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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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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리가 늦었다. 게으름과 미련 때문이다. 집에서 작성하려니 자료가 회사에 있고 또 회사에서 작성하려니 수첩을 집에 두고 왔고.. 오늘도 그렇다. 더는 늦추지 말자고 자료를 찾는데 사진 자료들을 모두 회사 컴퓨터에 저장해놓은 것이렷다. 하는 수 없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자료 재활용. ^^


강의 시작과 함께 황무현 교수는 나눠준 페이퍼 빈 공간에 나무와 해와 집을 그려보라 했다. 수강생들이 그리고 나서도 그것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려보란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부분 한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은 나무와 해와 집의 모양이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획일적 교육 때문이란 얘기겠지. 그는 아동미술심리학 전공이다.


이번 한 달 그를 통해 미술을 보는 시각이 좀 변할 수 있으려나. '미술'이란 단어는 예부터 사용해오던 용어가 아니란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미술'이란 단어가 등장한 게 조선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이라고 하는 '한성순보'에 실렸단다. (순보 : 10일에 한번 발간하는 신문)




미술이란 무엇인가? 나눠준 페이퍼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일반적으로 글자 의미상 미술이란 미, 즉 아름다움을 기교에 의해 기술한다는 의리로서, 좁게는 조형예술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동시에 예술의 넓은 의미 중에서도 미술은 소리나 동작 문자 등에 의해 표현되는 비물질적인 형태들과는 상대적으로 물질을 사용하는 시각조형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아, 이렇게 베껴 적다보니 미술이 더 어려워진다. 뭐 옛날엔 서화가 미술의 거의 전부였다면 이젠 조형이나 동영상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 작품을 미술이라고 생각하면 될듯. 토털아트, 그게 미술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미술의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 예를 들어 내가 안경과 안경집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건 미술 작품이다"라고 정의하면 사람들이 "야~ 대단한 작품입니다."하며 엄지척해줄까? 웃음거리만 안 되면 다행이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 미술 전람회에 누군가 집에서 사용하던 소변기를 떼어다 전시해놓곤 제목을 붙였다. '샘'이라고. 이것은 미술작품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혐오스러운 물건에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술사 어느 시점에서 아주 훌륭한 작품이 되어버렸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 그것인데 마르셀 뒤샹이라는 인물이 건방지게도 소변기를 작품이라고 우긴 탓에 현대 미술에 '레디 메이드'라는 인식이 가능케 해준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술계 거목 김종영도 이런 레디 메이드(이미 만들어진 것)를 미술전시회에 종종 내놓았다.




미술을 감상하려면 미술관에 가야만 하는 걸까. 요즘은 보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텔레비전, 비디오, 영화, 만화, 광고, 사진, 도시공간, 하물며 모바일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일상 생활에 밀접해져 있고 그래서 미술을 읽어내는 연습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미술계 정론이기는 하겠지만 황 교수가 한 말 중에 "예술가에게 처음 맞딱뜨린 시련은 카메라의 출연이다"는 말에 공감한다.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카메라의 등장 이전에는 화가들의 소명은 대부분 오브제를 그대로 화폭에 담는 거였을 것이다. 물론 상상도 현실처럼. 그러나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굳이 애써 똑같이 그릴 필요가 없어졌으니 화가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마네니 모네니 하는 인상파 화가들은 카메라의 성질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그림을 그렸으며 대부분 많은 화가들은 카메라가 표현하지 못하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카메라의 발명으로 세계의 미술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화면에 세 마리의 소가 등장했다. 알타미라 동굴의 소와 피카소가 그린 소, 그리고 이중섭의 소. 어찌보니 세 마리의 소가 유사하다. 황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그리는 행위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 했다. 그림을 보는 눈도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걸까?


세세히 기록하다간 1박2일도 모자라겠다.




아우환 작품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산에서 샀다면 80%는 위작일 거라는. 워낙 유명한 화가인 데다 그가 그린 단색화라는 게 모방하기 쉬워 그런지 몰라도 위작이 많다는 얘긴데... 게다가 비싸기까지 하니. 위작 논란에 대해 이야기가 좀 더 이어졌다. 천경자의 '미인도'도 위작 논란에 휩싸였다. 모방한 그림이 얼마나 정교한지 정작 작가 본인도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원 작품이 많이 나돈다는 것은 미술계에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미술계엔 폭력이 존재한다고 했다. 조영남의 대작사건은 그가 워낙 바쁜 사람이니까 라는 점은 십분 이해한다 해도 남에게 몽땅 맡겨버리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차라리 엔디 워홀처럼 자기의 작업실을 팩토리(공장)라고 이름 붙이고 작품의 대중화를 위해 찍어낸다고 했으면 별 문제가 안되었을 것이다.


미술계에서 작품의 가격을 올리는 행위는 출판계에서 책 판매량을 올리는, 즉 베스트셀러 조작 과정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피카소는 그점을 아주 영리하게 이용했다고 한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무작정 그림만 그린다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진 않다. 이름 없이 그렇게 그림을 그려 아트페어에 내놔봐야 사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작품의 가치가 올라가는 경우의 대부분은 스승을 잘 만나거나, 혹은 제자를 잘 만나거나 혹은 사위를 잘 두거나. 그냥 예사로 깎은 방망이 하나가 수억을 호가하는 김종영의 작품에 대해 누구도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은 그가 키워낸 제자들이 또한 대한민국 미술계 어른들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미술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당연히 실력있는 스승에 실력있는 제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는 "예술은 사기다"라고 했단다. 그의 예술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데엔 20세기 예술의 거장 보이즈와 케이지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공공연하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그의 예술세계를 반어적으로 드러낸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예술세계란 가치형성에 묘한 법칙이 적용되는 공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백남준 이야기는 조금 더 있다. 그의 비디오아트는 유한하다. 비디오 부품이 수명 끝 하면 다른 부품으로 갈아야 하기 때문에 종내 모든 부품을 다 갈았을 때에도 그것이 백남준의 작품이 될 것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작품이 어디까지 교체되는 것까지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내용을 아예 못박아놓았다고 한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도 않았지만 백남준은 예술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 매장문화재가 외국의 박물관에서 버젓이 전시되고 있다는 점,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남의 문화재와 미술품을 가지고 제것인양 전시해놓고 자랑하고 있다는 점과 우리나라는 미술관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는 점, 그리고 황 교수 생각에 최고의 미술품은 세한도라는 얘기가 이어졌다.


아마도 다음 주엔 세한도에 대한 얘기가 더 나오지않을까 싶다. 첫 시간 유익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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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예술극단은 아마도 1992년쯤 극단 마산과 함께 뻔질나게 드나들던 극단이다. 당시 경남매일 문화부 기자를 하면서 연극 붐을 일으켜보자는 무모하고도 당찬 꿈을 안고 있었다. 개인적인 타임라인으로 치자면 학교 졸업 후 극예술연구회 동문들이 모여 뭔가를 만들어보자는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산되고 잠시 실의에 빠져 있었던 터였다.


당시 문화부 연극 담당 기자로 종종 마주쳤던 사람은 동남일보의 문보근, 경남신문의 정기홍이었다. 문보근 기자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들과 친화력도 강해서 연극인들이 다들 알고 있다 내지는 좋아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작품 뭐 준비하고 있나 싶어서 당시 세림상가 옥상에 있던 극단 마산에 가면 언제 왔는지 벌써 죽치고 앉아 있었고 또 한날은 방향을 바꿔 창원시보건소 쪽 창원예술극단(아마 창원예총사무실 공동사용)에 가면 또 어느새 거기서 장기를 두고 있는 문 기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동상가 뒤에 있던 극단 미소에선 문 기자를 한 번도 맞딱뜨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극단 미소 단원들하고도 잘 지냈다. 연습 마치고 나면 올림픽공원 잔디밭에 둘러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술잔을 돌리기도 했었다.


오늘 밀양아리링아트센터 소극장에 겨우 시간 맞춰 들어섰을 때 맨 뒷좌석에 앉아 있던 천영훈 극단미소 대표를 만났다. 다른 굿쟁이보단 많이 만나지는 사람이다. 1993년 연극 담당을 그만두고 거의 20년 넘게 굿판을 떠나있었기에 나는 그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을 거라 생각했다. 오늘 천 대표 옆에 앉아 있던 박승규 씨도 그렇고 정석수 선생도 그렇고 사람이 그리 쉬 잊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리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나도 굿쟁이 출신이긴 하지만 기자생활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호칭이 그랬다. 대부분 누구누구씨 아니면 대표, 감독 등등. 그런데 딱 한 사람 현태영 감독만큼은 선배라고 불렀다. 아마도 경남대서 현 선배가 '맥베스'(그러지 싶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셰익스피어는 확실하다.)를 올릴 때 처음 불렀던 호칭이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내가 소답동에서 자취할 때 참 자주도 만났더랬다. 현 선배 집에도 종종 갔었는데, 특히 다락방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오래되어 가물가물하지만 애 이름이 예림이? 그랬던 것 같다. 그 이름이 이번 작품 '소풍'에 언급된다. 아들 둘에 딸 하나. 일흔한 살 영감쟁이에겐 딸 예림이가 그나마 효녀다. 꼬박꼬박 생활비도 대어주고. 


영감쟁이와 띠동갑인 아내 둘자는 쉰아홉. 어쩌면 한창 나이다. 스물하나에 연극보러 갔다가 눈이 삐가지고 연출을 맡았던 영감쟁이한테 덜컥(?) 시집을 간 것이다.


현 선배가 그렇다고 일흔한 살은 아니지만 묘하게 뭔가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극중의 영감쟁이와 현선배, 그리고 둘자와 형수... 예림이라는 딸. 아마도 집에 키우고 있을 '눈치'라는 강아지. 자식들 다 키워 내보내고 노년을 살면서 한 번도 소풍이라고 가본 적이 없어서 이제라도 한 번 가보자는데 아내는 덜컥 치매에 걸리고 자신은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밀양아리랑아트센터 야경이 쥑인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무엇이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고 하더니 현 선배는 이 '소풍'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것을 말해주고 싶었나 보다. 특히 화려했던 과거를 보낸 사람은 나이 들어 그 시절을 종종 그리워하는데 마지막 장면 아내가 집에 홀로된 상황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자 영감은 어차피 시한부 삶이란 것을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독극물을 마시고 바로 아내 뒤를 따라 간다.


그제야 이들 부부는 소풍을 간 것일까. 오랜 세월 함께 살았던 두 노인 앞에 두고 이제 홀로 남은 반려견 '눈치'의 슬픈 짖음이 가슴을 파고 든다.


공연이 끝나고 선배를 찾아가 그랬다. "선배, 혹시 자서전 아임니꺼?" "그렇지." 답이 너무 쉽게 돌아와서 살짝 걱정이 됐다. 진짜 선배 아픈 건 아닐까? 언제 한 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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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7년 4월 7일 12면.


어제 아내와 함께 티비 드라마 '사임당'을 보면서 사임당이나 그 딸이나 참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남자들의 세계에 들어가 당당히 평등을 주장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드라마에서처럼 당연히 정의에 확신이 선 남성 동조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도 동감이다.


여성운동은 여성만으로 결코 이루어낼 수 없다. 난 세계 성평등지수 1위라는 아이슬란드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인증법안' 도입하게 된 것도 여성의 자발적인 움직임과 그것에 동조하는 남성들이 있기에 가능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럼으로써 국민 전체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성평등지수 1위인 아이슬란드도 현재는 성별 임금 격차가 14%나 된다고 한다. 그것을 2022년까지 격차를 완전히 없앤다는 게 목표다. 여성에게 그만한 보장을 하니 여성의 노동참여율도 높다. 88%란다. 그러다 보니 여성의 정치참여비율도 높다. 의회 총 의석이 63개인데 절반 가까운 30석이 여성의원이란다. 우리나라로선 꿈이나 꾸겠나 싶은 현상이다.


기사를 읽어보니 이게 어느날 갑자기 수혜를 입듯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75년 여성 인구 5분의 1이 거리집회를 했고 여성 노동인구 90%가 총파업을 했다. 그래서 여성이 일하지 않으면 사회가 마비된다는 것을 보여줬고 40%가 넘던 임금격차를 현재 14%까지 줄인 것이다.


다시 여성들은 지난해 10월 거리로 나왔다. 남은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다. 임금 격차를 그대로 둔다면 여성들은 오후 2시 38분 이후로는 공짜로 일해주는 셈이기에 무임금 노동은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한다. 거기엔 16년 동안 네 번을 연임한 여성대통령의 역할도 컸다고 한다. 우리 나라와 비교되는 장면이다.


오후 3시 퇴근.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 들어본 키워드다. 여성운동단체에서 외친 공허한 주장에 머물렀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세계여성의 날에 한국의 여성은 거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3월 8일이 여성의 날인지도 모르는 여성이 태반일 거라는 추측도 하게 된다.


여성들이 먼저 인식이 바뀌지 않고 단결하지 않으면 남녀평등이니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니 하는 구호는 한갓 메아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솔직히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의 총파업을 보고싶다. 그래서 여성이 일할만한 사회를 만들고 아이슬란드처럼 여성이 대거 정치권에 들어가 제대로 된 남녀평등의 국가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남자들도 안심하고 육아휴직도 하며 일과 가정에 충실할 수 있지 않겠나.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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