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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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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휴일, 토요일을 맞았다. 마음이 아주 편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 이상하다. 불안하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똬리를 틀고 빤히 쳐다보는 독사마냥 어디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틸 수 있나 보자며 지켜보는 것만 같다.

 

"어디 안 갈래?"

 

아내가 먼저 물어준다. 토요일이라 집에 붙어있는 아이들은 제 하고싶은 것 하도록 놔두고 실컷 잠이나 자고, 자다가 지겨우면 컴퓨터로 TV를 보든가, 아니면 얼마 전에 선물받은 시집이나 침대에 누워서 볼까 생각하던 차였다.

 

"어데 가꼬?"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아주 일상적인 대화였는데, 그 대답 한 마디에 게으름을 꿈꾸던 환상은 자그마하게 피어났던 뭉게구름마냥 사라져버렸다.

 

"수영장 가고 싶어 ㅠㅠ"

 

막내가 우는 소리를 섞어 지난 주 기억을 떠올리며 수영장으로 가자고 떼를 쓴다.

 

"아빠한테 물어봐라."

 

이 한마디에 아이는 희색이 되어 쪼르르 달려온다.

 

"엄마한테 물어봐라."

 

아이는 탁구공처럼 왔다갔다하면서 점점 짜증스러원 분위기를 팍팍 풍겨낸다.

 

"수영장 가자."

 

그냥 아무 의욕도 없이 내뱉은 말인데도 아이는 환호성을 지른다. 자기 방에 있던 오빠도 쭈뼛 고개를 내민다. 상황이 아주 멋지게 돌아가는 데도 오빠는 사실 그렇게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고사를 망치는 바람에 딴에는 명예회복을 해야하는 이유가 있을 터이다.

 

"너도 가자!"

 

망설인다. 갈등이 생겼을 것이다. 이때엔 아빠의 단 한마디만 있으면 아들의 마음 속에 엉켰던 교통혼잡이 일시에 해결된다.

 

"오전에 많이 했으니 잠시 쉬는 게 오히려 공부하는 데 도움된다."

 

걱정도 덜어주고 명분도 안겨줬다.

 

변수가 생겼다. 아니 변덕이 생겼다. 아내가 다시 입을 연 것이다.

 

"그냥 충혼탑 앞에 있는 공원에 놀러가자."

 

나야 이러나저러나 상관 없지만 막내가 갑자기 울상이 된다. 수영을 못하는(귀에 병이 있으니) 아내로서는 또 물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고생하는 것이 아무래도 싫었던 모양이다.

 

"지원아, 공원에 먼저 갔다가 내일 수영장에 가자."

 

어쨌던 수영장에 간다는 약속이 있어서일까 엄마의 두어마디에 아이는 금세 표정을 바꾼다. 그렇게 나선 곳이 창원대로 충혼탑 앞에 있는 삼동공원이다.

 

토요일임에도 날씨가 흐려 그런지 공원에 사람들이 별로 없다. 오늘 요일을 착각하고 잘못왔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없었다. 간간이 연인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 보이고 운동하러 나온 할아버지와 늘그막에 연애를 시작한 듯한 흰머리 성성한 할머니와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가 남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것이라고 여길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가다 서다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까지 들고 나왔는데 알게 모르게 집에서부터 이어졌던 묘하게 피곤한 분위기가 결국 야외에서 누려볼 거라고 기대했던 잠깐의 평화로운 낮잠마저 이루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아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사춘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사춘기도, 엄마의 사춘기도, 누나의 사춘기도 자기보다는 잽도 안 될 정도로 약하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진짜 사춘기다. 자기만 고통을 겪는다고 여기는...

 

산책길에서 내려가면서 자기를 안 불렀다고 언덕 위에서 30분이나 넘게 혼자 있었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오히려 집에 들어가 잠이나 잘 핑계가 생겼으니 굳이 나쁘다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짧은 시간이지만 한나절이든 반나절이든 무념무상으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재확인한 것을 성과로 삼고 다음 기회를 보아야겠지?

 

 

가져갔던 자리는 바위 위에 한 3분 펼친 게 모두다. 나중에 아주 유익하게 활용되긴 하지만. ㅋㅋㅋ

 

 

삼동공원 연못에 있는 연 중에 참 아담하고 예쁜 게 눈에 띄었다.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꽃? 하면 장미! 했는데 연꽃으로 바꿔야겠다. 바꿨다. ㅎㅎ. 나는 참 간사하다. 예쁜 연꽃 보았다고 장미를 배신하다니.

 

 

데크 길을 다닐 땐 조심해야겠다. 송충이 같은 벌레가 사람 손 닿는 지점에 홍길동처럼 출몰하기 때문이다. 쏘이면 제법 오래갈 것 같다는...

 

 

연못에 있는 잉어는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구경거리다. 특히 값싸고 양많은 과자를 손에 쥐고 있는 상태라면 금상첨화다. 집에서 나오면서 챙겼던 '포테이토 스낵'은 아이들 입에 반도 못들어갔다.

 

 

산책길이 괜찮다. 짧긴 하지만 자르락 자르락 자갈돌 밟는 기분도 나쁘지 않고 띄엄띄엄 세워져 있는 시비석도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준다.

 

 

워낙 유명한 시이건만, 가만히 서서 도종환 시를 다시 음미해봤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한바퀴를 돌아나오는 길이다. 막내가 사자상에 올라탔다. 옛날 생각이 났다. 아마도 10년 전일 게다. 오빠가 막내만 했을 때일 것이다. 부곡하와이. 동물 박제가 많은 곳이다. 박제 전시실에서 곰을 만났다.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을 시베리아 반달곰이 내 손목을 물었다. 아들이 혼비백산하여 아빠의 팔을 빼려고 잡아당겼다.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지만 얼마나 재미가 있었던지... ㅎㅎ

 

 

막내에게 당시의 모습을 재연시켜보았다. 사진찍기용이다보니 별 재미가 없다. 손목까지 깊숙이 넣어 연출하는 데도 한 번에 안 돼 위기 상황을 느끼는 재미도 느낄 수 없었다. 내 손을 집어넣어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쳤다면 막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에이 그렇게 해볼 걸...

 

맞은 편에 있는 사자상 등에도 올라타더니 뒤에서 껴앉는 모습을 찍고 나니 좀 전에 손목을 물린 데 대한 복수극 쯤으로 보인다. ㅋㅋ. 뭐든 해석하기 나름. ㅎㅎ

 

이때에 비가 주르륵하고 쏟아졌다. 우산 대신 아주 유용하게 쓰인 물건이 별로 앉지도 못했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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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만난 날이 1995년 6월 30일이었다. 하얀 옷으로 단장한 멋진 신사였다. 난 처음부터 그가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는 예감을 했었다.

 

그의 이름은 액센트 멀티다. 기어는 수동이며 에어컨도 잘 나왔다. 매일 그는 우리와 함께 했다. 특히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이었다.

 

어떤 때엔 함께 목숨도 잃을 뻔하기도 하고 어떤 때엔 저녁놀이 깔린 강가에서 멋진 지평선을 감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락을 함께한 이 친구와 어제 이별했다.

 

보험 재가입 시기에 맞춰 폐차를 계획하고 있다가 마침 임자가 나타나 팔게 되었다. 세차를 하지 않아 멋지다는 표현이 더 이상 어울리지 않지만 오랜 흰색 친구가 새 동반자로 맞이한 사람은 몽골출신의 '다기'라는 사람이다. 자동차를 고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있다고 하니 '흰색신사'는 반가운 새 친구를 만난 셈일 터이다.

 

17년, 큰 아이와 나이가 같다. 큰 아이는 2월에 태어났고 흰색신사는 6월 말에 만났으니 큰 아이보다는 동생이다. 자동차의 평균 보유기간을 보면 오랜 기간 함께 한 셈이다.

 

17년 동안 엔진오일이나 타이어, 스타트 모터를 간 것 말고는 수리한다고 손 댄 것은 없다. 아, 에어컨 프레온 가스 한 번 주입한 적이 있구나. 늘 안전운전을 해서 그런지 지금까지 사고도 거의 없었다.

 

 

가장 컸다고 느끼는 사고가 진해에서 살 때 출근 중에 장복산 구도로를 내려올 때, 그때 김건모의 '스피트'가 흘러나오고 있을 때였다. 당시 그 노래가 한창 인기있던 때였다. 구불구불한 산길 전방에 청설모 한 마리가 길 가운데 버티고 있지 않은가. 순간 오만 한 가지 생각, 이걸 밟고 지나가? 아니면 비키길 기다렸다가 가? 그냥 가자고 결론을 내리고 거의 앞에 도달했을 때 마음이 바뀐 것이 사고를 불렀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는데 차가 왼쪽 절벽아래로 향하는 게 아닌가. 오른쪽으로 다시 핸들을 돌리고 왼쪽으로 돌리고 하기를 여러번. 결국 오른편 우수도랑으로 바퀴가 빠지면서 순간의 위급했던 상황은 종료됐다. 다행히 차는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다.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 김건모의 '스피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2년 전 쯤엔 음료를 실은 트럭이 골목 교차로에서 서행중이던 '흰색신사'의 뒷부분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트럭 기사 말로는 제동불량이라고 했다. 큰도로 교차로 신호대기 때문에 골목 교차로까지 차가 밀려 빠져나갈 수 없었지만 교차로 교통사고라며 보험회사에선 50대 50으로 처리하겠다고 알려왔다.

 

말도 안되는 결론에 강력항의해 70대 30으로 하긴 했지만 이 역시 처음엔 받아들이지 않다가 우리 주머니에서 돈이 한 푼도 나갈 일이 없다는 것에서 합의를 본 것이다.

 

당시 차 수리비가 31만 원 나왔다. 정비소에선 폐차를 하라고 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아직 고장 한 번 안나고 잘 나가는 차를, 멀쩡한 차를 왜 폐차해야 하느냐고 정비소 직원에게 따졌더니, 차 값이 30만 원이란다. 참내. 웃기는 현실을 직면하고 잠시 허탈했지만 수리비를 어쨌든 조금 깎아서 차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폐차를 하거나 매각을 생각했던 이유는 잠시 자동차 없이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다 몇 달 후 다른 중고차를 매입할 계획이, 확실한 건 아니지만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그 차는 오토여서 아내가 몰고다닐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오랜 동안 운전에서 좀 자유로웠으면 하는 바람이 이제 서서히 실행되는 과정이다. 17년 고락을 함께한 '흰색신사' 액센트 멀티와는 이제 작별했지만 새 친구와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도 지금까지 함께 살았던 정이 남아 있어서인지 많이 아쉬워했다.

 

큰 아이는 차량 매각 소식에 "엥! 진짜로?"하면서 못믿겠다는 듯 아쉬워한다. 어쨌든 나는 시원하다. 후련하다. 그리고 아주 조금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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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일까. 진주성을 다시 찾은 것은 최소 못해도 5년은 된 것 같다. 당시엔 공북문을 수리하고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지는 않았더랬다. 그래서 이번에 진주를 찾은 김에 공북문으로 입장했다.

 

공북문 입구에는 널찍한 주차장이 있다. 1시간에 1100원이다. 그 이상 주차요금은 10분당 200원씩 추가된다.

 

주차요금 때문에 은근히 마음이 급해진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었다. 어른은 2000원이고 유치원 다니는 아이는 무료입장했다.

 

예전에 친척에게서 진주성은 우리 가문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서 매표소 일하는 분에게 툭 던지듯 물어보았다.

 

"예전에 진주 정가 은율공파는 무료입장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지금도 그런가요?" "다음엔 무료로 들여보내 줄게요."

 

공짜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아직 무료입장은 되는 모양이다. 이유는 진주성 안에 우리 가문 재실이 있기 때문이다. 재실에 일이 있어 간 게 아니니 무료입장하면 맞지 않다. 괜히 그랬다가 나 스스로 비겁해지는 느낌이 즐거움을 짓눌렀을 것이다.

 

공북문은 옛날 관찰사 감영과 경상 우병영이 있어서 진주성의 주요 통로로 사용된 문이란다.

 

문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한 바퀴 휘 돌 생각이었다. 맨 처음 눈에 띄는 것이 대포같이 생긴 무기다. 왜란 때 크게 활약한 무기라는데 이것이 어떤 방법으로 무기의 역할을 했을까 궁금했다.

 

일단 옆에 있는 제원을 살펴보았다. 이런 무기를 총통이라 한다. 진주성에는 3개 종류가 전시되어 있다.


천자총통, 길이는 130㎝이고 구경은 13㎝다. 발사물은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쓰고 사거리는 1킬로미터 하고 136미터를 더 날아간다.

천자총통보다 한 단계 아래 제원은 지자총통이다. 길이는 89.5㎝이고 구경은 9.6㎝다. 장군전 조란탄을 쓴다. 사거리는 1킬로미터에 9미터 더 날아간다.

또 맨 아래 제원인 현자총통은 길이 79㎝며 구경은 7.2㎝다. 차대전 조란탄을 쓰며 사거리는 지자총통과 같다.

 

 

 

 총통에 꽂아 쏘는 것은 대장군전 한자에서 보듯 화살이다. 화살을 이 대포같은 총통으로 쏜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화살이라면 시 하나에 한 명이 타깃인데 활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이 아닌가. 백과사전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천자총통은 적 사살용이라기 보다 적 위협용이란다. 적이 총 공격! 하고 달려올 때 큼직한 화살이 발앞에 꽝하고 내리꽂히면 기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래서 이런 무기가 필요했었군.

 

 

총통 3형제를 지나 다음 본 것은 김시민장군 전공비다. 비석에 희미하게 글씨가 남아있었다. 모두가 한자로 쓰여 있으니 이해할 수가 있나 어디. 몇 개 글자 알아본다고 해도 해독은 불가능하다. 옆에 세워져있는 안내판이 반가운 이유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비는 임진왜란 3대첨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主將)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당시 김시민 장군은 진주목사로서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1000명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 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 장군은 적은 군사로써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銳氣)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함으로써 왜병의 호남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 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했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울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 11년(1619년)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 옆에는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가 있다. 글자로만 보아서는 무슨 말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촉석이면 돌덩이가 무수히 많다는 얘긴데... 어쨌든 안내판의 설명을 빌릴 수밖에 없다.

 

"이 비는 조선 선조 26년(1593년) 6월 19~29일에 있엇던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三壯士) 김천일, 황진, 최경희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싸움(1592년 10월 5~10일)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에 의해 가토 키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 12년(1686년)에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운 것이다."

 

 

지금까지 진주성을 네 번 정도 찾았을 것이다. 어릴 땐 어른들을 따라 왔을 것인데 기억나는 장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 한 번, 아버지 칠순 때 한 번, 사오년 전 아내와 왔다. 그런데 아내는 기억이 별로 안 난다고 하는데... 이룬. 의심받기 시작했다. 억울하다.

 

아내는 하이힐을 신었다 얼마 걷지 못하고 앉아 쉰다. 이런 여행이 별로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훗날 다시 진주성을 찾아 전에 왔던 거 기억나지? 하고 물으면 아마도 같은 눈썹을 하고선 "어떤 여자랑 왔어?"하고 의심할 것이 틀림없다.

 

이날 진주성을 찾은 것은 말하자면 겸사겸사 세트코스다. 극단 현장이 마련한 '뿌왕뿌왕 할머니와 꼬방 고양이'를 보려고 창원에서 진주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면 서운하므로 진주성을 찾은 것이다.

 

 

마침 이날 무형문화재 등 공연 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촉석루에 대형 스피거를 설치한 것을 보니 촉석루에서 진행될 모양이다.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가 여유만 있었더라면 보았을 터인데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또 다른 일정이 있으니 내려왔다.

 

 

막내 지원이가 성밖의 모습을 궁금해 해다. 몰랐을 터인데 내가 성벽 위로 내려다보니 저도 보게 해달라고 급호기심을 표출하는 바람에 성벽에 올려줬다. "우와!" 아이의 감탄사 하나로 이곳 정경이 설명될 듯하다.

 

 

촉석루는 경상남도가 지정한 문화재자료다. 문화재자료 8호로 나와있다. 엥, 도 문화재가 아니라 문화재자료? 촉석루만큼 유명한 누각이 문화재에 포함 안 됐다는 게 의아스러웠다. 한편으론 문화재가 아니니 누구나 올라가서 쉬기도 할 수 있구나 싶기도 하다. 오히려 더 잘된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밀양의 영남루처럼 말이다.

 

 

촉석루에선 괜찮은 장이 많이 나온다. 기념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마룻바닥이 상당히 오래된 것 같다. 조심조심 걸으면서 드는 생각이 '이런 델 아이들이 후다닥 뛰어놀기도 하게 어찌 개방해 놓았을까'하는 거였다.

 

 

촉석루를 나왔다. 이정표가 여러 곳을 가리키고 있다. 어디로 갈까. 의암은 지난 번에 봤으니 통과(아내는 기억이 안난다고 하는데, 허걱! 기억났다. 함께 온 사람이 아내가 아니다. 이룬.)하고 내가 안 가본 영남포정사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이가 꽃을 보고 탐을 낸다. 요즘 막내의 취미는 꽃을 꺾어 손에 드는 것이다. 아마 반나절은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지원아, 그냥 가자."

 

 

엥, 쌍충사적비 맞은 편 쪽에 어떤 할아버지가 생리현상을 해소하고 있었다. 할배, 주책이우. 하며 생각했는데 정작 진주성 한바퀴를 돌면서 성내에 화장실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랬다. 진주성 안에는 화장실이 없다. 왜일까? 간혹 만나는 화장실 안내문을 보면 정문 밖과 공북문 밖에 있으니 이용하라는 내용이다. 할아버지의 노상방뇨를 무조건 나무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쌍충각을 들여다봤다. 아마 진주성 안에서도 이곳만큼 인기가 없는 곳은 없을 것이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다. 지나가다 그냥 슬쩍 들여다보는 게 전부일 것이다. 딱 그런 분위기 속에 있었다.

 

촉석루는 문화재자료여도 쌍충비는 도 유형문화재 제3호다. 안내문에 이렇게 적혀있다.

 

"이 비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의 공을 새겼다.

 

제말장군은 지이록에 경상도 고성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웅천, 김해,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서 전공을 세워 곽재우 장군과 함게 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성주싸움에서 전사했다.

 

조카 제홍록은 숙부를 따르 공을 세운 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하였다.

 

정조 16년(1792년) 때 왕은 이들의 충의를 기리어 이조판서 서유린에 명하여 비문을 지어 쌍충각을 촉석루 옆에 세웠다.

 

일제 때 일본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가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지금 자리에 다시 옮겨 세웠다.

 

 

진주성내에 우물을 복원하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아, 우물도 문화재구나. 이런 문화재를 애초 진주성 조성할 땐 왜 파묻었을까? 이제 와서 복원한다고... 그런데 복원이야, 발굴이야. 공사장에 붙여놓은 펼침막 글이 헷갈린다. 복원하는 것도 발굴이란 표현을 쓰는구나.

 

 

우물 복원현장을 지나 영남포정사 쪽으로 향했다. 기울어진 길을 타고 올라갔다. 땀이 속옷을 적신다. 많이 걸었다. 막내가 쪼르르 올라가더니 갑자기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손도 만져보고 옷도 만져보고 하더니 하는 말. "엄마, 아빠! 저 아저씨 몸이 딱딱해요." "하하하!" 아이는 정말 사람인줄 알았나보다.

 

 

비석군을 지나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모양이 참 다양하다. 갓을 쓴 비석도 있고 용문양을 한 것과 꽃문양을 한 것 등 문양마다 다른 기준이 있는 것일까.

 

 

비석의 머리에는 문야에 따라 이수(용이나 이무기 모양), 하엽(연꽃문양과 보석), 관석(구름과 꽃잎, 해와 달), 그리고 팔작지붕을 얹은 것은 개석이라고 한단다. 따라서, 위의 사진에 나타난 문양은 이수다.

 

 

진주성 안에 전설을 담은 돌무더기가 있다. 용다리전설이다. 용다리 전설을 잠시 감상해볼까. "지금의 동성동 삼성화재 부근에는 예전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어있는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용다리에는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때는 고려 초 진주의 한 마을 군수 이씨에게 딸이 셋 있었다. 그중 둘째 딸은 불행히도 출가하자마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군수의 집 머슴 돌쇠는 이때부터 아씨를 사모하게 되었고 아씨 역시 돌쇠의 성실하고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 서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으며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씨는 상사병으로 그만 목숨을 잃게 되었고 돌쇠는 아씨를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 용다리 위에서 무심결에 도랑물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죽은 아씨처럼 보여 "아씨!" 하고 소리치다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

 

이후 이 군수는 딸을 잃은 이곳을 떠나려고 막 용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뒤따라 오던 돌쇠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찾아보니 이미 돌쇠는 다리 옆 고목에서 목을 맨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마리나 될 듯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이는 마치 죽은 돌쇠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그뒤부터 용다리 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가장 많이 모여 울게 되었다.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울음이 끊겼으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번 왔다갔다 하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돌쇠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라도 이루는 돌쇠의 지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6.25전까지 돌쇠가 목매어 죽은 고목에 아들을 원하던 사람들은 한식에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용다리의 흔적만이 진주성 안에 남아있다.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 걸렸다. 물론 박물관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러려면 뒤에 이어질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아쉽지만 공북문으로 나와야 했다. 나오면서 다시 만난 김시민 장군의 모습. 근데 누굴 향해서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위엄은 있어보이나 왜 이런 자세를 취했는지 알 수가 없다.

 

누군가를 호통치는 모습인데 이것이 김시민 장군의 대표할 만한 모습일까 싶기도 하다. 적을 앞에 둔 상황이라면 칼을 뽑아야 더 적절한 것 같은데... 글쎄. 아무 생각 없이 일률적으로 디자인한 것은 아닐까 싶다. 온화한 모습의 장군은 없는 것일까.

 

 

괜한 짓한 걸까. 팔을 벌린 모습이 이렇게 어색할 수 없다. 생각만큼 좋은 장면이 나오질 않네. ㅠㅠ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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