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5월, 연록의 봄. 화창한 어린이날이었다. 가야진사의 용신제가 이날 열리는 바람에 아이들과 함께 바깥 나들이를 하지 못한 게 미안할 따름이다. 가야진사 용신제에라도 함께 오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아침에 부랴부랴 회사로 가서 차를 가지고 과속 카메라에 걸리지 않을 만큼 속도를 내어 행사장으로 달렸건만, 10시에 시작하는 행사에 10분 늦게 도착했다.
여느 행사라면, 나처럼 지각하는 사람을 배려한 것일지 모르나, 정각 땡하고도 10분, 20분을 지나서야 시작하기도 할 텐데 도착하니 꽹과리, 북, 장구 가락에 태평소가 소리그네를 타고 있었다. 식전행사였다. 에이... 조금 천천히 와도 되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속 좁은 자신을 발견하고는 카메라 가방을 챙겨 행사장에 들어섰다.
가야진사는 국가 제례였다. 지금도 양산시장이 초헌관이 되어 지내는 제례다. 용왕에게 뱃길 안전하게 해달라는 옛 제례에서 시와 시민과 국가가 평안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의미로 바뀌긴 했지만 그 형태는 보존되어 이어져오고 있다.
물론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시대와 똑같으랴마는 재미없는 제례에 사람들이 제법 모이는 데엔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은 그냥 제례행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제례 행사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주변 민속놀이 공간이 많이 마련되어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였고, 그리고 용신제가 끝나면 공짜 점심, 즉 무상급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용왕님께 복을 빌고 아이들과 실컷 놀기도 하고 밥도 얻으먹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으리. 게다가 가야진사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너른 품은 마음을 잔잔하게 해준다. 아무리 등 뒤로 북, 장구, 꽹과리, 징이 께춤을 추고 법석을 떨어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저 마음은 평화롭기만 하다.
고성군은 공룡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몇 개 없다는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무더기로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자국이 발견된 상족암 인근은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이곳에 공룡박물관이 생기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되었다.
트레킹 코스인 공룡길을
따라 상족암으로 가도 되고 이왕이면 공룡박물관에
들러 각종 공룡
의 뼈와 화석들을 구경하고,
영화 상영시간에 맞춰지는 운이 있다면 3D
공룡영화도 볼 수 있으니 박물관을 들렀다가
상족암으로 내려가도 되겠다.
공룡박물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전경.
병풍바위
옆으로 일명 브라자섬이라고도 불리는 안장도가 보인다.
상족암은 퇴적암인데
바닷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절경을 빚은 자연의 멋진
조각품이다. 해식동굴이
생기면서 그 모양이 상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상족암(床足岩)이라
이름 지어졌다. 이곳
상족암 앞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곳에 공룡의 발자국이
있어 그 자국을 따라 걸어보는 재미도 있다.
이곳에서 바다 건너편으로
보면 병풍처럼 막아선 커다란 바위절벽이 있다.
병풍 같다 하여 이름이 병풍바위다.
다른 말로 ‘입암’이라고도 하고 ‘선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병풍바위
아래쪽에 동굴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신랑 동굴이고
입구의 크기가 조금 작은 다른 하나는 신부 동굴이라고
부른다.
상족암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사진의
왼쪽 위엔 전망대가 있고 그 아래에 신랑굴이,
오른쪽 끝에 신부굴이 보인다.
신부굴.
신랑 동굴은 입구가
둥근 편이고 신부 동굴은 세로로 좁다.
그렇지만, 신랑
동굴은 깊지 않지만 신부 동굴은 그 깊이가 4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정부
관광지식정보시스템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연기를 피우면 4㎞
떨어진 곳에서 연기가 솟았다.”라고
한다.
이 해식동굴의 이름이
각각 신랑 동굴, 신부
동굴이고 보면 필시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서려 있을
터. 관광지식정보시스템에
수록된 이야기를 여기에 다시 풀어본다.
“옛날에 이 어촌에는
청룡이라는 어부가 살고 있었는데,
마음씨가 착하고 마음이 정직하여 거짓말을 안
하는 우직하고 소박한 사람이긴 했으나 조금 어리석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청룡을 바보라고 부르며
놀려대었으나 그는 그저 좋아하기만 하였다.
청룡이 바보스러웠지만
그의 아내는 아주 똑똑하고 영리하며 얼굴 또한
절세미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룡에게 여복이 있다고 부러워했다.
청룡 또한 아내를 위하는 마음은 남달리 깊었으며
아내 또한 남편을 극진히 위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두 내외는 금실이 좋았고 정이 깊었다.
그래서 비록 가난한
어부에 지나지 못하는 살임이었지만 초라한 초옥 안에는
단란한 웃음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어느 해 가을이었다.
청룡은 여느 때와 같이 나룻배를 저으며 바다로
나갔다. 넓은 바다로
향하여 고기를 많이 잡고서 만선의 꿈을 안고 배를
저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물 위에 나뭇조각을
부여잡고 어떤 사람이 실신해 있는 것이 아닌가!
청룡은 깜짝 놀라 노를
저어 그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죽은 사람의 시신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건져보았다. 몸에는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고 그 사람의 형색을 보아 어부는
아닌 듯했다. 청룡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위해 잡은 고기를 그냥 두고
그 사람을 배에 싣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청룡은 아내와
함께 그를 따뜻한 방에 누이고 팔다리를 열심히 주물러
주며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자 죽은 듯 꼼짝 못하던 그가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부인을 보며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주시니 그 은혜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치하하는 것이었다.
청룡부부는 ‘은혜랄게
있겠습니까?’ 하면서
어찌하여 바다에 떠 있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자기는 용왕의 아들로 태어나 바깥세상을 구경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왔다가 태풍을 만나 일행과 헤어져
이런 신세가 되었다며 앞으로 큰 재난이 닥치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가르쳐주었다.
몇 년이 지나자 해안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여 마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피난을 하였다.
그러나 청룡부부는 용왕 아들의 도움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그가 가르쳐 준 용굴로 피난하여 무사히
몸을 피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병풍바위
전망에 입구에 설치된 이정표.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신랑굴.
원
안쪽, 반대편에 신부굴이
있다.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아마도 이 해식동굴들이 신랑 굴,
신부 굴로 이름 지어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래서 몇몇 자료에는 이 해식동굴이 용굴이라고
기록되기도 하다.
경남은행에서 발행한
‘우리 고장 섬, 바다’란
책자에는 ‘자연이 펼쳐 놓은 열두 폭 병풍,
선바위’란 제목으로 관련 정보를 안내하면서
동굴에 대해서는 ‘자세히 보면 조금 큰 것과 작은 것
두 개가 있다 이름하여 쌍룡굴,
각각 수용굴과 암룡굴로 불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얽힌 전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앞서
소개한 내용과 비슷하며 다만 “두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을 덧붙여 놓았다.
이러한 전설이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이
신랑
신부 굴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고 한다.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병풍바위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상족암에서
공룡길을 따라 촛대바위를 지나고 20여
분 걸으면 입암마을을 만난다.
입암마을 방파제 쪽으로 가면 다시 나무데크 길이
조성되어 있다. 멀리
병풍바위 위에 불쑥 튀어나온 전망대가 보인다.
주상절리
경관.
이 전망대는 2011년
맥전포항으로 이어지는 데크를 설치할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다. 낮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전망대 입구에 상족암 1.6㎞,
맥전포항 0.8㎞라는
양쪽 거리를 나타낸 이정표를 만난다.
‘맥전포’란 이름은 예전 이곳에 보리밭이 많아서
붙여졌다.
전망대는 절벽 밖으로
상당히 튀어나왔기 때문에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기분을 피할 수 없다. 건장한
사내가 장난친다며 폴짝 뛰는 시늉만 내어도 겁이 나서
후딱 되돌아 나가야 하는 그런 분위기의 절벽난간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다보면 신랑 굴이 보인다.
각도가 충분하지 않아 동굴 내부를 관찰하기는
쉽지 않다. 신부 굴은
아예 볼 수 없다. 동굴이
주상절리 돌기둥 절벽 반대쪽으로 났기 때문에 굴의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신부 굴은 상족암에서 망원렌즈로
당겨 봤던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전망대에서 바로
아래쪽으로 내려다 보면 바위의 모양새가 묘하다.
바닷물이 찰랑거릴 때마다 하트모양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신랑굴
신부굴 앞에 있다는 것이 묘한 어울림으로 비친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13일 몽골 관광객인 담딘후 씨와 체첵 씨, 그리고 통역을 맡은 노유정 씨와 함께 창녕을 찾았다. 이날 오전 창녕읍에 있는 석빙고 주차장에서 일행을 안내하기로 한 김진숙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났다.
13일, 보슬비가 부드럽게 내리던 오전 일행은 김진숙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를 석빙고 앞에서 만났다.
관광은 4시간 정도의 일정으로 잡았고 해설사와 사전 조율을 통해 창녕석빙고~진흥왕척경비~송현동고분군~우포늪을 둘러보기로 했었다. 이렇게 기본 여정을 정해놓고 동선에 따라 추가할 곳이 있으면 해설사가 추가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창녕석빙고
창녕석빙고에 대해 구조와 기능, 그리고 이에 얽힌 에피소드를 설명하고 있는 김진숙 해설사.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면 한 번쯤 실물을 보았을 석빙고는 어린 시절 과학적 호기심 이상의 안타까운 역사가 스며있는 문화재다.
석빙고 입구 한쪽에는 큰 돌로 막아놓았는데 겨울 찬바람이 부딪혀 안쪽으로 냉기가 흘러들어가도록 장치를 한 것이고 안쪽에선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흘려보내기 위해 바닥을 경사지게 했으며 따뜻한 공기가 빠져나가도록 천장에 통풍구를 만든 점 등은 그 시절 어찌 이런 과학적 사고할 다 할 수 있었을까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차태현 주연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봤듯이 석빙고는 권력의 상징이요, 사치의 극치였다. 권력이 있거나 부유한 양반들이 한여름에 얼음을 끼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석빙고 덕분이었는데, 한겨울에 강의 얼음을 채취해 이곳에 보관하면 여름 때까지 그렇게 많이 녹지 않고 얼음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 7개 석빙고 중에서 창녕에 2기가 있다. 창녕읍 송현리에 있는 석빙고.
이러한 유용한 냉동시설이 서민 백성에게도 혜택이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음을 채취하는 것을 벌빙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주 고된 노동이었다. 엄동설한에 부역 나간 사내들은 발에 동상이 걸리기 일쑤였고 벌빙 중 잘못하여 물에 빠져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벌빙 노역을 피하려고 도망을 가는 사내들도 많았는데 이 때문에 ‘빙고청상(氷庫靑孀)’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단다. 겨울철이 되면 벌빙 부역을 피하고자 남편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아내들은 생과부가 되었는데, 겨울바람에 생과부들의 한숨소리가 섞여 마을 전체가 스산한 분위기였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석빙고의 과학적 구조에 감탄하던 몽골인 담딘후 씨와 체첵 씨가 ‘빙고청상’ 부분에서 혀를 끌끌 찬다.
진흥왕척경비
진흥왕척경비 앞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통역을 통해 듣고 있는 몽골인 담딘후·체첵 부부.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 만옥정 공원 안에 있는 진흥왕척경비는 삼국시대인 진흥왕 22년, 서기 561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일제 강점기 때 화왕산으로 소풍갔던 학생들에게 발견되었는데, 1914년 창녕초등학교 교장이었던 하시모토가 탁본을 하여 일본에 보냈고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 비석의 정체가 밝혀졌다고 한다.
비석에는 다른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觀境)’이란 표현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했기 때문에 척경비라고 일컬어진다. 이 진흥왕척경비 비문 중에는 중국식 한자가 아닌 신라만의 한자도 있다고 한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정각은 사각의 기와지붕인데 처마 아래가 그물로 둘러쳐져 있다. 새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방법이란다. 김진숙 해설사는 이 비석이 국보 33호로 소중한 문화재임에도 이렇게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공간에 있어 참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창녕박물관 야외전시장
창녕박물관 뜰에 세워진 관룡사 석장승 2기 앞에서 김진숙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창녕박물관으로 갔다. 마침 월요일이어서 박물관 문은 닫혔다. 박물관 관람은 예정에 없었기에 아쉬운 것은 없었으나 한편으론 ‘이왕 간 김에’ 하는 기분 때문인지 다음엔 어딜 가도 월요일은 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초곡리 유적인 고려시대 방형구획무덤과 사창리의 청동기 시대 무덤, 영산 서리에서 발굴된 15호 석실무덤 등이 전시되어 있다. 무덤 중에는 규모가 작은 것도 있었다. 아이의 무덤이었을까?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묻는 게 아니고 풍장을 하여 근육과 살이 썩어 없어진 다음 뼈만 묻기 때문에 작게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부장품이 없으면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가 없어요.”
돌무덤들을 둘러보고 박물관 뒤편에 있는 송현동고분군으로 향하는 길에 나란히 길목을 지키고 있는 석장승 두 개를 만났다.
관룡사 석장승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거란다. 보통 사찰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이 구역 안에서의 사냥, 어로행위 등을 금지한다는 경고의 의미로 세우기도 하는데 사찰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액을 쫓고 복을 받게 하는 민속신앙으로서의 역할이 크다 하겠다.
관룡사 석장승은 여장승과 남장승, 두 개로 되어 있는데 사찰의 수문신 역할을 한다. 마치 안경을 쓴 듯 콧잔등에 굵은 주름이 있는 것이 남장승이다. 석장승의 외관을 보면, 왕방울 눈과 주먹코, 상투머리, 각각 아래 위로 뾰족하게 나온 송곳니가 독특하다.
송현동고분군
창녕박물관 뒤편 송현동고분군. 이 고분군 중 가장 큰 분묘에서 16세 소녀 송현이의 뼈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1911년 일본 학자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여러 차례 발굴조사 되었으나 21호와 31호분 외에는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발굴된 부장품은 마차 20대, 화차 2량분이라 하니 공식 기록에 없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가히 그 수량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발굴된 문화재라야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문관에 소장된 일부를 제외하곤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송현동고분군 중에서 가장 큰 15호분은 특별한 사연이 스며있다. 이 고분은 1500여 년 전의 무덤으로 주 피장자와 네 명의 순장된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 치아가 다 발달하지 못한 16세 소녀의 뼈가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은 이 소녀의 이름을 송현이라고 붙이고 당시 살았을 적 모습으로 복원했다. 역시 어린 나이에 순장 당해야 했던 안타까운 이야기다. 죽은 주인을 위해 살아있는 하인과 시종들이 죽임을 당해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당시의 시대상에 담딘후 씨도 체첵 씨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창녕우포늪
딱딱구리가 파놓은 작품(?). 그러나 나무의 영양분이 전달되는 바깥쪽을 남겨두어 나무의 성장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왜 이곳을 우포라고 했을까? 해설사는 이곳의 지형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포늪 북쪽 우항산(소목산)의 모습이 소가 물을 마시는 모양이라서 붙여졌다고 한다. 우포란 말은 우리말로 ‘소벌’이다. 여기엔 4개의 늪이 있는데, 우포를 비롯해 목포늪, 사지포늪, 쪽지벌이 그것이다. 가장 작은 쪽지벌만 순우리말로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우포늪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내륙습지다. 이방면과 대합면에서 흘러온 물이 하천 폭이 좁아지면서 형성됐다.
1960년 이후 새마을운동을 벌이면서 농지를 확보하려고 제방을 쌓아 물을 막아 늪의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제방 건너 농지가 예전에 모두 늪이었다는 얘기다. 우포늪의 역사는 얼마나 될까? 1억 4000만 년이라고 한다. 그때의 자연 생태계가 그대로 보전되어 왔기 때문이 우포늪을 자연의 보물이라고 칭하는 모양이다.
“어떤 식물이 자랄지 알 수 없어요. 아직 얘네들이 새싹을 안 틔웠거든요. 조금 더 따뜻해져야 틔워요. 그러면 또 올해는 어느 수생식물이 이 늪을 쫙 덮을지 결정이 되는 거예요. 매년 같은 아이들이 같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 자리싸움이 굉장히 심해요.”
김진숙 해설사의 얘기다. 매번 강자를 달리하며 변해오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것 또한 우포늪의 매력이라고 한다.
김진숙 해설사의 시각이 나뭇가지에 머물렀다. 이 초봄에 무슨 열매인가 봤더니 벌레집이라고 한다. 또 속이 비어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그런데 파릇한 잎사귀들이 꽤 많이 돋아나 있다.
“움푹 들어간 이 나무 기둥은 딱따구리가 쪼아 먹은 흔적이에요. 그런데 바깥쪽은 손상이 그렇게 많이 않아서 나무가 영양분을 끌어올려 잎을 피울 수 있는 거예요.”
하물며 딱따구리도 자기 삶을 위해 나무를 쪼기는 하지만 그 생명을 끊지는 않는다. 그렇게 우포늪의 생물들은 경쟁하기도 하고 배려하기도 하면서 1억 4000만 년을 버티어 왔던 것이 아닐까. 전문가 설명을 들으며 한국의 문화와 자연을 접한 담딘후 씨와 체첵 씨, 이 몽골인 부부에게 창녕이 멋진 인상으로 남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