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관음사, 다시 가 본 전설의 현장
전설텔링-장자늪 구렁이의 저주 현장을 찾아서
일부러 다시 찾은 것은 아니다. 일이 있어 인근에 들렀는데… 예전 이곳에 취재하러 왔던 기억이 떠올랐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경내는 한산했다. 발자국 소리도 목탁 소리도… 하다 못해 풍경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코로나19가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들었나 보다.
여튼 우연히 다시 들른 관음사 덕에 예전 '경남이야기'에 썼던 글 다시 소환하게 됐다.
전설텔링 집필할 때가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장자늪에 얽힌 전설은 비단 창녕군 영산면 장척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편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인근 함안지방에도 장자늪 전설이 있고 의령에도 있고 밀양에도 있습니다. 충북 청주와 충주에도 있고 경기도에도 유사한 전설이 많이 있습니다.
‘장자(長者)’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부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러한 전설이 여기저기 많이 퍼져 있는 것은 아마도 옛 사람들은, 요즘 흔히 쓰는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부자들에게서 많이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요?
창녕의 이 장자늪 전설은 이야기 구성 형태가 다른 전설에 비해 비교적 기승전결의 짜임이 잘 되어 있습니다. ①욕심 많은 부자가 살았다 ②그 부자에게 스님이 찾아가 시주를 바라는데 시주는커녕 나쁜 짓을 했다 ③그것을 본 착한 며느리가 시아버지 몰래 시주를 하고 스님으로부터 주의사항을 듣는다 ④부자가 사는 마을에 나쁜 일이 생긴다 ⑤며느리는 스님의 말을 까먹는 바람에 돌부처가 된다 ⑥마을은 물에 잠겨 늪이 된다 ⑦물에 빠져 죽은 장자는 구렁이로 변해 늪을 지키고 있다. 대략 이런 구성입니다.
창녕군 영산면 신제리와 봉암, 봉산리에 걸쳐 있는 장척호.
◇도내 장자늪 전설 어떤 차이가 있나
앞서 언급한 이야기 구성은 ‘장자늪 구렁이의 저주’ 이야기에서 배경이 된 창녕 장척호에 얽힌 전설의 얼개이며 창녕군지(1984년)에 소개된 내용을 따왔습니다.
이러한 전설은 경남의 경우 각 지역의 시 또는 군지에 수록된 것으로 작성한 사람에 따라 이야기의 길이와 깊이에 차이가 납니다. 의령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관련 전설은 아주 간략합니다. 창녕군 장척호에 얽힌 전설과 다른 점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의령군은 정곡면 적곡마을 앞에 있는 약 2000평 가량 되는 늪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장자에게 시주승이 찾아간 대목입니다. 여기선 장자가 며느리에게 쇠똥 한 사발을 주라고 했는데 며느리가 몰래 쌀을 시주합니다. 이것이 들켜 장자가 노발대발하는데 스님이 도와 며느리가 화를 면하게 됩니다.
이때 스님은 온데간데 없고 늪에서 잔잔한 물결이 들끓기 시작하는데 이때 커다란 이무기가 튀어나와 장자의 집을 모두 쓸어버렸다고 합니다. 장자는 흔적도 없어지고 이무기는 승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늪 속에는 지금도 놋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데 장자의 영혼이 개과천선하여 구원을 청하는 소리라고 전해진답니다.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야기 구성이 창녕과 좀 차이가 있습니다. 다음은 통영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초라한 복장을 한 스님이 장자로부터 쇠똥 시주를 받게 됩니다. 이 스님은 동네사람들로부터 장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혼을 내겠다 마음을 먹습니다. 이듬해 예전의 초라한 행색과 달리 흰수염에 장죽을 짚고 장자를 찾아 가지요. 장자는 이 스님이 도사처럼 보였던지 대문 안으로 반갑게 맞이합니다.
스님이 장자의 집에 서기(瑞氣)가 있다며 앞으로 집안이 번창할 거라며 너스레를 떱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며 슬쩍 운을 떼자 장자는 귀가 솔깃해합니다. 그러자 스님은 바다 건너 삼봉산 앞 대섬(竹島) 가운데를 잘록하게 파서 봉우리 두 개를 만들면 5대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욕심쟁이 장자는 다음날 즉시 머슴들을 데리고 산 능선을 팝니다. 사흘째 되던 날 장자의 곡괭이에 거북이 목이 잘려 나옵니다. 장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놈이 우리 집안 명당의 혈을 가로막고 있었구나’ 하고요. 이 일이 있고서 장자에겐 계속 우환이 생기며 5대는커녕 3년도 못 가서 폭삭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밀양의 경우 초동면 반월리에 있는 원늪에 이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이 원늪은 달리 ‘장재늪’이라고도 불린답니다. 원늪에 얽힌 전설은 창녕과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나는 점은 며느리가 스님의 말에 따라 뒷산 중턱에 올라섰을 때 천둥번개에 뒤돌아보는 순간 돌미륵이 될 때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장자의 집이 불길에 휩싸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반달 모양의 연못이 생겼고 마을을 반월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함안의 장자에 얽힌 전설은 또 다른 형태를 띱니다. 장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점과 잘못의 원인이 장자가 아니라 장자의 며느리란 점이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잠깐 들여다보면, 입곡리 숲안마을에 아주 큰 부자인 곡부공씨(曲阜孔)가 살았는데 이집 며느리는 하도 손님이 많이 찾아오자 뒤치다꺼리에 진절머리를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에게 시주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과객이 몰려들지 않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집 왼쪽의 하천을 오른쪽으로 흐르게 하면 과객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며느리는 일꾼을 시켜 하천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하루아침에 집안 살림이 망해버려 다시는 과객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얘기로 전해옵니다.
◇장척호
봉암리와 봉산리 중간 지점에서 바라본 장척호 모습. 연꽃 군락이 꽤 넓게 펼쳐져있다.
장척호는 인근의 번개늪과 함께 민물낚시를 좋아하는 동호인들에게 꽤 알려진 저수지입니다. 주로 배스가 많이 잡힌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직도 늪 속에는 장자가 변한 구렁이가 산다고 하는데 낚시인들은 겁도 없나 봐요.
장척호의 남쪽은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둔 형태입니다. 장척호의 넓이는 0.5㎢로 약 15만 평에 이릅니다. 늪의 주변은 연잎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고즈넉한 호수 분위기에 어울린다는 느낌이 듭니다.
인근 주민들은 장자늪이 장척호 옆에 있는 번개늪으로 알고 있기도 합니다. 동쪽과 서쪽에 엇비슷하게 형성된 두 늪의 넓이는 비슷하지만 모양은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장척호는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이고 번개늪은 타원형의 밋밋한 모습입니다. 이 번개늪 역시 장척호만큼 낚시인들의 관심지역이라고 합니다.
◇부처고개
영산면에서 부곡면으로 가는 길은 고갯길입니다. 지금은 도로가 잘 형성되어 두 지역 간 소통이 원활하지만 옛날엔 그리 녹록한 고개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에서 며느리가 고개를 올라가서 뒤돌아보았다가 돌 속으로 몸이 스며들어 부처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고개가 이곳입니다. 이 미륵불은 일제강점기 때 도로개설을 하면서 도천면 송진리 관음사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관음사 미륵존불상
미륵존불상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호입니다. 이 미륵존불상은 관음사 내 성법보전 옆 작은 보호각 안에 들어 있는데 누구에게나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이 부처바위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며 자연석의 한쪽을 다듬어 미륵의 몸과 광배(光背)를 선으로 새긴 마애불이라고 설명되어 있군요.
이야기 속에 부처가 된 며느리가 장자구렁이에게 불꽃을 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 안내판의 내용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설명문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미륵의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나발과 상투 모양의 육계(肉髻)가 선명하다. 늘어진 귀에 긴 얼굴은 살집이 있어 온화하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두꺼운 세 줄의 삼도(三道)가 새겨졌다. 부처의 빛을 나타내는 광배(光背)에는 불꽃과 꽃잎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었고, 양 어깨에서 걸쳐 내린 법의(法衣)는 얇게 표현되었다.”
관음사에는 미륵존불상 외에도 오래된 문화재자료들이 두 개나 더 있습니다. 하나는 도천삼층석탑이고 또 하나는 관음사 석등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33523" align="aligncenter" width="630"]관음사 전경.[/caption]
[caption id="attachment_33524" align="aligncenter" width="630"]
도천삼층석탑은 원래 송진1리 탑골이라 불리던 보광사에 있던 탑인데 임진왜란 때 절이 폐허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파손되었고 1928년 이 탑을 관음사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 탑은 당시 기단부와 탑신 1장, 지붕돌 2개가 남아있었다고 하네요. 상륜부와 나머지는 사라진 상태였는데 탑재의 일부로만 다시 세웠기 때문에 석탑의 정확한 원형이 복원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탑의 높이는 1.62m이며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관음사 연못에 세워져 있는 석등 역시 삼층석탑과 함께 폐허가 된 보광사 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옮겨와서 관음사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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