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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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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의 업적이 나열된다. 사실주의 낭만주의 물결 속에서 '표현주의' 극을 이끌었다는 점, 극 중간에 또 이루어지는 중간극, 이것은 오페라 쉬는 시간(인터미션)에 공연되던 작은 오페라, 오페레타와 유사하겠다 싶다. 하긴 유럽에서 이 오페레타가 재미있는 극의 구성으로 오히려 오페라보다 더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지만. 여튼 그러한 장르의 극도 구상하고 소극장운동까지 펼쳤다고 하니 대단한 인물이다. 한국 연극 계보를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광래의 이러한 점은 현재 한국 연극계 거장 오태석, 이윤택, 손진책, 윤호진 이런 양반들과 비슷했겠다 싶다. 새로운 극을 실험하는 것만큼 창조적 희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그만큼 이광래는 거듭 말하지만 연극에 관한한 한치의 오차도 용납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불치의 병마(당뇨병)에 시달리면서 소극장운동의 세미나나 공연, 그리고 대학극의 초대에는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관극하고 합평회에 참석하여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연극에 미친(狂) 까닭을 광래 자신이 쓴 <나와 연극>(연극연감, 연극협회편)에서 찾아보자.


"내 울적한 감정과 격앙된 사상을 펼치고 떨칠 필드로서 연극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도쿄 고등학교(지금의 전문대학)를 나와 와세다대학에 재학시 공산주의 사상이 한창 판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반면 이것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백색테러가 반공인(公認) 아래 백주에 횡행하던 폭력시대였다. 이것을 보다 못해 분기한 것이 다가다노 마바의 학생침입이라는 유혈의 투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때 연좌(連坐)하였던 동지들은 5~15년의 판결 언도를 받았는데, 나는 연소자일 뿐아니라 학생이라는 이유로 빼돌려 주었다. 그러나 일본 관헌들의 눈은 나를 미행하다 못해 기어코 일본 땅에서 추방하고야 말았다. 귀국한 뒤에 축구경기장에서 결승전에 농민종맹(좌익계열)과 맞붙었는데 구기는 고사하고 사상적인 대립으로 집단 난투극의 수라장이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이것 때문에 소요죄에 걸려 감옥신세가 되고 말았으며, 반면 후에도 요시찰 인물로 하루가 멀다하고 유치장엘 드나들게 되었다. 나의 격앙된 심경은 결코 아폴론적으로 평온할 수는 없었다. (중략)그러다가 연극예술의 진수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동랑 유치진과 같이 (그는 행장극장을 만들어 민중계몽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일종의 공리적 목적에서 연극에 빠져들었지만 끝내는 연극예술을 꽃피우기 위하여 그 험난한 형극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나와 연극>에서 다음과 같은 글도 보인다.


"니체가 인생은 수난이 아니고 수난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했듯이 우리나라 연극사가 수난의 기록이 아니고 수난 그것이 바로 연극의 기록인 것 같이 내 인생이 연극인지 연극 바로 그것이 내 인생인지, 어쨌든 연극 가운데 내가 살고 내 가운데 연극이 살고 있는 한 내 인생은 수난 많은 인생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광래 스스로 말하듯 '수난의 기록'인 연극이었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그가 이룩한 업적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언제나 선구적 위치에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연출가요 극작가였다. 1930년 중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물결속에서 이땅에 처음으로 표현주의 무대를 형상화시키기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중간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연극을 탄생시키려고 온 정력을 다 기울였다.


또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극장운동을 개척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흥우(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 교수에 의하면 "그의 만년에 시도된 심포닉 드라마는 한국 고전음악기를 동원한 것으로, 한국 고전의상의 현대화, 이두 문자의 부활, 언어의 시각화 등을 시도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온재 이광래 연구)고 말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필자는 광래의 심포닉 드라마를 한 편도 관극하지 못해 낙향한 서글픔을 달랠 수밖에 없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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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의 마지막 이야기일 듯하다. 1968년 사망 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광래에 대한 인상적이 이야기가 나왔다.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오랫동안 참여했는데, 한 번은 심사 노트를 변기에 빠트렸는데, 그 노트를 건지기 위해 똥을 다 퍼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건진 노트를 물로 헹궈내고 다른 노트에 옮겨 적기를 꼬박 하루동안 작업을 했다고 하니 성격이 독특하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나도 좀 그런 류의 인간형이긴 하다. 언젠가 한 번 한 시간여를 열심히 썼던 일기가 갑작스런 정전으로 날아가버렸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기록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에는 어찌 그리 애통하던지.



그런데 광래는 <기류의 음계>를 발표하면서 '작의'를 먼저 덧붙인 것이다. 약간 장황하지만 그의 실험정신을 탐색한다는 뜻에서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의식의 흐름이 오늘같이 혼잡한 때가 있었던가? 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잡다한 불협화음계가 소연한 가운데 현대의식은 갈피를 차리지 못하고 광망한다. 작자는 이러한 상황을 상징하여 '기류의 음계'라 정하였다. 그리고 '기류의 음계' 아래 이율배반적으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현대의식의 생태를 분석하여 의지적·정열적 변화의 경과를 내험하는 현대의식의 비장미를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구상화해 보려고 한다.(중략) 그러므로 의식작용을 화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의식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직관케 하기 위하여 작중 박환기의 인물을 3인으로 등장시켜 각각 지·정·의를 분탐케 하였다. … 실제인물로서 의식의 요소를 분탐케 하는 작의를 연출자와 연기자들이 잘 이해해주기 바란다."


8·15광복 전 현진건의 <무영탑>을 각색하면서 등장인물의 심상의 세계를 직관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시험해 본 바를 다시금 가다듬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한 것이다. 1958년 11월 18일부터 3일간 진주극장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물론 이광래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연출하면서도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자세로 온 정성을 다 쏟아부었으며, 특히 60년대 혜성처럼 나타났다 아깝게 요절한 탤런트 이우평 씨의 연기는 참으로 압권이었다."고 조연출을 맡았던 정인화 씨는 회고하고 있다. 


사실 광래는 일상생활, 특히 술자리에서의 생활태도는 거의 상궤를 벗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웬만한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약속을 해 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그런데 연극과 관계되는 약속은 아무리 취중이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도리어 혼이 나곤 했다.


가령 진주 영남예술제 때(1953년)부터 개천예술제로 이름이 바뀐 1968년 작고하던 그해까지 딱 한차례(54년에는 동랑 유치진 선생이 참석하셨다)만 빼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돌아가신 그해 1968년에는 서라벌예대에 병가(당뇨병)로 휴직원까지 제출해 놓은 상태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으며, 또한 10월 29일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열흘 남짓 전인 12일부터 16일까지 심사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버티신 이야기는 지금도 후배나 제자들의 귀감으로 전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사를 하실 때는 절대로 대충대충 머리로 하지 않고 심사노트를 바탕으로 하여 과학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 작품에 대한 심사 메모는 적어도 국판노트 56쪽을 넘었다고 한다. 이 심사 메모를 모아 놓은 노트를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다가 빠트린 일화는 지금도 연로한 진주예술인들 사이에는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그 오물을 다 퍼내고 건져서 깨끗한 물에 씻어 새로이 정리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이 위대한(?) 작업을 진두지휘하였던 당시의 예술제전 사무국장 한동렬 씨는 지금도 혀를 내두르고 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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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주현이 1958년 당시마산에서 김수돈 정진업 이런 양반들과 함께 공연을 했구나. 이즘 이광래는 드라마센터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동시 동국대 교수까지 맡아 자신의 연극론을 본격적으로 펼쳤단다. 그의 연기론은 스타니슬라브스키에서 더 한발 나아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했다는데 그는 이 연출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행간에서 연구하는 연극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마산에서의 공연 얘기를 덧붙인다.


익살스런 장서방 역을 맡은 주현의 코믹한 연기, 고뇌를 씹어삼키면서도 조용히 결의를 다지는 정도 역을 맡은 심영식의 그 처절한 표정 연기, 그리고 자비로우면서도 보다 큰 일을 위한 용단을 내리는 어머니 역을 맡은 천선녀의 그 중후한 연기. 이렇게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 보기 드문 공연이었는데도 마산의 관객은 그걸 몰라주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쫑파티(공연 자축 겸 합평회) 석상에서 온재 선생의 대갈일성이 터졌다. 


"화인·월초 두 사람은 잘 들어. 관객이 없는 연극이 있을 수 있나? 지금이 홍도야 울지마라 시대인가? 마산 관객을 이렇게 팽개친 것은 물론 고향을 오래도록 떠나 있는 내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안 해. 허지만 고향을 지키고 있는 자네들이 때때로 연극을 했다면서 관객을 18세기 시대에 이렇게 팽개쳐두고도 무슨 예술가로 자처하고 있는가? 책임을 느끼게 책임을."


그날 저녁 오랜만에 세 사람의 선후배는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도 마산의 연극 부흥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1958년엔 이광래의 일생에 변화가 온다. ITI(국제극예술협회) 한국지부 이사를 거쳐, 1960년에는 평생을 두고 고락을 같이 해 온 동랑 유치진의 청탁을 흔쾌히 수학하여 드라마센터(한국연극연구소) 상임이사와 같은 해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의 강사를 맡아 드디어 이광래는 자신의 소신을 펼치게 된다.


우선 동랑이 세계를 돌면서 유명한 극자의 구조를 촬영한 것을 바탕으로 드라마센터의 무대와 객석구조를 설계하려 할 때, 저 유명한 '김치'론을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버터 대신 김치를 먹고 살아온 민족이니 극장설계도 여기에 알맞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문화주체론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형무대, 장방형무대는 물론, 우리 고유의 탈춤·인형극 그리고 마당굿까지도 공연이 가능하도록 무대의 구조를 설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어서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출강하게 된 직접 동기는 서라벌예대(초급대학 2년제)와는 사뭇 다르게 연극미학·현대극론 그리고 새로운 연출론(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한 색채와 선과 율을 원용한 새로운 도학의 연출법)을 강의하면서 '그저 느낌과 주먹구구식 종래의 연극'을 배격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연극예술의 진가는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치밀한 계산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는 광래 자신의 생각을 후학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코 학자적 위치에서 이론 탐그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해, 전술한 소극장 '원방각'을 조직하여 서울은 물론 지방에까지 공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주 개천예술제(옛날의 영남예술제)에 참가한 <기류의 음계>라는 작품이다. 대체로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하여 '작의'라는 해설을 붙여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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