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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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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통하기 나름이고 그림은 느끼기 나름이다. 예술을 두고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말처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구름을 보고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는 사람 없고 바다를 보고 무슨 의미인지 따지는 사람 없듯이 예술 중에서도 추상의 영역은 그런 감상이 필요한 분야다. 그저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설치미술은 작가가 의도하는 기호가 분명하게 깃들어 있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고 무리한 이해를 요구하게 되면 감흥은 반감된다. 추상은 대부분 기호를 품고 있지 않다. 아주 은밀하게 숨겨놓았을 수는 있다. 때론 오브제 자체가 화두 역할을 해 보는 이에게 고뇌의 행복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뭐 아닐 경우가 더 많긴 하겠지만.


오늘 경남도립미술관에 갔다. 정말 오랜 만에. 20년도 훨씬 전에 기자생활을 함께 했던 동기와 함께. 경남도립미술관은 입장료가 있다. 도립이지만 무료가 아니다. 1000원. 무료나 진배없지만 유료라는 전제조건이 갖는 효과는 무료일 때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관람태도에서.


1000원을 내는 순간 눈에 보이는 얇은 작품설명서를 챙기게 되고 손에 쥐고 있다가 전시실에서 작품을 만나면 책자를 펼치게 된다. 비로소 작품을 감상할 태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유료정책의 장점이다.



별별과 별별. 전시장에 들어서니 단지 언어유희만은 아니었다. 별의별 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온갖 별들의 형상은 다양하게 드러난다. 지금은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탄생하는 아기가 맨 먼저 보는 것은...음... 산부인과 의사의 얼굴이거나 천장에 붙박혀있는 형광등일 터이다.


하지만 아주 옛날, 그러니까 공룡이 발톱을 세우고 뛰어다닐 때보단 훨씬 후에 살았던 원시인들은 뭐 춥지 않은 곳이라면, 태어나면서 밤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들을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 펑하고 터지며 불꽃을 피웠던 별이 오늘날 미세먼지 속에 희미해진 밤하늘 가운데서 어찌어찌 용캐도 관측될 수 있기도 하겠다.


에고.. 참나.. 별의별 이야기를 다한다. 안내 책자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있다. 


"수많은 문학과 미술, 신화와 역사에 별은 우주의 신비와 미지의 반짝임 속에서 염감이 원천이었다. 하나의 성좌를 구성하는 별들은 상상이 맺어놓은 관계 외에는 서로 무관하고 거리상 이웃도 아니며 시서능르 ㄶ아주지 않는 반짝임들은 우주 어디엔가 존재하며 우리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십광년 전의 잔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천문학적 지식은 천체에 대한 몽상을 깨기는커녕 시간과 무한, 존재와 환상으로 우리의 상상을 유도한다."




권부문 작가와 강소영릴릴 작가, 정성윤 작가, 안경수 작가, 그리고 이우성 작가, 김도경 작가가  별을 소재로 설치 작품을 내놓았다. 









두 개의 큰 원이 만났다. 무슨 의미일까. 개기일식이다. 물론 설득력은 떨어진다.



약간 독특하게 봤던 작품이다. 안경수 작가의 작품. 어두운 공간의 벽에 작품을 걸고 블랙라이트를 비춘다. 단순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했지만 묘한 감흥을 준다.



스님의 작품이어서 그런지 한자성 제목이 많다. 피안으로, 무제, 볍계, 본래면목 등등.



칠. 스케치 된 것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 칠이다. 색칠. 정해진 대로 칠하지 않고 어깃장 놓아 칠하는 것은 황칠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어 치매 상태에 든 상황에서 장난기 가득한 외계인의 조종을 받아 벽에다 독특한 향이 밴 누런 색을 칠하는 것을 두고는 우리 조상들이 '똥칠'이라고 했다.



성파스님은 그 어느칠도 아닌 옻칠을 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옻칠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일까? 영구성이다. 성파의 작품 중에서도 내는 피안으로 혹은 민화 호랑이가 맘에 든다. 






아... 잠이 와서 다음에 보충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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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에 보냈던 기사.



진주 극단 현장

<강목발이>

작 : 임미경

연출 : 고능석

일시 : 6월 8일 오후7

공연장 : 양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연락처 : 055-392-2543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와 변한 게 없노? 속이고 훔치고 등치고 자기밖에 모르고. 내 인간들에게 지옥 맛보게 할란다!” 주인공 강목발이의 외침이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주제를 이 한 대사에 담아낸 강목발이는 경남 진주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 속 인물이다


설화 속 강목발이는 홍길동과 같은 인물이다. 도둑질했다는 증거도 없이 몸의 움직임이 빠르다는 이유로 관아에 끌려가 발목을 상하게 되어 절룩이는 신세가 되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동작으로 부잣집 재물을 털어 가난한 집에 나눠준다


역시 증거도 없이 잡혀 죽게 되는데 훗날 백정집안의 자손인 하도식의 몸을 빌려 살아간다. 아버지는 질 좋은 한우를 공급하는 장인이다. 동네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자 하도식의 아버지는 철거를 반대하고 버티지만 오히려 철거업자에게 뭇매를 당한다


그런 모습을 본 하도식이 말리지만 오히려 자신마저 두들겨 맞는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하도식의 몸에서 강목발이가 튀어나온다. 그러자 바로 저승에서 그를 추적해 따라온 도깨비들이 그에게 결계를 쳐 사로잡는다. 이 작품은 지난해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단체 금상에 희곡상,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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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간이다. 한하균 선생의 연재가 어제의 그 시점에서 일정한 타임라인을 가지고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여지없이 빗나갔다. 어제는 온재 이광래 선생이고 오늘은 화인 김수돈 선생이다. 한국문학을 한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름 김수돈. 한하균 선생은 그와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자네, 청마 선생댁으로 앞장서게"


그뒤 6·25가 어지고 국립극장이 대구로 피란가고 '신협'이 공군본부 정훈감실에 소속되자 나도 신협 연구생으로 입단하게 되었고, 온재 선생과의 교분은 어느새 사제간의 정분으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초반부터 진주에서 열리는 영남예술제(지금의 개천예술제) 때마다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고, 이후 1968년 운명하실 때까지 서울에서 혹은 마산에서 선생님과의 사이에서 여러가지 일을 겪은 것이다.


화인 김수돈 선생과의 만남


두번 째로는 화인 김수돈 선생과의 만남이다. 1946년 늦가을이었다고 기억된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큰 아야, 전화가 안되네. 윤선(부둣가) 머리 고모님 댁에 좀 갔다 오이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얼마되지 않은 거리지만 귀찮기도 하고 그렇다고 감히 못 가겠다고 짜증도 못 부릴 형편이었다. 수동식 전화기를 자꾸 돌려 보았지만 아무리 돌려도 우체국 교환양은 어디로 갔는지 묵묵부답이었다.


그 무렵은 전화기 있는 집도 드물었지만 설사 있다해도 어찌된 영문인지 통화하기가 요즘처럼 쉽지 않았다. 부득이 부둣가로 걸어가는데 때마침 마산~통영 객선이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여보게 학생~."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키에 어울리지 않게 큰 미군 점퍼(당시는 미군 물자가 많이 유통되고 있었다)를 걸치고 머리는 봉두난발로 아무렇게나 뒤로 빗어 넘긴, 얼핏 보아 예술가임에 분명한 사나이(?)가 조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아주 소중한 보물인 양 옆구리에 끼고 서 있지 않은가.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가까이 갔더니 대뜸 "유치환 선생을 아시는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청마 선생님을 왜 찾으시는데요?" "옳아. 선생님 아호를 아는 것 보니까 제법 된 녀석이군. 자네 청마 선생님 댁으로 나를 안내해 주게."


그리하여 고모님 댁 심부름은 깜박 잊고 길 안내에 나선 것이었다. 그 이듬해 출판된 저 유명한 <소연가>라는 시집 원고가 그 소중한 보따리였고 그 시집의 서문을 받기 위하여 청마 선생님을 찾아오셨던 김수돈 선생님이 통영에 내리자마자 부둣가에서 이렇게 나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 뒤로 통영에서 탄생한 '문인극회'(유치환 박재성 김용기 김상옥 김춘수 허창언 서성탄 황하수 정명윤 송두영 윤이상 정윤주 전혁림 등 지금 생각해 보아도 기라성 같은 멤버들이었다)가 마산의 '청년문학협회 마산지부'(김수돈 조향 등)의 초청을 받아 박재성 작 <호풍>, 이기영 작 <해방> 등의 레퍼토리로 공연하면서 화인 선생과의 사귐은 화인 선생 말씀대로 '수어지교'로 발전된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서 겪었던 둘만의 이야기, 내가 마산에 살면서 모셨던 가지가지 일들을 아가씨가 수를 놓는 정성으로 하나씩 엮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한하균 선생의 이야기에 덧붙여 <경남연극인물사1>에 실린 화인 선생의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자.


 

(이 책은 김소정 연구와 강주성 보조연구로 연극협회 경남도지회가 발행했다.)


책 33쪽에 화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시기(이 시기라 함은 광복이 되고 마산에서 온재(이광래)가 바로 극단 '민예'를 조직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연극이 활기를 띠던 때를 이른다) 마산지역에서는 김수돈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1947년 창단된 '문인극회'에서 그는 <민족의 태양>(염주용 작)을 연출했다. 


다음 해에 <동래성 함락의 날>(염주용 작)과 <무의도 기행>(함세덕 작), <낙화암>(함세덕 작), <견우직녀>(서항석 작), <단층>(김영수 작) 등을 연출하며 지역 연극계의 선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한국전쟁 직후 1950년 9월 거주지를 부산에서 마산으로 옮긴 김수돈은 문총 마산지부에서 종합예술제를 개최했을 때, <군상>(서항석 작, 정진업 임향 복헤숙 김영옥 출연)을 연출하여 국제극장에서 공연했다.


1954년 6월에는 '청문극회' 창립공연으로 <구원의 곡>(이주홍 작)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그 무렵 그는 마산문화협의회의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향토연극운동의 전위대로서 극예술연구회(회장 김수돈 기획 강형순 총무 최익배)를 창립했다.


창립 기념공연으로 <닭의 의미>(오학영 작)를 강남극장에서 공연함으로써 전쟁으로 침체했던 마산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6년 7월 그는 예총 마산시지부 창립총회에서 부지부장에 피서되었고 12월에는 3·15기념회관 개관출하문화제 행사때 연극 <고래>(임희재 원작)의 기획 무대감독을 맡아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3년 11월에는 연극 <태양의 아들>(진풍선 작 정진업 이백화 출연)을 연출해 3·15회관에서 공연하였다.


화인 김수돈에 대해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됐다. 시인이면서 연출가. 문학과 연극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는 것.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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