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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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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언론연수차 광주에 들렀다. 나로선 생애 처음이었다. 여러 번 갈 기회가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먼곳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원거리는 공식적인 일이 아니면 가급적 피했던 것도 사실이다. 가족여행이랍시고 멀리 간다고 갔던 곳도 기껏 포항이었으니. 어쨌든 광주란 곳은 내게 새롭고 신선한 동네였다. 당연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기록해야할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숙소 인근에 평화공원이 있었다. 1박 2일 출장 나가서 술을 안 마셔본 적도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1시쯤 잤다. 그랬더니 6시 제때에 눈이 떠졌고 한 30분 비몽사몽을 즐기다가 밖으로 나갔다. 물론 나가기 전에 다음지도로 주변을 탐색했다. 가까이 공원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도 상으로 보면 평화공원은 완전히 인공 공원이었다. 길쭉한 직사각형에 양쪽 끝은 원으로 라운딩한 그런 형태다.



두바이호텔에서 묵었으므로 내가 들어간 평화공원 입구는 광주시청 반대편이다. 숲길을 따라 좀 걷다 보니 인공으로 바위벽을 만든 장소가 나타났다. 적힌 팻말을 보니 '입석대폭포'를 반으로 축소해 만들었단다. 입석대폭포는 무등산 정상 부분 서쪽에 깎아지른 바위절벽이다. 해발 1017미터. 이 높은 곳에 폭포라니. 정말 한 번 꼭 가보고싶다. 입석대는 돌의 모양이 5~8각형이고 기둥은 10~16미터의 높이로 열을 지어 서있는데 이런 돌 모양은 다른 산에선 찾아보기 어렵단다. 그래서 2005년에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었다고.



인공이긴 하지만 이렇게 물이 흐르니 산책 분위기는 좀 났다. 음, 평화공원에 대해 인터넷에 뭐라고 나와있는지 검색해봤더니, 국내 곳곳에 평화공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부산 평화공원, 서울평화공원, 도라산 평화공원, 제주4.3평화공원, 춘천대접기념평화공원...



그런데 광주 평화공원에 대한 글은 그리 많지 않다. 동네 아주 작은 규모의 산책코스라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떤 블로그에서 짧은 소개가 있어 옮겨본다.


"상무지구에 있는 평화공원, 1998년 콘크리트광장으로 조성돼 많은 시민이 불편을 겪었는데, 보기도 좋지 않고 해서 2007년 기후온난화 대응과 녹색도시 성장을 위해 도시 한가운데 이런 평화광장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대로 베껴쓴 것은 아니다. 축약. ㅋㅋ



우레탄 바닥이다. 차라리 흙길이었으면 좋았겠다 싶다.



나선형으로 물이 흐르도록 설계한 배수로가 재미있다.



도로원표. 이것을 통해 동서남북과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방햐과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그냥 조형물 쯤으로 보고 넘기면 그러그런 예술작품 쯤으로여기게 되지만 표기된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서 음미해보면 의외로 재미있기도 하다.



오전 9시 30분 쯤의 광주 하늘. 빌딩 숲 가운데 있다 보니 하늘이 더욱 이채롭고 예뻐보인다.



평화공원 조성 전후를 알 수 있는 패널. 조성은 잘 한 것 같다. 우레탄 대신 흙을 깔았더라면 120점. ㅋㅋ


난 다음의 이 지도를 보면서 은근히 지적 추리를 즐겨버렸다. 물론 내 추리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위성사진을 언제 찍었느냐는 것인데, 그림자의 길이와 방향으로 보아, 물론 위쪽이 북쪽이라는 전제 하에. 대개 지도는 위쪽이 북쪽이므로 그 방위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태양은 거의 남서방향 가운데 떠 있는데 그림자의 길이로 보아 촬영 시기는 12월로 판단된다. 정확한 날짜까지 추리하긴 어렵지만 촬영 시간대는 대략 오후 3시 30분쯤일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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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절로 수(水) 절로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절로

우리도 절로절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절로 늙으리라   -송시열(1607~1689)-


국악연주단 정음 공연. 가운데 악기는 '생황'인데... 저기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와 비슷.


가곡전수관에서 온 보도자료를 보고서 우암의 청산도를 다시 음미해봤다. 이게 시절가조, 즉 평시조인데 가곡으로 어떻게 부르나 궁금해서 동영상도 찾아 들어보았다.


아, 먼저! 시조와 가곡의 차이를 모를 수도 있겠다 싶어 부연설명을 하자면, 시조를 관현악기에 맞춰 노래로 부르는 것이 가곡이다. 말하자면 시조는 문학 쪽이겠고 가곡은 음악 쪽이겠다. 유행가로 치자면 가사냐 노래냐 뭐 그정도.


우암의 '청산도'는 학창시절 한 번쯤 보았음직한 시조다. 청산 하면 더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겠지만. 우암의 이 시조는 세월따라 자연따라 순리에 따라 사는 삶을 조망한 것으로 또한 시어의 댓구를 잘 활용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이 노래는 가곡에서 계면조 계락으로 불린다. 계면조란 말은 서양음악으로 치자면 단조 비슷한 것이다. 반음 낮은 음이 많아 우울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성조다. 그러면 계락이란 계면조 음계로 불리는 계락시조의 준말인데 가볍고 밝은 음계이 우락시조에 대조되는 곡이다. 여창 또는 남창으로 불리는데 '청산도'는 여창이다. '청산리' '노세노세', '바람도', '병풍에', '한자 쓰고' 등 6곡이 있다고 한다.




표제 음악인 '청산도'를 비롯해 7월 목요풍류에 준비한 작품은


기악합주 '경풍년'

가곡 계면조 이삭대엽 '두류산'

가곡 계면조 평거 '초강'

가곡 계면조 두거 '임술지'

가곡 우조 언락 '벽사창이'

가곡 계면조 계락 '청산도'

가곡 계면조 대받침 '태평가'


이렇게 프로그램이 짜여졌다. 가곡 공연에서 마지막 곡은 언제나 계면조 대받침 '태평가'라는 사실(어쩌가 간혹 아닐 수도 있겠지만)은 상식. *^^*


7월 13일 오후 7시 30분. 가곡전수관 영송헌. 055-221-0109


가곡은 깊게 들어갈수록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내용들이 더 많이 있으나 다 나열하려면 끝이 없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공연에 앞서 좀 일찍 포스팅을 하니 관심이 있는 분은 좀 여유있게 관람 계획을 짜시라는 뜻.


늘 하는 이야기긴 하지만 문화란 알면 재미가 있다는 점. 빠져들면 마니아가 되고. ^^ 언젠가 해금을 타면서 가곡 한 수 읊을 날 있겠지.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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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즈음한 시기는 문화예술 분야의 격동기였다. 아니 정치, 사회, 생활 모든 것이 격변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점에 이광래가 주도한 '민예'의 활동 역시 격변기 상황을 대변했을 터이다. 한하균 선생의 글에서 놀란 것은 친일 극단이었던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광복과 함께 '조선연극동맹'이란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즉각적으로 공산주의 선전계몽대로 돌변한 사실인데... 친일단체였던 이 극단을 '친일청산'에 더 강력하게 대처했던 북한이 묵인했다는 게 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여튼.




연극의 예술성(순수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몸부림하던 이광래는 일제의 가교한 문화정책 때문에 신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극연'과 '중앙무대'가 해체되자 상업극의 독무대가 된 극단에서 1940년 황금좌에 가담하게 된다.


이 황금좌는 1933년 12월에 창단된 극단으로 멀리는 남북 만주로, 가까이는 전국(물론 북한지역 포함) 각지로 이른바 지방 공연을 주로 한 극단이었다. 이 극단의 문예부와 연출부 책임자가 이광래였고, 월초 정진업이 이 극단의 중견배우로 활약하고 있었다.


굳이 서울을 피하고 지방으로 순회하는 까닭은 지나치게 친일적인 레퍼토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온재 선생은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조선총독부 경무과(지금의 경찰청 정보과)의 직접적인 감시와 감독에서 조금이라도 더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서 경성을 일부러 멀리한 것이라 했다. (당시에는 극장 안에 임석 경관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감시가 심하였다.)


이 무렵에 공연된 작품은 일본인 마부네 유타카 원작 <태양의 아들>, 정비석 작 <청춘의 윤리> 등과 <칼맨> <춘희> <윌리엄 텔> <양산도령> <아버지 돌아오다> <아의 죽음>(정진업의 구술에 의함, 자신이 출연한 작품) 등 이광래 작·각색으로 된 레퍼토리였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제국은 드디어 연합군(미영불 등 세계각국)에 항복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그렇게도 소망하던 광복의 날, 해방의 날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일장기를 흔들면서 황군승전(일본군의 승리)을 소리높이 외치던 조선연극 문화협회(친일 연극단체)가 8월 17일 '조선연극동맹'이란 새옷을 갈아입고 해방된 지 불과 2~3일만에 공산주의 선전 계몽대로 둔갑하게 된다.


1945년 12월께에는 조선예술극장·서울예술극장·청포도(극단)·배우극장 극단 전선·혁명극장 등 무려 86개의 극단이 조선연극동맹 산하로 들어가 이른바 '모스크바회의'에서 결정된 한국의 신탁통치를 적극 지지하면서 혁명적 리얼리즘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날뛰고 있었다.


지금도 70대 노인들은 창동의 공락관(구 시민극장)에서 혁명극장이 공연한 바 있는 <세 동무>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특히 황철의 명연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으리라.


사실 황철은 해방 후 공산당의 주구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연기만은 이화삼과 함께 오래도록 연극사에 남을 연기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온 나라가 좌익일생이 된 마당에 오직 하나, 그야말로 유일무이하게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한 극단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광래가 이끌던 극단 '민족예술무대(민예)'다.


일본제국의 강압에 못이겨 친일연극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그러나 조금이라도 민족적 양심이 있던 인사들은 물러나 스스로 자중하고 있던 그 무렵, 일기당천의 기개로 좌익 진영과 맞서 싸운 단체가 극단 '민예'였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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