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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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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을 계기로 형성된 ‘마산성신대제’(2)

행사진행 회의서부터 신목을 선창에 가져와 세우기까지의 과정


마산성신대제는 원형을 ‘별신굿’에서 찾는다. 여기서 별신이란 모든 신()을 일컫는 말로 산신과 목신, 성주, 용왕 등 모두 포함된다. ‘성신(星神)대제’라고 명명하고도 사당에 모셔진 신장은 ‘별신장군’, ‘성신대장’, ‘배선장군’ 등으로 불러 전래의 ‘별신(別神)’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성신대제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제의 흐름을 보더라도 남해안 별신제와 성격상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마산에는 예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는 조창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에 맞춰 별신굿과 유교적 의례가 결부된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


성신제는 1년에 한 번 여는 기제, 5년에 한 번씩 여는 중제, 10년에 한 번씩 여는 대제로 구분해 지내왔다. 마산문화원이 지난 2006년부터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대제다. 지난 917일부터 20일까지 성신대제가 거의 원형에 맞춰 재현되었다. 그 하나하나 절차를 따라가 본다.





성신대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맨 먼저 제관들이 모여 제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논의를 한다. 그것이 지난 95일 성신대제보존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제관들이 논의한 내용은 신목을 지정하는 문제, 제수 준비, 그리고 목도꾼을 어떻게 선정하느냐 등이었다.


참석자는 보존회장과 보존회 사무국장, 어시장중매인조합회장, 풍물단장, 수협이사, 축제위원, 조합감사와 상인회 임원 등이었다. 이들이 성신대제를 준비하고 행사를 치르는 핵심 구성원이다.





성신대제는 사흘간 지내게 되는데 본격적인 절차는 17일부터 시작했다. 오전 9. 김종석 중매인조합회장을 비롯한 4명의 제관이 마산어시장으로 제물을 구입해기 위해 나섰다. 어물전과 과일전 등을 들러 장을 본다.


장을 보는 제관들은 모두 입에 ‘하미’라는 흰색 한지를 입에 물고 있어야 한다. 제의에 쓸 음식이기 때문에 침이 튀어 부정을 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러니 손짓과 표정으로 물건 값을 물어보고 살 수밖에 없다. 제수용품을 살 때 특이한 점은 절대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상에 올릴 성스러운 것인데 값을 깎아서야 어찌 신들에게 정성을 다했다 하겠는가 하는 인식이 배어서일 테다.





제물을 준비하고 나서 1030, 제관들은 자산동 송림으로 향했다. 신목에 쓸 나무를 지정하기 위해서다. 신목은 다른 말로 별신대라고 한다. 별신굿에서 신대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인식이다. 무당집에서 굿이 있는 날 대나무로 된 신대를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신이 나무를 타고 강림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신대를 신간이라 하기도하고 혹은 ‘솟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솟대가 마을의 안녕을 위한 액막이 벽사의 역할인데 비해 성신대제에의 별신대는 신과 인간이 만나는 가교역할을 하는 상징이다. 단군시대 태백산 신단수처럼.


신목을 지정하게 되면 오방색으로 띠를 두르고 주변에 왼새끼로 꼰 새끼줄로 금줄을 친다. 금줄에는 흰색의 소지를 끼우는데 이 나무가 성신대제의 신목으로 쓰임을 알리기 위해 조금 큰 종이에는 ‘성신신목’이라고 표시한다.





신목을 지정하고 나면 성신제당으로 돌아온다. 제당은 ‘하당’으로 불렸다. 지금은 없지만 산에 있는 신당을 ‘상당’이라고 했는데 그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제관들은 낮 12시에 돌아와 어시장 수산물도매센터 옥상에 지어놓은 제당에 금줄을 쳤다. 이렇게 금줄을 치고나면 첫날 일정은 마무리가 된다.





다음 날 오전 930. 어시장 어디선가 풍물소리가 요란하다. 풍물단 한 무리가 줄을 지어 사물을 치면서 동네 곳곳 지신을 밟듯 휘젓고 다닌다. 동서풍물단이 옛 선창걸립패로 둔갑하여 길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길놀이의 목적은 뭐니뭐니해도 사람을 끌어모으는 일이다. 곧 주민들이 모여 큰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다. 풍물 소리에 어시장 상인들도, 사무실 사람들도 쭈뼛쭈뼛 내다본다.





10시부터 어시장 선창마당에선 선창걸립패를 비롯한 목도꾼들과 마을주민들이 모여 주민화합 한마당을 펼친다. 처음엔 그렇게 시끄럽다가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절로 어깨가 들썩이게 되는 게 우리네 전통 풍물이 아니던가. 앉아서 관람하던 주민들도 어느새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춘다.





30분 동안 풍물놀이 한마당이 진행되고 나면 목도꾼들이 오와열을 맞추기 시작하더니 한쪽 줄 목도꾼들은 전날 장을 보던 제관들처럼 입에 ‘하미’를 물고 어깨에 목도채를 걸었다. 목도채는 8개 그러므로 16목도다. 목도꾼이 16명이면 신목의 규모는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증에 의하면 옛 성신대제 때 14~15간 높이의 신목을 썼다고 한다. 현재 도량형으로 따지면 24~25미터가 족히 되는 크기의 나무다. 그러니 16목도꾼을 동원할 수밖에. 목도꾼은 모두 어시장 주민들로 구성됐다.





선창을 떠난 산신제 제관들과 목도꾼, 풍물패 일행이 11시 자산동 송림에 도착했다. 산신제관 일행은 신목 앞에 당도하자 우선 금줄을 걷어내고 제상을 차렸다. 이들은 신목을 무사히 선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로 산신제를 지내려는 것이다. 물론 주민들의 안녕과 뱃길 안전을 염원하기도 했다. 제상에는 젯밥 대신 흰쌀이 올랐다. 특이하다.


산신제가 시작됐다. 제주가 신목 앞에 꿇어앉아 술 한 잔을 올렸다. 그러자 참여자 모두 삼배를 한다. 삼배가 끝나자 제관은 술을 신목 주변에 뿌리고 제상에 올렸던 과일 등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어 고수레를 했다.


이러한 행위가 끝나면 목도꾼 중 한 명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찍는다. 물론 요즘 세상에 멀쩡히 있는 산의 나무를 베는 경우가 있을 수 없다. 그냥 나무를 하는 흉내만 내는 것이다. 신목은 행사 주최 측에서 미리 준비한 것을 쓴다. 솔가지를 쓸어내고 다듬어서 이제 모두 힘을 합쳐 가지고 내려가면 되는 일이다.





신목을 산에서 가지고 내려올 때 그냥 내려오지 않는다. 당연히 소리가 있다. 이를 목도소리라고 한다. 이 과정을 지역 기업이 2008년 펴낸 ‘몽고식품 100년의 발자취’에 소개되어 있다. 1954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대로 옮긴다.


420일 오전, 신목으로 정한 큰 소나무를 자른 다음, 운반하기에도 좋도록 도끼로 손질했다. 듬직한 재목을 메고 오는 데는 노동요가 필요했다. 이때 목도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성진 사설에 구슬픈 가락이 어찌나 장중하고 숙연했던지 주민들도 감동하고 말았다.


20여 명의 목도꾼이 산에서 재목을 메고 내려와 자산동회 마당에서 쉬게 되었다. 동회마당은 바로 몽고양조장 뒤편에 붙어 있었다. 휴식을 취하는 그들에게 금강(당시 몽고간장 김홍구 사장)은 선심을 썼다.


자산동 화산탁주 도가에서 막걸리 30여 말을 가져왔고 미리 돼지를 잡아 준비한 돼지수육을 푸짐하게 내놓았다. 목도꾼뿐만 아니라 선창의 객주들과 자산동민까지 몰려와 잔치판을 벌인 것이다.”





1140분이 되어서야 자산동 송림 아래 타작마당에 이르렀다. 여기서 중천맥이굿을 한다. 무녀가 두 손을 모아 신목이 무사히 이동되기를 바라며 빈다. 이 짬에 목도꾼들도 목을 축이며 잠시 쉰다.





목도꾼들은 구성진 목도소리에 후렴을 하면서 다시 신목을 메고 산을 내려선다. 목도소리는 산에서 나무를 하여 내려올 때 여럿이 함께 힘과 보조를 맞춰야 하기에 ‘허여차~ 허여’하는 후렴구가 자주 반복된다.


가파른 산을 내려올 땐 느린 자진모리 박자에 발을 맞추고 평지면 휘모리에 발을 맞춘다. 목도꾼의 흥을 돋우기 위해 앞소리는 짧다.


“허여차~ 허여~ 허여차~ 허여~/헛디딜라 허여~ 허여차~ 허여~/발맞춰라 허여~ 허여차~ 허여~”





이렇게 목도로 신목을 선창까지 운반하고 나면 선창 하당, 즉 제당 인근에 신목을 세운다. 이를 별신대 세우기라고 한다. 별신대는 산에서 해온 나무 그대로 세우지 않는다. 별신대 끝에 가로목을 덧대고 가로목에는 다섯 개의 전발을 단다. 전발이란 한지에 싼 방울이다. 주먹만 하다. 전발과 함께 소지종이로 만든 성신기(무속 관습대로 종이를 오려서 만듬)도 달아서 별신대를 세운다.


별신대를 세운 후엔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뿌린다. 이윽고 풍물패가 한바탕 신명을 풀어낸다. 그런 후 제주가 신목 앞에 나와 술 한잔을 올리고 제를 지낸다. 산신제에서처럼 모두 삼배를 한다.(계속)


[관련기사]

조창을 계기로 형성된 ‘마산성신대제’(1)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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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대제. 이 명칭을 접한지는 제법 되었다. 아마도 2006년에서 2008년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지역 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탓(?)인데다 언론사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본격적으로 취재를 했을 때 느낌. 성신대제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그런 것과 많이 다른 그런 민속이었다.


마산 어디 단체에서 성신대제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것이 마산에서 옛날에 지내던 동제라는 정도였었다.


사실 이번에도 경남이야기 전통을 찾아서란 코너에 한꼭지로 소개할 소재를 찾다가 어시장축제의 한 코너로 별신굿을 한다기에 체크해뒀다가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별신굿은 안 하고 몇 달 전 통영 통제사 안에서 보았던 남해안 별신굿의 하나인 수륙새남굿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그 일부인 용선놀이. 남해안별신굿 문화재 보유자인 정영만 선생이 직접 무대에 올라 용선놀이를 하고... 아니 어떻게 된 거지?


다음날 출근해 성신대제 자료를 뒤져봤다. 왜 성신대제에 남해안별신굿의 용선놀이가 등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진도 구할 겸 마산문화원 임영주 원장을 찾아갔다. 인터뷰를 하면서 새로 얻게 된 사실들... 내겐 큰 충격이었다. 성신대제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방대해서 모두 다를 수는 없다.


줄이고 줄여 정리한 게 이번에 경남이야기에 싣는 3편의 글이다.


조창을 계기로 형성된 ‘마산성신대제’(1)

1760년부터 본격화된 별신굿 부침 겪다 중단…마산문화원서 원형 부활


지난 19일 창원시 마산어시장 일대에서 제14회 마산어시장축제가 열렸다. 어시장축제의 한 프로그램으로 ‘성신대제 별신굿’을 한다는 정보를 얻었기에 그것이 어떻게 시연되나 보고 싶었기에 찾아갔다.


무대가 설치된 축제장에는 많은 이들로 자리를 메웠다. 아마도 유명한 초청가수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한 번 앉은 자리 잘 일어서지도 않고 끝까지 지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덕분일지는 몰라도 관객들은 마산성신대제 별신굿이 무대에 올라도 열심히 관람하는 모습을 보였다.


별신굿이 시작되기 전에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이 무대에 올라서서 성신대제 별신굿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이번 무대에 오르는 것은 성신대제의 마지막 굿판으로 용선굿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 축제를 막 시작했는데 성신대제의 마지막 순서라니? 의아해하며 듣고 있자니 벌써 며칠 전부터 성신대제를 진행해왔다는 것이다. 자산동 산에 있는 나무 중에서 신목을 지정해 거기서 굿도 하고 어시장 활어센터 옥상에 있는 제당에서 제의를 지내고 선창에서 굿도 했단다.


그때 느낀 것이 성신대제가 간단한 전통민속행사가 아니구나 하는 거였다. 성신대제, 한자로 星神大祭라고 쓴다. 풀이하자면 별신에게 지내는 큰 제사라는 뜻이다. 국내 여러 곳, 특히 바닷가에는 많은 곳에서 별신굿을 한다.


별신굿 안에는 여러 굿들이 있다. 당맞이굿, 성주굿, 천왕굿, 군웅굿, 용왕굿…. 그런데 왜 바닷가 마을에서 별신굿을 많이 할까? 별신이 하늘에 떠있는 별을 신으로 숭상하여 지내는 것이므로 추측이 가능했다.





바닷가 사람들은 뱃사람들이 많으므로 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갔다가 어두워지면 별빛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돌아와야 하므로 별신굿을 지냈으리라. 그런데 이 추측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나를 1주일 지나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을 다시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별신이라고 해서 ‘성신(星神)’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산 이외 대부분 지역에선 별신을 한자로 ‘別神’이라고 쓴다. 직역하자면 ‘특별한 신’이고 ‘별이별 신’이다. 그제야 왜 별신굿 안에 성주굿, 청왕굿, 용왕굿 등 온갖 굿이 다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별신굿이 토템에서 비롯됐다는 추측은 누구라도 틀렸다 할 수 없겠다.


그러면 왜 마산에선 별신(別神)이라 하지 않고 성신(星神)이라 하였을까? 성신을 역사적으로 고증하면 1905년까지 올라간다. 이 해에 별신제가 크게 열렸는데, 별신대를 세우는 대신에 제당을 지어 신위를 모시면서 그 신위에 ‘星神位’라고 적은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전에는 별신이라고 써왔다. 그래서 1906년 황성신문엔 ‘別神’이라 표기하였고 이후에야 성신이 제대로 알려져 1928년 중외일보에서 ‘별신(星神)’, 1954년 마산일보가 ‘星神’이란 표현을 썼다.


마산에서 성신대제가 성행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고려시대부터 마산에는 조운제(漕運制)에 의해 지어진 조창이 있었다. 조운제는 지방 군현의 세곡을 받아 모아두었다가 일정 시기에 수도에 있는 경창으로 운송하는 하는 체제다.


그때만 하더라도 세곡을 배에 싣고 수도 경창으로 운반해야 했으므로 배가 사고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하도록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그러던 것이 태종 3년인 1403년에 조운제가 폐지되면서 공적으로 지내던 제의가 민간신앙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이후 영조 36년, 1760년에 조운제가 다시 시행되면서 남성동 일대 조창이 생겼다. 이곳은 주변 8개 읍면의 세곡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장시도 형성되어 사람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예전 같으면 조운선에 실은 공물이 탈 없이 경창까지 운송되도록 순풍제만 지냈을 테지만 장시의 형성으로 규모가 확대되어 제의에서 모시는 신도 다양해졌다.


다시 말해, 조운선의 무사항해뿐만 아니라 풍어, 마을 안녕까지 기원하게 되는 ‘별신’ 성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조창이 있다는 이유로 당시 관청과 민간이 공동으로 제를 올리게 되어 별신제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장시도 계속 번성하여 어시장이 형성되었고 조선후기엔 이 조창을 관리하기 위해 유정당이라는 건물도 지었다.


조창이 설치된 후 135년간 행사가 지속되어 오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다음해인 1895년 고종 32년, 조운제가 폐지되면서 조창도 폐창되고 다시 대제 의례는 희석되고 민간신앙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1904년 대폭풍우가 덮쳐 큰 피해를 보게 된다.


이때 민심은 별신제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신들이 노해서 이런 재해를 입게 되었다고 믿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인 1905년 지역의 유지들과 어시장 객주집단에서 성신대제를 계승 부활시키게 된다.


그해 음력 3월 28일 어시장에 신당(하당)을 짓고 ‘星神位’ 위패를 모시게 된다. 이것이 ‘성신대제(星神大祭)라는 명칭을 얻게된 계기다. 그래도 넓은 개념에서 보면 성신제도 별신제(別神祭)의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이때 이후론 매년 음력 3월 28일 기제를 지내고 5년에 한 번씩 중제, 10년에 한 번씩 대제를 지냈다. 그러다 1954년 크게 지낸 후부터는 대제, 중제가 없어지고 기제와 명절제사, 초하루제사로 축소되어 지내왔다. 1987년부터는 수협중매인협회장이 제관을 맡아 유교식을 기제사를 지내왔으며 2006년 이후 마산문화원에서 성신대제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해 대제의 원형을 발굴, 오늘에 이르렀다.


관민일체로 별신제가 크게 흥했던 시기는 1760년 영조때 마산조창이 생기고 이를 관리하는 유정당 낙성, 그리고 조운선이 첫 출항한 그 시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모습을 시로 나타낸 글이 있다. 김이건이라는 사람이 지은 ‘송조선가(送漕船歌)’다.


“뱃사공 수백 명 불러 모아서/뜰 안에 자리 주어 줄지어 앉히고는/먼저 위로의 음식 내려 마음을 격동하고/포구에서 전별할 때엔 기생들이 춤추었네/기생들이 행선악을 연주하자/가득 모인 사민들 모두 즐거워하네/다음날 아침 깃발이 포구로 나가/모든 배 점검하고는 북과 나팔을 불자/포성 세 발에 일제히 닻을 걸고는/밧줄 풀고 돛을 걸자 바람과 파도 잠잤네/백신이 호송하여 큰 바다로 나서서는/앞 노와 뒤 돛대 서북으로 향하여/무서운 여울을 지나도 끄떡 없었네”(‘마산 성신대제 연구’:마산문화원. 26p)





이 기록으로 보아 성신대제는 당시 제의를 지내고 뱃사람과 백성, 관리가 어우러진 큰 축제를 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전통이 지금 성신대제와 어시장축제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계속)


[관련기사]

 조창을 계기로 형성된 ‘마산성신대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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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텔링)효자 이평과 무량산 호랑이(해설)

이평이 살았던 고성군 대가면 유흥리와 충효테마파크를 찾아서



효자 이평에 얽힌 전설은 실제와 가상이 적절히 섞여 있는데, 이것은 마을 아이들에게 효를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1803년 고성군 대가면 유흥리에서 태어난 이평은 크게 벼슬을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각각 3년과 27개월 시묘살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전하고 마을 사람들이 이평을 나라에 효자로 추천했다는 일종의 연판장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효자로 ‘지정’ 받지는 못했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가산이 많이 기울었고 후손들이 힘들게 살았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효자 이평과 유사한 전설은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하나의 유형으로 굳어진 전설입니다. 효자와 호랑이가 친구가 된다거나 형제가 된다는 설정이지요. 사람과 호랑이가 이런 관계를 맺게 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효심이 지극해서 호랑이가 감동받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호랑이가 어리석어서 사람의 꾀에 넘어간 경우입니다.





고성군은 이평의 효경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대가면 유흥리 뒷산 일대에 충효테마파크를 조성했습니다. 이곳에 소개된 이평 전설을 읽어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뛰어난 효자 한 분이 이곳 삼계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성은경주 이씨며 이름은 평이라 하였다. 평소 효성이 지극했던 이평은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마을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뒤 봉화산 기슭에 장례를 지내고 묘 앞에 막을 지어 정성을 다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효자는 단순한 시묘살이 뿐만 아니라 밤이 되면 인근의 산골짜기에서 1개씩 돌을 져다 모아 묘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 효자의 효행담이 인근 마을에 전해지자 이 마을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고성읍 무량리 큰 서당 글꾼들이 이 효자의 소문을 듣고 하루 저녁에는 효자의 행실을 확인하고자 묘막에 와보니 막은 텅 비어 있고 효자는 간 곳이 없는지라 “소문만 널리 난 엉터리 효자다!”면서 막에 불을 지르고 가버렸다.


그때 효자는 마을 가까이 있는 선친의 묘를 둘러보던 중이라 묘막에 불이 난 것을 뒤늦게 알고 급히 뛰어가 보니 이미 다 타버린 뒤였다. 효자는 이를 자신의 정성이 부족함이라 여기고 그때부터 막도 없이 모친의 봉분 옆 맨땅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묘살이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효자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음인지 어느 날 밤부터 돌을 져다 나르는 효자 뒤에 한마리의 호랑이가 늘 같이 따라다녔고 끝내는 호랑이와 친하여져 효자와 같이 시묘도 하고 묘성도 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울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날 밤, 막에 불을 지르고 갔던 서당 글꾼들이 다시 찾아와 보니 봉분 옆 한 평 남짓한 시묘 터에는 눈이 전혀 내리지 않았으며 그 주위에는 사람 발자국과 나란히 호랑이 발자국이 있어 과연 소문대로 호랑이와 같이 시묘살이하는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감탄하며 태워버린 묘막을 다시 지어주었다. 그러나 이 효자는 끝내 그 묘막에 거처하지 않고 삼 년을 맨땅에서 시묘를 했다.


시묘를 끝내고 호랑이를 돌려보낸 어느 날, 비몽사몽간 효자의 꿈에 통영 원문재의 함정에 빠져있는 호랑이가 보이면서 구원을 요청했다. 효자가 즉시 원문재로 달려가 보니 이미 날은 밝기 시작하는데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고 몽둥이와 창을 가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둘러싼 함정 속에는 같이 있던 호랑이가 빠져 있었다.


효자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호랑이는 나와 같이 사는 내 호랑이요, 이 호랑이는 예사 호랑이가 아니니 해쳐서는 아니됩니다. 여러분의 요구가 무엇이든 다 들을 테니 호랑이를 살려 내게 돌려주시오.” 하면서 사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니, 어디 이런 정신나간 사람이 있어?” 하면서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그렇다면, 내 호랑이임을 증명해 보이겠소” 하며 함정으로 뛰어 내려가 “아이구, 니가 어찌하여 이런 곳에 빠졌느냐”며 머리를 쓰다듬으니 정든 개가 주인을 반기듯 효자를 따르니 이를 지켜 본 주민들은 크게 감복하여 그 연유를 묻고 호랑이를 구해주었다.


그 후에도 이 효자의 시묘정신은 더욱 극진해지고 효행담은 널리 알려졌으며 삼 년간의 시묘살이 중 호랑이와 같이 쌓아 올린 효성은 지금도 봉화산 기슭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때의 시묘터에는 1평 가량 잔디가 나지 않고 있다.


이 효자가 세상을 떠나자 유림 100사람이 뜻을 모아 효행비를 건립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나라에서도 효자라는 시호를 내려 그 자손이 소장하고 있다.”


테마파크에 소개된 이평 전설은 마을주민들이 세웠다는 불망비에 적힌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재미나게 읽도록 각색을 했겠지요.





이평 전설과 흡사한 전설에는 전남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에 전하는 호랑이 보은담이 있습니다. 간략히 소개하면, 옛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묘살이를 하는데 첫날 밤 호랑이가 나타나 묘를 한 바퀴 돌고선 상주를 지켜주었습니다. 상주는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가 무서웠으나 옆에서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고 해요. 호랑이는 밤이면 오고 아침이 되면 갔습니다. 3년 시묘살이가 다 끝날 무렵 상주가 꿈을 꾸는데, 그 호랑이가 나타나 자기가 지금 해남 무슨 동네에서 덫에 걸려 있으니 니가 오면 살고 안 오면 자신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상주는 상복을 입은 채로 배를 빌려 타고 호랑이가 일러준 곳으로 가니 꿈에서 본 대로 호랑이는 덫에 걸려 있고 포수들이 총을 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상주는 허둥지둥 달려가 포수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하고는 이 호랑이는 자기 호랑이라고 하였습니다. 포수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히 상주를 보다가 호랑이를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면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상주가 호랑이를 쓰다듬자 호랑이는 눈물을 흘리며 상주의 손을 핥았다는 겁니다.


이 전설은 1979년 진도에서 당시 81세 이덕순 씨의 이야기를 듣고 채록한 것입니다.(디지털진도문화대전)





충효테마파크는 삼계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입구까지는 승용차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차량 8대 정도 댈 수 있는 주차장도 있고요. 테마파크 산책로 입구에는 세 개의 안내판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성군 관광안내도이고 나머지 두 개는 테마파크 안내도와 테마파크를 조성하게 된 목적과 내용이 적혀 있는 안내문입니다.





테마파크 안내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올라가는 곳곳에 충과 효에 관한 안내판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처음으로 만나는 안내판이 한자 ‘효()’ 자의 의미를 설명한 것입니다.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지게에 태운 모습이 ‘孝’자 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충()’ 자 인데,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런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면, 효란 무엇일까요, 시대별 효사상, 효도 10, 웃어른께 인사하기, 부모님께 효도하기 등의 안내판을 만납니다. 그런데 찾아간 날이 비가 온 다음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먼지 앉았던 곳에 빗물이 떨어지고 또 먼지가 쌓이면서 보기 흉하게 되었습니다.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평의 모친 묘소까지 이어진 테마파크 산책로는 인위적으로 손을 대지 않고 자연 그대로 형성된 길을 따라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며 만들어놓은 그대로의 길. 그 때문인지 친근함까지 더해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약간 힘들다고 느끼는 딱 그 정도까지입니다. 묘소를 50미터 정도 남겨둔 위치부터는 가파른 경사가 버티고 있습니다. 통나무를 계단처럼 덧대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놓아 그나마 조금 편하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평 모친의 묘소는 지난 비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앞부분이 약간 무너져내렸습니다. 주변 석축은 크게 둘러 있었고 묘 아래쪽에도 평지작업을 위해서인지 석축을 쌓아 묘터의 경사를 줄인 다음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모친의 무덤 옆에는 1평 정도의 크기로 잡풀이 별로 없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연유는 모르겠으나 신기하다기보다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을 가운데 두고 묘소 건너 쪽에는 묘소만큼의 터에 움막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주변으로 안내판이 있는데 여기엔 이평에 얽힌 전설이 소개되어 있지요. 이곳에서 몸을 산 아래쪽으로 돌리면 탁 트인 유흥리 경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대가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평은 마을까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곳에서, 말하자면 출퇴근해도 될 텐데 고집스레 움막에서 시묘살이했다는 게 참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었겠다 싶습니다.





충효테마파크를 구경하고 내려와서 실제 이평 선생이 살았다는 삼계마을을 둘러볼 참으로 갔습니다. 지금까지 안내를 맡아주었던 최옥선 고성문화관광해설사가 친절하게도 마을과 이평에 대해 가장 잘 안다는 최관호 녹색농촌체험마을 대표를 수소문해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마을에 이평의 무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의 묘소가 멀지 않는 곳에 있다는 뜻밖의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안내를 부탁해 함께 가보았습니다.





효자 시호를 받았어도 자손이 넉넉히 살지 못하면 묘소에까지 신경을 쓸 수 없는 게 세상사인 것 같습니다.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이평 선생의 묘소엔 비석 하나 서 있지 않았습니다.





삼계마을은 녹색체험마을이기도 하지만 충효를 강조하는 체험마을로도 지향하고 있는 듯합니다. 마을 입구에 아주 작긴 하지만 충효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마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장소이지 싶네요.





취재를 다녀 온 후 이튿날 당일 인터뷰했던 삼계마을 최관호 대표로부터 이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이평 선생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전설이 하나 생각나서 알려드립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 봉양을 위하여 나무를 지게에 한 짐 지고 고성 장에 가서 나무를 팔고 생선을 한 꾸러미 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어요. 고성 장바닥 소전머리에 늙은이 둘이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옆에 초라하게 생긴 한 초동이 바둑 두는 구경을 하고 있는데, 바둑을 두던 한 노인이 구경하던 초동을 보아하니 곡 죽을 운명이라. 그 초동을 보고 얘야, 어 지금 방금 대가면으로 가는 이 길을 빨리 가노라면 지게에 생선을 한 꾸러미 지고 가는 초동이 있을 테니 그를 얼른 따르라고 하였어요.


초라한 그 초동은 그 생선을 지고 가는 초동을 급히 따랐는데 삼계마을에 다다랐을 즈음에 난데없는 벼락이 그들 앞에 쳐서 떨어졌는데, 생선을 지고 가는 초동과 뒤를 따른 초동은 벼락을 모면할 수 있었어요. 생선을 지게에 지고 가는 사람이 바로 이평 선생이었어요.


이처럼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벼락도 이평 효자를 피해갔다는 전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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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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