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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은 현충일. 백과사전에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과 국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한 기념일"이라고 되어 있다. TV를 보니 이명박 대통령도 현충원에 참석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선열과 호국영령 앞에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고 추념사를 읊었다. 다행히 어디에 글을 써서 남기는 일정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현충일 하면 6.25전쟁이 떠오르고, 임진왜란 정도까지 생각이 확산되긴 한다. 나 어렸을 적엔 현충일이 아니라 6월만 되면 TV고 영화고 전쟁 이야기로 도배를 했다. 학교마다 반공을 소재를 글짓기에 표어, 포스터 작성을 위해 부산했다. 괴물 같은 북한 괴뢰군을 무찌르는 국군장병 아저씨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밀려오는 개미같은 중공군을 따발총으로 무찌르는 미군도 멋있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가면서 전쟁이라는 것이 아군과 적군의 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됐다. 한국전쟁 때만 해도 그렇다. 군인들보다 더 희생당한 이는 민간인이었다. 이때 남한에선 38만 명이 죽었고 남북한 합치면 100만 명은 족히 될거라는 추정이다. 단 3년만에 말이다.
어쨌기에 한국전쟁에서 민간인이 이렇게 많이 희생당했을까.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나 '웰컴투 동막골' 등의 영화에서 알 수 있듯 전쟁은 민간인을 가만 두지 않았다. 국군이 점령하면 민간인을 모아 빨갱이라고 총살하고, 인민군이 점령하면 또 민간인을 국군에 동조했다고 가만 두지 않았다. 힘없는 민간인이 이래저래 총든 사람들에 휘말리면서 희생은 더 컸다. 보도연맹 사건은 대표적이다. 밥 한 끼 챙겨먹으려고 가입했다가 국군에게 붙잡혀 단체로 총살 당한 일이 어디 한둘이랴. 내 고향 진주 평촌에도 고개 넘어 저수지 쪽에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총살당했다는 애길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현충일 하면 전쟁중에 장렬히 전사한 국군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총든 사람들로부터 억울하게 희생당한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현충일이 무슨 날이냐"는 질문에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날"이라고 교과서답게 대답한다. 학교에서 당연히 가르친 대로 답을 했을 것이다. "그런 군인들에 의해서 죽은 우리 같은 민간인도 많이 있단다." 아이는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전쟁영화를 봐도 군인끼리 총질하다 저들끼리 죽지만 민간인이 죽는 꼴은 별로 보이지도 않은 데다 전쟁통에 민간인이 군인보다 더 많이 희생됐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봐, 총을 든 군인이 총싸움하다 죽은 것이 억울하겠니, 아니면 총도 없고 아무런 무기도 없이 또 죄도 없이 끌려가 총살 당한 민간인이 억울하겠니?"
"그러니까 오늘은 태극기에 검은 띠를 달고 묵념하는 것은 전쟁 때문에 희생당한 남북한 군인을 위하기도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을 위해 더 많이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우리는 태극기를 통해 전쟁통에 돌아가신 억울한 영령들을 위로하고 미군에 의해 83명이나 학살당한 곡안리로 향했다.
마산 진전면 곡안리는 한가로웠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꽃혀있었다. 6.25때 많은 분들이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곡안리 재실이 어디 있는지 마을 어르신에게 물었다. 재실이 두 개란다. 이씨 재실이 있고 김씨 재실이 있는데 김씨 재실을 말하는가 하면서 가던 반대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킨다. 할아버지가 가리킨 대로 돌담 골목길 사이로 빠져나가니 좀 큰 길이 나왔다. 그 길로 쭉 올라가니 재실같은 건물이 보인다.
가까이 갔더니 입구 옆에 김씨 성의 비석이 보인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50대로 보이는 아저씨 두 분이 일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6.25때 주민들이 총 맞아 돌아가신 곳 맞습니까?" "그~어는, 여~가 아이고 저~짜... 여기선 안 보이네..."하면서 마을 건너편으로 손가락을 가리킨다. "아, 그래예..."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는 데 아내와 아이들이 불평이다. 좀 제대로 알고 오지 하는 원망이 섞였으리라. 그렇잖아도 이 더운 날에...
김씨 재실을 빠져나와 우리는 다시 마을 사잇길로 가로질러 이씨 재실로 향했다. 피곤해도 아내와 아이들은 애써 막내에게 손그네도 태워주며 나의 뒤를 따랐다.
좁은 논길을 따라 걷는 것이 힘겨웠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보다 막내를 데리고 오던 아내가 결국 돌아가자고 한마디 던진다. "저기 보이제. 저기다. 지원이는 내가 업으께."
이씨 재실은 김씨 재실보다 규모가 컸다. 재실로 가는 길 입구에서부터 비석이 안내를 한다. '성주 이기석 순국지지'. 저곳이 6.25때 그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곳이란 말이지.
재실엔 문이 잠겨 있었다. 김주완 부장이 옆집에 이야길 하면 열어준다고 했는데 굳이 그럴 것 까지는 없겠다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이곳이 아침에 설명했던 그 장소라는 것만 확인시켜주면 될 것 같았다. 입구 옆에 있는 두 그루의 앵두나무에는 빨간 앵두가 흐드러지게 맺혀있었다. 막내가 자꾸 땅에 떨어진 앵두를 집어먹으려하자 빨리 기념촬영하고 가잔다. 앵두 좀 따먹고 가자고 했더니 아내가 "그 앵두에는 죽은 사람 영혼이 들어있어서 먹으면 안된다"며 만류한다. 아, 나참... 할 수 없이 벌써 저만치 내려간 아내와 아이를 따라 곡안리 이씨 재실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돌아가는 길에 김부장이 일러준 대로 황점순 할머니를 찾아갈까 했는데 막내가 계속 울어대는 바람에 차로 바로 갔다. 차에 가서야 막내는 제 엄마 젖을 물고 곤히 잠이 든다. 에구 이놈...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현충일과 곡안리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8월 11일, 주민들이 이씨 재실에 모여 피란가기로 했는데 미군 전투기가 나타나 기총소사로 할머니, 할아버니, 부녀자와 아이들 83명이 한꺼번에 총에 맞아 죽게되었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아까 봤제. 그 동네 할아버지들. 그 할아버지들의 아버지 엄마, 누나 동생이 비행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노?"
그러나 너무나 평화스런 마을 분위기 탓이었을까. 아이들은 이 마을에 그런 끔직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대신 아내만 "그렇나. 에구 어쩌나"하면서 맞장구를 쳐준다.
아이들에게 다시 확인하듯 현충일에 대해 물었다. 오전 내내 세뇌교육하듯 강조해서인지 아이들은 아빠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준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날." 운전대를 잡은 내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