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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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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텔링]망산도·유주암에 얽힌 옛이야기
창원 진해구 용원동 위치…김수로 부인 허황옥 도착한 곳


경남사람치고, 나아가 김해사람치고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을 모르는 이 드물 것이다. 김해 봉황동에 김수로왕의 무덤이 있고 구산동에 허황옥의 무덤이 있다. 허 황후는 김해 허씨의 시조모다. 김해 허씨는 허 황후의 자손이란 얘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 황후는 인도 사람이다. 아유타국이란 나라가 고향이다.

허 황후가 어떻게 가락국으로 건너왔는지 설이 분분한데 ‘보주태후’란 시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사천성 보주에서 살았던 인도인으로 보는 견해가 크다. 그 증거로 학자들은 수로왕릉에 새겨진 쌍어문을 들고 있다. 쌍어문이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진 문양인데, 이것이 인도 아유타국으로 알려진 아요디아(Ayodhya)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중국 보주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연관성을 찾으려는 것이다.

진해 용원동 망산도 앞 유주정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여가를 즐기고 있다.

허 황후는 가락국으로 김수로왕에게 시집 오면서 혼수품으로 금과 은, 보석, 비단 등 온갖 물건을 가져왔는데 그중에서도 차(茶) 씨앗을 가져온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다.

장군차. 우리나라의 여러 차 중에서 장군차 하면 김해를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해가 장군차의 시배지이기도 하다. 허 황후가 중국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면서 배가 풍랑에 중심을 잡고 잘 견딜 수 있도록 무거운 돌을 함께 배에 실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파사석탑으로 수로왕비릉 파사각에 모셔져 있다.

그렇다면, 허황옥이 김수로와 결혼하기 위해 먼 바닷길을 왔는데 그가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 진해 용원동과 부산 송정동 경계지점에 망산도라는 곳이 있다. 수로왕은 이 망산도에 가서 신부 허황옥을 맞았다고 한다. 망산도는 부산인데 망산도 동남쪽 오히려 부산 방향에 있는 유주암은 창원이다.(다음 지도 참고)

망산도.
망산도 끝에 세워진 비석.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망산도 유주암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있는 가락국 수로왕과 혼인한 허 황후의 일행이 타고 온 배가 변한 바위.

삼국유사 가락국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 기록에 의하면 수로왕이 왕이 된지 7년이 지나도록 왕비가 없어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는데 수로왕은 왕비는 하늘이 정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유천간(留天干)을 보내 기다리게 한 곳이 망산도이다. 어느 날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색의 돛과 깃발을 단 돌로 만든 배가 허 황후 일행을 태우고 나타나자 수로왕이 직접 나가 허 황후를 맞이하여 혼례를 올리고 15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허 황후 일행이 타고 온 돌배가 바닷속에서 뒤집혔는데, 그곳이 바로 망산도에서 동북쪽으로 70m쯤 되는 곳에 있는 바위섬이 유주암이라고 한다.

유주암과 멀리 망산도, 그리고 실제 망산도라는 설이 있는 망산(왼쪽 산봉우리).
유주암.

그런데 지도 상엔 현 유주정 앞에 있는 작은 섬이 망산도라고 되어 있으나 안골왜성이 있는 안골동 뒷산인 동망산이 당시 지칭했을 망산도라는 주장도 있다.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에서 펴낸 ‘우리고장 문화유산’이란 책에 보면 관련 내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책에 설명된 내용을 가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로왕이 즉위한 지 7년(서기 48년) 7월 27일에 구간들이 왕의 배필을 간택할 것을 아최니 왕은 ‘유천간’에게 명하여 작은 배와 말을 몰고 망산도에 가서 망보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岾)에 나아가 망보게 분부하셨다.

그때 무득 가락국 앞 서남쪽 해상에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을 보고 오는 배가 있었다. 망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留天干) 등이 먼저 횃불을 올리니 배를 마구 내달아 와 앞을 다투어 내리려 했다. 신귀간 등이 승점에서 이 모습을 보고 바로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공주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서 배를 대어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있었다. 거기에서 공주는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쳐 제사를 지내었다.

왕후가 비단바지를 바쳤던 그 산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망산도로 들어가는 입구. 잠겨있다.

망산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가락국 앞 서남쪽 해상에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을 보고 오는 배를 지금 말하는 망산도(말무섬)에서는 볼 수가 없다. 말무섬에서는 안골동의 뒷산인 실제의 ‘바라메(望山)’가 가리워서 서남쪽에서 오는 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망산도는 ‘바라메’를 ‘望山島’로 차자(借字) 표기한 이름이며 ‘바라메’는 안골동 뒷산 이름이고, 뒤에 안골포진 지도에는 ‘육망산(陸望山)과 ‘동망산(東望山)’ 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된다.

안골동 뒷산을 ‘망산도’라고 섬처럼 표기한 것은 당시는 수위가 높고 교통도 불편하여 멀리 뭍에서 보면 섬으로도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횃불을 올리며 배를 맞이한 곳은 안골동 뒷산인 ‘바라메’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기록된 승점이라는 표현 역시 현재 망산도가 잘못됐음을 증명하고 있다.

말무섬에서 횃불을 올렸다면 신귀간이 기다리던 승점은 어딘지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안골동의 바라메에서 본다면 승점은 마천동에서 용숫골로 올라가는 사자목(용추폭포 동쪽 위에 있는 고개. 보통 ‘밤낮재’라고 함)이 바로 보이므로 거기를 비정해 볼 수 있다. 김해로 오가는 길목이었으니 비정할 만한 곳이다. 말무섬에서는 어디로 보나 승점으로 비정해 볼만한 곳은 찾을 수 없다.

이 책에선 유주암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이야기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유주각.

쪽박섬이라는 돌섬을 ‘유주각’과 대응해서 ‘유주암’이라고 하면서 공주가 타고 온 돌배가 뒤집혀 있다고 하는 이가 있다. 가락국기에는 종자에게 선물을 주어서 돌배를 돌려보내었다고 하였으므로 허무맹랑할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파사석탑 이야기에서 충분히 논거가 뒷받침된다. 결론적으로 후대에 허 황후 설화와 불교 설화가 결합해 지어진 이야기로 봄이 타당하다는 얘기다.

허황옥 공주가 타고 온 배가 돌배라고 하니 돌로 만든 배로 아는 이가 있다. 석주(石舟)를 그대로 국역하면 ‘돌배’가 되지만 돌로 만든 배가 아니라 실은 물건이 돌이어서 ‘돌배’라고 하였던 것이다. 나무를 실어나르는 ‘나무배’, 멸치를 실어나르는 ‘멸치배’라고 하듯이.

수로왕비릉 앞에 있는 파사각.
파사각 내에 안치된 파사석탑.

배에 실은 돌이란 것이 지금 김해시 수로왕비릉에 있는 파사석탑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파사석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최근에 각 부재를 검토하여 새로이 탑을 복원하였다고 하나 본래의 부재와 똑같은지는 세밀한 고증이 필요하다. 이 석탑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권 제3 탑상편 제4 금관성파사석탑조(金官城婆娑石塔條)에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금관성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邑)이 금관국으로 되어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오려고 하다가 파신(波神)의 노여움에 막혀서 할 수 없이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물가에 와서 닿았는데, 비범(緋帆 : 붉은색의 배)·천기(茜旗 : 붉은 색의 기)·주옥(珠玉)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중략)… 탑은 사면으로 모가 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럽고 특이하여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

허황후릉.
음수대에 있는 쌍어 조각과 멀리 허황후릉, 파사각이 보인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파사석탑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호계사(현재 연화사)에 있던 탑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해부사로 있던 정현석(鄭顯奭)이 “이 탑은 허 황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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