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텔링]여우와 사랑 나눈 명의 유이태
[전설텔링]여우와 사랑 나눈 명의 유이태
유의태 모델로 알려진 조선의 명의에 얽힌 거창 침대롱바위·이태사랑바위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20년 이상 산 사람이라면 허준을 모르는 이 없고 그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의태를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제목 아니면 본문에 나타난 이름 두 개가 다름을 알아챘으리라.
1975년 이은성이 극본을 쓴 MBC 드라마 <집념>(허준 역 김무생, 유의태 역 이순재)이나 영화 <집념>(허준 역 이순재, 유의태 역 김인태), 그리고 1991년 MBC 월화드라마 <동의보감>(허준 역 서인석, 유의태 역 이순재)혹은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방송된 역시 MBC 드라마 <허준>(허준 역 전광열, 유의태 역 이순재)에 이어 또 역시 2013년 MBC 드라마 <구암 허준>(허준 역 김주혁, 유의태 역 백윤식)에 이르기까지 동의보감의 주인공 ‘허준’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는 계속 재생산되어왔다.
이은성은 드라마와 영화 <집념>의 성공을 계기로 이를 소설화(소설 동의보감)했고 다시 MBC는 소설을 바탕으로 드라마화 했다. 드라마로 재생산될 때마다 허준의 이야기는 공전의 히트를 쳤고 마침내 2013년 <구암 허준>에 이르러서는 1세대 허준이었던 고 김무생 배우의 아들인 김주혁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허준 역을 맡는 일화까지 생겼다.
명의 유이태가 어렸을 때 살았다는 집과 일부 주민들에게 침대롱바위로 알려진 바위.
어쨌든 이은성의 작품 영향으로 대한민국의 갑남을녀는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유의태는 가상의 인물이다. 지금 산청 동의보감촌에선 그 유의태를 실존했던 인물로 스토리텔링화하고 있지만 묘하게도 이름이 아주 유사한 유이태라는 인물이 실존했다는 사실이 작금 논란이 되고 있다.
허준(1539~1615)은 조선 13~15대 임금인 명종~광해군 때의 사람이고 유이태(1652~1715)는 조선 후기 19대 임금인 숙종의 어의를 지낸 인물이다. 그러니 살았던 시기는 서로 다른 세상이었다. 그것도 허준이 시대적으로 훨씬 앞선 인물이다. 그러니 유의태는 이름과 상황이 비슷한 유이태를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개명을 하고 가상의 인물로 그려졌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유이태의 후손 입장에서 보면 실존 인물 유이태가 가상 인물 유의태로 잘못 알려지는 처지라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겠다. 유이태의 후손들은 지난 5월 산청군에 ‘유의태’로 되어 있는 이름을 ‘유이태’로 변경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유이태는 거창군 위천면 위천중학교 인근 사마마을에서 태어났다. 유이태는 천연두와 홍역 등의 병에 깊은 연구를 하여 의학전문서인 <마진편(痲疹篇)>을 썼다.
어의로 숙종의 심각한 병을 고치어 신임을 받았고 나중에는 안산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을 고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전념을 다했다고 한다. 유이태는 거창에서 태어났지만 외가인 산청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어의까지 지낸 인물이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시골로 돌아와 의술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히 수많은 일화와 전설까지 얻지 않았나 싶다.
유이태는 어렸을 때부터 침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유이태에 얽힌 수많은 전설 가운데 침대롱 바위가 있는데, 이는 유이태가 침대롱을 놓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침대롱이란 침을 넣어두는 대통이다. 지금에야 위생상 침대롱에다 침을 보관하는 한의사가 있기야 하겠나만 조선시대 당시만 하더라도 보관의 편리성을 위해 가느다란 대나무통, 즉 대롱에 침을 넣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곤 했다.
이 침대롱바위는 유이태가 태어났다는 집에서 가깝다. 위천중학교 옆 사마마을 입구에 있다. 이 마을에서 전 부녀회장을 지냈다는 소순자(75) 씨를 만났다.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위천중학교 옆 사마마을 입구. 원 안이 침대롱바위.
침대롱바위 가까이 다가가 아래서 위로 향해 본 모습.
침대롱바위 수평 앵글.
위에 올라가 내려다 본 모습.
“저기 보이는 저 기와집이 옛날에 유이태가 살던 집이라 캐요. 기와집은 지금 사는 사람이 새로 지었지만도 저~서 살았다 캐. 그라고 그 앞에 있는 저 바구가 침대롱바위라 캐요. 그런데 전에 엠비씬가 방송국에서 와서는 요 삐알(비탈)에 있는 저 바구를 찍어가데.”
소 여사가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 묘하게 생긴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침대처럼 생겼다. 침대롱과 침대, 물론 유사한 발음이지만 전혀 다른 물건이다. 하지만 특이하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침대처럼 생긴 바위가 유이태 전설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근처에 거창의 유명한 관광지인 수승대가 있다. 여름이면 국제연극제가 열리는 곳으로도 세계에 알려져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피서와 문화를 동시에 즐기기도 하는 곳이다.
이 인근에 유이태가 어렸을 적에 여우와 사랑에 빠졌다는 전설이 스민 바위가 있다. ‘이태사랑바위’다. 위천천이 ㄱ자로 꺾여 돌아가는 모서리에 있는 데다 바위가 꽤 높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예부터 수많은 풍류객이 머물다 간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을 다른 말로 ‘척수대’라고도 부른다.
유이태가 태어난 사마마을에서 수승대로 가다 보면 수승대 관광지 입구 바로 못 가서 왼쪽에 ‘이태사랑바위’가 있다. 들어서는 입구에 작은 안내판이 있다.
‘백여우와 사랑에 빠진 유이태의 전설, 척수대. 이태사랑바위’라고 제목이 적혀있다. ‘척수대’란 이름이 붙은 연유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사신이 오가며 이곳에서 근심을 씻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암튼,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은 스토리가 제법 재미있다.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본다.
조선 숙종 때에 유이태(劉以泰)라는 유명한 의원이 있었다. 그는 위천면 서마리(이후 갈전리 사마마을)에서 태어난 거창 사람으로 그가 지금 수승대 어귀에 있는 어나리 서당에서 글공부를 할 때의 일이다.
수승대 관광지 안으로 들어가 본 팻말과 이태사랑바위.
망원렌즈로 조금 당겨 본 모습.
250밀리 망원렌즈로 완전히 당겨 본 모습.
위천천 갈대와 어우러진 이태사랑바위.
유이태가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으려면 밤마다 예쁜 아가씨가 나타나서 유혹하여 그럴 때마다 그는 마음을 굳게 해 독서에 더욱 전념하였는데, 어느 달 밝은 밤에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하여 수승대에 올라 중천의 달을 보고 있는데 또 그 아가씨가 나타나 단 한 번만 입맞춤이라도 하여 달라고 애원하니 그는 그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단 한 번만 입맞춤하기로 하였다.
그녀와의 접촉에서 더할 수 없는 황홀감과 달콤함을 실감하고 신비로운 향기에 도취해 있는데 그녀의 혀끝에서 감미로운 구슬이 굴러들어와 형용하기 어려운 쾌감에 젖을 때면 구슬은 다시 그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고 이렇게 두 사람의 입으로 구슬이 오감을 거듭하는 동안 긴 애무 끝에 그녀는 작별을 고하고 사라졌다.
이 같은 일이 연일 계속되어 유이태는 밤이면 그녀를 그리워하게 되고, 이러한 밤이 수십일 계속 되는 동안 유이태의 안색은 점점 창백하지고 몸은 야위어 갔다. 이상하게 생각한 서당 훈장은 그에게 사연을 물으니 자신의 쇠약을 근심하던 그는 그 사유를 순순히 고했다. 고백을 들은 훈장은 심사숙고한 끝에 “그 구슬이 너의 입에 들어올 때 삼켜라.” 하고 일렀다.
그날 밤에도 예외 없이 두 남녀의 밀회는 계속 되고 있었다. 문득 스승의 말씀이 떠올라 몇 번인가 굴러들어온 구슬을 눈을 딱 감고 꿀꺽 삼켰더니 웬일인지 그렇게 아름다웠던 아가씨는 순식간에 비명을 지르면서 한 마리의 흰 여우가 되어 달아나는 것이었다.
훈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다음 날 뒷간에서 그 구슬을 찾아와 소중히 간직하라고 하였다. 구슬을 얻은 날부터 아가씨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몸도 완연히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유이태의 총명이 비상하게 늘었다는 것이다.
한 번 듣거나 본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천재가 되었고 이때에 그는 의서를 열심히 공부하여 의술의 대가로서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되어 마침내 국왕의 병환에 부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태사랑바위로 들어가는 길.
이태사랑바위 끝자락.
발아래로 절벽이다.
멀리 금원산 능선에 운무가 덮여있다.
그러나 그의 보배인 구슬이 온데간데없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구슬을 잃고 난 뒤부터는 그도 평범한 재주밖에 없게 되었고 기억력도 줄어서 마침내는 건망증까지 걸렸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며느리가 감기몸살에 걸렸는데 콩나물을 달여 먹이려던 것이 콩나물을 잊어버리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떠오르지 않아 ‘비녀나물 비녀나물’이라고 하다가 며느리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이태사랑바위 안내판에는 “전설처럼 이태사랑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연인은 사랑이 이루어지고, 자식은 훌륭한 인재로 성장한다고 전해진다.”고 적혀있다.
이러한 여우구슬, 혹은 구미호의 보배구슬에 얽힌 설화와 전설이 얽혀 있는 사람은 유이태 말고도 여럿이다. 특히 산세가 험한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경기도 양평의 이식 일화, 충북 영동 도선 일화, 경북 안동 이황의 제자 조목 일화, 전남 해남 윤선도 일화 등이 알려졌다. 전설의 유형은 유이태 전설과 대동소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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