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299)
돌이끼의 작은생각 (110)
돌이끼의 문화읽기 (477)
다문화·건강가족 얘기 (20)
경남민속·전통 (14)
경남전설텔링 (74)
미디어 웜홀 (142)
돌이끼의 영화관람 (21)
눈에 띄는 한마디 (8)
이책 읽어보세요 (76)
여기저기 다녀보니 (92)
직사각형 속 세상 (92)
지게차 도전기 (24)
지게차 취업 후기 (13)
헤르테 몽골 (35)
돌이끼의 육아일기 (57)
몽골줌마 한국생활 (15)
국궁(활쏘기)수련기 (16)
Total
Today
Yesterday
11-28 17:39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전설텔링]”첩룡을 죽이라니까!”

용들의 삼각관계에 휘말려 생긴 노여움 풀던 곳 ‘가야진사’


낙동강변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에 있는 가야진사는 본처 용과 첩으로 들어온 용의 싸움에 휘말린 조 사령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조 사령이란 사람의 실수로 첩룡을 죽여야 하는데 잘못 칼을 휘둘러 남편 용인 황룡을 죽였다. 그러자 본처인 용이 마을에 재앙을 내렸고, 그저 마을 사람들은 용의 마음을 달래느라 아주 오래전부터 용신제를 지내오고 있다는 이유 있는 스토리가 전해져 온다.



가야진사 제단을 둘러싼 네개의 홍살문.



제단에서 바라보면 첩첩이 문을 통과해 위패를 모신 가야진사가 보인다.



가야진사.


먼저 양산문화원에서 펴낸 ‘양산고을 옛이야기’ 책에 소개된 내용 중 이야기 부분만 옮겨 읽어보자.


옛날 양산 고을을 옥당이라 칭할 때의 이야기다. 양산군수의 명을 받은 조 사랑이 경상감사가 있는 대구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현재의 가야진사 부근인 원동 용당리로 접어들 무렵부터 여인 하나가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용당리는 인근 나루터로 인해 사람 통행이 잦은 곳이라 조 사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해질 무렵 주막에 들어선 조 사령은 인근 나루터로 북적이던 주막이 웬일인지 썰렁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주모에게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주모가 난처한 얼굴로 주막이 썰렁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요 며칠 새 주막에서 묵은 남정네들이 하루에 한 명씩 야밤에 커다란 구렁이에 놀라 기절했다는 것이다.


방안에서 쉴 준비를 하고 있던 조 사령은 마침 밖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끌려 밖을 내다봤다. 옆방으로 들어가는 여인은 다름 아닌, 낮에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여인이었다.


꺼림칙함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조 사령도 밤이 깊어지자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여인이 들었던 옆방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에 조 사령은 잠을 깨고 말았다.


밖으로 나간 조 사령은 용기를 내어 여인을 불렀다. 방문이 열리자 안을 들여다 본 조 사령은 깜짝 놀라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당연히 방 안에 있어야 할 여인은 보이지 않고 흡사 커다란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형상의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벌벌 떨고 있던 조 사령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는데 놀랍게도 구렁이 형상의 괴물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용이 되어 승천하기 직전의 이무기로 저 앞 황산강 용소에 사는 황룡의 본처라며 간곡한 청이 있으니 제발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용소에는 자신과 남편 황룡, 첩룡 세 마리 용이 살고 있는데 황룡이 첩룡의 꾐에 빠져 자신에게 주어야 할 여의주를 첩룡에게 주고 함께 승천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일 정오에 남편 황룡과 첩룡이 용소에서 싸움을 벌이도록 할 터이니 첩룡을 죽여달라고 했다.



가야진사에 모셔진 황룡과 청룡들을 그린 삼룡도.



가야진용신제전수회관 앞에 세워진 삼룡석상.


조 사령은 신과 마찬가지인 용을 죽일 만한 용력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이무기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면 복이 따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다음날 조 사령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배를 저어 용소를 찾았다. 정오가 되자 이무기의 말처럼 황룡과 청룡이 강물 위로 솟구치며 싸우는 것이었다. 조 사령은 싸우는 용들을 향해 준비해 간 장검을 힘껏 내리쳤다.


커다란 비명을 울리며 용 한 마리가 강물로 떨어졌고 주변 강물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때 어제 만난 본처 용이 청룡이 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본처 용은 울부짖으며 조 사령이 죽인 것은 첩룡이 아니라 남편인 황룡이라는 것이었다.


화가 난 본처 용은 조 사령을 원망하며 용궁으로 함께 가야 한다며 조 사령을 끌고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이 마을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뒤따랐다. 마을 사람들은 용이 노한 것이라고 믿고 해마다 용신제를 지냄으로써 재앙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가야진용신제다. 제를 지낼 때는 돼지를 용소에 던지면서 “돼지가 가라앉습니다(沈下豚)!”하고 세 번을 반복해 외치며 용신에게 제물을 바친다. 용신제의 제상에는 반드시 메 세 그릇과 잔 세 개, 탕 세 그릇을 놓는다.


그것은 용소에 황룡 한 마리와 청룡 두 마리가 살고 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가야진사 사당 내의 제상 위에는 가야진지신(伽倻津之神)이란 신주 위패가 모셔져 있고, 뒷벽에는 세 마리 용의 모습이 그려진 삼룡도가 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가야진사에서 지내는 용신제는 매년 음력 3월 초 정일(丁日), 즉 ㅅ3월 들어 첫 번째로 맞는 정()자가 들어가는 날에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이 음력의 그날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터라 근사치에 있는 날 중에 휴일을 잡다 보니 양력 55일 어린이날에 하게 됐다.



용신제 제물로 바쳐지는 돼지.



가야진지신’이란 글이 새겨진 위패.



용신제례가 끝나면 위패는 다시 덮개를 닫은 뒤 가야진사 안에 모셔진다.


가야진사의 용신제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다. 가야진사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신라의 종묘는 제2대 남해왕이 시도대왕 혁거세의 묘당을 세워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라고 한다. 신라는 대사, 중사, 소사로 나누어 지냈는데 가야진 용신제는 중사에 해당한다.


중사는 제후가 왕명을 받들어 명산대천에서 올리던 제사로 오악(산신), 사해(해신), 사진(지신), 사독(천신)으로 구분되는데, 가야진용신제는 사독에 해당한다. 신라 때부터 전해오던 가야진용신제는 일제강점기 홍수로 사당이 헐린 데다 일제가 제례를 금지해 어려움에 처했지만 마을주민들이 밤에 몰래 천태산 비석골에 가서 제사를 지내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2010년 한국문물연구원에서 발굴작업을 했는데 이곳에서 조선 초기 각종 분청자기를 다량 발견되었으며 이 유물들은 양산박물관에 옮기어 전시하고 있다. 마침 지난 5일 용신제가 있는 날이었다. 용신제는 부정가시기, 칙사맞이굿, 용신제례, 용소풀이, 사신풀이 등 5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신제 행사에 관해선 다음 기회에 풀어보기로 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5월, 연록의 봄. 화창한 어린이날이었다. 가야진사의 용신제가 이날 열리는 바람에 아이들과 함께 바깥 나들이를 하지 못한 게 미안할 따름이다. 가야진사 용신제에라도 함께 오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아침에 부랴부랴 회사로 가서 차를 가지고 과속 카메라에 걸리지 않을 만큼 속도를 내어 행사장으로 달렸건만, 10시에 시작하는 행사에 10분 늦게 도착했다.


여느 행사라면, 나처럼 지각하는 사람을 배려한 것일지 모르나, 정각 땡하고도 10분, 20분을 지나서야 시작하기도 할 텐데 도착하니 꽹과리, 북, 장구 가락에 태평소가 소리그네를 타고 있었다. 식전행사였다. 에이... 조금 천천히 와도 되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속 좁은 자신을 발견하고는 카메라 가방을 챙겨 행사장에 들어섰다.


가야진사는 국가 제례였다. 지금도 양산시장이 초헌관이 되어 지내는 제례다. 용왕에게 뱃길 안전하게 해달라는 옛 제례에서 시와 시민과 국가가 평안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의미로 바뀌긴 했지만 그 형태는 보존되어 이어져오고 있다.


물론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시대와 똑같으랴마는 재미없는 제례에 사람들이 제법 모이는 데엔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은 그냥 제례행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제례 행사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주변 민속놀이 공간이 많이 마련되어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였고, 그리고 용신제가 끝나면 공짜 점심, 즉 무상급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용왕님께 복을 빌고 아이들과 실컷 놀기도 하고 밥도 얻으먹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으리. 게다가 가야진사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너른 품은 마음을 잔잔하게 해준다. 아무리 등 뒤로 북, 장구, 꽹과리, 징이 께춤을 추고 법석을 떨어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저 마음은 평화롭기만 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용왕의 아들을 구한 착한 부부이야기

고성군 하이면 월흥리 상족암 맞은편 병풍바위 신랑·신부굴


고성군은 공룡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몇 개 없다는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무더기로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자국이 발견된 상족암 인근은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이곳에 공룡박물관이 생기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되었다.


트레킹 코스인 공룡길을 따라 상족암으로 가도 되고 이왕이면 공룡박물관에 들러 각종 공룡

의 뼈와 화석들을 구경하고, 영화 상영시간에 맞춰지는 운이 있다면 3D 공룡영화도 볼 수 있으니 박물관을 들렀다가 상족암으로 내려가도 되겠다.



공룡박물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전경.



병풍바위 옆으로 일명 브라자섬이라고도 불리는 안장도가 보인다.


상족암은 퇴적암인데 바닷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절경을 빚은 자연의 멋진 조각품이다. 해식동굴이 생기면서 그 모양이 상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상족암(床足岩)이라 이름 지어졌다. 이곳 상족암 앞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곳에 공룡의 발자국이 있어 그 자국을 따라 걸어보는 재미도 있다.


이곳에서 바다 건너편으로 보면 병풍처럼 막아선 커다란 바위절벽이 있다. 병풍 같다 하여 이름이 병풍바위다. 다른 말로 ‘입암’이라고도 하고 ‘선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병풍바위 아래쪽에 동굴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신랑 동굴이고 입구의 크기가 조금 작은 다른 하나는 신부 동굴이라고 부른다.



상족암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사진의 왼쪽 위엔 전망대가 있고 그 아래에 신랑굴이, 오른쪽 끝에 신부굴이 보인다.



신부굴.


신랑 동굴은 입구가 둥근 편이고 신부 동굴은 세로로 좁다. 그렇지만, 신랑 동굴은 깊지 않지만 신부 동굴은 그 깊이가 4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정부 관광지식정보시스템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연기를 피우면 4㎞ 떨어진 곳에서 연기가 솟았다.”라고 한다.


이 해식동굴의 이름이 각각 신랑 동굴, 신부 동굴이고 보면 필시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서려 있을 터. 관광지식정보시스템에 수록된 이야기를 여기에 다시 풀어본다.


“옛날에 이 어촌에는 청룡이라는 어부가 살고 있었는데, 마음씨가 착하고 마음이 정직하여 거짓말을 안 하는 우직하고 소박한 사람이긴 했으나 조금 어리석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청룡을 바보라고 부르며 놀려대었으나 그는 그저 좋아하기만 하였다.


청룡이 바보스러웠지만 그의 아내는 아주 똑똑하고 영리하며 얼굴 또한 절세미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룡에게 여복이 있다고 부러워했다. 청룡 또한 아내를 위하는 마음은 남달리 깊었으며 아내 또한 남편을 극진히 위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두 내외는 금실이 좋았고 정이 깊었다.


그래서 비록 가난한 어부에 지나지 못하는 살임이었지만 초라한 초옥 안에는 단란한 웃음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어느 해 가을이었다. 청룡은 여느 때와 같이 나룻배를 저으며 바다로 나갔다. 넓은 바다로 향하여 고기를 많이 잡고서 만선의 꿈을 안고 배를 저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물 위에 나뭇조각을 부여잡고 어떤 사람이 실신해 있는 것이 아닌가!


청룡은 깜짝 놀라 노를 저어 그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죽은 사람의 시신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건져보았다. 몸에는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고 그 사람의 형색을 보아 어부는 아닌 듯했다. 청룡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위해 잡은 고기를 그냥 두고 그 사람을 배에 싣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청룡은 아내와 함께 그를 따뜻한 방에 누이고 팔다리를 열심히 주물러 주며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자 죽은 듯 꼼짝 못하던 그가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부인을 보며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주시니 그 은혜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치하하는 것이었다.


청룡부부는 ‘은혜랄게 있겠습니까?’ 하면서 어찌하여 바다에 떠 있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자기는 용왕의 아들로 태어나 바깥세상을 구경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왔다가 태풍을 만나 일행과 헤어져 이런 신세가 되었다며 앞으로 큰 재난이 닥치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가르쳐주었다.


몇 년이 지나자 해안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여 마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피난을 하였다. 그러나 청룡부부는 용왕 아들의 도움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그가 가르쳐 준 용굴로 피난하여 무사히 몸을 피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병풍바위 전망에 입구에 설치된 이정표.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신랑굴.



원 안쪽, 반대편에 신부굴이 있다.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아마도 이 해식동굴들이 신랑 굴, 신부 굴로 이름 지어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래서 몇몇 자료에는 이 해식동굴이 용굴이라고 기록되기도 하다.


경남은행에서 발행한 ‘우리 고장 섬, 바다’란 책자에는 ‘자연이 펼쳐 놓은 열두 폭 병풍, 선바위’란 제목으로 관련 정보를 안내하면서 동굴에 대해서는 ‘자세히 보면 조금 큰 것과 작은 것 두 개가 있다 이름하여 쌍룡굴, 각각 수용굴과 암룡굴로 불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얽힌 전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앞서 소개한 내용과 비슷하며 다만 “두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을 덧붙여 놓았다. 이러한 전설이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이 신랑

신부 굴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고 한다.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병풍바위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상족암에서 공룡길을 따라 촛대바위를 지나고 20여 분 걸으면 입암마을을 만난다. 입암마을 방파제 쪽으로 가면 다시 나무데크 길이 조성되어 있다. 멀리 병풍바위 위에 불쑥 튀어나온 전망대가 보인다.



주상절리 경관.


이 전망대는 2011년 맥전포항으로 이어지는 데크를 설치할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다. 낮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전망대 입구에 상족암 1.6, 맥전포항 0.8㎞라는 양쪽 거리를 나타낸 이정표를 만난다. ‘맥전포’란 이름은 예전 이곳에 보리밭이 많아서 붙여졌다.


전망대는 절벽 밖으로 상당히 튀어나왔기 때문에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기분을 피할 수 없다. 건장한 사내가 장난친다며 폴짝 뛰는 시늉만 내어도 겁이 나서 후딱 되돌아 나가야 하는 그런 분위기의 절벽난간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다보면 신랑 굴이 보인다. 각도가 충분하지 않아 동굴 내부를 관찰하기는 쉽지 않다. 신부 굴은 아예 볼 수 없다. 동굴이 주상절리 돌기둥 절벽 반대쪽으로 났기 때문에 굴의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신부 굴은 상족암에서 망원렌즈로 당겨 봤던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전망대에서 바로 아래쪽으로 내려다 보면 바위의 모양새가 묘하다. 바닷물이 찰랑거릴 때마다 하트모양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신랑굴 신부굴 앞에 있다는 것이 묘한 어울림으로 비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