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빙고에 얽힌 ‘빙고청상’이란 말 혹시 아세요?
13일, 보슬비가 부드럽게 내리던 오전 일행은 김진숙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를 석빙고 앞에서 만났다.
관광은 4시간 정도의 일정으로 잡았고 해설사와 사전 조율을 통해 창녕석빙고~진흥왕척경비~송현동고분군~우포늪을 둘러보기로 했었다. 이렇게 기본 여정을 정해놓고 동선에 따라 추가할 곳이 있으면 해설사가 추가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창녕석빙고에 대해 구조와 기능, 그리고 이에 얽힌 에피소드를 설명하고 있는 김진숙 해설사.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면 한 번쯤 실물을 보았을 석빙고는 어린 시절 과학적 호기심 이상의 안타까운 역사가 스며있는 문화재다.
석빙고 입구 한쪽에는 큰 돌로 막아놓았는데 겨울 찬바람이 부딪혀 안쪽으로 냉기가 흘러들어가도록 장치를 한 것이고 안쪽에선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흘려보내기 위해 바닥을 경사지게 했으며 따뜻한 공기가 빠져나가도록 천장에 통풍구를 만든 점 등은 그 시절 어찌 이런 과학적 사고할 다 할 수 있었을까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차태현 주연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봤듯이 석빙고는 권력의 상징이요, 사치의 극치였다. 권력이 있거나 부유한 양반들이 한여름에 얼음을 끼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석빙고 덕분이었는데, 한겨울에 강의 얼음을 채취해 이곳에 보관하면 여름 때까지 그렇게 많이 녹지 않고 얼음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 7개 석빙고 중에서 창녕에 2기가 있다. 창녕읍 송현리에 있는 석빙고.
이러한 유용한 냉동시설이 서민 백성에게도 혜택이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음을 채취하는 것을 벌빙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주 고된 노동이었다. 엄동설한에 부역 나간 사내들은 발에 동상이 걸리기 일쑤였고 벌빙 중 잘못하여 물에 빠져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벌빙 노역을 피하려고 도망을 가는 사내들도 많았는데 이 때문에 ‘빙고청상(氷庫靑孀)’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단다. 겨울철이 되면 벌빙 부역을 피하고자 남편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아내들은 생과부가 되었는데, 겨울바람에 생과부들의 한숨소리가 섞여 마을 전체가 스산한 분위기였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석빙고의 과학적 구조에 감탄하던 몽골인 담딘후 씨와 체첵 씨가 ‘빙고청상’ 부분에서 혀를 끌끌 찬다.
진흥왕척경비 앞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통역을 통해 듣고 있는 몽골인 담딘후·체첵 부부.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 만옥정 공원 안에 있는 진흥왕척경비는 삼국시대인 진흥왕 22년, 서기 561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일제 강점기 때 화왕산으로 소풍갔던 학생들에게 발견되었는데, 1914년 창녕초등학교 교장이었던 하시모토가 탁본을 하여 일본에 보냈고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 비석의 정체가 밝혀졌다고 한다.
비석에는 다른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觀境)’이란 표현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했기 때문에 척경비라고 일컬어진다. 이 진흥왕척경비 비문 중에는 중국식 한자가 아닌 신라만의 한자도 있다고 한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정각은 사각의 기와지붕인데 처마 아래가 그물로 둘러쳐져 있다. 새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방법이란다. 김진숙 해설사는 이 비석이 국보 33호로 소중한 문화재임에도 이렇게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공간에 있어 참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창녕박물관 뜰에 세워진 관룡사 석장승 2기 앞에서 김진숙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창녕박물관으로 갔다. 마침 월요일이어서 박물관 문은 닫혔다. 박물관 관람은 예정에 없었기에 아쉬운 것은 없었으나 한편으론 ‘이왕 간 김에’ 하는 기분 때문인지 다음엔 어딜 가도 월요일은 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초곡리 유적인 고려시대 방형구획무덤과 사창리의 청동기 시대 무덤, 영산 서리에서 발굴된 15호 석실무덤 등이 전시되어 있다. 무덤 중에는 규모가 작은 것도 있었다. 아이의 무덤이었을까?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묻는 게 아니고 풍장을 하여 근육과 살이 썩어 없어진 다음 뼈만 묻기 때문에 작게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부장품이 없으면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가 없어요.”
돌무덤들을 둘러보고 박물관 뒤편에 있는 송현동고분군으로 향하는 길에 나란히 길목을 지키고 있는 석장승 두 개를 만났다. 관룡사 석장승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거란다. 보통 사찰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이 구역 안에서의 사냥, 어로행위 등을 금지한다는 경고의 의미로 세우기도 하는데 사찰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액을 쫓고 복을 받게 하는 민속신앙으로서의 역할이 크다 하겠다. 관룡사 석장승은 여장승과 남장승, 두 개로 되어 있는데 사찰의 수문신 역할을 한다. 마치 안경을 쓴 듯 콧잔등에 굵은 주름이 있는 것이 남장승이다. 석장승의 외관을 보면, 왕방울 눈과 주먹코, 상투머리, 각각 아래 위로 뾰족하게 나온 송곳니가 독특하다.
창녕박물관 뒤편 송현동고분군. 이 고분군 중 가장 큰 분묘에서 16세 소녀 송현이의 뼈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1911년 일본 학자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여러 차례 발굴조사 되었으나 21호와 31호분 외에는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발굴된 부장품은 마차 20대, 화차 2량분이라 하니 공식 기록에 없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가히 그 수량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발굴된 문화재라야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문관에 소장된 일부를 제외하곤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송현동고분군 중에서 가장 큰 15호분은 특별한 사연이 스며있다. 이 고분은 1500여 년 전의 무덤으로 주 피장자와 네 명의 순장된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 치아가 다 발달하지 못한 16세 소녀의 뼈가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은 이 소녀의 이름을 송현이라고 붙이고 당시 살았을 적 모습으로 복원했다. 역시 어린 나이에 순장 당해야 했던 안타까운 이야기다. 죽은 주인을 위해 살아있는 하인과 시종들이 죽임을 당해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당시의 시대상에 담딘후 씨도 체첵 씨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딱딱구리가 파놓은 작품(?). 그러나 나무의 영양분이 전달되는 바깥쪽을 남겨두어 나무의 성장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왜 이곳을 우포라고 했을까? 해설사는 이곳의 지형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포늪 북쪽 우항산(소목산)의 모습이 소가 물을 마시는 모양이라서 붙여졌다고 한다. 우포란 말은 우리말로 ‘소벌’이다. 여기엔 4개의 늪이 있는데, 우포를 비롯해 목포늪, 사지포늪, 쪽지벌이 그것이다. 가장 작은 쪽지벌만 순우리말로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우포늪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내륙습지다. 이방면과 대합면에서 흘러온 물이 하천 폭이 좁아지면서 형성됐다.
1960년 이후 새마을운동을 벌이면서 농지를 확보하려고 제방을 쌓아 물을 막아 늪의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제방 건너 농지가 예전에 모두 늪이었다는 얘기다. 우포늪의 역사는 얼마나 될까? 1억 4000만 년이라고 한다. 그때의 자연 생태계가 그대로 보전되어 왔기 때문이 우포늪을 자연의 보물이라고 칭하는 모양이다.
“어떤 식물이 자랄지 알 수 없어요. 아직 얘네들이 새싹을 안 틔웠거든요. 조금 더 따뜻해져야 틔워요. 그러면 또 올해는 어느 수생식물이 이 늪을 쫙 덮을지 결정이 되는 거예요. 매년 같은 아이들이 같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 자리싸움이 굉장히 심해요.”
김진숙 해설사의 얘기다. 매번 강자를 달리하며 변해오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것 또한 우포늪의 매력이라고 한다.
김진숙 해설사의 시각이 나뭇가지에 머물렀다. 이 초봄에 무슨 열매인가 봤더니 벌레집이라고 한다. 또 속이 비어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그런데 파릇한 잎사귀들이 꽤 많이 돋아나 있다. “움푹 들어간 이 나무 기둥은 딱따구리가 쪼아 먹은 흔적이에요. 그런데 바깥쪽은 손상이 그렇게 많이 않아서 나무가 영양분을 끌어올려 잎을 피울 수 있는 거예요.” 하물며 딱따구리도 자기 삶을 위해 나무를 쪼기는 하지만 그 생명을 끊지는 않는다. 그렇게 우포늪의 생물들은 경쟁하기도 하고 배려하기도 하면서 1억 4000만 년을 버티어 왔던 것이 아닐까. 전문가 설명을 들으며 한국의 문화와 자연을 접한 담딘후 씨와 체첵 씨, 이 몽골인 부부에게 창녕이 멋진 인상으로 남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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