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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당연히 함께 병실에서 잠을 자야하는 거라 생각했다. 보호자가 함께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여겼다. 어떤 때엔 간이침대가 아닌 병상에 함께 누워 자기도 했다.
입원실에 들어가면서 손을 씻고 들어가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나 역시 입구에 비치된 손소독제를 보지만 한 번도 그것으로 손을 씻은 뒤 병실에 들어간 적이 없다.
사나흘 가족이 입원해 있으면 당연히 화장지라든지, 비누라든지 이런 것들은 챙겨가야 하는 물건이었다. 감기가 걸려 병원에 진료하러 갔을 때 안내대에서 접수하면 간호사가 뭉특하게 생긴 체온계를 주머니에서 꺼내 귀에 꽂는다. 그것 역시 위생적으로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으며 당연시 여겼다.
그런데, 오늘 경향신문이 뉴욕타임스 기사를 인용해 보도한 것을 보니 우리가 얼마나 위생에 허술한 습관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NYT는 한국에서 진료를 받은 외국인의 시선을 담았다. 전혀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다. 외국인이니까 한국인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병원에서의 이런 우리 습관이 메르스 확산에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일리있다. 서울삼성병원이 메르스의 온산이 되어버린 것도 이런 우리의 위생습관 때문일 것이다. 위생에 수준 높은 인식을 해야할 병원 종사자들조차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으니.
자신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어야 하겠다. 거울을 보지 않고서야 얼굴에 숯검정이 얼마나 묻었는지 어찌 알 수 있으랴!
지난 5월
28일 함안 함주공원에서
제38회 경상남도민속예술축제
때 펼쳐졌던 진주솟대쟁이놀이보존회의 솟대놀이
시연은 그야말로 옛날 놀이패들의 놀이전통을 고스란히
재현한 느낌이었다.
솟대쟁이놀이는 1936년
황해도 원산 공연을 마지막으로 하여 해체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제가
조선의 민속을 탄압하고 있던 데에다 일본의 신파와
곡마단이 들어옴으로써 우리 전통민속에서 관심을
돌리게 만든 탓이기도 하다.
이때 사당패와 걸립패 등이
남사당패에 흡수되었는데 솟대쟁이들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명맥이
끊기는가 싶었는데 마침 진주에서 솟대쟁이놀이를
복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솟대쟁이패는 원래 진주를 본거지로 하여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놀이패다.
2003년부터
진주지역 후예들이 죽방울놀이,
장다리타기 등을 시작을 복원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다행히 솟대쟁이놀이에
대한 문헌이 많이 남아 있어 복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복원된 솟대쟁이
놀이의 복원과정과 의미에 대해서는 본보 2월
25일에 보도된 ‘놀판살판
어절씨구…솟대쟁이놀이 전승’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이번 기사에선 이날 펼쳐진
놀이를 시간순서에 따라 스케치를 함으로써 솟대쟁이
놀이가 어떤 놀이인지 간접 감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먼저 솟대쟁이놀이가 문헌에
많이 남아있다고 하였는데 고려말 이색의 ‘목은집’,
고려가요 ‘청산별고’,
조선 초 성현의 ‘허백당집’에 시로 잘 나타나
있지만 감로탱 등 그림으로 잘 묘사되어 있어 옛날
솟대쟁이들이 놀았던 모습을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다.
위 감로탱 자료는 솟대쟁이놀이
팸플릿에 인쇄된 것들이다.
감로탱은 1592년
그려진 것부터 1701년
등등 20세기 초 송송갑의
증언에 의해 그려진 연희도까지 소개되어 있다.
부부분 사찰에 탱화로 모셔놓은 감로탱에 솟대놀이가
많이 그려져 있는 것은 이것이 불교문화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탱화와 조선시대 풍속도를 통해
드러난 솟대놀이 모습을 살펴보면,
솟대에 거꾸로 매달려 기예를 부리거나 솟대
끝에서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줄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가 하면 줄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며 두 줄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서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탱화의 경우 자세히 보면 유사한 모습이
많은데 다른 그림을 보고 베낀 것이리라.
따로 현장을 보고 그렸더라면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앞놀이
과장으로 춤과 노래로 놀이패들이 무대를 돌며 흥을
부추긴다.
넋전춤은
선대예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춤으로 솟대 줄을 타면서도
펼친다.
놀이는 크게 세 마당으로 구성된다.
첫째 마당은 들머리판이다.
들머리판은 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판으로 구경꾼들에게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공연이다.
그래서 호적을 중심으로 취군이 연주하고 놀이패의
놀음이 조화를 이루어 시끌벅적 앞놀이를 하는 것이다.
놀이는 당산굿-길놀이-넋전춤으로
이어지는데 당산굿은 마을의 입구에 당산나무에
솟대쟁이패가 와서 공연을 한다는 것을 알리는 굿이다.
길놀이는 죽마를 타고 걷는
개우다리타기로 풍물잽이들과 함께 행사장 주변을
돌면서 가두선전을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넋전춤은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선대 예인들의 넋을 위로하며 놀이가 안전하게 진행되도록
기원하는 춤이다.
솟대쟁이놀이
본과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매호씨(어릿광대)가
재담을 늘어놓으며 흥을 돋우고 있다.
솟대놀이의 본과장은 재주넘기
마당이다. 다양한
기예와 재주넘기로 이루어져 있다.
솟대놀이가 남사당놀이와 다른 점은 체기,
즉 기예 중심의 연희라는 점이다.
이런 솟대쟁이패의 기예는 나중에 유랑극단이나
유랑서커스단이 펼치던 민속 기예의 원형이 된다.
본과장이 시작되는 것은
어릿광대라고도 불리는 매호씨의 입담에 달렸다.
관객과 주거니 받거니 재담을 늘어놓다가
진주삼천포농악 뜬쇠를 부른다.
진주삼천포농악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다.
진주삼천포농악은 솟대쟁이패의 농악을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진주솟대쟁이
농악을 원류로 하는 진주삼천포농악으로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풍물.
진주삼천포농악은 한국의 농악
중에서 제일 먼저 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고깔을 쓴 치배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대신 채상놀음이 뛰어난데 종종 기예를 선보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대체로 가락이 빠르고 남성적이다.
이날 일부를 선보였지만 진주삼천포농악을 12차
농악이라 부르는 것은 오방진,
얼린굿, 덧배기
법고놀음 등 12과장으로
꾸며졌기 때문이다.
죽방울놀이는
서로 많은 재담을 주고받으며 코믹하게 이루어진다.
죽방울놀이는 나무를 장구
모양으로 조그맣게 깎아 가운데를 실로 팽이처럼 돌리며
기예를 부리는 놀이다.
죽방울을 다리 사이로 지나가게도 하고 어깨 뒤로
넘겨 돌리기도 하며 높이 던져올리기도 한다.
다양한 기술이 선보일 때마다 관객의 손뼉소리가
터져 나온다.
죽방울놀이는 죽방울받기,
또는 죽방울돌리기라고 부른다.
놀이 모습이 조선말기 화가 김준근이 그린
기산풍속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불행히도 기산풍속도첩은 우리나라에 없고 독일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버나잡이가
사발을 가는 막대기를 이어붙인 위에 올려놓고 돌리고
있다.
버나는 지름 30~35㎝
정도의 쳇바퀴에 가죽을 둥글게 오려붙인 것을 말하는데,
버나잡이들은 이것만 돌리는 것이 아니다.
대접도 돌리고 대야도 돌리고 하물며 밥상도
돌린다. 작대기 끝에
얹어서 돌릴 수 있는 것은 다 돌리는데,
작대기 대신 담뱃대로도 돌리고 식칼로도 돌린다.
점점 마술 같은 기예를 보이는데 서로 주고 받는
재담도 재미있다. 실수를
하면 실수 한 대로 한 번 더 도전한다.
버나놀이에는 동작에 따라
15가지 사위가 있다고
한다. 던질 사위,
때릴 사위, 다리
사위, 무지개 사위,
자새 버나, 칼
버나, 바늘 버나,
도깨비 대동간 건너가지,
정봉산성, 단발령
넘는 사위, 삼동,
놋대야 돌리기, 낙화
사위, 꼬바리 사위,
물주리 사위 등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돌리는 기술로만 봐서는 중국의 접시돌리기와
유사하다. 이 연희에
재미를 더하는 것은 역시 재담이겠다.
살판
과정. 멍석 위에서
뒷곤두(텀블링)를
하는 꼰두쇠.
살판에는 3명이
등장한다. 살판은
12가지 땅재주 중의
하나로 제일 마지막 재주다.
살판이란 말은 꼰두쇠들이 이 재주를 넘으면서
잘 하면 살판 못하면 죽을 판이란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만큼 위험한
기예라는 얘길 터. 곤두박질친다는
말은 곤두를 하다 실수를 하여 처박히는 모양새를
이름이니 이 기예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방증하는
말이다.
살판의 기예에는 앞곤두,
뒷곤두, 번개곤두,
자반뒤지기, 팔걸음,
외팔걸음, 외팔곤두,
앉은뱅이팔걸음,
수세미트리, 안즌뱅이모말되기,
숭어뜀, 살판
등의 기술이 있다. 수세미트리는
앞곤두와 같은 것을 큰 원을 그리며 돌기를 4번
계속 하는 것이다.
얼른쇠가
빈 주머니에서 계란을 꺼내 보이고 있다.
얼른은 다른 말로 마술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장치나
재빠른 손놀림을 이용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어리게 해 눈속임하는 과정이다.
이 얼른 과장은 혼자 등장하는 관계로 얼를쇠의
재담은 없다. 여느
마술사처럼 몸짓으로 마술을 시연할 뿐이다.
그래서 거 계란이 어디서 나왔을까?
신기하긴 하지만 연희 묘미는 좀 떨어진다.
솟대쟁이
셋이서 솟대와 줄에 올라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
진주솟대쟁이놀이의 솟대타기는
장대타기로 불리는 초계대광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장대타기는
대광대가 긴 장대 위에서 20분가량을
여러 재주를 부리는 것이지만 진주의 솟대타기는 두
가닥의 밧줄을 활용해 셋이서 각종 묘기를 부리는
것이다.
기예는 매달리기,
중심잡기, 물구나무서기,
악기연주 등을 펼친다.
이때 솟대쟁이는 아래에 있는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는다. 흔들거리는
솟대 위에서 때론 떨어질 듯 위험한 몸짓으로 관중을
긴장하게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최고라는 둥 넉살 좋은 말로 좌중을 웃게 한다.
솟대타기에 이어 두 가닥의 줄
위에서 쌍줄백이놀이를 한다.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팔걸음도 하고 앞으로
구르듯 고물무치기도 한다.
솟대쟁이놀이
마지막 판놀음으로 대동놀이마당이 펼쳐지고 있다.
역시 전통 예술의 마지막은
대동놀이다. 이것은
농악이나 탈놀이도 마찬가지로 놀이판이 제의적 성격이
있어 마지막은 모든 이가 어울리는 어울림 마당이 되는
것이다. 이날은 경연
형태의 공연이어서 관중의 참여는 없었지만 다른
놀이판이었다면 그 흥취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된다.
이를 바래굿이라고 한다.
고성에서 임진왜란 시기 무기정 월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명하기 시작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월이에 대한 이야기는 당항포해전관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월이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상영하고 있기도 하다.
해전관 가운데 설치해놓은 미니어처는 이순신 장군에 쫓겨 당항포를 지나 소소포로 향하던 왜선이 수로가 없는 해변에서 당황해 하는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먼저 민속극의 주인공 월이가 어떤 인물인지 당항포해전관 앞에 소개된 글을 읽어보자.
당항포해전 전시관에서 상영 중인 애니메이션 월이이야기.
당항포해전 전시관 가운데 비치되어 있는 해전 미니어처.
15세기 후반,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고 사전에 밀사를 보냈다. 밀사는 삼천포 쪽으로 해서 남해 노량과 여수, 목포를 거쳐 평양을 둘러 남쪽으로 내려오다 무학동 무기정 곱새네 집을 찾아왔다.
임무를 완성한 밀사는 방심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기생 월이는 술을 자꾸 원해 취하게 만든 후 완전히 잠든 밀사의 가슴을 뒤져 무명 비단보에 싼 보자기를 열었다.
그 속에는 우리나라를 침략할 전략과 해로의 공격 요지며, 육로로 도망할 수 있는 지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월이는 밀사의 붓을 찾아 조심스럽게 월평리와 지소강(지금의 마암면 삼락리 간척지)을 연결, 통영군(통영시)과 동해면, 거류면을 섬으로 만들어 놓고 붓을 놓았다.
그 후 임진년 6월 5일 일본이 조선을 쳐들어왔다. 그들은 월이가 그려넣은 가짜 지도를 따라 고성 소소포(마암면 두호리 근방)에서 죽도포(고성만 바다)로 가기 위해 소소강(고성천)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뱃길이 없음을 알고 되돌아 나오던 중, 뒤따라 온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전멸이 된다.
왜선은 산산조각이 났고 물 위에 떠오른 왜적의 머리 수백 두가 썰물에 밀려 소소포 쪽으로 밀려오니 그 후부터 머리가 밀려왔다 하여 이곳을 두호라 부르게 되었다.
당항포해전의 명장 이순신 장군의 전공이라고 하지만 월이가 일본 밀사의 지도를 허위로 고쳐놓지 않았다면 고성은 왜놈의 손에 아비규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월이는 1·2차 일본의 대함대 57척 3500명이나 되는 수군을 전멸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월이가 그린 지도를 따라간 왜장은 속았다고 분개를 했고 그 후 이 일대 바다를 ‘속싯개’라 부르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민속극이 본격 시작하기 전에 먼저 월이 이야기의 배경을 구수한 소리로 풀어내고 있다.
월이 민속극은 이러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꾸며졌다. 민속극이 시작하면 먼저 월이 전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도입부는 월이를 기리는 향사로 시작한다. 흰옷 입은 여인들이 월이 신위를 모시고 기원을 한다. 그리고 살풀이춤으로 넋을 기린다.
이윽고 만장을 앞세운 상여가 등장해 무대를 한 바퀴 돌고 빠져나간다. 시대적으로 보면 역순이다. 맨 나중에 있을 진혼제가 먼저 나오고 월이의 사망에 따른 상여, 그리고 월이와 일본 밀사 간에 있었던 사실을 극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풀어냈다.
월이 민속극은 월이에 대한 진혼무로 시작한다.
월이 상여가 처량한 상여소리에 실려 무대를 한 바퀴 돌고는 빠져나간다.
왜군 밀사가 조선의 지형을 그려넣은 지도를 완성한 후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실제 왜군 밀사가 승려로 변장을 하고 고성 무기정을 찾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러한 설정이 설득력을 얻는다. 조선시대 타락한 승려를 풍자한 오광대 탈놀이를 보면 당시 타락한 승려들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조선의 승려로 변장한 왜군 밀사의 모습을 코믹하게 그렸다. 무기정 기생들에게 홀딱 반해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하며 월이를 어찌해볼 요량으로 희롱을 하나 먹혀들지 않자 답답해하는 모습도 그러하다.
무기정을 찾은 왜군 밀사가 월이의 모습에 반해 애를 태우고 있다.
무기정 기생들이 춤과 노래로 왜군 밀사의 혼을 빼놓고 있다.
술에 취해 나자빠진 밀사의 품에서 지도를 꺼내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월이.
월이의 역할로 전쟁에서 이기자 월이를 칭송하며 가무를 즐기고 있다.
인사불성으로 술을 퍼마시곤 곯아떨어졌을 때 월이의 활약이 시작된다. 그의 품에서 지도를 꺼내 휙휙~ 지도를 고치고는 다시 그의 품에 넣는다. 중간에 여전히 몽롱한 모습으로 밀사가 벌떡 깨어나긴 하지만 월이의 손끝에 밀려 다시 벌러덩 나자빠진다.
그리하여 승리할 수 있었던 임진왜란이었다. 극의 마지막은 월이의 수훈을 칭송하는 노래로 마무리한다. 물론 월이 후예들의 춤이 없을 수 없다. 흥겨운 노랫가락이 시간을 거슬러 500여 년 전 무기정에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월이의 귓가에 혹시 맴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