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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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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순서의 글에서 마산에 신극이 태동하던 1920년대 후의 여러 단체들이 순회공연을 했다고 했다.(표참조)


표(동아일보에서 추출하여 뽑은 것)를 참고로 살펴보면, 첫째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공연하였다는 것, 둘째 고학생 돕기 운동이 태반이었다는 것, 셋째 일본제국에 대한 문화적 대항 내지는 민중계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소나기가 갑자기 퍼붓듯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의 위장된 문화정책의 영향에 따라 1920년대 초반(21~23년) 몇 차례 공연이 있은 뒤 일제의 마각이 드러나면서 다시금 휴면기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31년에 접어들어 마산의 휴학생들과 지식청년이 힘을 합하여 극단을 창단하기로 하고 공연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발기인은 목발 사장으로 너무나 유명한 김형윤(경남신문 전신인 마산일보 발행인)씨, 김종신(전 마산시장 및 국회의원)씨, 이우식(의령의 부호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함, 안호상 이극로 등의 독일유학을 거의 도맡다시피함, 물론 이번 일에도 재정 원조가 컸다고 함)씨, 그리고 이광래 이일래 형제가 그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레퍼토리를 이광래 작 <어막의 일야>로 정하고 일주일간 책읽기 연습에 들어갔을 때였다고 한다.


당시 마산경찰서 고등계(주로 사상문제를 다루는 부서) 형사인 일본인 고다마가 연습장에 나타나 자꾸만 쓰잘데없는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이에 키는 작지만 성격이 불같고 단단한 체구인 이광래와 언쟁을 하다가 육박전 직전까지 가는 사태로 악화되었다.


여기에 앙심을 품은 고다마 형사가 광래의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다카다노마바 사건'을 들추어내어 조사할 게 있다는 명목으로 구류를 시켜버린 것이다. 이로써 마산의 신극운동은 첫 출발부터 시련과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 것이다.


그 다음해인 1932년 7월에 '극예사'라는 단체를 김여찬 이훈산 등의 발기로 창립하고, 연출부에 천전막, 무대부에 윤종환, 음악부에 박성옥, 집행부에 김무산 등이 가담하였다는 기사가 당시 동아일보에 보이지만 공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일본 유학을 팽개치고 귀국한 이광래는 상경하여 서울에서 집안의 아저씨 뻘이요, 어린 시절 막역한 친구 길상의 형이요, 또한 친형 일해의 죽마고우인 노산 이은상(당시 조선일보 학예부장이었다)의 도움을 받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기자로 근무하면서 연극에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 무렵 광래의 관심을 끈 것은 '극예술연구회(약칭 극연)'의 활동이었다. 극연은 극영동호회를 모체로 하여 1931년 7월 8일에 발족한 신극단체다. 창립 동인은 김진섭 이헌구 서항석 유치진 등 해외문학파와 일본축지소극장(일본신극의 요람무대)에 연극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홍해성 등이었다.


각 신문상에 발표된 이들의 창립취지를 보면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극단의 사도로의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이 신극을 수립하려는 목적'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 수립에 감동해 극연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935년은 실로 이광래의 연극 인생에 있어 기념할 만한 한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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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재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1928년 배재고보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키는 작았지만 오히려 이름난 운동 선수였다. 


배재고보를 비롯한 5대 사립(중앙, 휘문, 양정, 경신 등)의 종합 경기가 있을 때면 육상에서는 단거리 선수요, 야구에서는 명 포수로, 축구에서는 날쌘 LW(레프트 윙)로 '배재의 꼬마'라는 별명 그대로 온 운동장을 누비고 다닌 선수였다. 이렇게 만능 스포츠맨같은 활동은 일본도쿄고등학교 영문과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온재가 '연극'이라는 신천지에 눈을 뜬 것은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한 뒤였다. 그 대학에는 일본 신극의 개척자 쓰보우치쇼오 박사가 서양 연극을 일본에 이식하는데 힘썼을 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희곡 번역으로 연극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극이라는 새로운 바다에 뛰어든 온재는 항해를 시작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에서 시작하여 입센과 체호프 극에 빠져들었고 특히 당시 신문에서 많이 소개되던 '애란'의 국민극운동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벨리, 뮤레이(애란의 극작가)의 <황금결혼> <장남의 권리> 등을 탐독하였으며 로드둔사니의 신비적 상징주의 연극인 <아아기메데스왕과 무명전사> <신의 신들> 등의 희곡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김흥우의 <이광래 연구>p4~5)


이렇게 서양의 저명한 작가의 작품을 마구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그의 문학적 소양을 살찌우고 있던 중 그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이른바 다카다노바바 학생침입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카다노바바' 사건이란 한마디로 일본제국에 대한 반항으로 민족차별과 멸시에 대하여 동경 유학생들이 분노하여 궐기한 항쟁의 하나다. 남달리 정의감이 강한 광래가 이 항쟁을 강건너 불보듯 먼발치로 보고만 있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유혈극에 몸소 뛰어든 광래는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1933년 끝내는 와세다대학 3학년 중퇴로 귀국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눈을 돌려 마산에 신극이 태동하던 1920년대로 무대를 옮겨보자. 1932년 극예사가 마산에 신극의 깃대를 꽂을 때까지 여러 계몽 단체들의 순회공연이 먼저 있었다. 소인극운동의 효시가 되는 창원청년기독교회의 연극 공연이 1921년 5월 15일부터 16일까지 이틀 동안 공연이 있었다는 기사만 동아일보에 보일 뿐 그 레퍼토리나 스태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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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 온재 이광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경남도민일보 2000년 7월 5일에 실린 이야기다.



회원천변의 개구쟁이


이러한 마산의 젖줄인 회원쳔변에서 두 이씨 형제는 남달리 우의가 투터우면서도 잘 싸웠던 모양이다. 동리 아이들과 같이 천렵을 하다가 말다툼 끝에 덩치 큰 동리 아이 하나와 광래 사이에 끝내는 육박전이 벌어지게되었다. 이에 길상(화학자, 노산 이은상의 아우)은 무조건 광래편이 되어 공동으로 적(?)을 물리친 뒤 또 다시 광래와 길상이 싸웠다고 노산은 그의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어쨌거나 유년과 소년 시절의 광래는 잘도 싸우고 또 고집불통의 어린이였다고 한다. 한번은 할머니께서 새 양복(그때는 넉넉한 집이 아니면 양복 입기가 참으로 힘들었다)을 갈아입히면서 광래에게 타일렀다.


"홍근아, 오늘은 제발 싸우지 말고 옷에 흙 묻히지 말아라." 그렇게 신신당부를 해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해질무렵에 돌아온 아이는 아침에 갈아입힌 양복을 홀랑 벗어버린 알몸이 아닌가. 깜짝 놀란 할머니가 까닭을 물으니 헐벗은 거지 아이에게 벗어주었다는 것이다.


쫒겨난 광래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도 어머니께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수신(오늘날의 윤리) 시간에 선생님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착한 일이라고 배웠다는 것이다. 이 고집불통의 어린이는 한대 맞으면 반드시 두대 때려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한마디로 개구쟁이 중에 개구쟁이였던 것이다.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기독교 계통인 배재고등보통학교(지금의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한 광래의 지난날 모습의 일단을 그의 딸인 이영실 씨는 <현대연극>(1971년 겨울호 27~28쪽)지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배재고보 당시 축구와 야구로 단련한 몸을 의사가 보고 당신 가슴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철판 같다고 했으며 웃통을 벗고 몸을 씻으면 잘 구워진 윤나는 구릿빛 살결을 사람들은 부러워들 했다고 자랑을 하시곤 했다. 운동과 싸움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어릴 적에 길상님과 친척 관계이기 때문에 한집에서 어울리며 공동 소유로 선물 받은 야구 볼과 클럽을 받고 기뻐하셨다 한다.


그러나 아버지만 할머니께 밉게 보여(하도 개구쟁이 짓을 하니까) 그 소유권에서 박탈당했다고 못내 서운해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시곤 했다. 그 이유는 툭하면 싸움질이고 새옷인데도 훌렁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들어오기가 일쑤요, 수틀리면 문밖 쓰레기통 옆이건 맨 바닥이건 드러눕거나 아니면 방문을 잠그고 단식투쟁을 하기 일쑤였다고 했다.


할머니 속을 무진장 썩여드려 심지어는 아버지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하지만 연극 공연 때문에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통탄하면서 사흘 밤을 꼬박 뜬눈으로 시신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고 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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