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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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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예전엔 지금보다 전국 순회공연 다니는 것이 훨씬 더했다. 악극단이 순회공연을 펼쳤듯이. 지금이야 서커스란 게 거의 형태를 감췄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서커스가 열리는 지역에는 동네가 시끌벅적했단다. 1960년대에 태어난 나도 그런 서커스 공연을 들어가서 보진 못했지만 밖에서 얼쩡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만 한 번도 연극을 그렇게 순회공연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음...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해도 연극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으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2 때 교회에서 친구들이 연극을 해보자며 내게 어쩌면 일방적으로 맡겨버리는 바람에 대본 쓰고 연출을 하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숫기가 없고 연기력이 딸리니까 배우 하지말고 연출을 맡겼을 수도 있겠다.


또 샜다. 지금에야 보고싶은 연극이 있으면 일부러 찾아가서 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지역의 문화 수요자를 위해 많은 극단이 지역 또는 전국을 돌며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게 한때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드러나긴 했는데.. 이젠 지역의 극단들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선의의 경쟁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광복 즈음, 이광래가 이끌던 '민예'는 어떻게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을까. 오늘 이야기는 한하균 오동동야화 12번째 이야기를 베껴 써본다.



극단 '민예'는 민족정기를 바타응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반탁운동의 기치를 높이 흔들면서 1945년 10월에 조직되었다.


신재현, 맹만식, 송재로, 박상익, 남궁연, 김득순(김감순은 오류), 유해초 등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단장은 물론 이광래였다. 사무실은 종로 베카리 음식점 2층에 두고 1947년 늦가을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남한의 각 지역을 순회 공연하다가 조선 연극 동맹(좌익)의 프락치 사건으로 분열이 생겨 해산하기에 이른다. 프락치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KAPF파의 효장 임화(시인 소설가)의 처가가 마산이다. 마산 이상조의 여동생 숙희가 그의 처다. 그녀는 훗날 지하련이란 예명으로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하는데, 폐병으로 가포 결핵요양원에 와서 치료를 받고 있던 임화와 알게 되어 둘이 연애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임화가 해방이 되자 좌익 예술인의 핵심 멤버로 설치고 다녔는데 극단 '민예'만이 그들의 노선과 달리하고 있어 눈엣가시처럼 고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민예의 대표인 이광래가 처가의 먼 친척뻘이 되는 것을 알고, 처가를 매개로 하여 협박도 해보고 달래기도 해 보았으나 이광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극단 '민예'에 프락치(그 사람은 지금도 생존해 있으므로 성명을 밝히지 않겠다, 2000년 기준)를 넣어 정보를 빼냈을 뿐 아니라 와해공작을 시도한 것이다. 그 당시 돈으로 쌀 한가마 12원 할 때 공작금이 400원 가까이 소요되었다니 얼마나 공작이 치열했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예가 창단되던 무렵에는 마산과는 여러 가지로 겹친 인연이 있었다. 일제 말기의 황금자 시절에 월초 정진업이 중견배우로 활약하였다 함은 이미 전술한 바 있다. 그는 영양실조 끝에 조막염에 걸려 오래도록 병상에서 치료하다가 해방의 감격과 함께 서울로 가서 민예에 입단, 주연 배우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게 된다.


곧 뒤따라 서울로 간 화인 김수돈은 연출부에 배속되어 이광래의 훈도 아래 조연출로 맹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산 사람 셋이 중심이 된 극단 '민예'는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상연된 대표적인 작품은 김동인 작 이광래 연출의 <젊은 그들>을 비롯해 김형활 각색 이광래 연출의 <카츄샤>, 이광래 작 연출 <청춘의 애정>, 이광래 작 연출 <박쥐의 집> <독립군> <백일홍 피는 집> <최후의 밤> <어머니의 모습> <청춘의 정열> <청춘산맥> 등으로 수많은 작품을 밤마다 바꿔가며 공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합포성을 대표할 만한(?) 이 세 분의 예술인들이 한솥밥을 먹기는 필자가 알기로, 극단 '민예' 생활이 최초요, 최후가 아니었나 싶다.


연극과 문학과 술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격은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에 가지가지 이야기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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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선 지하련의 이름이 '숙희'로만 나오는데 숙희는 아명이고 본명은 이현욱이다. 그의 셋째 오빠 이상조에 대해선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 단지 임화와 일찍 알고 지냈고 전향 문제로 투옥되었다는 사실 정도. 지하련이 살던 산호리 집은 지금도 용마고 뒤편에 있는데...지난해 말인가 불이 났다고... 헐리기 전에 찾아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찾아가보지 않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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