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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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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참 오랜 만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야 수시로 해수욕하러 찾은 곳이나 바닷가에 이렇게 와보기는 30년이 훨씬 넘었다. 고등학교 마치고 6개월 쯤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와봤으니.



죽도공원.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던 곳이다. 2개비째 시도하다가 도저히 못견디고 나머지 18개비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긴 했지만. 그때 빨간 솔이 처음 나왔을 때다. 500원짜리. 



이제 와 보니 이곳이 죽도공원이란 이름을 달고 있었다. 대나무숲으로 우거진 섬이란 말이렸다.



멀리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정자. 이름이 송일정이다. 일송정하고 헷갈린다. 송일정이야 새로 지었겠지만 송정이란 이름과 무관치 않다. 송정이란 마을 이름이 붙은 국내 대부분의 지명이 소나무숲에 있는 정자에서 비롯된 것처럼.



송일정 옆에 있는 바위섬. 꼭대기 누가 얹어놓은 둣한 저 바위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무게중심이 앞에 있어 금방이라도 앞으로 꼬꾸라져야 할텐데 모진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다. 그 이유를 가서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강한 바람에 감히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송일정에서 바라본 태평양. 망망대해가 눈을 시원하게 한다.



왜 죽도냐 하면, 예전엔 이곳에 대나무가 많았는데 전쟁시 화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래 대나무가 있었으니 죽도이지. 동해 한가운데 떠있는 독도에 무슨 대나무밭이 있었다고 그것이 죽도냐? 일본이 그 섬을 다케시마(죽도)라고 부른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 언어학을 공부한 나로서는 독도를 다케시마라 불렀을 가능성을 점쳐본다. 받침이 있는 '독' 발음이 일본인에게 어려우니 '다케'가 되었을 거란 얘기다. 다케시마란 말 자체부터 '독도'를 인정한 꼴이 아니더냐.



죽도공원에서 바라본 송정해변. 여기선 잘 보이지 않지만 서핑보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송정에서 해운대까지 이어지는 철길 트래킹이 시작됐다.



폐선로를 트래킹하는 것은 색다른 맛을 준다.



왼편으로 광활한 바다를 끼고 있어 눈이 즐겁다.



하지만 염주알 굴리듯 계속 같은 보폭으로 되풀이되는 걸음은 여간 지겹지 않다. 거의 수행의 수준이다.



색다른 볼거리가 나타나 조금 휴식을 취했다. 바닷바람에 태극기 속 바람개비가 신나게 돌아간다.



왼편 절벽 아래는 절경이다. 바위들과 파도가 군무를 추는듯하다. 간간이 보이는 해안초소도 옛추억을 꺼집어내는 오브제로 작용했다. 해안초소 근무처럼 따분한 것 없을 것이다.



멀리 해무가 밀려온다. 저 깊은 바다의 속을 누가 알까. 외로운 물새들은 알까. 저 바다에 누워란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저절로. 



3분의 2 지점을 지나고. 발 딛는 곳만 내려다 보며 묵언수행을 하다시피 하다 고개를 들면 멀리 해운대가 보인다.



철길 트래킹이 걸음걸이를 단조롭게 해 지겹다는 느낌이 있어도 종종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바다풍경 덕분에 지겹지만은 않은 길이다.



짧은 터널. 여고생인지 여중생인지 온갖 폼을 잡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학창시절 저런 추억 만들기 부럽다. 내 학창시절은 사진이 비싼 시절이어서 영상은 기억 속에만 있으니 이것이 안타깝다. 기억을 인화할 수 있는 기술, 나 죽기 전에는 개발될까.



해운대가 한층 가까워졌다. 멀리 두산위브더제니스인지 아이파크인지 모르겠으나 마천루가 구름을 끼고 있는 모습이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송정발 철로 종점이자 해운대발 트래킹 시작점이다. 미포다. 지명에서 예전에 이곳이 포구였단 걸 짐작케 한다.



해운대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큰 모래더미가 몇 군데 산을 이루고 있다. 왜? 그 궁금증은 머지 않아 풀렸다.



이달 말부터 모래축제가 시작된다. 모래를 만들 수 있는 예술품들이 짧은 생명을 마다않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려 밤낮으로 해운대 바닷가를 지킬 것이다. 그때 한 번 다시 와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려나.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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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찾아서)2000년 역사 가야진 용신제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낸 국가 제례…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


가야진 용진제는 신라 초기부터 전해오는 나라 제사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32 ‘제사조’에 기록되기로 “가야진용신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국가적 제전으로 제정한 중사(中祀) 가운데 사독(四瀆)의 하나다.”라고 했다. 이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렸다.


신라 시대 중사는 제후가 왕명을 받들어 명산대천에서 올리던 제사다. 사독엔 오악(산신), 사해(해신), 사진(지신), 그리고 사독(천신)으로 구분되는데 가야진용신제는 사해가 아니라 사독에 해당한다. 당시 기우제 성격이 강해서였을 것이다.



가야진사에서 바라본 낙동강.


그리고 사독은 서라벌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있는 토지하(흥해), 웅천하(공주), 황산하(양산), 한산하(서울)을 일컫는 말인데 지금은 유일하게 가야진용신제만 남았다. 신라시대엔 천신제와 풍년기원제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진용신제는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9호다. 신라시대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던 이 민속제례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였다. 일제는 가야진사를 허물고 용신제를 금지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몰래 인근 천태산에 들어가 제사를 모시면서 명맥을 유지했다.



가야진사 앞 제단의 남문에 금줄이 쳐져 있다. 헌관과 제관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종이도 걸려 있다.


광복 후 현 위치로 돌아왔고 꾸준히 보전해왔기 때문에 1983년엔 경남무형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고 1990년 대대적인 복원정비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가야진용신제는 이제 민속놀이로 승화해 1995년 제27회 경상남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이어서 1997년 도무형문화재가 된 것이다.


가야진용신제는 1 부정가시기, 2 칙사맞이굿, 3 용신제례, 4 용소풀이, 5 사신풀이 순서로 진행된다.


부정가시기굿



제단 주위를 돌면서 부정가시기굿을 하고 있다.


먼저 부정가시기는 제례일 3일 전부터 제관들은 목욕재계하고 제단 내외를 청소하며 제향을 준비한다. 제를 올리기 전에는 제단 주변과 출입문에서 부정을 쫓아내는 의식을 한다. 그리고 제단 주변으로 부정이 없도록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치고는 부정가시기 굿을 벌인다. 부정가시기 굿은 풍물패가 가야진사 앞에 마련된 제단을 돌면서 진행된다.


“부정아 가시라/부정부정 웬 부정/천상아래 넓은데/목욕재계 삼석달/점지하신 이곳은/이제 정성 대했네/삼용신을 모신 터/부정을 물리세/부정아 가시라/부정아 가시라/부정아 가시라/훠이 훠이 부정 가시라.”


칙사맞이굿



칙사맞이굿칙사맞이굿 중에 길닦이를 하고 있다.


칙사가 당도하기 전에 먼저 길을 닦는 의식이다. 칙사는 나라에서 보낸 관리로 용신제에서 제관이 된다. 가야용신제에선 현재 양산시장이 초헌관을 맡는다. 칙사맞이굿을 할 때엔 사람들이 괭이와 망깨 등 농기구를 들고 소리에 맞추어 땅을 고르고 다지기도 하고 빗자루로 쓸기도 한다.


이런 노동 품앗이에 술이 없을 수 없다. “아이고, 대라! 좀 쉬었다 하세!”하고 누가 소리라도 치면 잠시 휴식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을 하다 중간 중간 쉴 때마다 술이 공급된다. 길닦이 노동이 끝나면 일꾼들과 풍물꾼들이 섞여 춤도 추고 소리도 하며 노동의 피로를 푼다.


길닦이 소리가 정겹다. “용당마을 장정들아 가야진사 역사가세/어허여차 망깨야/길을 닦자 길을닦자 가야진사 길을 닦자/어허여차 망깨야/목괭이로 땅을 파고 나무가래 땅고르고/어허여차 망깨야/망깨로서 다져보세 천년만년 다하도록/어허여차 망깨야…”



칙사맞이사인교에 칙사를 모시고 제단으로 향하고 있다.


이렇게 길닦이가 끝나면 사인교를 앞세워 칙사를 맞으러 간다. 정자에서 기다리던 칙사(나동연 양산시장)가 사인교에 오르면 다시 제단으로 향한다.


“쉬! 칙사님 나가신다/! 나랏님 명을 받고 칙사님 나가신다/! 칙사님 행차시다.” 그렇게 칙사가 지나는 길에는 양옆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구경을 한다. 예전에는 부복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용신제



용신제초헌관을 맡은 칙사 나동연 양산시장이 제례를 하고 있다.


칙사가 제단에 당도하면 비로소 용신제가 시작된다. 먼저 강신굿을 하고 제단 남문 옆에 설치된 용고(龍鼓)를 세 번 울린 후 집례관의 집전에 따라 제례가 엄숙히 진행된다. 현재의 제례는 유교 형식을 띠며 제물은 돼지를 비롯해 익히지 않은 것을 올리고 잔은 3개를 놓는다. 이는 가야진사에 얽힌 전설에 따라 용 3마리에게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신제축문을 읊을 때면 모든 참제원들이 절을 한다.


용신제의 홀기(제례의 순서)가 진행되면 초헌관인 칙사는 여러 차례 제단을 오르내린다. 초헌례가 진행될 때 가야진용신제 시제축문을 읊는다. 그러면 모든 참제원들이 엎드려 축문을 듣는다.


“유세차 을미년 삼월을축삭십칠신사/근견신 양산시장 나동연 감소고우/가야진지신 복이 위국지축 택윤만물 극인극사 사아백복/근이 생폐예제 자성서품 식진명천 상향.” 한자로 된 어려운 말이나 제사를 지내는 헌관이 ‘감소고우’ 즉 가야진의 신에게 삼가 밝게 고하는 것으로 나라에 좋은 일이 있고 만물은 윤택하고 모든 일에 복이 있길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용소풀이



용소풀이_불집태우기불붙은 송막.



침하돈돼지 제물을 용소에 넣는 의식.


용신제례가 끝나면 모두 제단 인근에 마련된 송막(불집)으로 간다. 풍물을 치며 송막을 한 바퀴 돌면 칙사가 불을 지른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짚신을 벗어 불길로 던지며 용의 승천을 기원한다. 요즘은 행사를 위한 제례이므로 미리 송막 주면에 짚신을 마련해놓고 송막이 타오르면 짚신을 주워 던지는 시늉을 한다.


풍물이 끝나면 모두 강변으로 간다. 헌관과 집례 사령들은 배를 타고 용소로 간다. 제물을 용소에 있는 용왕에게 바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다. 용소는 강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용소에 도착하면 칙사가 헌작하고 세 번 절을 한다. 그러고는 “용신님, 이 희생을 바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하고 외치고 돼지를 물에 빠트린다.


이어서 함께 간 사람들이 “침하돈! 침하돈! 침하돈!”하고 세 번을 외친다. 이 소리와 함께 나루터에 있던 풍물패와 마을 주민들은 “비온다!”하고 외친 후 즐겁게 풍물을 울린다. 칙사 일행이 배를 타고 돌아오면 다시 모두 제단 앞으로 가서 흥겹게 뒤풀이를 한다.


사신풀이



사신풀이는 제관과 마을사람들이 함께하는 대동마당이다.


용소풀이가 끝나고 제단 앞에 모인 모든 참제원들이 풍물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뒤풀이를 한다. 이를 사신풀이라고 한다. 칙사는 관복을 벗고 제관을 비롯한 모든 참제원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논다. 대동마당이 펼쳐지는 것이다.




[관련기사]


[전설텔링]“첩룡을 죽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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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텔링]”첩룡을 죽이라니까!”

용들의 삼각관계에 휘말려 생긴 노여움 풀던 곳 ‘가야진사’


낙동강변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에 있는 가야진사는 본처 용과 첩으로 들어온 용의 싸움에 휘말린 조 사령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조 사령이란 사람의 실수로 첩룡을 죽여야 하는데 잘못 칼을 휘둘러 남편 용인 황룡을 죽였다. 그러자 본처인 용이 마을에 재앙을 내렸고, 그저 마을 사람들은 용의 마음을 달래느라 아주 오래전부터 용신제를 지내오고 있다는 이유 있는 스토리가 전해져 온다.



가야진사 제단을 둘러싼 네개의 홍살문.



제단에서 바라보면 첩첩이 문을 통과해 위패를 모신 가야진사가 보인다.



가야진사.


먼저 양산문화원에서 펴낸 ‘양산고을 옛이야기’ 책에 소개된 내용 중 이야기 부분만 옮겨 읽어보자.


옛날 양산 고을을 옥당이라 칭할 때의 이야기다. 양산군수의 명을 받은 조 사랑이 경상감사가 있는 대구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현재의 가야진사 부근인 원동 용당리로 접어들 무렵부터 여인 하나가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용당리는 인근 나루터로 인해 사람 통행이 잦은 곳이라 조 사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해질 무렵 주막에 들어선 조 사령은 인근 나루터로 북적이던 주막이 웬일인지 썰렁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주모에게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주모가 난처한 얼굴로 주막이 썰렁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요 며칠 새 주막에서 묵은 남정네들이 하루에 한 명씩 야밤에 커다란 구렁이에 놀라 기절했다는 것이다.


방안에서 쉴 준비를 하고 있던 조 사령은 마침 밖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끌려 밖을 내다봤다. 옆방으로 들어가는 여인은 다름 아닌, 낮에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여인이었다.


꺼림칙함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조 사령도 밤이 깊어지자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여인이 들었던 옆방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에 조 사령은 잠을 깨고 말았다.


밖으로 나간 조 사령은 용기를 내어 여인을 불렀다. 방문이 열리자 안을 들여다 본 조 사령은 깜짝 놀라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당연히 방 안에 있어야 할 여인은 보이지 않고 흡사 커다란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형상의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벌벌 떨고 있던 조 사령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는데 놀랍게도 구렁이 형상의 괴물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용이 되어 승천하기 직전의 이무기로 저 앞 황산강 용소에 사는 황룡의 본처라며 간곡한 청이 있으니 제발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용소에는 자신과 남편 황룡, 첩룡 세 마리 용이 살고 있는데 황룡이 첩룡의 꾐에 빠져 자신에게 주어야 할 여의주를 첩룡에게 주고 함께 승천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일 정오에 남편 황룡과 첩룡이 용소에서 싸움을 벌이도록 할 터이니 첩룡을 죽여달라고 했다.



가야진사에 모셔진 황룡과 청룡들을 그린 삼룡도.



가야진용신제전수회관 앞에 세워진 삼룡석상.


조 사령은 신과 마찬가지인 용을 죽일 만한 용력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이무기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면 복이 따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다음날 조 사령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배를 저어 용소를 찾았다. 정오가 되자 이무기의 말처럼 황룡과 청룡이 강물 위로 솟구치며 싸우는 것이었다. 조 사령은 싸우는 용들을 향해 준비해 간 장검을 힘껏 내리쳤다.


커다란 비명을 울리며 용 한 마리가 강물로 떨어졌고 주변 강물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때 어제 만난 본처 용이 청룡이 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본처 용은 울부짖으며 조 사령이 죽인 것은 첩룡이 아니라 남편인 황룡이라는 것이었다.


화가 난 본처 용은 조 사령을 원망하며 용궁으로 함께 가야 한다며 조 사령을 끌고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이 마을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뒤따랐다. 마을 사람들은 용이 노한 것이라고 믿고 해마다 용신제를 지냄으로써 재앙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가야진용신제다. 제를 지낼 때는 돼지를 용소에 던지면서 “돼지가 가라앉습니다(沈下豚)!”하고 세 번을 반복해 외치며 용신에게 제물을 바친다. 용신제의 제상에는 반드시 메 세 그릇과 잔 세 개, 탕 세 그릇을 놓는다.


그것은 용소에 황룡 한 마리와 청룡 두 마리가 살고 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가야진사 사당 내의 제상 위에는 가야진지신(伽倻津之神)이란 신주 위패가 모셔져 있고, 뒷벽에는 세 마리 용의 모습이 그려진 삼룡도가 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가야진사에서 지내는 용신제는 매년 음력 3월 초 정일(丁日), 즉 ㅅ3월 들어 첫 번째로 맞는 정()자가 들어가는 날에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이 음력의 그날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터라 근사치에 있는 날 중에 휴일을 잡다 보니 양력 55일 어린이날에 하게 됐다.



용신제 제물로 바쳐지는 돼지.



가야진지신’이란 글이 새겨진 위패.



용신제례가 끝나면 위패는 다시 덮개를 닫은 뒤 가야진사 안에 모셔진다.


가야진사의 용신제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다. 가야진사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신라의 종묘는 제2대 남해왕이 시도대왕 혁거세의 묘당을 세워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라고 한다. 신라는 대사, 중사, 소사로 나누어 지냈는데 가야진 용신제는 중사에 해당한다.


중사는 제후가 왕명을 받들어 명산대천에서 올리던 제사로 오악(산신), 사해(해신), 사진(지신), 사독(천신)으로 구분되는데, 가야진용신제는 사독에 해당한다. 신라 때부터 전해오던 가야진용신제는 일제강점기 홍수로 사당이 헐린 데다 일제가 제례를 금지해 어려움에 처했지만 마을주민들이 밤에 몰래 천태산 비석골에 가서 제사를 지내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2010년 한국문물연구원에서 발굴작업을 했는데 이곳에서 조선 초기 각종 분청자기를 다량 발견되었으며 이 유물들은 양산박물관에 옮기어 전시하고 있다. 마침 지난 5일 용신제가 있는 날이었다. 용신제는 부정가시기, 칙사맞이굿, 용신제례, 용소풀이, 사신풀이 등 5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신제 행사에 관해선 다음 기회에 풀어보기로 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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