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텔링)용다리 연가(戀歌)(4)
(지난 줄거리) 사랑싸움을 하던 연화와 윤석은 옥신각신하면서 진주성 앞 고목 옆을 지나다 갑자기 형성된 웜홀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고려시대 진주 군수의 집 별당 화연의 방과 돌쇠가 기거하는 행랑채에 밝은 초록빛이 감돌더니 두 사람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납니다.
돌쇠가 10년을 화연의 아버지인 이 군수의 집에 들어와 솔거노비로 살았지만 화연과 돌쇠는 상전과 하인 이상의 관계였던 적이 없었는데 몸에 변화가 일어난 이후론 서로 스치기만 하여도 이상한 끌림을 느낍니다. 서로 피부가 닿기만 하면 두 사람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던 영상을 공유합니다.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매일 밤마다 별당으로 이어지는 골목 담벼락 아래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담장 끝에서 지켜보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화연이 그것을 눈치채고 돌쇠에게 이야기하자 돌쇠는 불안해집니다. 천한 종놈이 언감생심 지체 높은 군수의 딸을 가슴에 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한 때에 평소 자신을 잘 따르던, 같은 솔거노비인 곱단이가 찾아와서는 큰일이 났다며 하염없이 울먹입니다.
……………………………………………….
돌쇠는 어젯밤 화연아씨와 자신이 함께 있는 것을 본 그 그림자가 오늘 아침 주인나리에게 고변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불호령이 떨어졌을 테고 그 불호령을 들은 곱단이가 먼저 쫓아와 자기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리라. 돌쇠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봤습니다. 상놈이 언감생심 밤마다 상전인 아씨를 마음에 품고 포옹까지 하였으니 목숨을 부지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과욕이리라.
돌쇠는 멍석말이든 곤장을 맞든 그렇게 고통 속에서 목숨이 다하더라도 후회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연유에서 아씨와 이렇게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밤마다 만나며 짜릿한 사랑을 맛보았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했기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다만, 돌쇠는 곱단이에 대한 미안함은 금할 길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한 집에서 함께 노비로 생활하면서 서로 정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곱단이가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안방마님에게 둘이 혼례를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할 참이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돌쇠의 눈에도 핑그르르 물방울이 맺히더니 귓불 타고 목으로 떨어졌습니다.
“오라버니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도망갈까?”
“도망간다고 해결이 되겠니? 그러고 니가 도망은 왜 가?”
“이제 헤어지면 영원히 오라버니를 못 볼 텐데 그러고 어떻게 살아? 그럴 바에야 산속에 숨어 살거나 아니면 죽는 게 낫지.”
돌쇠는 곱단이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목숨까지 걸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무슨 소리냐? 넌 꿋꿋이 살아야지. 내 몫까지 보태서 오래오래 살아야지.”
곱단이는 돌쇠가 그래 당장 이 집을 떠나 멀리 도망이라도 가자고 말해주길 바랐는데 자기 몫까지 살라고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에 의아해졌습니다.
“오라버니, 무슨 말 하는 거야? 내가 아씨를 따라 나주에 가게 되었는데 오라버니 몫까지 살라니?”
“……?”
돌쇠는 곱단이 얼굴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곱단이가 울면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 어젯밤 정체 모를 그림자에게 들킨 것 때문이 아니라 서로 헤어지게 된 것 때문이구나. 그렇게 상황파악이 되고 나니 돌쇠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피었습니다.
“오라버니는 나랑 헤어지는 게 좋은 거야? 슬픈 거야? 울었다가 웃었다가. 왜 그래?”
곱단이는 돌쇠가 밉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툇마루에 돌아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더 크게 울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어젯밤 아씨가 봤다는 그림자는 사람의 그림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돌쇠는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쓴웃음을 또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내일이면 나주 목사의 아들이 장가를 들려고 집에 올 것으로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 갑갑해졌습니다.
내일 있을 혼례 준비를 하느라 온 집안이 어수선하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화연은 종일 방안에만 있었습니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했습니다. 이미 돌쇠에게 마음이 가버린 터라 아무리 나주 목사의 아들이 멋있는 총각이라 해도 손톱만큼도 화연의 마음에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일이면 그 나주 도령과 혼례를 치러야 하고 그를 따라 나주로 가야 합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화연은 화연 대로 돌쇠는 돌쇠대로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안 보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정이 되었을 무렵 화연은 방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으흠.”
화연은 댓돌에 놓인 꽃무늬 갖신을 신으려다 헛기침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화연아, …….”
이 군수는 딸의 표정을 오랫동안 살피더니 작심한 듯 이야기를 꺼냅니다.
“화연아, 내일이 혼례인데 이제 돌쇠를 그만 만나는 게 좋을 듯하구나.”
화연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떻게 이 사실을? 그러다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아버지였구나 하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태 일언반구 말씀이 없었을까?
“벌써 돌쇠를 잡아다가 혼찌검을 내고 싶었다만 혼사를 앞두고 소문이 나서는 안 되는 일. 니가 스스로 자제해주길 은근히 바랐다.”
“…….”
“그런데 니가 오히려 더 돌쇠를 찾는 것 같아 이제 더는 두고 볼 수 없구나. 화연아, 니가 마음을 접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돌쇠를 만나거든 잘 이야기하거라.”
아무리 소문이 나서 안 될 일이긴 하지만 아버지께서 이 정도로 자신과 돌쇠를 생각해주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이 깨끗하게 마음을 정리하면 아버지도 돌쇠를 벌주거나 어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안채로 건너가는 것을 보고 화연은 돌쇠가 밤마다 찾아오는 골목길로 갔습니다. 이번엔 돌쇠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돌쇠야, 이런 우리의 만남도 이게 마지막이구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겠지. 나도 너의 마음같이 헤어지기 싫지만 나로선 어찌할 수가 없구나.”
화연은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돌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림자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돌쇠가 알게 되면 더는 이 집에서 일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씨, 전 아씨가 없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둘이 어디라도 도망을 가서 살까요?”
돌쇠는 이렇게 말하고서 아침에 곱단이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도망간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돌쇠는 가슴이 갑갑해져 옴을 느꼈습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마주 보고 서 있었습니다. 여전히 멀리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적막을 흔들며 번져왔습니다. 담장 위에 앉아있던 고양이는 지겨운 듯 일어서서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켜고는 담장 끝으로 걸어갔습니다.
“돌쇠야, 우리 다음 생에는 같은 신분으로 태어나서 꼭 다시 만나자.”
화연은 눈물을 훔치면서 별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돌쇠는 우두커니 선 채 달려가는 화연아씨를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다음날, 점심나절께 나주에서 온 신랑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때맞춰 풍악이 울렸습니다. 음악에 맞춰 무용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었고 마을 사람들은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사랑채 대청 위에는 이 군수와 나주 목사, 그리고 초청받은 지체 높은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이제 곧 혼례가 시작될 터이니 다들 준비하거라.”
이 군수의 말을 시작으로 마당은 순식간에 혼례식장으로 정돈되었습니다. 돌쇠는 사랑채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가지 않고 행랑채 옆 문앞에 서서 불안한 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그때 돌쇠는 혼례식장으로 들어서려는 신랑과 마주쳤습니다. 신랑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외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질투가 날 정도로 준수한 얼굴입니다.
돌쇠의 가슴이 또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신랑 역시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돌쇠를 보고 일부러 근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신랑의 길 안내를 맡은 이가 돌쇠에게 목소리를 깔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놈 무엄하구나. 썩 비키지 못할까?”
(다음 주 5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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