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꽃·바람의 화음…함안 뚝방길
여항면 내곡리에서 시작한 함안천이 악양루 바로 앞 남강을 만나는 곳에 기역 자로 꺾여진 둑이 있다. 이 둑길 양옆으론 형형색색의 꽃들이 일직선으로, 마치 70년대 국빈이 방문했을 때 도로 양쪽에 나열하여 국기를 흔들며 환영하던 그 인파처럼 꽃잎을 흔들고 있다.
함안뚝방길이다. 이 길이 연결된 방죽은 길다. 함안과 의령 창녕의 방죽을 합하면 338킬로미터란다. 그 긴 길을 큰맘 먹고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마는 도심생활에 지친 사람이라면 하루 두세 시간 정도 잠깐 시간 내어 쉬엄쉬엄 걸으며 상념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위성지도위성사진./네이버지도
차를 몰고 찾아왔다면 함주공원에서 함안대로를 따라 악양마을 쪽으로 무조건 직진하여 직선 길이 끝날 때까지 가면 뚝방길을 만난다. 그 거리는 5.7킬로미터다.
이산화탄소 가득한 지구별. 신이 노했는지 자연이 놀랐는지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유월 하순. 지난 22일 잠시 짬을 내어 지난 봄 화려한 꽃으로 블로거들을 유혹하던 양귀비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뚝방길 가운데 쯤에 경비행기 교육장이 있다.
경비행기와 까치의 기싸움?
이미 뚝방길에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꽃양귀비는 화무십일홍 올해 한 세월을 풍미하고 꽃잎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붉은 꽃양귀비와 함께 푸른 잎의 수레국화, 노란 금계국 등도 얼추 화장을 벗고 진한 갈색의 씨앗들을 통통히 살찌우고 있었다.
다만, 해바라기를 닮은 루드베키아와 작은 해바라기들은 군락을 이루어 이제야 제철인양 진노란 얼굴을 드러내며 여행객을 반긴다.
뚝방길은 그리 길지 않다. 풍차가 있는 주차장에서 서쪽 길끝까지 1.3킬로미터, 동쪽 꺾어진 지점까지 1킬로미터. 총 2.3킬로미터, 차가 있는 곳으로 다시 와야 하므로 왕복 5킬로미터 정도를 걷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조금 더 시간이 있는 여행자라면 동쪽 뚝방길을 끝까지 걸어가서 악양교를 건너 ‘처녀뱃사공’ 노래비를 보고 악양가든을 지나 악양루를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
꽃양귀비.
구절초와 나비.
대부분 꽃양귀비가 화려한 시절 다 보내고 몇몇 젊은(?) 아이들이 마지막 자태로 카메라 눈을 유혹하는 뚝방길을 따라 서쪽으로 마냥 걸었다. 꽃잎은 떨어졌어도 꽃은 꽃인 모양이다. 벌, 나비, 잠자리가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길 가운데엔 검은 천으로 포장(?)을 해놓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던 5월 방죽 흙길에 먼지가 일지 않게 조치한 것일 게다.
원두막 삼형제.
혼자 걷는 길에 잠자리와 나비가 길동무다. 이들의 춤을 보고 걷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래도 길 중간 쯤에 나란히 앉은 원두막 삼형제가 발길을 붙잡는다. 마지못한 척 퍼질러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을 느낀다. 반갑다. 뚝방길에 올라서면서부터 느꼈던 부담스러움. 유월 태양의 열렬한 환영이 정말 부담스러웠는데 원두막 마루에 걸터앉으니 다소곳한 바람이 선녀처럼 합죽선으로 살랑살랑 부채질해주는 듯도 하다.
해바라기 뒤로 루드베키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뚝방길 왼편 루드베키아 군락을 만났다. 노란 꽃잎들이 가뭄 끝에 물맛을 보았는지 빙그레 웃으며 해바라기 흉내를 낸다. 루드베키아 군락 앞에 해바라기 식구들이 줄을 지어 있다. 아직 어린 해바라기들이다. 그렇지. 함안 강주마을은 해바라기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8월이면 그곳, 해바라기로 바다를 이룬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법수면사무소 방향으로 7.8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8월이면 뚝방길에 코스모스도 키재기를 하며 쑥쑥 자랄 시점이겠다. 이곳 뚝방길은 5월 꽃양귀비, 9월 코스모스로 여행객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꽃 계절의 중간에 찾아와 망막에 맺히는 화려함은 없어도 시원한 하늘과 산과 물, 그리고 주위를 맴돌며 온갖 기교를 부리며 춤추는 나비와 잠자리가 있으니 이것이 낭만이 아니고 무엇이랴.
벌써 코스모스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돌아 오는 길에 멀리서 보이는 풍차.
뚝방길 끝을 찍고 되돌아오는 길. 왔던 길이 지겨우면 강변길을 따라 걸어도 되겠다. 하지만, 이 길은 물이 차면 갈 수 없는 길이다. 뚝방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도 상념으로 채우면 전혀 지겹지 않다. 좀 전에 만났던 원두막 삼형제를 다시 보게 되고 여전히 춤을 추며 유혹하는 나비와 잠자리. 그리고 멀리 보이는 풍차.
돌아보면 먼 거리인 것 같아도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쪽으로 1킬로미터 새로운 기분으로 걸어도 되겠다. 아니면 차량을 이용해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있는 곳으로 와서 어떤 사연이 서렸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다.
처녀뱃사공 노래비 뒤쪽에 숨어있는 스피커.
“낙또옹가앙 강빠아라아~암이 치마폭을 스으치이~면…” 술좌석에서 노래 부르는 이가 이젠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겐 노래방 애창곡이 바로 ‘처녀뱃사공’이다. 한 번이라도 와봤던 사람이라면 처녀뱃사공 이 노래의 사연을 잊지 않을 듯하다.
지금은 방송 출연이 뜸하긴 하지만 한때 ‘나는 행복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등을 불러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윤항기와 ‘여러분’을 불렀던 윤복희 남매의 아버지가 ‘처녀뱃사공’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아버지인 윤부길이 유랑극단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가 처녀 뱃사공의 이야기를 듣고 작사했고 ‘빈대떡 신사’ 한복남이 작곡한 노래가 바로 ‘처녀뱃사공’이다. 황정자 목소리의 노래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찾아 가보니 아하, 나무 뒤에 큰 스피커가 숨어있다.
노래 한 곡 정도 주변을 둘러보며 감상하고 길 건너편 악양가든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악양루로 가려면 이 식당을 지나야 한다.
악양루에서 보이는 뚝방길.
악양루는 높지 않은 절벽 위에 지어졌다. 지금이야 난간이 있어 안전하다지만 옛날엔 겁이 나서 어찌 마루 끝에 앉았을까 싶다. ‘악양루’ 편액을 찍으려 해도 자세가 영 마뜩찮다. 함안천 건너편에서 찍으면 잘 나오려나.
악양루 내부에는 많은 글이 걸려있다. 대부분 한시다. 물론 악양루중수기 등 짓게 된 사연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한문 실력이 상당한 분이라면 주련의 글귀를 읽으며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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