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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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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마지막 시간이라 하니 아쉽다. 첫 강좌 김소정 극단 상상창꼬 예술감독의 연극 재미있게 보기에 이어 창원대 전욱용 교수의  가곡이야기, 그리고 이번달 마산대 황무현 교수의 톡톡 미술과의 대화에까지 이어진 시간이 참 짧게 느껴진다. 오늘은 일찍 창원용호고등학교서 아이들 가르치는 대학 친구가 연극 '다크엔젤의 도시' 티켓을 10장 팔아주어 일찍 서둘렀더니 강의실에도 일찍 도착했다. 


강의실에서 이렇게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는데, 늘 정확한 시간에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며 살다보니...ㅋㅋㅋ. 옆 사람과 대화도 나눴다. 그는 이번 강좌의 반응을 좋게 평가했다. 그리고 자신이 낸 세금을 이렇게 돌려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만족해 했다. 그런 생각까지 하는구나.


한 7분 남았다. 조금 전에 받은 페이퍼에서 눈에 띄는 설명을 먼저 옮겨 적으며 예습.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뒤러에서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다빈치와 라파엘로를 거쳐 홀바인, 틴토레도, 루벤스, 렘브란트, 고야, 고흐, 고갱, 크르베, 밀레, 마네, 뭉크 및 피카소와 달리에 이르기까지 거장들의 자화상은 그 자체가 미술사이기도 하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62살 노년의 루벤스는 주름진 세월의 흔적을 그렇게 그림으로 남겼고 일백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린 렘브란트는 죽기 전에 웃고 있는 자신의 초상을 남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26살에 붓을 잡아 그림에 몰두한 것이 고작 4년이지만 고흐는 권총자살하기 전 2년 동안 자신의 초상을 많이 남겼다."


"한국을 대표하는 자화상이면서 동양 최고의 자화상이 된 공재 윤두서의 초상도 46세에 낙향하여 자신의 초상을 완성하고 48세의 일기를 마쳤다."


"정조는 생애 2번에 걸쳐 자신을 그리게 했다. 임금의 초상은 몸과 얼굴을 따로 그리는데 천하의 김홍도도 몸만 2번을 그렸다. 당대의 평가는 이명기와 한종유가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처음 그린 자신의 얼굴을 못마땅해 했고 역시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린 62세의 서직수의 초상은 못마땅하다 못해 찬문에다 자신의 참모습을 그리지 못했다고 불만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에게는 뛰어나 ㄴ도화서의 화원들이 있었다. 그의 어진을 거절했던 강세황이 죽던 해 정조는 39세였고 제자인 김홍도는 47세, 신윤복은 34세, 그리고 정약용이 29세였다. 강세황은 71세의 자신을 그렸는데 관모를 쓰고 편복을 입은 자신의 초상을 담았다. 제자인 김홍도의 초상에는 청수한 얼굴과 세속을 초월한 성품을 담았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이번 자료는 지난해에 강의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 나를 담다'라는 책 참고.

왜 예날엔는 자화상을 그렸을까? ㅎㅎ 카메라가 없었으니까.


사람들은 왜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찍어대는지 자신이 기대하는 자신의 초상은 무엇인지 겉모양을 확인하기 위함인지, 내면의 자신을 확인하기 위함인지 자신을 기록하는 셀카봉이 인기상품이 되었다.


자화상(self-protrait)은 '발견하다'라는 의미가 담긴 protrahere 앞에 '자신'을 뜻하는 self를 붙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인 셈이고 자신을 찍는 행위인 셀프카메라가 같은 의미가 아니겠는가.




퐁네프의 연인들. 영화는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의 에피소드를 담은 작품. 시력을 잃기 전에 루불 박물관에서 줄리에트 비노쉬가 본 명화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100여 점 그렸다. 왜 그랬을까.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예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벽보에 잔뜩 붙어있는데, 자기 성찰의 과정이 요즘과 옛날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예전엔 목민관 관점에서 정의에 많이 천착했던 것 같고 요즘엔 그런 가치가 많이 희석된 것 같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의 발언들을 보면 19금에 해당될 것도 있는 것 같고.


어쨌든 렘브란트는 젊었을 때의 패기가 점점 잃어져가면서 가정사에서도 불편한 점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저렇게 정직하게 그려낼 수가 있는가. 생각이 든다.


로뎅의 자화상들이 주관화사다. 그 내면을 그림속에 담아내는가가 중요하다.



고흐의 작품은 천억대에 이른다. 정신분열에 시달렸다. 짧은 생애를 살면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반 고흐는 일본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고흐 그림의 80퍼센트는 일본이 가격을 다 올렸다. 일본은 자기 나라를 강조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많이 샀다. 자기 나라 국가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그림값도 올렸다. 우리의 상황을 반추하게 된다. 중국도 자기 나라 작가의 그림이 나오면 중국이 뻥튀기하면서 다 사버린다. 


고흐는 자신의 내면을, 자기와의 싸움을 기록했다. 거기에는 보통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고흐와 같은 처지가 되면 당당히 자신을 그릴 수 있을까? 고흐는 미술인들이 모여사는 공동체 사회를 꿈꿨던 것 같다.


고흐의 친구 중에 약간은 얌체같은 인물이 있다. 폴 고갱.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목의 그림.


피카소도 잘 생긴 자신의 모습을 잘 그릴 수 있었을 텐데... 특징을 강조해 비사실적으로 그렸다. 우리나라에서 화가를 아는 수준은 태정태세문단세 하는 식의 교육에 의해 배우고 기억하고 있다.



그림을 설명하긴 했는데... 누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피카소, 엔디워홀, 폴세잔, 가수 누가 있는데.. 이름 기억이 안 난다. 


윤두서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한 장면.



영화 관상이다. 등장인물의 보니 송강호가 윤두서와 많이 닮았다. 


황무현 "어렸을 적엔 웃지 않았다. 어색해서. 그래서 인상이 별로 안좋았는데 요즘엔 거진 웃는다. 당황해도 웃고 마누라하고 싸울 때도 웃고... 웃으면 좋은 것 같다. 왜 옛날엔 웃는 얼굴 보여주지 않았을까... 거울 보면서도 웃고... 생각해보니 40대부터 웃었던 것 같다. 자면서도 웃고..ㅋㅎㅎㅎㅎ.  아이에게 이야기해요. 가진게 별로 없으면 웃어라고 해요. 어렸을 적 가정통신문을 보면 부끄럼이 많고 내성적이라는 글이 꼭 있었어요. 제일 싫었던 게 돌아가면서 노래부르는 거였어요. 차례가 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디제이하면서 7~8년쯤 했어요. 그동네에선 약간 촉망받는... 이쪽저쪽 가께모찌라고 했는데... 몽땅 뛰었으니 잘나가는 측면이 있었지요. 그때도 내게 가장 큰 화두가 부끄럼을 극복하는 거였어요."



공재 윤두서의 유명한 자화상. 목이 없다. 귀가 없다 의복이 없다하지만 최근 과학기술로 밝혀냈다. 귀도 있고 목도 있고 의복도 있다는 것이.



강세황은 앞서 언급했듯이 김홍도의 스승이다. 오른쪽 그림은 강세황과 김홍도가 콜라보레이션한 그림이다. 강세황이 뒤에 있는 소나무를 그렸다. 조선 시대엔 85%가 성이 없었다. 13% 정도 양반. 나머진 쇠돌이, 돌쇠, 아무개... 이런 이름만 가졌다. 85% 이상이. 뭔 말하다 이말이 나왔지?



강세황이 그렸다고 하는데... 따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이 그림의 수염은 쥐의 수염으로 붓을 만들어 그렸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쥐를 잡아야 이정도 그릴 수 있는 붓을 만들 수 있을까...ㅋㅋ


강세황은 영조의 어진을 그렸던 경험 때문에 정조의 어진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대신 제자 김홍도를 추천했다고.


이성계, 영조, 철종, 또 누구야. 조선 임금 4명의 어진만 남아있다.



김홍도가 일본에 가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고? 정황은 있는데 물증이 없단다. 이 그림은 평양에서 유홍준이 찍어온 것이라고.



왼쪽은 추사가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인데... 너무 못생기게 그려서 글로 남기기를 누가 이를 두고 나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해도 나는 나니까 ㅎㅎㅎㅎ. 뭐 그런 식의 내용이라고. 오른 쪽은 다른 사람이 완당을 그린 것.


완당과 김종영. 검색해봐야겠네... 김종영 추사를 가장 좋아했던듯. 추사 무덤에 가서 술도 따르고 했던 듯. 


황무현 "처음엔 추사의 글씨를 보고 저게 뭐 잘 쓴 글씨냐, 한석봉의 글씨 역시 그랬다. 요즘엔 얼마나 많은 노력 끝에 그 글씨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됐다."


세한도 이야기. 저 정도 그림이면 세 살 먹은 아이도 그릴 수준인데 그렇게 훌륭한 그림인가.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 됐다. 간송에서 일본에 있는 이 그림을 아주 비싸게 주고 사왔다.


백남준이 외국에서 엄청 뜨니까 우리도 그러지 않으면 안 되니까... 한국에 들어올 때 전 세계 생중계할 때. 봤다.


세한도도 중국에 잘 나간다는 화가 비평가들이 뒤에 글을 남겼다. 한국에도 세한도 뒤에다 글을 남기고 싶어하는 작가가 많았다. 


김화타 이야기.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미술계의 스타가 된 케이스. 본명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대 홍대 출신이 외국에 나가 유명해졌다는 얘기 들어본 적 없다. 왜곡된 우리 미술 교육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백남준도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다.


월전, 누구지? 친일청산 문제. 비평하는 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친일작가의 이순신 장군 동상, 논개 영정... 상처는 가지고 있는 것이 좋지만 성역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서직수 김홍도 그림 혹평. 실제 어진 주관화사에서 보면 이명기 이런 사람에 비해 많이 밀린 것 같다. 


현대로 넘어간다.



고희동. 자화상이 현대 미술에서 치면 첫 자화상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 자화상에서 고희동이 옷고름을 풀어헤쳤는데... 저항을 표현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화가를 이야기할 때 남자는 고희동, 여자는 나혜석을 이야기한다. 나혜석은 신여성이다. 우리나라에 '첫'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 사람이다. 남편이 해외여행을 시켜줬는데, 남편의 친구와 바람이 났다. 그러면서 한마디했다. "조선 남성들은 보시오. 자신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성에겐 그것을 요구한다." 등등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다 쫓겨나 비명횡사했단다. 안타깝게도. 시대를 잘못 태어난 사례로 봐야하나. 근대 회화사에 일획을 그은 인물이다. 



김종영. 창원 소답동. 부유한 생활. 독특한 성격의 양반.



문신. 화구까지 화폭에 담은 자화상은 문신이 거의 유일하다. 당시로선 획기적이다. 그래서 그림값도 엄청 비싸다. 김종영과 문신의 제자, 영향을 받은 작가가 이 지역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자화상. 나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고 해도 좋다. 이번 강연의 마지막 멘트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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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산은 그 이름만으로 오랜 추억이 깃든 곳이다. 스물두 살 즈음, 방위 복무할 때 박격포 사격장이 있던 곳, 81밀리 연습탄을 쏘아대던 곳이 신불산 아래 삼성 이병철 별장 옆이었다. 한 번은 박격포 좌표 설정을 잘못하는 바람에 이병철 별장을 박살낼 뻔 했다. 오피(OP)를 보면서 좌로 몇도를 읊어야 할 것을 우로 몇도라고 포사수에게 지시했는데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을 날아가는 포탄을 보고서야 아차차 했다. 포탄은 무심하게도 방향을 꺾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내 바람을 외면한 채 사수가 설정한 방향대로 날아갔고 포탄은 이병철 별장 옆 나무에 떨어져 불을 피웠다.


그 때문에 사격은 잠시 중단됐고 근처에 있던 60밀리와 유탄발사기 사수들이 소화기를 들고 달려가 불끄는 모습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라봐야 했던, 군용 망원경의 성능이 꽤 괜찮다는 인식까지 보탠 그런 기억이다.


그후로 신불산은 내게 군용 포사격장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영남알프스 산들을 섭렵하면서 네 번째 순서로 신불산에 올랐다.


신불산, 자료를 찾아보니 울산 울주군 삼남면과 상북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대백산맥의 여맥에 해당한다고 되어 있다. 태백산맥의 줄기라는 얘기다. 요즘 뇌 기능이 퇴화한 건지 산꼭대기에 올라섰어도 동서남북 방향감각을 되찾을 수 없었는데 인터넷 자료글을 읽다 보니 어디가 북쪽인지 감이 잡힌다.


북쪽에 고헌산, 가지산, 능동산, 간월산, 취서산, 천황산, 운문산이 놓여 있다. 이중에 가지산과 천황산을 가봤던 곳이다. 능동산에서 간월산과 신불산에 이르는 능선의 서쪽 사면은 완경사로 평탄한 지형이 전개돼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고 설명되어 있다. 억새평원이 그래서 이루어졌겠다 싶다.


배내골 청수골에서 출발했다. 급경사에서 시작해 완만한 등산로, 다시 급경사로 사력을 다해 오르다 보니 억새평원이 눈앞에 시원스레 펼쳐진다.


카메라에 신불산 봄 풍경을 담았다. 산행이 힘들긴 했지만 고개에 올라서선 이처럼 시원하고 멋진 자연 경관을 언제 또 보겠냐 싶은 감동이 일었다. 그러면서 그 30여년 전 연습탄 고폭탄 뻥뻥 쏘아댄 장면이 겹치면서 자연에 참 몹쓸짓을 했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청수골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휴양림 국립관리소 입구에 주차가 가능하다. 입장료는 1000원. 여기서 100미터 정도 더 올라가면 파래소폭포 쪽과 신불산 정상 쪽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에 이런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가 다녀온 코스는 가운데 길로 올라가고 간월재 못가 가파른 경사길이다. 이 길도 파래소 폭포를 만난다.



처음과 막판에 경사가 조금 있는 등산로다. 중간 쯤엔 아주 완만한 각을 이루는 길이어서 걷기 편했다. 사진은 고개 정상부 다다랐을 지점인데 되돌아보니 골짜기가 직선으로 쭉 뻗은 것이 색다른 느낌을 갖게 했다.



마치 복슬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운 풀이 바람에 쓸리고 있다. 손으로 싹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다.



재약산 사자평처럼 고갯마루엔 억새밭이 지천이다. 평원에는 데크로드가 설치되어 이것도 볼거리를 보태는 것 같다.



고갯마루 가운덴 둥글게 데크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 도착했을 때 갑자기 비가 내렸다. 우린 이 데크 아래로 몸을 숨겼다. 빗방울이 데크 틈바구니로 한두 방울 떨어졌지만 여기서 우린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기억에 남을 상황이다.



고갯마루에서 신불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 경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신불산 정상. 신불산 정상에서 셀카를 찍지 않으면 아무래도 허전하겠지. 셀카 찍으러 그 고생해서 산에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맛도 산행을 즐기는 이유의 하나다.



신불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 시설이 잘 되어있다는 생각이 자꾸 꼬리를 물게한다.



산세로 보아 이곳은 영화촬영을 해도 멋진 장면이 나올 것 같다. 산 능선을 타고 대규모 인구가 이동하는 장면도 충분히 소화할 것 같다.



저 아래가 간월재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파래소폭포,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등억온천단지다.



신불산 바위능선 끝에서 하산했다. 바위를 타고 내려가야 해서 여간 힘들지 않았다. 무릎 관절만 괜찮았어도 사지를 떨지는 않았을 텐데.... 암튼 짜릿한 구간이다.



공룡발자국 화석같은 모양의 바위가 눈길을 끈다. 바위가 왜 이렇게 동글동글하게 팬 거지?



하산 직전 기념으로 촬영을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선 가식의 포즈가 자연히 뿜어져 나온다. ㅋㅋ



독특한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말의 무릎 관절처럼 생긴 것도 많고 이 소나무처럼 희한하게 굽은 것도 눈에 띄었다. 이 소나무는 마치 커다란 뱀이 스르르 몸을 비틀며 기어가는 듯하다.



드디어 파래소폭포에 도착했다. 거의 되돌아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이름이 파래소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폭포의 웅덩이가 초록인 것을 보니 물이 파랗다고 파래소가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파래소를 조금 지나면 움푹 팬 바위 동굴이 있다. 이곳은 일부러 바위를 파낸 듯했다. 비를 만나면 좋은 대피소가 될 것 같다.



한바퀴 돌아 갈림길 출발점에 도착. 9시에 오르기 시작해서 6시 거의 다되어 내려왔다. 내가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말 안해도 알 것이다. 96킬로의 거구가 이렇게 산을 타는 거 쉽지 않거든....


그런데 살은 좀 빼야겠다. ㅠㅠ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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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는 정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은 조선의 화가,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1]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관직에 나갔다."


김홍도 보다는 80살이 많으니 두 세대는 선배인 셈이겠다. 조선시대 산수화 하면 겸재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화단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한 인물이다.


그런 겸재가 창원에 왔단다. 창원대박물관에서 두 번에 걸쳐 내게 우편물이 왔다. 첫 번째엔 마우스패드였고 두 번째엔 포스터를 겸한 팸플릿이었다. 자료는 한눈에 겸재를 느낄 수 있게 제작되었다. 종이의 재질도 고급이어서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겠다. 거실 벽에 붙여두면 수시로 겸재를 만날 수 있겠다.


해서 어제 토요일, 서울로 실습을 나가는 딸아이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짬을 내어 창원대학교박물관으로 향했다. 27년 전 1년 넘게 자취하듯 살았던 공간, 도서관이 박물관으로 변신해 있었다. 창원대 들를 일이 간혹 있어 지나가면서 보긴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보긴 처음이었다.



외관부터 많이 바뀌었다. 물론 이젠 이곳이 도서관은 아니다. 살짝 상실감. 예 살던 고향을 잃어버린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도서관 2열람실은 학비 절감을 위한 내 삶의 터전이기도 했으니. 89년 추석엔 부산의 집으로 가지 않았다. 학교 전체를 통틀어 나를 쳐서 딱 두 명만 학교에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건물을 보니 수많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언젠가 추억을 토해낼 기회가 있으리라.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조현욱아트홀.




자료엔 겸제 정선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한 시대의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이끈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그의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다룸에 있어 독자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예술화풍을 창출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84세까지 장수했던 겸재는 일평생 붓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으며 그림을 그려 닳아진 붓이 큰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 동경의 대상인 금강산을 비롯하여 나고 자란 한양과 한강의 풍경, 영남과 충청도 등 전국 산천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다."



입구의 애니메이션. 보고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좀 환상적이기도 하고.^^




문암관 일출. '문암'은 돌로 만든 문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문암 위에 올라가 동해안의 일출을 바라보는 인물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사선정'에서 왼쪽 위에 작게 그려졌던 문암의 모습을 확대하여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사선정의 모습이 작게 보인다. 그림 아래에 달린 작품설명이다.



낙산사. 낙산사는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소재가 되었으며 전선도 낙산사를 소재로 한 그림을 몇 폭 남겼다. 정선의 낙산사는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낙산일출을 소재로 한 예가 많은데, 이 그림 역시 떠오르는 해를 묘사하고 있다. 절벽 위에 서있는 정자의 표현은 생략되어 있다.



총석정. 통천의 총석정을 그린 것으로 총석 네 기둥을 충실히 표현하였다. 부감법을 이용해 그렸으며 부벽찰과 절대준을 절충해 표현함으로써 총석의 표현이 잘 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여기까지. 지금부터 등산준비. 도시락부터 싸야지. 홀랑홀랑.(빨리빨리)



내연삼용추. 이 작품은 전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 내연산에 있는 삼용추 폭포를 그린 그림으로 정선이 청하현감으로 부임한 이듬해 1732년에 내연산 용추폭포 맨 위쪽 폭포의 암벽에 '갑인 가을 정선)'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는데. 이 그림은 삼성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각기 소장하고 있다.


삼성미술관 소장본은 긴 종축에 그려져 있다. 그림에는 세 개의 폭포가 있는데 중간의 것은 쌍폭이다. 실제 내연산에는 열두 개의 폭포가 연이어져 흐르고 있으며 이중 제5 무풍폭포, 제6 관음폭포, 제7 연산폭포를 그린 것이다.


내연산 골짜기의 시원한 암벽과 폭포의 아른다운 긴 종축에 맞게 대담하게 생략·구성했으며 정선 특유의 긴 종축에 맞게대담하게 생략·구성하였으며, 정선 특유의 미점과 적묵법, 그리고 흑백의 대조가 생동감 있는 현장감을 잘 살렸다.



서교전의도. 한양의 서쪽 교외에서 개최된 이별의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신해년 겨울 이춘제가 청나라로 가는 사신의 부사가 되어 중국으로 떠날 때의 이별 장면을 그렸다. 그림 가운데 무악산과 오른쪽 인왕산이 있고, 그 사이 무악재로 난 길을 따라 말을 타거나 걷는 일행이 그려져 있다. 물기 없이 갈필을 사용하여 그린 점이 새로운 맛을 준다.



세검정. 세검정은 지금의 종로구에 남아있는 정자로, 정선의 나이 73세 즈음에 처음 지어졌다고 추측된다. 아마도 새로지은 세검정을 기록화로 남기기 위해 이곳을 찾아가 보고 그렸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무송관폭. 한 선비가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시원스레 흘러가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은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수록된 그림을 따른 화보풍이지만, 실제의 경치를 반영시키려는 화가의 의도가 담겨져 있어서 흥미롭다. 화면 왼쪽에 적혀 있는 '삼용추 폭포 아래에서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는 화제에서 확인할 수 잇는데, 여기서 '삼용추'는 영덕과 포항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 끝자락에 있는 내연산 용추계곡의 폭포이다.

삼용추의 실제적 특징을 살리지는 못하였으나 실경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화제 뒷부분인 '유연견남산'은 도연명 음주시의 한 구절에 해당하며 조선시대 즐겨 그려진 그림의 소재다.



송하한담. 송하한담은 소나무 아래에서 한가롭게 담소를 나눈다는 뜻으로, 한여름 폭포의 물줄기가 흐르는 소나무 아래에 앉아 두 명의 인물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송하한담도'는 정선 이후의 이인문과 김홍도 또한 즐겨 그렸던 소재로 정선의 그림처럼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물들이 정감있게 묘사되어 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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