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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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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13일 몽골 관광객인 담딘후 씨와 체첵 씨, 그리고 통역을 맡은 노유정 씨와 함께 창녕을 찾았다. 이날 오전 창녕읍에 있는 석빙고 주차장에서 일행을 안내하기로 한 김진숙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났다.
(해설경남)20150415창녕편_창녕석빙고앞에서해설
13일, 보슬비가 부드럽게 내리던 오전 일행은 김진숙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를 석빙고 앞에서 만났다.
관광은 4시간 정도의 일정으로 잡았고 해설사와 사전 조율을 통해 창녕석빙고~진흥왕척경비~송현동고분군~우포늪을 둘러보기로 했었다. 이렇게 기본 여정을 정해놓고 동선에 따라 추가할 곳이 있으면 해설사가 추가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창녕석빙고
(해설경남)20150415창녕편_창녕석빙고를설명하는김진숙해설사
창녕석빙고에 대해 구조와 기능, 그리고 이에 얽힌 에피소드를 설명하고 있는 김진숙 해설사.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면 한 번쯤 실물을 보았을 석빙고는 어린 시절 과학적 호기심 이상의 안타까운 역사가 스며있는 문화재다. 석빙고 입구 한쪽에는 큰 돌로 막아놓았는데 겨울 찬바람이 부딪혀 안쪽으로 냉기가 흘러들어가도록 장치를 한 것이고 안쪽에선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흘려보내기 위해 바닥을 경사지게 했으며 따뜻한 공기가 빠져나가도록 천장에 통풍구를 만든 점 등은 그 시절 어찌 이런 과학적 사고할 다 할 수 있었을까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차태현 주연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봤듯이 석빙고는 권력의 상징이요, 사치의 극치였다. 권력이 있거나 부유한 양반들이 한여름에 얼음을 끼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석빙고 덕분이었는데, 한겨울에 강의 얼음을 채취해 이곳에 보관하면 여름 때까지 그렇게 많이 녹지 않고 얼음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설경남)20150415창녕편_창녕석빙고
전국 7개 석빙고 중에서 창녕에 2기가 있다. 창녕읍 송현리에 있는 석빙고.
이러한 유용한 냉동시설이 서민 백성에게도 혜택이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음을 채취하는 것을 벌빙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주 고된 노동이었다. 엄동설한에 부역 나간 사내들은 발에 동상이 걸리기 일쑤였고 벌빙 중 잘못하여 물에 빠져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벌빙 노역을 피하려고 도망을 가는 사내들도 많았는데 이 때문에 ‘빙고청상(氷庫靑孀)’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단다. 겨울철이 되면 벌빙 부역을 피하고자 남편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아내들은 생과부가 되었는데, 겨울바람에 생과부들의 한숨소리가 섞여 마을 전체가 스산한 분위기였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석빙고의 과학적 구조에 감탄하던 몽골인 담딘후 씨와 체첵 씨가 ‘빙고청상’ 부분에서 혀를 끌끌 찬다. 

진흥왕척경비
(해설경남)20150415창녕편_진흥왕척경비
진흥왕척경비 앞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통역을 통해 듣고 있는 몽골인 담딘후·체첵 부부.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 만옥정 공원 안에 있는 진흥왕척경비는 삼국시대인 진흥왕 22년, 서기 561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일제 강점기 때 화왕산으로 소풍갔던 학생들에게 발견되었는데, 1914년 창녕초등학교 교장이었던 하시모토가 탁본을 하여 일본에 보냈고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 비석의 정체가 밝혀졌다고 한다. 비석에는 다른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觀境)’이란 표현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했기 때문에 척경비라고 일컬어진다. 이 진흥왕척경비 비문 중에는 중국식 한자가 아닌 신라만의 한자도 있다고 한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정각은 사각의 기와지붕인데 처마 아래가 그물로 둘러쳐져 있다. 새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방법이란다. 김진숙 해설사는 이 비석이 국보 33호로 소중한 문화재임에도 이렇게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공간에 있어 참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창녕박물관 야외전시장
(해설경남)20150415창녕편_창녕박물관_관룡사석장승모조품
창녕박물관 뜰에 세워진 관룡사 석장승 2기 앞에서 김진숙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창녕박물관으로 갔다. 마침 월요일이어서 박물관 문은 닫혔다. 박물관 관람은 예정에 없었기에 아쉬운 것은 없었으나 한편으론 ‘이왕 간 김에’ 하는 기분 때문인지 다음엔 어딜 가도 월요일은 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초곡리 유적인 고려시대 방형구획무덤과 사창리의 청동기 시대 무덤, 영산 서리에서 발굴된 15호 석실무덤 등이 전시되어 있다. 무덤 중에는 규모가 작은 것도 있었다. 아이의 무덤이었을까?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묻는 게 아니고 풍장을 하여 근육과 살이 썩어 없어진 다음 뼈만 묻기 때문에 작게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부장품이 없으면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가 없어요.”


 돌무덤들을 둘러보고 박물관 뒤편에 있는 송현동고분군으로 향하는 길에 나란히 길목을 지키고 있는 석장승 두 개를 만났다. 관룡사 석장승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거란다. 보통 사찰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이 구역 안에서의 사냥, 어로행위 등을 금지한다는 경고의 의미로 세우기도 하는데 사찰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액을 쫓고 복을 받게 하는 민속신앙으로서의 역할이 크다 하겠다. 관룡사 석장승은 여장승과 남장승, 두 개로 되어 있는데 사찰의 수문신 역할을 한다. 마치 안경을 쓴 듯 콧잔등에 굵은 주름이 있는 것이 남장승이다. 석장승의 외관을 보면, 왕방울 눈과 주먹코, 상투머리, 각각 아래 위로 뾰족하게 나온 송곳니가 독특하다. 

송현동고분군
(해설경남)20150415창녕편_송현고분군
창녕박물관 뒤편 송현동고분군. 이 고분군 중 가장 큰 분묘에서 16세 소녀 송현이의 뼈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1911년 일본 학자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여러 차례 발굴조사 되었으나 21호와 31호분 외에는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발굴된 부장품은 마차 20대, 화차 2량분이라 하니 공식 기록에 없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가히 그 수량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발굴된 문화재라야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문관에 소장된 일부를 제외하곤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송현동고분군 중에서 가장 큰 15호분은 특별한 사연이 스며있다. 이 고분은 1500여 년 전의 무덤으로 주 피장자와 네 명의 순장된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 치아가 다 발달하지 못한 16세 소녀의 뼈가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은 이 소녀의 이름을 송현이라고 붙이고 당시 살았을 적 모습으로 복원했다. 역시 어린 나이에 순장 당해야 했던 안타까운 이야기다. 죽은 주인을 위해 살아있는 하인과 시종들이 죽임을 당해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당시의 시대상에 담딘후 씨도 체첵 씨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창녕우포늪
(해설경남)20150415창녕편_나무와딱따구리
딱딱구리가 파놓은 작품(?). 그러나 나무의 영양분이 전달되는 바깥쪽을 남겨두어 나무의 성장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왜 이곳을 우포라고 했을까? 해설사는 이곳의 지형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포늪 북쪽 우항산(소목산)의 모습이 소가 물을 마시는 모양이라서 붙여졌다고 한다. 우포란 말은 우리말로 ‘소벌’이다. 여기엔 4개의 늪이 있는데, 우포를 비롯해 목포늪, 사지포늪, 쪽지벌이 그것이다. 가장 작은 쪽지벌만 순우리말로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우포늪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내륙습지다. 이방면과 대합면에서 흘러온 물이 하천 폭이 좁아지면서 형성됐다. 1960년 이후 새마을운동을 벌이면서 농지를 확보하려고 제방을 쌓아 물을 막아 늪의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제방 건너 농지가 예전에 모두 늪이었다는 얘기다. 우포늪의 역사는 얼마나 될까? 1억 4000만 년이라고 한다. 그때의 자연 생태계가 그대로 보전되어 왔기 때문이 우포늪을 자연의 보물이라고 칭하는 모양이다. “어떤 식물이 자랄지 알 수 없어요. 아직 얘네들이 새싹을 안 틔웠거든요. 조금 더 따뜻해져야 틔워요. 그러면 또 올해는 어느 수생식물이 이 늪을 쫙 덮을지 결정이 되는 거예요. 매년 같은 아이들이 같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 자리싸움이 굉장히 심해요.” 김진숙 해설사의 얘기다. 매번 강자를 달리하며 변해오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것 또한 우포늪의 매력이라고 한다.


 김진숙 해설사의 시각이 나뭇가지에 머물렀다. 이 초봄에 무슨 열매인가 봤더니 벌레집이라고 한다. 또 속이 비어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그런데 파릇한 잎사귀들이 꽤 많이 돋아나 있다. “움푹 들어간 이 나무 기둥은 딱따구리가 쪼아 먹은 흔적이에요. 그런데 바깥쪽은 손상이 그렇게 많이 않아서 나무가 영양분을 끌어올려 잎을 피울 수 있는 거예요.” 하물며 딱따구리도 자기 삶을 위해 나무를 쪼기는 하지만 그 생명을 끊지는 않는다. 그렇게 우포늪의 생물들은 경쟁하기도 하고 배려하기도 하면서 1억 4000만 년을 버티어 왔던 것이 아닐까. 전문가 설명을 들으며 한국의 문화와 자연을 접한 담딘후 씨와 체첵 씨, 이 몽골인 부부에게 창녕이 멋진 인상으로 남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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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학원에서 배운 춤을 춰보라고 했다. 아이는 머뭇거림 없이 바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춤을 춘다.


바깥에선 온몸이 그저 부끄러움 덩어리인 아이가 집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학원에선 또 그렇게 부끄러움이 없는 모양이다. 춤에 자신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뭐든 자신있는 것을 하게 되면 부끄러움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게 당연지사겠지.


춤을 추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기도 하려니와 새로 산 로데 샷건 마이크를 테스트했다. 실내 테스트는 어느 정도 만족스럽다. 아래쪽에서 음악을 켰는데 원음 가까이 마이크에 수음되는 것 같다.




귀농귀촌도시농업박람회 때 열린 전원주택 세미나를 동영상 촬영했다. 주변 잡음들이 많은 데다 스피커의 성능이 좋지 않아 음질이 깨끗하게 나오지 않았다.

뭐 원음 불변의 법칙? 영상작업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다음.

야외 촬영 테스트. 창녕 김진숙 문화관광해설사의 도움을 얻어 창녕 석빙고 해설 장면을 동영상 촬영한 것이다. 이 마이크는 야외에서 더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바람소리가 수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데드캣을 하나 장만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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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희망의 역사 엿보다

[해설이 있는 경남](1)진주편 : 용호정원~청동기유적박물관~진주성


지난 3월 28일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호정원을 비롯해 청동기문화박물관, 진주농민항쟁탑, 이충무공진배미유적지, 그리고 진주성으로 돌아오는 ‘진주투어’를 다녀왔다.


이번 기획은 경남 도내 여러 관광지를 다니면서도 정작 그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역사적 의미가 담긴 곳인지 몰랐던 여행 관습에서 벗어나 해당 지역의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보고 배우는 가족여행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하게 되었다.


경남 도내 각 지역의 문화관광해설사는 경남도가 인력을 양성해 파견하는 형태로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문화관광해설사들은 해당 시군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경남도에서도 교육과 모집 등 일정 부분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진주로 떠나기 닷새 전 진주시관광안내소(055-749-2485)로 전화를 했다. 이번 토요일(28) 진주 관광을 하려는데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싶다고. 그랬더니 마침 전화를 받으신 분이 당일 당번이어서 여행 안내를 해주겠단다.


그렇게 만난 문화관광해설사가 조서윤 씨다. 먼저 핸드폰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여행일정을 그와 논의했다. 역사 유적지 중심으로 관광하고 싶다고 하자 그가 먼저 청동기박물관과 농민항쟁기념탑, 진배미유적지, 그리고 진주성을 제의했다. 하지만, 너무 유적지 중심이라 진주에는 연못이 많은데 가볼 만한 연못을 추가하면 어떻겠냐 하여 용호정원이 들어간 일정이 도출됐다.


오전 10. 진주성 공북문 입구에서 전화와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았던 조서윤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났다.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자 그가 바로 알아차린 듯 걸어와 반긴다.


“바로 용호정원으로 가시죠!”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그를 차에 태우고 첫 여행지인 용호정원으로 출발했다. 진주성에서 산청으로 가는 방향으로 20분 정도 가니 잘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용호정원이 있었다.


조서윤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용호정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초봄이라 그런지 용호정원엔 마른 연꽃 가지들과 아직 잎을 피우지 못한 나뭇가지들로 말미암아 따스한 햇볕이 드는 겨울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연꽃이 피는 시기가 아닌 데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곳이라 좀 황량해요.”


조서윤 해설사는 논둑길을 걸으며 운을 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을 옛사람들을 기린 불망비들이 나란히 서 있었고 오른쪽으론 가운데 팔각정이 있는 연못이 보였다. 연못 가운데 서 있는 팔각정이라, 연꽃이 화사하게 피는 계절이라면 제법 운치가 있겠다 싶다.


“이 용호정원은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자결한 충정공 박심문이란 분의 후손이 조성한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박심문이란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땅과 돈을 주어 만들어졌어요. , 연못 가운데 있는 팔각정으로 드나드는 배가 있긴 한데 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쪽 뒤편에 커피숍이 있는데 건물이 꼭 관공서 같아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요.”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면서 연꽃이 만발할 시기에 다시 와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진주엔 이런 연못이 여러 군데 있으니 ‘연꽃투어’를 계획해보는 것도 좋겠다.


대평면에 있는 청동기문화박물관 앞 안내판을 보면서 설명하고 있는 조서윤 해설사.


우린 다음 코스로 대평면에 있는 ‘청동기문화박물관’으로 향했다. 청동기문화박물관은 1975년부터 1980년 사이 남강 다목적댐 개량사업 추진 과정에서 수몰예정지에 있던 매장문화재를 발굴해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꾸며놓은 야외전시장과 청동시 시대를 거치면서 역사시대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된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학예사가 여러 관광객에게 해설을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함께 갔던 해설사가 이곳의 해설은 학예사에게 직접 듣는 게 좋겠다고 한다. 천성주 학예사. 그를 따라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다는 움막으로 향했다.


천성주 청동기문화박물관 학예사가 고상창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저기 보이는 큰 움막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생활했던 곳인데 안에서 화덕을 피우고 했어요, 대신 이 앞에 보이는 작은 움막은 단순한 주거 용도입니다. 불을 피우거나 할 때엔 밖에 나와서 했지요.”


천 학예사는 움막 안으로 들어가 소개한 다음 밖으로 나와 고상창고에 대해 설명했다. 다른 말로 ‘다락창고’라고도 한다. 이 건물은 청동기 시대 마을의 식량을 저장한 곳으로 땅에서 발생하는 습기로부터 곡식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옛사람들 지혜의 결정체라는 설명이다.


이어서 청동기 시대 무덤을 복원해놓은 곳으로 이동했다. 청동기 시대 유행했던 석관묘의 형태를 관찰하고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대평면 유적지 발굴 사진들을 보며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도 들었다.


야외전시장 설명을 모두 듣고 나서 우리는 다시 박물관 안으로 돌아왔다. 학예사는 우리 가족이 안에서 설명을 듣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해 계속 안내를 해주었다.


“밖에 있는 유물들은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가짜들이고요, 여기에 있는 것은 대부분 진짜입니다.” 그렇게 천 학예사는 운을 떼고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을 이어갔다.


청동기 시대 생활상을 디오라마로 구성해놓은 전시관을 보며 학예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들.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른 가족도 합류하게 되었다. 학예사는 퀴즈도 내면서 안내를 했다. 학예사의 설명이 끝나고 함께 간 조서윤 문화관광해설사가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우리 일행은 박물관을 나와 수곡면 창촌리 농민항쟁기념탑을 찾았다. 이 탑은 2012624일 건립됐다. 이 탑은 1862년 조선 철종 13214일 진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봉건 농민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수곡면 창촌리에 있는 농민항쟁기념탑으로 향하고 있는 일행.


“탑 주위에는 당시 희생당한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사노귀대, 사노명돌이란 이름들이 보이는데 사노란 노비 신분으로 성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명패를 새긴 거예요.”


다음 코스. 수곡면 원계리에 있는 이충무공 진배미 유지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6호다. 진배미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사훈련을 하였다는 마을 앞 ‘진터’를 두고 이르는 말인데 이곳이 논배미여서 ‘진배미’란 이름이 붙여졌다.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활용되었던 곳이어서 그런지 비닐하우스만 없었다면 정말 군사들이 마음껏 훈련했을 광활한 장소다.


조서윤 해설사가 이충무공의 군사훈련지였던 진배미유적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군사훈련 장소였던 진배미 들판.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받았던 손경례 고택으로 들어가는 일행.


이곳 마을에 ‘손경례의 집’이 있다. ‘손경례의 집’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중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대패했다는 소식과 함께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금의 교서를 받았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7727일 이곳에 머물렀는데 83일 교서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 손경례는 이런 이순신을 깍듯이 대했다고 한다.


마을 앞길은 산청 남사예담촌까지 이어지는 백의종군로다. 손경례가()를 나온 일행은 진주성으로 향했다. 먼저 공북문으로 들어섰다.


“진주성의 정문은 어느 문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촉석루 앞에 있는 촉석문이 정문이라고 생각해요. 잘못 알고 있는 거죠. 공북문이 정문이에요.”


‘공북’이란 말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이다. 공북문은 조선 말 훼손되었는데, 200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진주성은 그동안 열 차례도 넘게 온 곳이어서 별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아 무심코 걷고 있는데 조서윤 해설사가 딸의 손을 잡고 김시민 장군 동상 앞에 선다.


김시민 장군 동상 앞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해설사와 경청하고 있는 가족.


“지원아, 이분이 누군지 알겠어요?”

“이순신 장군요.”


아이는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줄곧 들어와서 그런지 무심결에 오답을 내고 말았다. 한자를 알고 있었다면 그 동상 아래에 쓰인 글자를 보고 눈치껏 김시민 장군임을 알아차렸겠지만 좀 당황한 눈치다.


해설사는 김시민 장군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 아이 혼자 듣게 하는 게 어색해서 곁으로 가서 함께 설명을 들었다. 아마 아이에게 진주성 하면 ‘김시민’이 등식으로 개념이 잡혔지 않았을까 싶다.


진주성 내 우물가에서 조서윤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진주성 우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해설사는 진주성 안에 우물이 여러 곳에 걸쳐 있었다고 했다. 수맥을 따라 곳곳에 우물이 있어 성내 군사들과 백성들이 유용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일행은 촉석루를 구경하고 논개 영정이 모셔져 있는 의기사로 들어갔다. 논개야 널리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해설사는 아이에게 논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우리에게 의기사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논개 영정은 누가 새로 그렸는지 등에 대해 설명했다.


논개 영정이 모셔져 있는 의기사 앞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가족.


해설사의 설명에 따라 의암 바위를 내려다 보고 있는 가족.


“이제 논개가 적장을 안고 물속으로 뛰어든 의암 바위로 가시죠. 오늘은 날이 좋아 개방을 하지만 비가 오거나 할 땐 위험해서 출입을 금하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우리는 바위 있는 곳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예전엔 바위 위로 건너가는 것을 통제하지 않았지만 이젠 막는단다. 위험하기도 하고. 우린 출입구 앞에서 의암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서 하루 여행 일정을 마쳤다.


단체 관광이 아니라 가족 관광으로 일정을 짜면서 진주시의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쩌면 예사로 스쳐 지나갔을 유적지들, 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들으면서 다녀보니 그만큼 많이 알게 되고 인상도 깊게 각인되는 것 같다.


진주시 대평면 청동기문화박물관에서 천성주 학예사가 고대 무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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