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텔링)역녀(驛女) 월명(3)
(전편 줄거리)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한 초겨울 역녀 월명은 다른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이후에도 공식 업무가 끝나는 유시반각까지 기다렸다가 퇴근할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옵니다. 경주에서 출발해 나주로 가는 파발관원인데 업무 마감시각 안에 도착하려다 너무 지친 나머지 당도하자마자 말에서 떨어집니다.
월명은 말을 진정시키고 관원을 보았는데 여느때와는 다른 감정을 느낍니다. 파발관원이 식사대접을 청하자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식사를 합니다. 첫눈에 반한 파발관리 수영은 다음날 나주로 떠났고 다시 만날 것이라고 전혀 생각도 않았는데 다음날 저녁 경주로 돌아가던 길에 다시 함양으로 옵니다.
좋아하는 마음은 있었어도 기대하지 않았던 만남이어서 더욱 반가웠지만 월명은 오히려 자신의 마음과 달리 수영에게 얄밉게 행동합니다. 수영이 처음엔 자신이 착각을 하고 무례하게 대했나 생각이 들어 죄송한 마음을 나타내는데 월명이 짓궂은 장난을 쳤다는 것이 드러남으로써 서로의 관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날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월명의 집으로 간 수영은 월명의 아버지지로부터 집에서 자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월명의 아버지도 수영에게 관심이 간 것입니다. 밤늦도록 막걸리를 주거니받거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어느새 장인, 사위 하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열흘 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경주로 떠났던 수영은 약속대로 열흘 후 함양으로 아예 이사를 옵니다. 여기서 거주하며 장사를 시작한 수영은 파발꾼의 인맥을 살려 전국을 대상으로 한 행상을 시작합니다. 2년 만에 제법 많은 돈을 번 수영은 정식으로 월명에게 청혼하여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열흘 간의 신혼생활을 행복하게 보낸 마지막 날 수영의 고향 경주에서 편지가 옵니다. 편지를 본 수영의 얼굴에 어둠이 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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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보거라. 멀리 있으니 자주 근황을 알 수도 알릴 수도 없어 마음이 편치 않구나. 각설하고,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열일을 제쳐놓고 속히 집으로 오길 바란다.”
아버지의 친필 편지였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급하였는지 글씨도 거의 초서에 가까웠습니다. 편지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멀리 함양 처가에서 사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속내가 들어 있어 수영은 죄송하면서도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는 아버지가 서운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월명이 수영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위독하시답니다. 급히 오라는 전갈이군요.”
“어떻게 위독하시던가요?”
“그것까진 서찰에 쓰여있지 않아요. 좀체 이런 편지를 쓰지 않으시는 아버지께서 짤막하게 글을 써서 보내신 걸 보면 어머니 건강이 몹시 안 좋은가 보오.”
“여기 걱정은 마시고 얼른 가서 어머니를 살펴드리세요.”
수영은 아내 월명을 꼭 안았습니다.
“어머니 건강이 좀 나아지면 바로 오겠소. 나 없는 동안 건강 잘 챙기고 아버님도 잘 보살펴드리세요.”
장인에게도 사정을 이야기한 수영은 마구간에서 말을 꺼내어 올라탔습니다. 편지를 전해줬던 친구 득수와 함께 떠났습니다.
남편이 떠난 자리가 휑한 것처럼 월명의 마음도 뻥 뚫린 듯하였습니다. 시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데도 너무 멀리 있다 보니 찾아뵙지 못하는 게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지 월명은 장독간에 정한수를 떠 놓고 매일 밤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치성을 드려도 시어머니에게 차도가 없는 건지 남편은 돌아오지도, 편지를 보내지도 않아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월명은 금세 올 것 같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서서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병구완을 하다 남편마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너무 궁금하고 답답해 경주로 나설까 하다가 또 행여나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면 서로 길이 엇갈릴 수도 있는 일이므로 선뜻 나서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다 지나고 따뜻한 봄이 되었습니다. 산에 들에는 온갖 꽃들이 다시 생명을 얻어 피어나고 나비와 새들이 날아들었습니다. 새순이 돋는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몰려와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었습니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월명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그래, 이제 봄이 되었으니 어머니의 건강도 새생명을 얻은 것처럼 쾌차하실 테고 남편도 경쾌한 말발굽소리를 내며 돌아올 거야.’ 월명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얘야, 이 죽 조금이라도 먹거라. 속이 든든해야 기운도 차리지.”
“죄송해요, 아버지. 목이 따가워 음식을 삼킬 수가 없어요.”
월명은 정한수 앞에서 치성을 드리다 한 번 쓰러진 뒤론 건강이 급격히 악화해 몸져누운 지 한 달이 다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시어머니의 건강을 기원하며 치성을 드린 지 한 달 보름만의 일이었습니다.
남편 수영에게선 두달 반이 지나도록 전혀 연락이 없습니다. 월명은 이제 날도 따뜻해졌기 때문에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찾아가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 근 석 달이 되었는데도 그이의 소식이 없으니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역장 나리께 사정을 하여 말을 타고 경주엘 다녀오겠습니다.”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거냐? 그리고 역마를 사사로이 이용하고자 청을 넣는다는 것은 역장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니 옳지 않은 일이다. 내가 경주로 가는 행상을 통해 서찰을 보낼 터이니 넌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몸조리나 잘 하거라.”
아버지 말씀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월명은 너무 갑갑한 나머지 자신이 직접 가지 않으면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하신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마음이 불안해서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이러다 더 병이 날 것 같아요.”
딸의 마음병이 더 심해질 거라는 말에 아버지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였습니다.
“알겠다. 그렇다면 채비를 할 테니 국밥집 둘금이와 둘금이 오래비랑 셋이 함께 다녀오너라.”
“예, 고맙습니다. 아버지.”
월명은 곧 남편 수영을 만날 수 있다는 기분에 몸이 훨씬 나아진 듯하였습니다. 월명은 바로 둘금 어머니가 운영하는 국밥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둘금이네는 월명네와 친척보다 더 가까이 지내는 이웃입니다. 월명은 기운도 없고 숨도 가빴지만 기쁜 마음에 아픈줄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아주머니, 아버지께서 한석이 오라버니랑 둘금이랑 함께 경주 가는 것을 허락하셨어요. 아주머니께서도 허락을 해주세요.”
“그리 좋으냐? 그 먼 길을. 지금 니 몸 상태로선 쉽지 않은 여행이 될 텐데….”
“괜찮습니다. 이제 기운이 솟는 것 같아요.”
국밥집 둘금 어머니의 반 허락을 받은 월명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넉넉잡아 닷새 후면 남편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았습니다. 어찌 기운이 났던지 월명은 둘금 어머니에게 국밥을 한 그릇 달라고 했습니다.
“죽도 제대로 못 먹는 니가 이 국밥을 삼킬 수 있겠냐? 최대한 부드러운 고기로 국밥을 떠줄 테니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거라.”
“네, 고맙습니다. 어머니.”
“하하하. 녀석. 늘 아지매 아지매 하더니 웬, 갑자기 어머니야? 하하하.”
월명은 둘금 어머니로부터 국밥을 건네 받고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월명의 속이 이상해졌습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뭔가가 식도를 타고 거꾸로 치솟아 올라오는 듯하였습니다.
“우웩!”
분명히 속에서 굵직한 뭔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듯했는데 그러나 아무것도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웩, 우웩!”
연거푸 토가 올라오자 월명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둘금이 어머니가 따라와서 등을 두드려주었습니다.
“얘가, 왜 이러냐? 먹은 것도 없다 하더니? 가만!”
둘금모는 뭔가 생각난 듯이 손가락을 짚었습니다.
“월명아, 달거리 끝난 게 언제냐? 혹시 임신한 거 아니냐? 아이구, 맞구만. 맞아!”
선뜻 대답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월명을 바라보며 둘금모는 경사가 난 듯 좋아라 하였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평상으로 다시 돌아가더니 손님들에게 큰소리고 말했습니다.
“손님들, 오늘은 내가 너무 기쁜 날이라 밥 더 드시고 싶은 분은 말씀하세요. 얼마든지 공짜로 더 드리리다. 내 딸이나 진배없는 월명이 임신을 했어요. 아이를 가졌단 말이오. 하하하!”
월명은 살며시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습니다. 아직 느낄 수는 없지만 이 속에 사랑하는 남편과 자신의 아이가 들어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아가, 이렇게 우리가 만나는구나. 너를 만나서 아주 행복하다.’ 월명의 입덧은 어느새 멎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다시 배가 고파졌습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간 월명이 국밥 앞에 앉아 숟가락을 뜨려고 하자 속이 다시 울렁거렸습니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성스레 담은 국밥을 한 술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일어서려니 괜히 둘금 어머니에게 미안하였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맛있게 국밥을 담아주셨는데 이렇게 먹지도 못하고….”
“괜찮아. 무슨 소리냐? 입덧을 하면 누구나 그런 것을. 혹시 따로 먹고 싶은 것은 없어? 이 아줌씨가 뭐든 다 해줄 테니 말해보거라.”
“아뇨. 없어요. 이제 집에 갈게요. 경주에 갈 채비도 해야 하고.”
“참, 그렇구나. 경주엘 간댔지? 임신 초기에 몸조리를 잘하지 못하면 애가 떨어지는 수가 있는데…. 조금 더 있다가 아기가 뱃속에서 자리를 잡고 나면 떠나는 게 어떻겠니?”
순간 월명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아기가 생겨 그저 행복하였던 것은 장거리 여행을 가야 하는 상황을 연결지어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꺼번에 할 수 없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자 월명은 갈등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소식이 너무나도 궁금해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데 뱃속 아기 때문에 장기간 여행을 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월명의 기분은 다시 우울해졌습니다. 남편을 보러 갈 기분에 날아갈 듯 기뻤는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하는 수 없이 아버지 말씀대로 경주로 가는 행상을 통해 기별을 넣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별을 넣은지 또 한 달이 지났습니다. 마당을 오락가락하며 모이를 쪼아 다니던 암탉들도 더위를 피해 마루 아래로 들어가 수시로 날개를 퍼덕거렸습니다. 월명은 매일같이 남편에게서 올 편지를 기다렸습니다. 마을 어귀까지 나가 기다리길 밥 먹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물론이고 편지를 전해줄 법한 행상들의 모습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월명은 다시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어쩌면 지난 한 달은 아이 때문에 버틸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밤마다 월명을 괴롭혔습니다. 뒷산 소쩍새가 울어 깊은 밤 적막을 몇 번이나 깰 때까지 잠들지 못하던 월명은 새벽녘 샛별이 떠오를 녘에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월명이 잠들었을 때 희한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안개 자욱한 길을 거닐고 있는데 갑자기 절벽이 나타나더니 남편의 몸이 절벽 아래로 쑥 빠져버리거나 또 다른 날에는 괴물이 나타나 남편을 덥석 잡아가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자신의 힘으론 역부족입니다. 꿈속에서 남편을 잃고 허우적거리다가 깨어 보면 벌써 햇볕이 창문을 열어라고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월명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히 맺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뒤숭숭한 꿈 때문에 대청마루에 앉아 고개를 떨어뜨리고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고 있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시선에 들어왔습니다. 월명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행상차림을 한 남자가 태양을 등지고 월명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반쯤 뜬 눈으로 들어온 사내를 보고 월명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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