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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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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동공원은 몇 번이고 가본 곳이다. 나무가 새옷을 갈아입고 꽃들이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노래할 때쯤 다시 가서 봄기운을 느껴봐야겠다. 3월 1일. 아직은 이르단 느낌이지만 따스한 햇살에 눈비비고 일어나는 공원을 한 바퀴 돌아봤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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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장안리 산 31. 조선 16대 임금 인조를 모신 '인조대왕각'이 있는 성전암 주소다.


이 성전암에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등극에 성공한 인조반정의 주인공 '능양군'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인조가 백일기도를 했다는 성전암 대웅전은 안타깝게도 2010년 5월 어느 정신 나간 30대(당시 나이)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무량수전'이란 이름으로 새로 지은 건물이 단청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재 당시 목조여래좌상(문화재)은 스님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문화재급 건물이라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히 인조가 반정에 성공하고 즉위한 뒤 지었다는 '인조대왕각'은 대웅전에서 좀 위쪽으로 떨어져 있어 화마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인조대왕각이라는 편액이 건물 가운데 걸렸고 왼쪽엔 산신각 편액이 걸렸다. 안에 들어가면 가운데 인조대왕신위가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 산신탱화, 왼쪽에 용왕탱화가 걸려있다. 


인조가 능양군이던 시절 광해군에게 쫒겨 이곳에 왔었다. 광해군 7년, 1615년 수안군수 신경희가 반란을 꾀하면서 능양군의 동생인 당시 17세 능창군을 추대했다는 이유로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내려 죽인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신경희의 옥사 사건인데, 이를 계기로 능양군의 아버지가 홧병으로 죽고 능양군은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광해군 15년, 1623년 김류와 이괄, 이귀, 최명길 등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이 능양군과 뭉쳐 반정을 일으킨 게 인조반정이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키기 직전에 백일기도를 올린 곳이 이곳 성전암인 것이다.


종교시설인 사찰이 부처와 보살, 미륵, 나한 등 불교 존자와 함께 국왕의 신위를 모시는 것이 이치에 맞나 싶은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런 인연을 보전했기에 성전암이 그만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겠다 싶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왕권을 쥐었지만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이 약했고 그러다 보니 국정보다는 반대세력에 대한 견제에 더 신경을 썼다. 정치가 잘될 턱이 없었다.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면서 인조반정의 공신 이괄이 역적으로 모함받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고, 정세를 제대로 파악 못하고 배금정책을 유지하다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게다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돌아오자 청나라를 좋게 여긴다는 이유로 독살해버린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는 인물이가 아무리 산신과 용왕을 함께 모신 전각 안에 신위가 모셔져 있다해도 고개 숙여 절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어느 네티즌 말마따나 이 전각에 이왕이면 '용왕각' 편액 하나 더 붙인다면 이가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은 메워지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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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재상이 항상 말하되,

 

"내가 영남 도백으로 있을 때에 집 아이가 한 기생첩을 사랑하였는데, 내가 체차되어 돌아오매 함께 데리고 왔더니, 수년이 지난 뒤에 스스로 꾸짖음을 얻은 줄 알고 창기를 두는 자가 이 어찌 사부(士夫)의 행실일까 보냐 하여 이에 쫓아 보냈더니 이미 쫓아낸 후에 내가 '그 여인이 떠날 때에 여인이 무어라 말하더냐?' 물으니, '별로 다른 말이 없사옵고 다 말하지 못하되, 이렇듯 수년 동안 건즐(巾櫛)을 받들어 오다가 문득 이러한 이별이 있으니 유유한 내 회포를 무엇으로써 형언하리요 하며 운자를 불러 별장(別章)을 짓겠다기에 곧 군(君) 자를 부른즉, 여인이 가로되, 어찌 반드시 군자(君子)만 부르는고 하고 이에 읊어 가로되,

 

낙동강 위에서 님을 만나고

보제원 두에서 님과 여의니

복사꽃도 지면 자취 감추는데

어느 세월 어느 때인들 내 님 잊으랴.

 

이렇게 읊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나이다' 하매 내 그 시를 듣고 그의 결연히 죽을 것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게 하였더니, 이미 누암강에 투신 자살한지라, 내 아들이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두어 달 만에 죽었도다. 내 또한 이 일이 있은 후로 때를 만나지 못하고 장차 늙어가니, 부자의 사이에 오히려 이러하거든 하물며 다른 이에게 가히 적원(積怨)할 수 있으랴." 하더라.

 

조선 영조 정조 때 부묵자라는 사람이 엮은 <파수록>에 실린 한 이야기다. <파수록>에는 이처럼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나 속담, 전설, 음담패설 등이 담겨 있는데, 책 이름 '파수록(罷睡錄)'이란 말처럼 잠을 깨울만큼 재미 있는 글들이 많다.

 

문장은 요즘 사람들에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만연체로 이루어졌다. 인용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체가 한 문장이다. 액자 구성으로 서술된 거라 처음부터 줄거리에 집중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내용이 재미있다. 중앙정부 고위직 장관이 전하는 이야기다.

 

그가 영남지역 도지사를 하고 있을 무렵 아들이 기생첩을 사랑하였는데, 자기가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도 아들이 그 기생첩을 가까이 하자 아버지인 재상이 한마디 했단다.

 

"야, 이눔아! 늘 기생을 옆에 끼고 있는 자를 어찌 사대부라 부를 수 있겠느냐?" 하고 아들의 기생첩을 쫓아보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재상이 아들의 애인이 떠날 때 뭐라고 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갸가 가면서 뭐라 말 안 하더나?"

 

아들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별로 다른 말이 없었사옵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뜸을 들이가가 다시 말을 이었겄다.

 

"사실 갸가 수년 동안 내 수발을 든 거 사실 아입니꺼? 근데 갑자기 떠나라 카이 갸가 얼매나 마음이 아팟겠십니꺼. 그 씁쓸한 마음을 달래려고 글을 짓겠다며 운을 띄워 달라더군요. 그래서 군(君) 자를 불러주었는데 어찌 군자(君子)만 부르느냐며 퇴박을 놓더군요. 그러면서도 갸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아들의 기생첩이 읊은 시는 이랬다.

 

洛東江上初逢君(낙동강상초봉군) 낙동강 위에서 처음으로 임을 만나

普濟院頭更別君(보제원두경별군) 보제원 머리에서 임과 다시 헤어지네

桃花落地紅無跡(도화낙지홍무적) 복사꽃 떨어져 붉은 빛 흔적 없지만

明月何時不憶君(명월하시불억군) 달 밝으면 어느 때인들 임 생각 않으리

 

 

이 시는 사실 기녀 도화(桃花)의 시 '泣別北軒(읍별북헌)'의 내용이다.

 

아들의 첩이 이렇게 시를 읊고 떠났다고 하자 재상은 덜컥 겁이 났겠다. 죽음을 암시한 글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랫것들을 시켜 갸를 찾았더니 남한강 상류 충주 누암감에서 자결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도 갸를 잊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병을 얻어 두 달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아들을 그렇게 보내고 재상 자신도 시절을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나이 들어 가니 사람 간에 원한을 쌓는 일이 얼마나 허무한 짓인지 말하는 것이다. 부자 간에도 그럴진대 하물며 남과의 관계에서 원한 살 일은 더더욱 조심하란 얘기렷다.

 

이 글은 서울대 구인환 사범대교수 가 엮고 신원문화사에서 펴낸 <촌담해이>란 책에 수록된 것인데, 이 책에는 '파수록' 뿐만 아니라 태평한화, 명엽지해, 진담록, 성수패설, 교수잡사, 어수록 등 11개의 설화집이 담겼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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