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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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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베토벤 하면 '운명'이 먼저 떠오를까? 


오선지에 그려낼 때는 상상속의 곡, 연주를 하면, 여기에 화음을 넣으면, 여기에 합창까지 넣으면 그 음악을 얼마나 듣고 싶을까?


막상 연주가 끝나고 나면 베토벤은 악장이 돌려세워서야 청중의 박수를 느꼈다고...


베토벤하면.. 또 떠오르는 단어? 청각장애, 추남? ㅋㅋ. 


운명은 베토벤이 얼마나 노력파 작곡가인지를 보여주는 작품.


담엔 경남대 예술관에서 강연을... 피아노를 치면서 설명을 해야 잘 전달되는데... 하면서...


네 개의 음으로 1악장을 구성.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는지 보여줘. 


왜 모차르트는 천재작가였을까.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죽음을 재촉했다?


악보를 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다. 선율에 화성요소를 덧붙였는데... 선율이 가다가 끊기면... 솔솔미파. 끊어지는데 그게 머리 속에 들리는 대로 필사가 가능했기에 천재라고 했다.


(음악 선율을 띠리리 따리라라... 라고 읊는데... 이건 텍스트로 표현하지 못해 받아쓰기의 한계를 느낀다.)




베토벤은 교향곡 아홉 개. 9번 교향곡의 저주라는 말도 있음.


베토벤은 고전주의 작곡가이면서도 낭만파를 연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 교향곡이 3번 영웅이다.


1, 2번은 고전 모방의 시기다. 3번부터 앞선 룰을 무시하고 규모를 키웠고 다이내믹해졌는데 이 시기를 창조의 시기라고 한다.


전원교향곡은 표제음악. 나중에 낭만주의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8번부터는 반성의 시기. 


9번 교향곡 합창. 어쩌면 반성이라기보다는 다시금 창조하는 느낌. 1, 2, 3악장까지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있다 4악장 시작하자 우루루 일어서서 합창. 노래가 교향곡에 들어가게 한 최초의 사건.


만약 베토벤이 청각장애가 아니었다면 그런 상상력이 발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9번 합창곡은연말에 들어보라.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도 작곡했다. 다양한 곡을 작곡했다. 


현악4중주. 가장 많이 작곡한 사람은 하이든. 왜? 왕궁에 있다보니 많이 생산할 수밖에 없는 궁중음악가라서. 1,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현악4중주의 모태는 성악곡에서 기악곡으로 넘어갈 때 하나씩 합류하면서 관파트 악기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늘면서 오케스트라가 됐고. 관 파트 악기 수가 적은 것은 솔로 악기이기 때문. 솔로 악기에 지면 안돼겠다 해서 4중주 파트 수 늘어나.


현악4중주에서 발전된 것이 3중주. 이것이 트리오. 트리오 소나타가 처음 탄생. 트리오 소나타 악기는 4개. 화성담당 통주저음 악기가 있었다. 4명 콸텟, 5명 퀸텟.


피아노 3중주가 많이 연주되는 것은 화음악기여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가 기본 3중주. 하나를 더하면 클라리넷.


피아노 3중주 '고스트' 감상. 왜 고스트란 제목을 붙였을까? 들어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일반적인 곡과 전혀 다르지 않다. 



강의 중간에 이처럼 휴식시간을 갖기는 지난 4개월 교육 일정 중에서 처음이다. 어려운 내용이긴 한데... 차 교수의 설명은 참 재미있다.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듣는다면 제대로 받아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스트를 듣고 있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셋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kziMCkuf28


보자르 트리오 내한공연 영상. 침울하고 우울한 정서 때문에 고스트를 부제가 붙었단다. 피아노 저음의 소리가 으으으... 유령의 느낌이 난다해서 별명이 붙었다. 1808년. 작곡. 피아노교향곡 황제를 짓고 난 뒤 작곡한 거라 엄청난 창작열이 불탈 때 이 곡을 썼다. 베토벤만의 독특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2악장 마음으로 연주하지 않으면 절대 표현하기 어려운 곡이다. 2악장에서 유령 타이틀이 붙었다는 점. 베토벤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곡.


낭만주의 대표 주자. 쇼팽. 성악 쪽은 슈만. 기억 브람스. 멘델스존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천재성. 어느 순간 음악을 접었다가 어느 중요한 사건에 다시 재기. 실내악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


베토벤은 곡의 형식, 규모, 낭만파들이 따라할 수밖에 없는 영역을 마련했다. 브람스는 베토벤을 거의 따라하다시피 흠모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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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학교는 마산 역사의 한줄기를 이루고 있는 비중이 큰 사립교육기관이다. 1906년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기미독립만세 참여 등 일제에 항거한 활동 때문에 탄압을 받다 폐교되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대충의 이러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하균 선생의 이야기를 베껴 써본다. 오재 이광래 선생과 창신학교는 어떤 스토리를 공유하고 있을까.


온재 선생과 창신학교




온재 선생의 본명은 흥근이다. 광래는 그의 개명이고 온재는 그의 아호다.


온재 선생은 한국 신극이 태동하던 1908년(이인직이 원각사를 창립하고 <은세계>를 최초로 상연함) 9월 29일 마산시 중성동에서 이순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마산에서 거제를 거쳐 통영까지 오가는 정기여객선의 선장이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의 형인 이일래는 동요 작곡가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산토끼 동요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줄 안다. 이 노래의 원 작곡자(그 뒤에 다른 사람이 약간 편곡했다 함)가 바로 이일래다. 그가 재직했던 창녕의 이방초등학교 교정에는 지금 그의 노래비가 서 있다. 말하자면 일제 때 수탈당하던 우리 겨레의 형편으로는 제법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셈이다.


대체로 한 집안의 맏이는 너그럽고 유순한 반면 차남은 야멸차고 장난꾸러기 기질이 있듯이 이들 형제도 그랬던 것 같다. 창신학교 소학부(요즘의 초등학교) 최고 학년이던 일래는 여덟 살에 입학한(당시로서는 굉장히 빠르게 입학한 셈이다. 거의 대부분 아홉 살 아니면 열 살에 입학했었고 심지어 장가를 간 신입생도 있었다고 한다) 광래 때문에 여러 가지로 피해(아우를 잘 건사하지 못한다 하여 부모로부터 꾸중을 들었다)를 보아야 했다.


1908년에 개교한 창신학교는 경남의 명문 사립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더욱 놀랄 것이다. 김윤경(국어학자·한글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박사를 비롯해 역시 같은 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 선생, 안자산 선생, 그리고 일제 때는 일제와, 건국 후에는 자유당의 횡포에 맞서 싸웠던 박순천 여사, <물새 발자욱>의 작곡자 박태준 박사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창신학교 졸업생 중에도 쟁쟁한 명사가 많다. 우라 나라 초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 이극로 박사, 독립군(광복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김원봉 장군, 가고파의 시인 이은상, 그의 제씨인 이길상(화학자) 박사 등이 모두 창신 출신이다.


이러한 창신학교에서 1915년에 졸업한 사람 중에 일래가 있었고, 1921년에 졸합한 사람 중에 광래가 있었다. 일래는 아저씨 뻘인 이은상과 한반이었고 광래는 이길상과 한반이었다. 이들의 항렬은 숙질 간이었지만 어울려 놀 때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이들이 한창 개구쟁이 짓을 할 때인 1910년 대의 마산은 물 좋고 공기 좋고 그래서 인심 좋은 고장이었던 모양이다. 


이 고장 출신이면서 시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고 김종신 씨는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서원골에는 피래미가 지천으로 많아 천렵을 해서 회쳐 먹었고 또 오동교 아래에는 지금 봉암다리 근처에만 있는 꼬시래기가 많이 있었다"고 60년대 초에 술회한 바 있다.


마산산호공원 시의 거리에 있는 이일래 산토끼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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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하균 선생의 오동동야화를 베껴쓰기 전에 오늘의 주인공인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기본 정보부터 훑어보아야겠다. 자료는 역시 <경남연극인물사1>이다. 정진업은 극작가이자 배우,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다.1930년 김해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현 용마고등학교인 마산공립상업학교를 나왔다. 1936년 무렵 이광래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극단 극연, 낭만파, 태양 등에서 연극수업을 받았고 영화 <해연> <여인애사> <삼천만의 꽃다발>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한하균 선생의 야화를 거친 다음 풀어볼란다.




월초 전진업 선생과의 만남


세 번째로 월초 정진업 선생과 만났다.


1951년 스산한 바람이 세차게 부는 초겨울이었다. 마산의 화인 선생으로부터 서신 한 통이 배달되었다. '마산문총(현 예총)의 종합예술제에서 서항석 작 <군상>을 내 연출로 공연하니 꼭 오라. 자네가 존경하는 동랑 선생 작품이 아니라서 조금은 섭섭하겠지만 연출가에 뜻이 있는 자네가 한 작가에만 전념한다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 아니겠는가'하는 요지의 편지였다.


국제극장(지금은 없어진 부림시장 위 강남극장)에서 마지막 날 저녁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일찍이 토월회(1920년대 박승희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 신극단체의 효시) 시대부터 무대로, 스크린으로 널리 알려진 톱스타의 한 사람인 고 복혜숙(당시 피란 차 마산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음) 선생과 중진 여배우 김영옥(역시 피란 차 마산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음) 여사의 연기 역량이야 새삼스레 말할 나위가 없었다. 


정낙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그 육중한 체구에 걸맞게 박력 넘치는 연기와 그 낭랑한 보이스 컬러로 극장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볼륨있는 대사를 구사하는 남자 연기자였다. 막이 내린 뒤 소개받아 알았지만 그가 바로 월초 정진업 선생이었다. 월초 선생은 1939년 <문장>지에 소설을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지만 그뒤 시인으로 전업했다. 사실은 연극인으로 이광래 선생과 함께 일제 때는 만주 각지로, 해방 후에는 '민예'의 중진 배우로 전국을 누비고 다니던 대배우였던 것이다.


그날 저녁 이른바 쫑파티(연극이 끝난 뒤의 자평회 및 축하연)에서 주기가 도연해진 월초 선생의 자작시 낭독이 있었다. 과시(果是)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그대로 뛰어나고 멋진 낭독이었다.


그 자리에서 화인 선생의 권유로 나도 미당 선생의 시를 한 수 읊게 되었다. 눈의 휘둥그래진 월초 선생이 '시 낭독만은 내 전매특허인줄 알았는데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 걸. 그런데 미스터 한, 바이브레이션이 너무 심하면 격조에 이상이 생기니까. 그런 점에서 나를 모델로 삼아 더 연구해야 할 걸"하고 충고해 주시던 그때 일이 바로 어제 일인듯 새롭기만 하다.


정말 우직하리만큼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월초 선생이었다. 이런 월초 선생과 나는 주로 부산과 마산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같이 했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도 이 글에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어릴 적 그 맑고 순수하고 미소로운 사랑(?)이 고희를 맞은 지금까지도 아련히 가슴에 남아 있듯이, 이제 세 분 선배님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리고 지난 날을 반추하면서 오늘의 의미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먼저 언급하기를 정진업 선생이 언론인이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자료를 쭉 읽어내려가니 1951년 부산일부 문화부장으로 일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때 용공기자로(용공이란 말은 쉽게 말해 당시 빨갱이로 인식되는 용어다)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는 기록과 함께. 그의 시 '갈대'가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월초 정진업 선생의 시 '갈대' 시비.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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