려 있는 바, 전설의 현장 정각사로 찾아가니 정각사 주변은 울창한 대숲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죽림사 대웅전 뒤쪽 선방이 있는데 선방의 이름이 ‘죽림선원’이다.
여기저기 촬영하던 중 죽림선원 앞 작은 방에서 인기척을 느껴 들여다 보니 스님 한 분이 역시 인기척을 느꼈는지 내다본다. 눈길이 마주치자 서로 인사를 건넨다.
“스님, 이 절에 의도 임걸룡 전설이 있다면서요?”
장군수임걸룡이 마시고 씻고 했다는 장군수(원안) 샘.
스님은 방문객을 방으로 초청한다. 임걸룡 전설에 대해 듣고 싶다고 했더니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미 방문객이 사전조사를 했음을 눈치 챈 듯했다. 그래서인지 사전조사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장군수’라는 샘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임걸룡이 여기서 태어나 자라면서 무예를 익혔다고 해요. 터가 넓어서 훈련하기에 딱 좋은 곳이지요. 임걸룡이 훈련을 마치면 항상 물을 마시고 씻고 했던 작은 샘이 있어요. 징군수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이 절을 짓기 전, 옛날엔 맑은 물이 계속 솟아났다고 해요.”
의외의 수확이다. 임걸령샘이라 하여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 사이에 있는 그 임걸령샘만 생각했는데 임걸룡이 어렸을 때 훈련을 하고서 목을 축이고 세수를 하던 샘이 이 사찰 안에 있다니 귀가 번쩍 뜨이는 일이다.
임걸룡이 말을 맸다는 바위.
스님은 그 샘물이 있는 현장으로 안내해준다. 사찰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어 자연 그대로 보존돼 있지는 않았다. 시멘트로 각지게 만들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지 뚜껑을 덮어놓았다. 뚜껑을 열어 보니 맑은 물이 표면에까지 올라와 찰랑거린다. 깊이는 그렇게 깊지 않았다.
스님은 함께 뚜껑을 덮으면서 임걸룡이 말을 매었던 바위를 혹시 보았는지 물어본다. 스님의 말씀이 아니었으면 미처 촬영을 못 하고 돌아갈 뻔하지 않았던가.
“아마 차를 몰고 오셨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 같아 물어보았는데, 예상대로군요.”
외송리 6·25참전기념비 앞에서 바라본 새고개 전경.
스님은 사찰 입구인 천왕문 밖으로 안내한다. 천왕문 옆에 사찰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천왕문 앞에는 불화가 그려져 있다. 문수동자와 보현동자 그림이다. 천왕문 안쪽에는 예의 그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천왕문을 지나 조금 내려가니 양쪽에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장승처럼 생겼고 또 하나는 마디가 있는 칼처럼 생겼다. 스님은 이 칼처럼 생긴 돌에 임걸룡이 말을 맸다고 설명했다.
정각사에서의 취재는 끝났다. 스님과 합장으로 인사를 나누고 임걸룡이 산적으로 활동했다는 외송리 새고개를 찾아갔다. 새고개는 경호강을 끼고 있으며 산청읍과 신안면·단성면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새고개에서 아래쪽으로 내려다 본 전경.
새고개에 조성된 6·25참전기념비 공원.
지금이야 넓은 도로가 뚫려 차량이 쌩쌩 달리는 곳이지만 예전엔 보부상들이 무거운 봇짐을 메고 땀을 흘리며 넘었을 법한 고갯길이다. 주변 경치를 보니 임걸룡이 이곳에서 진을 치고 도적질을 일삼았을 개연성이 보인다.
이 새고개에서 북서쪽으로 높은 웅석봉이 있다. 주변 경관이 훤하다. 산적들은 이곳에서 숨어있다가 보부상들이 오면 대뜸 칼을 휘두르며 나타나 “있는 대로 모두 내놔라!”하고 엄포를 놓았음직 하다. 물론 전설에 따르면 의도 임걸룡은 그러지 않았다고 하니 그런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딱 취할 만큼만 취했으니 그나마 도둑이라도 예를 안다고 해서 의도(儀盜 )란 호칭이 붙었지 않나 싶다. 임걸룡이 활약했다는 새고개는 현재 6·25참전기념비와 베트남참전기념비, 그리고 88사건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임걸룡과 전혀 관련은 없지만 산청군 6·25참전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이곳에 기념비를 세운 것은 나름대로 고갯길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찾게끔 하고자 했을 터인데, 들어서는 진입로가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가까이 가고서 발견했다면 다시 찾아 들어가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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