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텔링)용다리 연가(戀歌)(마지막편)
(지난 줄거리) 이번 연재 ‘용다리 연가’는 상황 묘사를 좀 더 디테일하게 하다 보니 연재 편수가 딴 스토리보다 길어졌네요. 대학 1년생인 연화와 윤석이 웜홀을 통해 과거로 빨려 들어가면서 화연과 돌쇠라는 신분 차이가 확연한 두 인물 속으로 각각 들어간 게 1편의 이야기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 예전과 전혀 딴판의 의식을 지니게 되는데 실제 자신의 영혼과 미래의 영혼이 혼재하게 되지요.
서로 가까이 있게 되거나 살갗이 닿으면 미래의 영상이 머릿속에 비치는데 두 사람은 이것을 즐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지요. 그런데 진주 군수의 딸인 화연은 곧 전라도 나주목사의 아들과 결혼하게 될 몸이라는 점이 연화에게나 돌쇠에게 안타까운 현실이 됩니다.
혼인을 목전에 두고 두 사람이 밤마다 만나는 것을 화연의 아버지가 알게 되지만 소문이 두려워 자연스레 해결되길 바라고 지켜봅니다. 하지만 혼례식 전날까지 밤마다 두 사람이 만나자 군수는 화연에게 더는 돌쇠를 만나지 말라고 이릅니다.
다음날, 혼례식이 시작되고 돌쇠는 사랑채 입구에서 외모가 아주 준수한 나주도령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돌쇠는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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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쇠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습니다. 이 순간 이후 어차피 아씨를 만날 수 없다면 살아있을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주먹을 너무 세게 쥐어 그랬는지 양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신랑 입장하시오!”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쇠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 신랑에게 해코지했다가는 화연아씨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자 쥐었던 주먹에서 힘이 빠져나갔습니다.
“썩 비키지 않고 무얼 하느냐?”
신랑의 옆에 선 사내가 굵은 목소리로 돌쇠에게 쏘았습니다. 돌쇠는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례식장으로 들어가던 신랑의 뒷모습을 보던 돌쇠의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습니다. 돌쇠는 매화나무 위에 올라가 담장너머로 혼례를 지켜보았습니다. 나주도령과 마주선 화연도 멀리 담장 너머로 나무 위에서 쳐다보고 있는 돌쇠를 느끼면서 혼례를 치렀습니다.
이렇게 혼례가 끝나고 화연과 나주도령은 신방에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신방 앞을 오가며 두런두런 얘기도 나누었지만 돌쇠는 멀찌감치 떨어져 아씨가 다른 남자와 있을 신방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오라버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내 이럴 줄 알았어.”
곱단이 역시 풀이 죽은 채 터벅터벅 걸어오며 신방으로 들어가는 중문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돌쇠에게 말했습니다.
“오라버니도 내가 내일이면 아씨를 따라 나주에 간다니까 슬픈 모양이구나. 하지만 걱정마.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다시 만날 테니까.”
돌쇠의 귀에는 곱단이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건성으로 응응하고 대답은 했지만 돌쇠 마음의 눈은 줄곧 신방을 향해 있었습니다. 옆에서 곱단이는 뭐라고 조잘대고, 나름 돌쇠와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까지 흘리며 말을 하고 있는데 돌쇠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답할 기력마저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곱단이는 내일 아씨를 모시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며 돌아가고 돌쇠는 여전히 초승달 희미한 빛을 밟으며 마당을 왔다갔다 거닐었습니다. 숲속에서 부엉이 소리가 몇 번 울리고 날이 희끄무레 밝아왔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화연아씨가 나주도령을 따라 멀리 떠납니다. 돌쇠는 눈물로 멍이 든 가슴을 무릎에 파묻은 채 아침해를 맞았습니다.
아침부터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집안은 물론이고 온동네에 퍼졌습니다. 가솔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잠시 느려지더니 다시 어수선해졌습니다. 아씨가 나주도령을 따라 대문을 나섰습니다. 주인마님을 비롯해 안방마님과 여러 사람들이 배웅을 하고 있습니다.
가마 창문을 열고 뒤돌아보던 화연은 여러 사람 중에서 돌쇠를 찾았습니다. 그러다 바로 담장 너머로 보고 있는 돌쇠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화연의 눈도 잠을 못자 그런지, 밤새 울어서 그런지 벌겋게 핏발이 서 있었습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순간이지만 많은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둘이 동시에 피식 입가에 웃음을 지었습니다. 눈물은 그대로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화연아씨가 나주로 떠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돌쇠는 밥을 전혀 먹지 못했습니다. 함께 방을 쓰는 행랑아범은 돌쇠가 곱단이 때문에 넋을 놓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의 운명은 주인을 따라 가는 거란다.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거라.”
그런데 이 시점, 집안이 어수선해졌습니다. 행랑아범은 주인마님을 따라 멀리 출타를 했습니다. 한동안 집안 분위기가 숙연해지는가 싶더니 아씨가 나주도령을 따라 떠난 지 닷새가 되던 날에 주인마님과 함께 돌아온 것입니다.
돌쇠는 미칠 듯이 기뻤습니다. 곱단이가 먼저 달려와 돌쇠의 손을 잡고 얼쑤 춤을 추며 기뻐했지만 돌쇠는 곱단이가 화연아씨인 양 덩달아 기분이 좋아 춤을 추었습니다.
화연도 돌쇠를 보는 순간, 서로 얼싸안고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재회의 기쁨에 마음이 콩닥거렸습니다. 곱단이가 먼저 돌쇠 손을 잡고 저러는 것이, 그간의 관계를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좀 얄밉기는 했습니다.
그날부터 이제 밤마다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계산은 오산이었습니다. 화연은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방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엄명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화연아, 다시 돌쇠를 밤마다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말거라. 예전엔 소문이 무서워 그랬다만 만약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돌쇠를 멍석말이시키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나주로 시집간 첫날 밤, 잔치가 끝날 쯤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던 신랑이 갑자기 숨지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된 화연. 돌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신랑을 잃은 슬픔보다 기쁨이 앞서 가슴 두근거렸는데 아버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가슴에 무거운 바위를 얹은 듯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돌쇠는 밤마다 담장 아래로 나와서 화연을 기다렸습니다. 부엉이가 몇 번을 울고 난 뒤에야 돌쇠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행랑채로 돌아와 눈을 붙였습니다. 이 같은 일이 매일 되풀이되었습니다.
돌쇠는 곱단이로부터 화연아씨가 벌써 일주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돌쇠 역시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아씨의 건강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쇠로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화연아씨의 방에서 안방마님의 통곡이 들려왔습니다. 모두 아씨가 결혼하자마자 청상과부가 되어 시집을 떠나 온 게 짐이 되어 남편을 그리다가 몸이 쇠약해져 숨졌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화연이 죽었다는 데도 아버지인 이 군수는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군수는 돌쇠에게 화가 났던 거였습니다. 오전 내내 방에서 돌쇠를 어찌할지 속으로 화풀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냥 둘이 멀리 보내어 살게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이 군수로서는 딸의 돌쇠에 대한 정이 이리 깊은 것인 줄 몰랐습니다. 만나지 못하게 하면 자연히 옛날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화연의 죽음으로 가장 상심이 큰 사람은 돌쇠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무엇보다 갑갑했습니다. 돌쇠는 화연아씨가 나주도령을 따라 대문밖을 나서던 그때보다 더 슬픔에 북받쳤습니다.
화연의 죽음은 남편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져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남편을 따라 간 것으로 외부에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치를 때 나주목사와 전국의 벼슬아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셋째날 탈상을 하고 화연의 시신은 상여를 타고 대문밖을 나섰습니다. 가솔과 수많은 사람들이 상여를 따라갔습니다. 돌쇠도 상심한 채 상여를 따라갔습니다.
에호 에~호 에가리 넘자 에~호
세상천지 만물 중에 사립밖에 또 있던가
에호 에~호 에가리 넘자 에~호
여보시오 시주님 내 말 잠시 들어보소
에호 에~호 에가리 넘자 에~호
아버님 뼈를 타고 어머님 살을 빌려
에호 에~호 에가리 넘자 에~호
칠성님께 명을 빌고 석가여래 복을 빌어
에호 에~호 에가리 넘자 에~호
세상탄생 나 가지고 한두 살에 철을 몰라
에호 에~호 에가리 넘자 에~호
부모 은공 내 못하고….
상여가 용다리를 지날 때였습니다. 돌쇠는 다리 아래를 우연히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이미 사람이 아닌 듯했습니다. 그런가 싶더니 어느새 물속의 자신이 아씨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씨는 물속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아씨!”
돌쇠는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습니다.
“아씨, 가지 마요. 가지 마요. 엉엉.”
돌쇠가 하도 서럽게 울기에 다른 사람들도 상여를 따라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아무리 자기 주인의 죽음이 안타깝기로서니 노비가 저리 서럽게 우는구나.”
상여행렬이 다 지나도록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돌쇠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였습니다. 서서히 초록빛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동네를 빙빙 돌아다녔습니다. 돌쇠의 이러한 행동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다시 초승달이 찬바람에 오들오들 떨면서 구름 뒤로 들어가려던 그때였습니다. 돌쇠는 넋을 잃은 채 용다리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연화야, 제발 돌아와. 사실 난 너만 사랑하고 있어.”
돌쇠가 용다리에 도착해 아래로 내려다보았습니다. 구름에 반쯤 얼굴을 가린 초승달 희미한 그 빛에 물속 그림자가 일렁였습니다.
연화의 모습입니다. 웜홀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그 때의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돌쇠의 몸이 서서히 초록빛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연화야~.”
돌쇠는 용다리 앞 고목나무에 기댄 채 초승달만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그날 밤 숲속의 부엉이는 밤이 새도록 부엉부엉하고 울었습니다. 다음날 마을 사람 어느 누구도 돌쇠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돌쇠는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다만 곱단이가 매일 밤 고목나무 아래에 와서 하늘을 보기도 하고 물속을 들여다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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