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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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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을러지는 것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유혹이어서 한순간만 긴장을 놓치면 빠져들게 마련이다. 물론 변명을 덧붙이자면, 다른 일로 바빠서 내기사 따로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초파일 행사 기사를 이제서야 내블로그에 옮기는 것이야 잘못도 아니지만 스스로 지키려했던 일종의 규칙을 외면한 거여서 일단 무릎부터 꼬집는다.


기사에는 그렇게 개인적인 감정을 싣기 어울리지 않아 표현하지 못했는데, 이날 사진을 찍느라고 제대로 낙화를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순간이나마 물끄러미 떨어지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금세 전원이 꺼져버리던 할머니 생각이 오랫동안 일었다.


언젠가 울 할매 이야기를 남에게 발표를 하든 하지 않든 쓰려고 했던 생각을 줄곧 지니고 있었는데.. 어찌 불꽃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4년 전 돌아가신 울 할매 얼굴이다. 할매 얼굴은 돌아가시고 한동안 생각도 안 날만큼 희미했다. 사진을 봐도 돌아서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차츰 세월이 지나고 잊어먹어야 될 시간이 되자 오히려 또렷이 기억 안으로 들어온다. 함안, 할매 고향이 함안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이수정에서 떨어지는 불꽃 사이로 아련히 할매 억수로 순진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회사 갓 입사하고 소답동에서 자취할 때 둘이서 가물치 한 마리 고아먹느라고 우당탕탕 난리법석을 떨던 1991년 어느 여름날도 영화처럼 보인다. 그리 짧은 시간인데 참 많은 기억이 오랜만에 후련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재채기를 한 느낌이다.


떨어지는 저 불꽃 풍년·안녕 바람이려오

제24회 함안읍성 낙화놀이 5월 25일 함안 무진정 앞 이수정서 개최


‘돌돌돌 가랑잎을 밀치고/어느덧 실개울이 흐르기 시작한…’으로 시작하는 유치환의 시 ‘낙화’. 그런데 한자로 ‘落花’다. ‘그대가 일하는 곳 멀리 자전거를 세우고/그대를 훔쳐보는 일처럼…’ 이병률의 이 시도 ‘落花’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이형기의 이 시도 역시 ‘落花’다.



무진정 옆 특설무대에선 함안국악관현악단의 연주와 가수들의 공연이 펼쳐져 관람객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


낙화(落火)를 다룬 시는 아직 없는 모양이다. 낙화놀이가 조선시대 중엽부터 행해졌던 놀이임을 고려한다면, 낙화에 얽힌 수많은 사연이 있을 법도 한데, 시인들은 이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낙화놀이는 여러 숯가루 주머니에서 불꽃이 한꺼번에 쏴~ 하고 뿌려지면서 감동을 자아내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서 예부터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진 놀이다. 그 가운데 함안읍성 낙화놀이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계승과 발전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수정 연못에 비친 관람객들과 줄에 매달린 낙화봉.


함안박물관에 낙화놀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참고삼아 그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낙화놀이는 매년 4월 초파일을 전후하여 함안면 괴항마을 입구에 있는 무진정 연못에서 열리는 고유 민속놀이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중엽 한강 정구(鄭逑) 군수가 군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낙화놀이는 참나무 숯가루로 만든 낙화 타래에 불을 붙여 날리는 일종의 불꽃놀이다. 낙화놀이에 사용하는 낙화 타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오른 참나무를 흙 속에 파묻은 다음 일주일간 불을 지펴 숯을 만든다.


그리고 참나무 숯을 가루가 되도록 곱게 갈아서 광목과 한지에 넣고 만 다음, 두 개를 서로 꼬아 하나의 낙화 타래로 만든다. 이렇게 만든 낙화 타래 2000여 개를 연못 위의 줄에 엮어 달고 불을 붙이면, 약 2~3시간 동안 불을 머금은 숯가루가 꽃가루처럼 휘날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고유의 민속놀이로 이어져 내려오던 낙화놀이는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중단되었다가 1985년에 복원되었으며 액운을 태우고 안녕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매년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서 낙화놀이가 행해지는 지역은 대략 스무 곳 정도인데 경북 안동, 경기 여주, 충북 청주, 전북 무주, 전남 화순 등지의 불꽃놀이도 많이 알려졌다. 경남 도내에선 함안과 마산 진동에서 행해지고 있다.


함안읍성 낙화놀이는 1985년 함안문화원의 후원으로 괴항마을 주민이 주관하여 ‘이수정낙화놀이’로 출발했다. 그것이 9회까지 이어졌다. 2000년부터는 ‘이수정낙화놀이보존쥐원회’가 창립되어 10회와 11회 행사가 진행됐고 2006년에는 무형문화재 심사를 위한 시연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다 2008년 명칭이 ‘함안읍성 낙화놀이’로 바뀌고 그해 10월 ‘함안낙화놀이’라는 이름으로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이와 함께 김현규 씨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됐으며 2013년 8월엔 낙화놀이용 낙화봉 제조방법이 특허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



오후 6시 20분, 이수정 가운데 영송루에서 고유제가 진행되고 있다.


함안읍성 낙화놀이보존위원회(위원장 손인배)는 더 나아가 함안의 이 낙화놀이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승격되기를 바라고 있다. 5월 25일(음력 사월초파일) 오후 개최된 행사 개회식에서 손인배 위원장이 국가지정 문화재 추진 상황을 밝혔고 이날 참석한 안홍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이 적극 돕겠다고 밝혔다.


함안읍성 낙화놀이보존위원회는 이러한 목적으로 올해엔 지난 5월 초 개최된 함안아라제 때 제1회 함안낙화놀이 시연 행사를 마련해 호응을 얻기도 했다.


낙화놀이는 다른 지역의 사례를 보면, 대개 정월대보름과 사월초파일, 그리고 단옷날에 행해진다.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이유는 낙화놀이가 질병과 재액을 쫓는 벽사의 의미가 담겼기 때문인데 함안의 경우는 부처님오신날에 연다. 이는 함안에서는 초파일 관등놀이와 함께 놀이가 행해진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낙화봉에 불을 붙이고 있다.


함안 이수정에서의 낙화놀이는 가운데에 있는 영송루를 중심으로 연못 둘레 가장자리를 잇는 줄에다 낙화봉을 설치하는데, 보존회 측에서 여러 개의 뗏목을 타고 횃불로 불을 붙이는 것도 멋진 장면을 연출한다.


낙화봉에서 불꽃들이 제각각 조금씩 뿌려지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일제히 ‘쏴~’하고 불꽃을 날릴 때면 절로 탄성을 지르게 한다. 낙화놀이는 다른 말로 줄불놀이라고도 한다. 함안읍성 낙화놀이는 이렇게 불꽃이 바람에 흩날릴 때 이수정 옆 특설무대에서 풍악이 울려 더 즐겁다.








이수정 연못 위로 뿌려지는 불꽃과 특설무대 주변에 설치된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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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찾아서)또 서부가 이겼으니 풍년일세!

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 영산줄다리기 현장의 염원 담은 열기


아마도 줄다리기를 초등학교 즈음에 처음 해볼 것 같다. 이르면 1학년, 아니면 2학년이나 3학년쯤. , 요즘은 어린이집 다니는 나이 때부터 줄다리기 맛을 느껴볼는지도 모르겠다. 줄다리기는 학교 운동회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주 경기 메뉴다. 올림픽이나 체육대회에서 마라톤이 경기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처럼 운동회에선 줄다리기가 피날레를 장식한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꼬마줄다리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줄을 잡고 있다. 영산줄다리기 본 시합이 열리기에 앞서 개최된다.


그만큼 줄다리기는 대동의 놀이요, 놀이의 절정에 서 있다. 줄다리기의 역사는 문헌상으로 기록된 것만 해도 중국 당나라 때 ‘봉씨문견기’란 책에 보면 초나라와 오나라의 전쟁에서 비롯됐다는 표현이 나올 만큼 오래됐다.


당나라 봉연(封演)은 그렇게 기록했더라도 이 줄다리기가 농경문화에서 비롯됐다는 게 더 타당하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대개 정월대보름에 이 놀이가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조금씩 열리는 날이 다르기도 하다. 부산 동래에선 단옷날에 하고 제주도에선 추석에, 전라도 서해안 지역에선 음력 2월 초하룻날 줄다리기를 한다.


경기장으로 수줄이 등장하고 있다. 농악과 마을사람들의 함성이 놀이마당을 가득 메웠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인 창녕의 영산줄다리기는 원래 정월대보름 놀이였다. 그런데 영산에서는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삼일만세운동을 펼친 것을 기념해 삼일민속문화제를 개최하면서 이날 줄다리기를 하게 된 것이다. 1961년의 일이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 양력으로 환산하면 대개 31일 이쪽저쪽으로 걸쳐지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는 31일에 열리지 못했다. 당시 고병원성 AI가 발생, 확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개월이 흐르고서야 51~3일 개최하게 된 것이다. 매년 그러하듯 영산줄다리기는 둘째 날 거행됐다.


영산줄다리기는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1949년 한 차례 열렸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1961년에 삼일문화제에서 다시 모습을 보이면서 전승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1970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영산줄다리기는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대개 뭍에선 동서부로 나뉘고 섬에선 상하촌으로 나뉜다. 편제는 성을 기준으로 성 안쪽인 성내리와 교리는 동부, 성밖인 서리와 동리는 서부로 짜인다.


줄다리기 줄이 수줄과 암줄로 나뉘어 있고 줄의 머리 부분을 비녀목으로 끼워 서로 팽팽하게 당기는 형태로 줄다리기가 이루어지는데, 이처럼 대체로 동부는 남자를 상징하고 서부는 여자를 상징한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암수줄을 거는 과정이 재미있다. 양쪽에서 씨름에서 샅바 싸움을 하듯 실랑이를 한다. 겨우 암줄 머리에 수줄 머리를 넣고 비녀목을 끼우면 일단 줄을 놓고 시작 신호를 기다린다.


줄다리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농악놀이가 한동안 질펀하게 펼쳐진다. 큰줄을 중심으로 주위를 돌기도 하고 가운데 모여 깃대를 흔들며 흥을 돋우기도 한다. 줄다리기 참가자는 물론이고 마을사람들도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면서 장단을 맞춘다.


양쪽 암수줄 머리를 꿰고 나면 다시 농악이 이어진다. 큰줄 주위를 돌면서 흥을 돋운다.


본부석에서 이제 곧 줄다리기를 시작하겠다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물이 목소리를 낮췄다. 참가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본부석을 바라본다. 군수가 울리는 징소리와 함께 영차영차 줄을 잡았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줄 위에서 호령을 하던 동서부 장군들은 줄이 한쪽으로 쏠릴 때마다 더욱 크게 외친다. “힘내라! 힘내라!” 호루라기도 응원에 가담해 박자를 맞춘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동부팀이 지고 만다. 여자 쪽인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작 징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줄을 당긴다.


영차영차. 줄은 서부 쪽으로 끌려만 간다.


동부군 장군이 칼을 휘두르며 응원하지만 불가항력이다.


줄다리기가 끝이 나면 줄을 당긴 참가자는 물론이고 구경을 하던 관중도 대거 줄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손에 닿는 대로 줄을 잘라 간다. 줄다리기에 사용된 줄의 일부를 집에 가져다가 지붕 위에 올려놓거나 따로 보관하면 재수가 좋고 이것이 재앙을 막아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늘 서부의 승리로 끝나는 줄다리기 시합이지만 끝나고 나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다시 질펀한 풍악과 함께 흥겨운 춤사위가 이어진다. 막걸리 한 동이 비워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줄다리기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이 저마다 새끼줄을 잘라 한토막씩 가져간다. 액땜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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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 위론 새가 날지 않는다고요?

[해설이 있는 경남](3)양산편 : 춘추공원~법기수원지~통도사


양산시 교동에 있는 춘추공원은 호국 영령들을 모신 공원이다. 양산종합운동장에서 춘추공원으로 양산천을 가로질러 난 구름다리를 건너면 춘추공원 충혼탑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고개를 들어 올려보면, 꽤 높다. 이 계단의 개수가 얼마나 될까? 245개다.


충혼탑.


이 계단 꼭대기엔 충혼탑이 위용있게 서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보면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탑이다. 계단을 일일이 밟아 오르기 싫으면 옆으로 난 좁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승용차 대여섯 대를 주차할 만한 공간이 나온다. ‘춘추공원’이란 글자를 새긴 선돌이 있는 것을 보니 여기가 춘추공원의 입구인가 보다.



이번 ‘해설이 있는 경남’은 이옥희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안내를 맡았다. 그는 경남 문화관광해설사 2기로 경력 12년의 베테랑이다. 이날 일정은 먼저 춘추공원과 법기수원지, 그리고 오후엔 통도사를 돌아보는 것으로 정했다.


춘추공원은 호국공원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 입구에 기념비가 하나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 또 하나가 보인다. 아래쪽 비석을 먼저 보고 차례차례 올라가면서 보기로 했다.


김유신의 부친 김서현 장군을 기리는 비석.


‘신라대양주도독김서현장군기적비’라고 적혀있다. 김서현 장군이라…. 낯이 익은 이름이다. 누굴까 하고 한참 머릿속에선 이름의 정체를 찾고 있는데, 이옥희 해설사가 ‘김유신’이란 이름을 들먹인다. 아하! 그래, 김유신의 아버지였어!


이옥희 해설사는 김서현 장군의 아버지 김무력 장군의 묘가 통도사 북쪽 지산마을에 있단다. 삼국통일의 주인공 김유신 장군의 본고장이 양산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삼국유사를 보면, 김무력 장군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손자이므로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그제야 김유신이 가락국 왕실 사람이었다는 희미한 기억이 확연해졌다.


김서현 장군 기적비 위쪽엔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 기념비가 있다. 1892년 9월 생인데 돌아가신 날짜가 1921년 9월이다. 나이 서른에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선생의 연혁을 보니 예사롭지 않다. 1906년 14살에 일본에 건너가 명치대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재학중에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해 총무로 활동하면서 항일투쟁을 했다.


1909년 백산 안희재 선생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활동했으며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이시영,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해 초대 재무차장과 재무위원장, 내무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엔 독립신문에도 관여하고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 구국투쟁에 헌신했다. 요즘 나이 서른과 너무 비교가 되어 허탈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이원수 시인의 노래비가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이원수 시인의 고향이 양산이다, 창원이다 하는 논란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한국사람이 양산에만 살란 법 없고 창원에만 살란 법 없으니. 호가 해운이기도 하고 고운이기도 한 최치원은 이땅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겼지 않은가.



멀리 오두막이 있는 자리가 삼조의열비가 있었던 장충단.


이원수시비를 지나 조금 오르면 넓은 터가 나온다. 맞은편 언덕바지에 원두막 쉼터가 있다. 장충단, 저곳엔 원래 삼조의열비가 있었단다. 그것을 충혼탑 뒤편 오봉산 아래에 충렬사를 새로 지으면서 그곳으로 옮겨졌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걸어나오면 245계단을 만난다. 계단 끝에 있는 충혼탑으로 향했다. 2006년 노후화해 보기 흉해진 기존의 충혼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십장생 문양을 넣은 높이 23미터의 새 탑을 세운 것이다. 탑 아래 봉안각에는 육해공군과 경찰 등 호국영령 74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해설경남)20150511양산편1충혼탑 계단에서 충렬사로 이어지는 오솔길 산책로.


충혼탑에서 나와 계단을 다시 내려와 왼쪽으로 돌면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이 나온다. 충렬사로 가는 길이다.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나무기둥 사이로 빠져나오는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충렬사가 보인다. 초록 언덕 위에 조성됐다.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외삼문인 장충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삼조의열’ 세분을 기리는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삼조의열이란 신라의 박제상, 고려의 김원현, 조선의 조영규를 이른다. 모두 각 시대의 충신으로 왜적과 싸운 이들이다. 충렬사는 이 세분과 함께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거나 순절한 공신 28위와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유공자 39위 등 총 70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제향일은 매년 3월 27일이다. 양산향교에서 맡아 거행한다.


이옥희 해설사는 다음 코스인 법기수원지로 안내했다. 법기수원지는 동원과학기술대학교(옛 양산대학) 인근에 있다. 충렬사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떨어진 거리다.


“야~!”


법기수원지에 들어섰을 때 절로 입에서 새어나오는 탄성이다. 히말라시다와 편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솟아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 있는 법기수원지 내 편백나무 숲.


편백나무 열매.


“이곳이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개방됐죠?”


“2011년 7월에 일부가 개방됐죠. 상수도 수원지라 그동안 통제됐는데 상수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만 시민에게 열어준 겁니다. 아직도 상수원 보호가 중요하기 때문에 관람객이 배낭을 메고 들어가진 못해요.”


수원지 입구에서 댐 앞까지는 히말라시다가 도열한 듯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히말라시다 뒤편으론 편백이 자리다툼이나 하듯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았다. 상쾌한 향기. 그래, 이게 피톤치드란 걸 거야.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법기수원지 수림지 안에는 총 7종의 나무 644그루가 있단다. 편백이 413그루로 가장 많고 히말라시다가 59그루, 벚나무 131그루, 가래나무 25그루, 반송 14그루, 은행나무 3그루, 감나무 한 그루. 이들의 나이가 모두 어르신들이다. 최소 80년에서 130을 웃돈다. 이쯤이면 경건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겠다.


법기수원지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됐다. 1927년에서 1932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그 이후 2011년까지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안내문에 “1960년 6월 어느 날 오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시정 일행 3명과 함께 찾아와 수원지 서편 호안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며 휴식을 취하였던 곳”이란 설명이 버젓이 있어 묘한 느낌이 들었다.



수원지 댐에는 계단이 대각선으로 놓여있다. 역시 멋진 풍경이다. 이를 하늘계단이라 부른다. 그런데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왼쪽에 나무 데크로 만든 계단이 보였다. 하늘계단을 보호하고자 데크 계단을 만든 것 같다. 해설사도 처음 보는 것이라니 조성한 지 오래지 않은 모양이다. 이 계단 역시 개방을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사람이 만든 것만큼은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으면 그만큼 빨리 상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칠형제 반송의 하나. 둑 위에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의 풍경은 여느 저수지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저수지 너머의 산과 하늘이 펼쳐내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를 담아내기에 충분한 그릇 같았다. 댐 위에서 나란히 자태를 뽐내고 있는 반송들이 먼저 눈에 띈다. 모두 7그루다. 그래서 7형제 반송이란 이름이 붙었다.


법기수원지를 나와서 일행은 세 번째 목적지인 통도사로 향했다. 통도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와 둘러본 풍경이 채색 산수화 같다. 산 능선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온 소나무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통도사 들머리에 들어섰다. 산문 앞에 비석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여기를 부도전, 또는 부도원이라고 하는데요, 60기 정도가 있고요, 이 비들은 통도사에서 역대 스님들이 열반하시면 이 부도원에다 모시게 됩니다.”



산문에 걸린 편액 ‘영축총림’이란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가까이서 보니 ‘종정월하’란 이름과 함께 낙관이 찍혀있다. 월하종정 글씨의 이 편액도 세월이 흐른 다음 소중한 문화재 가치를 지닐 것이다.


조금 걸어가니 오른편에 성보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천 수도사에서 온 괘불탱화를 전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제야 안 것이 있다. 괘불탱화가 한 곳에만 머물러있지 않다는 것을. 괘불탱화가 선승이로구나.


일주문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왼편에 멋있는 무지개다리가 있다. 삼성반월교다. 아치형 다리 아래에 반원형의 홍예(虹霓)가 3개 있는데 이를 3개의 반달로 보고 반달별 3개, 그래서 삼성반월교란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다. 한시에 조예가 깊지 않으면 쉬 풀이하기 어려운 작명이다. 게다가 이 다리의 모양이 마음 심(心)자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니 없는 미적 감각을 다 동원해야 할 판이다. 이 다리는 1937년 건립되었다고 한다.


일주문 편액에 적힌 글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靈鷲山通度寺’. 오는 25일이 부처님오신날이어서 그를 안내하는 펼침막이 걸려있어 주련 글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일주문에는 세로로 ‘해강 김규진이 쓴 글이 있는데, ‘불지종가 국지대찰(佛之宗家 國之大刹)’이라고 적혀있다. 절의 종가요, 나라의 큰 절이란 뜻이다.


일주문 앞의 석주에 적힌 글귀도 눈에 띈다. 왼쪽엔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必須和睦)’이라고 적혀있고 오른쪽엔 ‘방포원정상요청규(方袍圓頂常要淸規)’라고 적혀있다. 무슨 말이고 하니, 각 성들끼리 모여 사니 화목해야 하고, 가사 입고 삭발했으니 규율을 따라야 한단 뜻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온다. 이 문을 통과하려면 부리부리한 눈을 뜨고 내려다 보고 있는 사천왕상의 시선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동방의 지국천왕은 용을 잡고 있고 서방의 광목천왕은 보탑, 남방의 증장천왕은 칼, 북방의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다.


그러나 사천왕이라 해서 꼭 같은 것만 들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경주 불국사와 합천 해인사의 경우 동의 지국천왕이 칼을 들었고 남의 증장천왕은 용을 들었다는 점이 다르다. 구례 화엄사의 경우는 지국천왕이 비파를 들었다. 증장천왕이 칼을, 광목천왕이 용을, 그리고 북방의 다문천왕은 깃발과 사자를 쥐고 있으니 말이다.


범종루.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왼편에 범종루가 보인다. 이 범종루엔 법고와 목어, 운경, 그리고 범종이 설치되어 있다. 범종루를 지나면 만세루가 있다. 누각이 아닌데도 이름이 ‘루(樓)’다. 지금은 단층 건물로 기념품 판매소이긴 하나 아마도 이 건물이 다시 지어지기 전엔 높은 마루가 있는 누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세루 편액의 글씨를 쓴 이가 6세 소년이었다 하니 서체의 기상으로 보아 그는 신동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만세루 맞은 편에 경주의 석가탑처럼 생긴 삼층석탑이 있다. 크기는 좀 작다.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후기 세운 것이란다. 1987년에 해체하여 수리하고서 다시 탑을 세웠는데, 이때 하층 기단 안에서 작은 금동불상과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됐단다. 탑 앞에 있는 배례석도 당시의 것으로 중요한 문화재라는 설명이다. 지금 있는 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단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발걸음 앞에 문이 또 하나 있다. 불이문이다. 이 불이문 앞에는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藍)’이란 글귀가 편액에 새겨져 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글씨란다. 이옥희 해설사는 이 불이문의 문고리를 주목했다.


“이게 뭔지 아세요?”

“문고리 같은데 아니에요?”

“문고리는 맞는데, 이 고리에 머리를 넣었다 빼면 복이 들어온다고 해요.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이 문을 지날 때마다 이 문고리에 머리를 넣어봐요.”


거의 대웅전 가까이 경내로 들어선 듯하다. 용화전 앞에 탑신 위에 밥그릇처럼 생긴 돌이 얹혀있는 탑이 있다. ‘봉발탑’이다. 봉발? 무슨 뜻일까? 웃어른께 식사를 올릴 때 쟁반이나 반상에 얹는 것처럼 미래에 올 미륵보살께 이것을 바친다는 의미란다. 그래서 이 탑은 ‘탑’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시각이 많다.


37조도품탑.


용화전에서 좀 더 들어가면 담이 없는 솟을삼문이 있고 그 오른쪽에 해장보각이 있다. 모두 통도사 창건주인 자장율사와 관련이 있는 건물이다. 자장율사가 해장보궁에 있다가 이 솟을삼문을 통해 나와 37조도품탑 앞에 서서 제자들에게 강연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것도 탑이라기보단 대(臺)에 가깝다. 이 대 위에 책을 얹고 설법을 풀었으리라.


통도사의 대웅전은 위에서 보면 정사각형 모양이다. 지붕은 복합 팔작지붕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어느 쪽이 앞이고 뒤인지 분간할 필요가 없다. 사면에 드나드는 문이 있고 어느 쪽으로 들어가든 들어가는 쪽이 입구다. 그리고 각 문의 위에는 편액이 각각 다른 이름으로 걸려 있다. 통도사 대웅전만의 독특한 형태다.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남쪽은 금강계단, 북쪽은 적멸보궁이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구성됐다. 대웅전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불상이 없다. 대웅전 북쪽에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금강계단에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금강계단.


신을 벗고 들어가 가운데 사리탑을 보면서 시계방향으로 탑돌이를 했다. 세 바퀴. 도는 동안 이옥희 해설사가 신기한 일이 있다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금강계단이 이렇게 노천에 있는데 그 위로 새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아 새똥이 하나도 없어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라 이곳이 기가 굉장히 센 곳인 모양이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새들이 이곳에 와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해요. 신기하지요?”


통도사배치도


그렇다면 정말 신기하다. 금강계단 탑돌이를 끝내고 나왔을 때 눈에 자그마한 못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모양새여서 반갑기까지 하였다. ‘구룡지’ 통도사 창건 전설이 서린 못이다. 통도사를 짓기 전 아홉 마리 용이 이곳 습지에 살았는데 자장율사가 도술을 부려 모두 쫓아냈는데, 눈먼 용 한 마리가 떠나지 못하자 율사가 따로 못을 만들어 살도록 해줬다는 곳이다.


구룡지 전설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옥희 해설사의 재미있고 자세한 설명으로 더욱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어쩌면 그냥 한 바퀴 돌고 나면 다녀왔다는 의미 외에 별다른 느낌이 없었을 여행이지만 가는 곳마다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니 보는 것마다 각인이 되는 듯했다. 그래, 여행이 때로는 확실한 공부인 게야.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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